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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열왕 19,9ㄱ.11-16
복 음 : 마태 5,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전 세계 수억 명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 활동은 무엇일까요?
단연 일등은 텔레비전 시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2021년 통계를 보면 3시간이 넘습니다.
1년 중에서 한 달 이상인 45일을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면 긴장이 풀어진다고 합니다.
화면에 집중할수록 사고 활동이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긴장이 풀어진다고 해서 내적 안정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떤 생각도 들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텔레비전 생각과 이미지를 내 안에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채널을 계속 돌립니다. 무의식적이 되고 수동적이며 내적 에너지가 고갈됩니다.
요즘에는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스마트폰과 동영상 서비스인
OTT(Over The Top)의 이용 시간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입니다.
이는 분명 재미와 흥미를 주지만, 역시 내적 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주는 내적 성장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길이고 주님 안에서 일치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의 모습과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남들처럼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굳이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남들처럼 살아야 할까요?
참 행복을 찾아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처럼 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남들처럼이 아닌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참 행복을 향해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의 시작은 행동에서일까요? 아니면 마음에서일까요?
당연히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죄를 품고 나서 이를 행동으로 저지르는 잘못된 행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저지르는 죄를 경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면서
오른눈이 죄짓게 하거든 빼어 던져 버리라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거든 잘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마음부터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세상이 주는 가짜 위로와 평화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위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 예언자에게 주님께서는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은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만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끝까지 사랑합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동안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속이 지옥이면 멀쩡하게 잘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 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제공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동상이몽’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구지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하는 분도 있지만,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지금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내어줌의 마음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여섯 개의 대당 명제’ 중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눈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간음과 불륜의 뿌리를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서간>에서 말합니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그러기에 응징받아야 할 대상은 육신의 지체 자체가 아니라,
의지와 의지를 부추기는 자발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니 죄의 뿌리를 뽑는 데는 옛 율법의 계명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고,
죄를 짓게 하는 내면의 지체를 잘라내는 일이 필요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마태 5,29)
이는 자신의 지체를 잘라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곧 ‘내면의 눈’을 뽑아내고, ‘손’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눈’은 죄를 불러오는 통로요, ‘손’을 죄를 행하는 도구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 (마태 6,22)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그러니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자신의 몸을 단련하여 복종”(1코린 9,27)시켜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욕망들을 죽이는 것"(콜로 3,5)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나쁜 욕망들을 “그리스도의 바위로 치는 것”(1코린 10,4)입니다.
곧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쁜 욕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으로 밝아질 것입니다.
이는 ‘회개’라는 ‘마음의 전향’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쁜 생각을 바라보면서 나쁜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볼 때 어둠은 물러가게 됩니다.
어둠이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빛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곧 어둠을 들여다보면서 어둠속에서 빛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비추어주고 있는 ‘빛’을 바라보면서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영적 투쟁은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보면서 ‘빛의 조명’으로 ‘정화’와 ‘일치의 길’을 갑니다
오늘도 우리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으로부터 부터 영적 음료를 마시며, ‘의로움의 길’을 갑니다.
이는 빛이신 주님의 인도와 자비로 가는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은 것이 낫다.”(마태 5,29)
주님!
겉으로는 가려진 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제 마음속을 들여다봅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듯”(마태 6,22), 마음의 눈을 맑게 하소서!
마음속 떠도는 그릇된 생각들을 잘라버리고, 마음속 깊게 새겨진 사랑의 법을 보게 하소서!
제 마음 항상 당신을 향하게 하시고, 제 행실이 당신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국과 한국은 사목회의 임기와 학제가 다릅니다.
한국은 12월 말에 사목회의의 임기를 끝내고 새해가 시작되면 새롭게 시작합니다.
학년도 12월에 방학을 하고, 새해가 시작되면 새 학년이 시작됩니다.
미국은 6월에 사목회의 임기를 마치고 7월부터 새롭게 임기를 시작합니다.
