현외에서 산길과 강변을 따라 구담으로 향하다 보면 줄곧 생태 길과 마주하게 된다. 즉 유교 문화길 제3구간은 문화생태 탐방길이다. 하회마을 입구 현외 삼거리에서 구담교에 이르기까지 총 10.6㎞에 달하는 길이다. 이 길은 산길을 따라 걷는 길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길로 크고 작은 고개를 비롯하여 낙고사, 작은 고개당, 파산정, 광덕교, 부용대, 겸암 갈림길, 저우리, 구담교로 이어지는 구담 습지 길이다.
우선 현외 삼거리에서부터 시작된 걸음이 낙고사지로 향하다 먼저 서원마을에 닿게 한다. 옛날에 서원이 있었던 마을이라 서원마을로 불리는 것일까? 명품 둘레길이라 일컫는 병산서원을 비롯하여 자연 속에서 학문을 익히고 삶의 이치와 의미를 담아낸 물아일체, 격물치지, 학사 위주, 추공교월을 헤아려보게 하는 키 큰 입간판이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원 둘레길을 안내하는 마을 입구의 입간판
낙고사지는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형제가 입향조 류종혜 공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낙고사라는 세덕사(世德祠)를 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 즉 문중을 빛내 세상에 널리 덕을 베푼 조상의 뜻을 기리기 위해 12세 중영 입암 류중영, 경심 귀촌 류경심, 권옹 류빈 선생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아마도 서원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낙고사지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1868년 대원군 서원철폐 때 훼철되어 사당에 모셔졌던 위 선조들의 위폐가 땅에 묻혔다는 것으로 한때 이곳이 서원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해서 이곳 마을 이름이 서원마을이 된 듯하다. 현재는 나지막한 단 안으로 네 개의 비석만이 그 옛날 선인들의 위업을 말해주고 있다. 비석 주변의 잡풀들이 시절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낙고사지
낙고사지를 거쳐 작은 고개당으로 향한다. 하회마을 주변에는 5개의 당(큰 고개 당, 작은 고개 당, 서낭당, 국신당, 삼신당)이 있다. 주로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자리한 당은 마을의 무병장수, 평안 그리고 풍년을 기원한다. 한마디로 당은 마을 지킴이로 나무 장승이나 돌무더기, 오색, 천, 신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찍이 사람들은 특별한 사물이나 자연에 기대어 살아왔다. 이는 애니미즘이자 정령신앙으로 사물에는 영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선인들은 자연물을 신성시해 나름의 예를 지켜 살아왔지만, 현재의 사람들은 그런 것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참고로 하회마을 주산인 화산에 서낭당이 있고, 그 아래에 국신당이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삼신당이 있다. 마을 입구에 말을 타거나 우마차로 짐을 나르던 비교적 넓은 고개가 큰 고개당이며 작은 고개당은 돌을 모아 쌓은 누석단과 신목이 있다. 하지만, 많은 세월을 건너면서 돌무더기는 낮아져 흔적이 희미했다. 격세지감을 느끼기 때문일까, 신목 역시 신성함을 느끼기보다 그저 하나의 고목으로만 와 닿는다.
걷기에 별 어려움 없이 매봉 길을 걷다 한쪽 낙동강변에 자리한 광덕리 양수발전소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면이 높은 농경지나 가뭄을 대비해 필요에 따라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특별히 풍천면 일대는 농경지가 넓기에 곳곳에 풍천 배수장을 비롯하여 양수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옛날에는 지금처럼 전기를 이용한 기계장치인 배수장이나 양수시설이 없었기에 인공적인 못을 만들어 농업용수로 사용했을 줄로 안다. 현재의 비옥한 토지는 배수시설과 양수시설 덕분이리라.
광덕교에서 내려다본 낙동강변 언저리 숲에 묻힌 파산정과 양수발전소
광덕리 양수발전소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강기슭에 파산정이 낙동강 위에 걸쳐진 광덕교를 지그시 바라보며 녹음 속에 묻혀 있다. 조선 중기 파산 류중엄 선생의 아담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이다. 하회마을 앞의 낙동강이 파(巴)처럼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정자 이름을 파산정으로 했다는 말이 있다. 때로는 지명이 그곳 지형의 생긴 모습에서 이름을 가진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류중엄 선생은 퇴계 선생의 문하생으로 성품과 학식이 뛰어난 선비였음을 호젓한 파산정이 일러주는 것 같다. 그 옛날 머물렀던 사람은 세월 따라 사라졌어도 주인의 흔적은 잊지 않고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다.