여름 방학을 마치고 가을에 새로운 학년을 시작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듯이, 미국에 있으면 미국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임기를 마치는 사목회가 7월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사목회에 넘겨줄 ‘예산’을 책정하였습니다.
본당 예산의 30% 이상은 건물 유지와 보수를 위해서 책정되었습니다.
각 분과의 예산은 조금씩 늘기도 하고, 줄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 분과의 예산이 전년에 비해서 많이 늘었습니다.
전년에 비해서 70% 이상이 늘었습니다.
이유는 부주임 신부님이 한국에서 오면서 청소년 분과의 행사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으로 멈추었던 청소년들의 ‘피정과 캠핑’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영어 미사를 전담하면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많이 늘었고, 청년들의 모임도 늘었습니다.
청년들이 성서 공부를 하고, 성가대도 만들고, 성지순례를 가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청소년 분과를 위해서 신부님을 초대했으면서
청소년을 위한 예산을 줄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성전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가능하면 긴축 예산을 책정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봉헌한 헌금과 교무금이니 당연히 아껴서 써야 합니다.
그런데 재정평의회를 담당하는 형제님이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매월 재정보고를 주보에 공지하는데 수입과 지출에서 지출이 많으면 걱정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본당에 자산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닌지 문의한다고 합니다.
사목회에서 예산을 책정해서 올바르게 집행한다면,
각 분과는 충분한 예산을 책정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이 캠핑도 가고, 피정도 가면서 행사를 많이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오히려 일을 하지 않으니까 매년 예산이 남는다고 합니다.
사목회에서 충분히 예산을 책정하면 재정평의회에서 검토하고
최종 예산을 본당 신부님께 보고한다고 합니다.
국가의 예산도 비슷합니다.
경제가 어렵고, 자영업자들의 생계가 어려워지면
개인이 대출을 받는 것보다는 국가에서 추가 경정예산을 책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 대부분의 나라는 재정을 확대해서 서민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었습니다.
저도 뉴욕에 있을 때, 정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본당의 유지와 보수를 위한 예산은 점차 늘어날 것입니다.
본당 신축 후 10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위한 준비에도 예산이 필요할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사목회에서 공동체를 위한 예산을 효율적으로 책정하고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컵에 남은 물이 반이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반밖에 남지 않았구나!’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반이나 남았구나!’
신앙인은 어쩌면 발상의 전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풍요가 넘쳐나는 세상에 나눔과 희생의 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늘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도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면서도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주님께로 가야 할 운명입니다.
어떤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늘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시인은 봄이 되면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봄처럼 부지런하라는 말, 봄처럼 꿈을 가지라는 말, 봄처럼 새로워지라는 말입니다.
전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봄처럼 부지런하다면, 우리가 봄처럼 꿈을 간직한다면,
우리가 봄처럼 늘 새로워진다면 거친 들판에서도, 고독과 절망 중에서도,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聖人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돈보스코의 제자 가운데 도미니코 사비오란 성덕이 출중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와서 그가 제시한 성덕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던 중
안타깝게도 중병을 얻어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오래가지 않아 교회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생명처럼 지켜왔던 모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죄보다는 죽음을!”이었습니다.
아마도 소년 사비오는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을 눈여겨봤을 것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9)
1855년 6월 24일 돈보스코가 마흔 살 되던 해 영명축일 때의입니다.
오라토리오 아이들은 성극이나 성가, 합창이나 시 낭송 등
정성껏 축제를 준비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아이들의 지극한 사랑에 크게 감동을 받은 돈보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자 받고 싶은 선물을 쪽지에 적어 내게 주세요.
뭐가 됐든 여러분의 기대에 실망을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수많은 종이 쪽지들을 들고 당신 사무실로 돌아온 돈보스코는 하나하나 쪽지를 열어봤습니다.
어떤 아이는 작은 성모상을 신청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운동화를 적었습니다.