광덕교에서 바라본 호젓한 파산정
광덕교를 지나 겸암 류운룡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겸암정사에 들린다. 겸암 류운룡 선생의 학문 정진과 제자 양성을 목적으로 지어진 정사는 풍천면 광덕리에 자리하고 있다. 광덕리 들판 위로 높게 서 있는 시멘트로 지어진 농수로가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농수로 옆의 거석은 겸암 선생의 시를 새기고 있다. 가파른 절벽 위의 집은 적적함과 외로움에 쌓여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벼랑 위에 지어진 겸암정사는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묻혀 지내고자 하는 선비의 모습 같다. 그나저나 사뭇 비탈에 위태롭게 서 있는 고택이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비탈에서도 꿋꿋하게 서 있는 겸암정사의 소소함
사방 주변 경관이 뛰어난 동서쪽으로 형인 겸암 류운룡 선생의 겸암정사와 동생 서애 류성룡 선생의 옥연정사가 자리한다. 부용대 기슭 작은 오솔길을 따라 두 형제는 서로에게 수시로 왕래하며 우애를 다졌다. 현재 형제가 다녔던 좁은 비탈길은 세월 따라 자취를 감추었고 비교적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등산로를 따라 두 형제 집을 왕래할 수 있다.
동남향에 자리한 겸암정사는 숲속에 묻혀 있어 학문을 익히며 자연에 취하기에 그만인 정자로 다가온다. 겸암(謙庵)이란 이름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지어준 것으로 자신의 능력과 덕을 드러내지 않고 남을 존중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는 평소 류운룡 선생의 됨됨이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애 류성룡 선생과 겸암 류운룡 선생은 형제로서 남다른 우애를 가졌다. 이를 말해주듯 부용대 앞 강물에 자리한 크고 작은 두 개의 바위가 두 형제의 우애를 상징한다. 물론 수심이 낮으면 형제 바위를 볼 수 있지만, 장마철에는 수심이 깊어져 볼 수 없다. 아무튼, 하회마을 하면 먼저 서애 류성룡 선생과 겸암 류운룡 선생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화천서원 정문인 유도문 너머 지산루가 자연을 끌어당길 듯 넓은 품을 펼치고 있다.
지방 유림에 의해 류운룡, 류원지, 김윤안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위패를 모시기 위해 창건된 것은 화천서원이다. 즉 선현을 배양하고 지방 교육을 담당할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훗날 후손에 의해 다시 복원된 화천서원은 지난 선조의 학업과 덕을 잇기 위해 정성을 다한 후손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현재 겸암정사와 화천서원은 방문객들의 갈증을 달래느라 각종 차(미숫가루, 대추차, 식혜, 매실차, 커피 등)를 판매한다. 대청마루에서나 방안에서 우리의 전통 차를 마시며 자연을 벗 삼아 잠깐의 휴식에 빠져보는 것도 좋다.
화천서원 인근에 있는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정자다. 폭이 좁은 간죽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노송이 긴 세월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듯 우람한 두 갈래의 몸통을 지지대에 기대고 있다. 두 갈래의 노송이 마치 서애 류성룡과 겸암 류운룡 선생처럼 여겨진다. 특별히 옥연서당은 서애 선생이 말년에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곳이다. 마침 햇살도 곱고 인적이 없던 터라 가방을 열어 책 한 권을 꺼낸다. 인적이 없는 옥연서당 마루에 앉아 편안하게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한동안 『징비록』에 빠져들었다.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적은 것이다. 서애 선생은 7년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참혹한 실상과 함께 미리 살펴서 전쟁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을 주요 내용으로 기록했다. 또한, 국내외 나라(조선, 일본, 명나라)의 이해관계에서 구원병 파견, 제해권의 장악 등 전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은 임진왜란 전후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兄弟愛를 말해줄 법한 두 갈래의 노송과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정사의 한가로움