짓궂은 한 아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초콜릿 100킬로 그램’
수많은 쪽지들 가운데 유난히 돈보스코의 눈길을 끄는 쪽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가 쓴 것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깜짝 놀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크게 감동 받은 돈보스코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비오!
성인이 되는 비결을 네게 선물하고 싶구나. 자, 여기 있다.
첫째 명랑하게 지내는 것이다.
둘째, 네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 공부와 기도의 의무에 충실한 것이다.
셋째, 친구들에게 선을 베풀거라. 설령 네게 희생이 따르더라도 항상 네 친구들을 도우렴.
이 세 가지만 잘 지켜도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천사표였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가 선물로 주신
세 가지 성화의 비결을 마음 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오라토리오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일 매일 충실히,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그 결과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래 지나지 않아
꿈에 그리던 성인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15세였던 1857년 3월 9일 병사(病死)한 그는,
1954년 6월 12일 비오 1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한번은 세상을 떠난 도미니코 사비오가 돈보스코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보스코, 보시는 것처럼 저는 지금 행복이 가득한 곳에 서 있습니다.”
이어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 장미, 바이올렛, 백합, 용담꽃, 밀 이삭이 어우러진
풍성한 꽃다발을 한 아름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꽃다발을 신부님의 아들들에게 보여주세요.
장미는 사랑을, 바이올렛은 겸손을, 용담꽃은 회개를, 백합은 순결을,
밀 이삭은 성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답니다. 돈보스코, 그럼 안녕히!”
어떻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세례를 통해 성화의 길로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도 ‘죄보다는 죽음을!’이란 굳은 각오를 세우면 좋겠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도 성인이 되고야 말겠다는 강한 결심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악의 유혹을 끊어버려라.
조욱현 토마 신부
분노는 살인의 어미이듯이, 욕정은 불륜의 어미이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28절) 간음을 저질렀다고 하신다.
행위보다 의지를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간음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유 없이 이웃에게 성내는 일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여자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도 그것을 행동으로만 옮기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의지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것을 큰 죄로 여긴다.
그것은 사람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큰 죄이기 때문이다.
그 욕구를 잘라버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를 짓게 하는 지체가 있으면 뽑아버리고 잘라버리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옳지 못한 사랑이나 우정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것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이다.
눈 하나나 발과 같은 지체가 옳지 못한 사랑 때문에 지옥과 협력하는 관계로 이끄는 길이 된다면,
차라리 그 지체가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마음도 잘라버릴 수 있다면, 마음이라는 지체도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지체 일부를 없애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온갖 악의 근원이나, 죄를 짓도록 하는 그 원인을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영원한 불행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을
모두 거부하는 삶이 중요하다. 그래서 죄를 범하게 하는 것들을 과감히 끊어 버릴 의지가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혼장을 써주는 일에 대해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마태 19,8)라고 하시며
이혼장을 폐지하시고 처음에 세우신 법을 되살리신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오늘 복음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혼을 금하시면서 또한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32절) 하신다.
여기서 불륜을 저지른 경우라고 하는 것은 부부간의 신뢰를 저버렸다는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서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를 말한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을 금하게 되었고,
그럴 때 관면을 주어 혼인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관면을 받지 않고 결혼하게 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하나를 잃은 게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5, 29~30)
지난 부활 시기에 줄곧 들어온 복음 메시지가 있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나와 내 아버지께서 너희 안에 있을 것이며,
너희가 진리이신 내 아버지의 말씀을 알아듣고 실행할 때
나와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집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줄곧 들어왔기에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모든 존재는 언제나 그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제게는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랑이 하느님의 본성이시라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오직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네 오른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리고,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5,29.30)라는 말씀은
너무 혹독하고 언어의 폭력처럼 느껴집니다.
사고로 한쪽 눈을 잃어버리거나 노동하다 손목을 잘린 분들에게는.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이며,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한다고 해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이 변한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떠났다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떠난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제 믿음은 비록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자유라는 미명으로 거부할 수 있지만,
결코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습니다.
인간의 선택이 설사 잘못된 것임을 아시면서도 잘못된 자유의 선택을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하는 게
하느님 사랑의 약함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픔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것을 허용하신다, 는 게 요즘 저의 새로운 묵상 주제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심지어 죄까지도 허용하시며 다만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그 단적인 복음이 바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15,11~32)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물론 그 선택을 한 본인에게 엄청난 결과
곧 고통으로 끝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징벌하시는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새삼스럽게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고통을 통해서 징벌하는 존재는 바로 자신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데 있고
그게 인간의 나약함이며 불완전함이라고 봅니다.
이런 연유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징벌하고 응징하신다고 믿지 않습니다.
설사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징벌로 손과 눈을 빼어 버리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가르쳐야 한다면 저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으렵니다.
제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이 비록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죄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진정으로 자신을 알지 못했기에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한껏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배반하고 배신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의 사랑에 기초해서
교회를 세우신 용서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다만 저는 경험했기에 말씀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징벌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벌을 내리고
그 벌이란 바로 우리의 고통이며 아픔이라고 결단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징벌을, 응징을, 보복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시고
그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은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징벌을 내릴 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오른쪽 눈이나, 오른손을 잘라 던져 버리는 것을 원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눈과 손으로 좋은 일을 하도록 격려하시리라 봅니다.
다만 스스로가 뒤늦게나마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사랑의 자유를 선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여 오늘 복음을 잘못 이해하지 않길 바라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를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안 아리아스는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에서,
『아니, 나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나약하다는 죄 때문에 갑자기 인간을 덮쳐오는 하느님을
물질을 비난하시는 하느님을
고통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인간의 기쁨을 방해하고자 빨간 신호등을 보이시는 하느님을
스스로 두려운 존재로 만드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친숙하게 다가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인간을 작은 손가락으로도 충분히 비틀거리게 만들 수 있는 거인 하느님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는 복권 하느님을
오직 손에 쥐어진 법조문에 의해서만 판결문을 내리시는 재판관 하느님을
인간의 서툰 실수를 보시고 미소를 지으실 수 없는 하느님을
비난만을 ‘일삼으시는’ 하느님을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시는’ 하느님을....
인간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전혀 느끼시지도 않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으신 하느님을
세상 일에 등을 돌리고 이웃에게 무관심하도록 가르치시는 하느님을
배신한 사람을 절대로 만나려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실 수 없는 하느님을
인간을 위해 결코 눈물을 흘리신 적이 없는 하느님을
빛이 아니신 하느님을 사랑보다 순결을 더 좋아하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곳에 계시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보다 더 위대하지도 않으시고 신비롭지도 않으신 하느님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명목 아래 우리 인간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모든 것을 따뜻하게 하는 태양의 관용을 가지고 있지 않으신 하느님을
사랑이 아니시며 또한 그분의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변화시키지 못하시는 하느님을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하느님을
넓은 의미로 보아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내가 희망할 수 없는 하느님을
아니, 나는 그런 하느님을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토로하면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바람을 노래합니다.
아리아스의 역설적 기도는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바로 죄인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필요로 하는 죄인이기에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고백에서 하느님께 투정한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 찾사오니
제게서 당신 얼굴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시옵소서.”(시27,8)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 안의 예수님 말쓰ᅟᅮᆷ은 좀 무시무시하네요.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손을) 잘라 던져 버려라.”(마태 5,29-30)
문자 그대로 따랐다가는 온몸이 성한 사람이 드물겠다 싶습니다.
그만큼 눈이나 손은 한 존재 안에 악이 스며들 수 있는 가장 예민한 부분들이라 그렇겠지요.
먼저 오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묵상해 봅니다.
그러려면 우선 당시 여성의 지위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은 아버지든 남편이든 아들이든 남성의 보호 아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얼마간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그렇지 못한 여성을 보면서 음욕을 품고(눈으로 죄를 지음),
폭력으로 그녀를 취한 뒤(손으로 죄를 지음), 이혼장을 써주라고
율법이 보장하는 대로 쉽게 버릴 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여성이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약자여서 마음을 기울이시는 겁니다.