서애 선생은 옥연정사에서 하회마을을 건너다보며 지난 임진왜란의 참상을 16권 7책 목판본으로 기록하면서 회한에 젖었으리라. 즉 일본의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로 많은 폐단을 낳았다. 수천 명 포로가 일본에 끌려가서 조선의 문화와 사상을 전해주게 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 학자인 강항은 조선의 성리학을 일본에 전파하여 일본의 국학을 꽃피우게 도움을 주었다. 또한, 조선의 약재로 인삼을 비롯하여 『동의보감』 등 주요저서들이 일본에 전해졌다. 이는 극에 달한 일본의 약탈과 횡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수치심과 적개심을 유발하게 하는 왕릉 훼손을 비롯하여 선조의 몽진은 백성들에게 불안감과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반면 어처구니없게도 조정 중신들은 나라가 위태해 피난 길 중이었음에도 서로의 책임을 물으며 당파싸움으로 정권 장악에 몰입했다. 이때 류성룡 선생은 파직을 당했다. 왜군에 쫓기는 상황에서도 조정은 단결하지 못하고 동인 세력을 물리치고 서인 세력의 교체로 어지러운 정국을 타개하려 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전란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장기간 전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심각하게 피폐해져 가족이란 혈육도 망각한 채 서로 잡아먹는 극한의 상황도 빈번히 일어났다. 생존을 위한 극심한 굶주림 앞에서는 인간의 예와 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 뒤늦게 삼도 수군통제사로 발탁된 이순신 장군은 비록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비극적인 패전을 가져왔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위기의 조선을 구하고자 안간힘을 쏟았다.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결사 항전의 의지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에서 볼 수 있다. 그 결과 왜군의 130척이 넘는 배들을 격파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이는 기적에 가까운 승리로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술과 지도력이 만들어낸 불굴의 의지이자 용맹함이었다.
이렇게 징비록은 다시는 당하지 않아야 하는 아픔의 역사서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현재 우리는 지난 역사를 발판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간죽문을 나서자, 하회마을 전경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하얀 백사장을 거느린 낙동강에 호젓한 빈 나룻배가 먼 곳을 응시하며 한가함에 놓여있다.
하회마을 전체를 관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는 부용대다. 부용(芙蓉)은 말 그대로 연꽃을 의미한다. 즉 64m 기암절벽에서 내려다본 마을이 연꽃 같다고 해서 부용대(芙蓉臺)라 부른다. 부용대 아래로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한 바퀴 휘돌아 나가는 형상은 한 송이의 연꽃을 보는 듯 아름답기 그지없다. 강 건너 하얀 백사장 너머로 우람한 만송정이 숲을 이루고 있다. 겸암 류운룡 선생의 혜안을 들여다보게 하는 숲속의 정자인 만송정은 풍수상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용대에서 내려본 만송정의 백사장과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인 전통 하회마을의 전경
걸음은 풍천면 광덕리 저우리로 향한다. 농촌 관광 명소로 지정된 저우리는 마을이 저울처럼 생겼다고 해서 저우리라 부른다. 마을 이름이 재미있다는 생각도 잠깐, 눈이 맑게 뜨이는 느낌이다. 주변의 낙동강과 하얀 백사장, 솔숲, 미루나무 숲의 싱그러움에 흠뻑 빠져든다. 파산 류중엄 후손이 모여 살았다는 낙동강변 마을인 저우리는 각종 전통 테마 마을로 잘 알려졌다. 한때 민화 체험, 미술 체험, 야외 체험장, 황토 학교 체험장, 사군자 체험관 등을 운영하면서 선비정신과 그 인품을 쌓아가는 교육의 장소로 쓰였다.
광덕교와 구담교를 건넜다.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낙동강 물결이 성난 것처럼 쏜살같이 흘러가기도 하지만 비교적 수위가 낮아 물결은 윤슬에 반짝이고, 물결이 미치지 못한 곳에는 간헐적으로 모래가 강바닥에 쌓여 백사장을 드러내기도 한다. 멀리 강 언저리의 습지가 생태계의 보고인 양 무성하다. 버드나무를 비롯한 각종 풀과 나무들이 정겹게 무리 지어져 있다.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흘러가기를 멈추지 않는 강은 각종 물고기를 품어내고 싱그러운 습지를 무성하게 키워내고 있다.
광덕교 아래 낙동강이 지어놓은 무성한 습지
이로써 유교 문화길 전 구간은 이즈음 마친다. 선인이 머물렀던 공간은 충과 효로 이루어진 유교 문화길로 지난 삶의 역사적 공간이자 현재의 장이다. 때로는 선인이 걸었던 길이 이정표인 양 다가와 언제까지나 미래와 함께 공존하는 생명의 길임을 느끼게 한다.
구담교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언저리의 싱그런 습지는 생명의 보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