남성인 누군가의 욕망과 변덕으로 한 여성이 너무도 쉽게 죄악의 덫에 걸릴 수 있는
사회구조 안에서 율법이 악용되는 사례는 비일비재했을 겁니다.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4,32)
죄가 죄를 낳는 연결 고리가 보이십니까?
한 사람의 정욕이 한 여자를 죄로, 또 그녀를 취한 다른 이까지 죄로...
예수님께서는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날 죄의 연대성을 꿰뚫어 보시기에 이렇게 가르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훌륭한 인격을 지닌 선량한 사람들도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어져 온 이 견고한 폐단을 폭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력한 표현을 쓰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혼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 이혼 불가를 선언하시자 제자들 마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렇다면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 19,10)라고
볼멘 소리를 하는 걸 보면, 그런 풍토에서 에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파격이었는지 알 듯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간음”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혼인 관계로 설정하시고,
서로의 계약에 충실하기를 바라시는 맥락에서 발생한 특유의 표현입니다.
당신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배우자를 놔두고 한눈을 파는 간음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오른 눈, 오른손.”(마태 5,29-30)
성서에서 오른편이라 할 때는 힘과 권력, 능력, 가치, 중요도 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오른 눈이나 오른손이라는 표현도
존재 안에서 보다 중요하고 유용한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어느 정도 내세울 만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력일 수도 있고, 손재주일 수도 있고 특별한 탈렌트가 될 수도 있지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 중 나를 더욱 나답게 만들고
가치롭게 해주는 성향이나 특성, 심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 부분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드리며
그분과 사랑을 나누어 그분과의 결속을 더 깊고 풍요롭게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느님과 나만의 이 귀한 사랑의 통로를
힐끗힐끗 한 눈을 파는 데 쓸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이 무뎌졌다면, 돈이나 명예, 건강, 가족, 작 자신, 취미, 점궤 등
자기를 더 봐달라고 눈길을 끌며 유혹하는 대상들은 무궁무진하니까요.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을 위해 당신을 섬기라고 주신 것으로 다른 우상을 섬기는 모습이
어쩌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마태 5,28)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재능을 활용해 얻은 성공과 성취를
마치 제힘으로 이룬 것인 양 착각하며 자기 영광에 도취 된 모습
또한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또 다른 간음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느님 영광의 자리에 제 영광이라는 우상을 세우고 섬기는 것이니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7)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투박하고 거칠고 별 쓸모도 없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보물”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만큼 귀하고 또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
단, 우리가 무엇을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질서가 뒤바뀌거나 무너지면 그것이 곧 “간음”이 됩니다.
앞서 간음이 간음을 낳고, 죄가 죄를 낳는 구조에서 보았듯이,
자기 우상화든 다른 무엇을 섬기든, 우상숭배 역시 파급 효과가 매우 큽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던 무수한 우상숭배가
어느 한 개인의 일탈로 끝난 적이 없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사실 먼 옛일만도 아닐 겁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옆에서 누군가 재물이나 학벌에 올인 해 성공하는 걸 보면
엉덩이가 들썩이고 슬쩍 한눈도 팔아보면서 더 나은 뭐가 있을 것 같은 기대와
나만 도태되는 것 같은 불안으로 하느님과 소원해지는 경우도 곧잘 보게 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지만 널리 퍼져나가야 할 것은 죄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5)
죄의 파급도 크지만, 감사하게도 은총의 파금 역시 그 힘이 엄청나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죄를 이야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은총을 불러오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간음, 곧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온 존재를 다래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영혼은
죄의 고리를 끊어내고 은총의 물꼬를 분수처럼 틀어주는 존재입니다.
오른 눈과 오른손을 잘 간수하고 제대로 쓰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은총의 전파자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