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의 대상은 예수님의 말씀.
지난날 대한민국 월드컵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들은 상대국 선수들의 뛰어난 실력만 두려워하고 그들을 이기고자 하는 강한 자신감과 전술 전략도 없이 오직 상대국 선수들이 실수하거나 지친 틈을 타 득점하려는 이삭 줍기 작전만 펼치다 대부분 패배하였습니다. 세상 어느 형태의 전쟁(경기)에서도 이 같은 이삭 줍기 요행심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전쟁(경기)에 임하는 용사(선수)는 이순신 장군이나 다윗처럼 적을 응징하려는 강한 적개심에 의한 용맹이 있어야만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적(상대편)이 아군보다 강하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정면 승부를 피해 적이 실수하고 지치기만 기다리는 요행심 따위로는 어떤 전쟁(경기)도 이길 수 없습니다.
국가대 국가 간에 치르는 운동 경기 또한 살육의 전쟁 대신 육적 기능의 우위로 승리하려는 대리 전쟁과도 같아서 온 국민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경기도 그 국민의 생명력이 되는 정의력과 정직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나라의 국민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공의와 정의와 정직과 거룩으로 조성되었느냐, 아니면 형벌 받아야 할 거짓과 불법불의와 모략술수와 음란방탕으로 조성되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됩니다. 즉 상대팀보다 단순히 육적 기능이 뛰어나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상대팀 선수들의 심성보다 착하고 정직하고 진실하느냐, 악하고 거짓되고 불법불의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무 것도 없는 죽음의 무(無)에서 우주만물과 모든 식물들과 생물들과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생명력)은 정확무오하여 태어난 모든 것들로 하여금 허무(虛無)로 뒤덮인 각자의 생각에서 시급히 떠나 생명력이 넘쳐나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생명력)은 마치 밭에 떨어진 씨앗과도 같아서 허무(虛無)에 속한 흙의 세력들을 뚫고 돌파해 하나님의 뜻을 세웁니다. 그러나 지금의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김일성 일가들 같은 악인들을 정복해 다스리지 못하고, 도리어 저들의 약육강식 사상에 정복 당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정의 사회를 구현하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좀비 같은 자들에게 속아 예수님의 일기당세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인간 육신의 지혜와 능력에서 발생되는 신학으로만 저들을 이기려 합니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진실이 천하만민이 지니고 있는 거짓된 죽음의 세력들을 능히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혼자서라도 죽음의 세력들을 정면으로 돌파해 깨뜨리고 광명한 생명의 빛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후부터 인간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만이 죽음의 세력들을 정복해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런 생명력(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실행하는 자들마다 자기 당대에 날뛰는 모든 죽음의 세력(재앙, 재해)들을 정면으로 돌파해 깨뜨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선각자들 또한 죽음의 방해 공작에 갇혀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들을 하나님 한 분의 말씀만 믿고 따르는 일기당세의 믿음으로 뚫고 돌파해 이기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부라함을 비롯해 그로부터 태어나는 수많은 믿음의 선각자들이 세상에 널브러져 있는 악인들, 곧 사망 권세자들이 매설해 놓은 온갖 지뢰밭 방해 공작들을 하나님 한 분이 가르치신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발견해 파괴하고 돌진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년 다윗은 천하의 무공챔피언 골리앗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선입감과 평판을 불식(拂拭)해 버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의 머리통을 깨뜨려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신앙인들은 혈육의 신학으로 세상에서 행세하는 골리앗 같은 자들의 육적인 힘을 이기려 합니다. 그래서 골리앗에 굴종하는 문재인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자신의 거짓과 불법불의와 모략술수와 음란방탕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낫다고 생각해 반역하였습니다. 육적인 힘만 숭상하는 골리앗 같은 자들의 악행은 오직 다윗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만 응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신앙인들은 정의가 이긴다는 막연한 믿음으로 골리앗이 실수해 넘어지기만 바랍니다. 악인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결코 예수님이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거짓과 불법불의와 음란방탕을 제일로 취급하는 골리앗 같은 자들은, 진리의 정답으로만 깨뜨릴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속임수 기술이 제일이다라고 우기는 골리앗 같은 축구 선수들에게 기죽어 그런 것들을 갖는 일에 정신을 쏟아 붓는 축구 선수들은 모두 그들의 먹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한낱 나무 잘타는 기술이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다른 방면으로도 사람들보다 뛰어난 줄 아느냐?"고 항거하는 참된 선수들에게는 그 어떤 골리앗 같은 선수라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또 "각선미와 미모가 뛰어난 여자만이 뭇 남성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여신 대접 받을 수 있다."는 음녀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무슨 소리, 여자는 한 남자의 이목에만 신경 써야지, 뭇 남자들의 이목을 끌려는 건 여신이 아니라 창기에 불과해!"라고 무시하는 여인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없습니다.
일반화된 사회적 통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가운데서 발생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죄악의 통념들을 당대의 하늘 공직자들인 신앙인들로 하여금 정복해 다스리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은 도리어 일반적인 통념들을 받아 들이니, 어찌 낙원 같은 사회와 나라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대한민국은 종북 반역 세력들의 난동에 의해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동족의 가면을 쓰고 대한민국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일에 목숨을 걸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정의와 정직과 거룩함을 소멸시켜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그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환란과 재앙을 틈타 자신들이 추구하는 빨갱이 국가를 이 땅 위에 세우려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모든 거짓된 자들에게는 옛부터 이 같이 대응하십니다. 즉,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아모스 5:18~24) 하셨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지금껏 자행한 온갖 죄악들로 말미암아 발생된 재앙과 형벌에 대해, 저들은 국제적인 운동 경기의 우승 따위로 만회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공의와 정의와 정직과 거룩함을 파괴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인간 재앙과 재해들은 어떤 업적으로도 모면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만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정직과 거룩함이 매마른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계몽할 사람이 등장하면, 김일성 일가들과 종북 반역 세력들은 이들을 전염병보다 더 두려워해 짓밟으려 합니다. 세상에 못난 것들 같으니라고... 얼마나 반민족 이적행위질과 부정부패에 연루 되었으면 이순신 같은 충신의 등장을 이다지도 무서워합니까?
지금의 한반도는 법과 원칙을 사수해 지키려는 포청천 같은 공직자들의 등장에 목말라 있으며, 교회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해 지키려는 성도들의 등장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순신 같은 공직자들과 참된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만 탄생될 뿐, 좀비 같은 신학의 믿음에서는 결단코 탄생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충효)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하심 같이, 사도 바울 같은 분도 자기 육신이 알고 있는 신학보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해 따르는 믿음으로만 세상을 이기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부모님들은 아직도 자녀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 친히 매를 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을 잘 순종해 지켰을 때에는 '말 잘 듣는 효자'로 칭찬해 상을 베풀고, 부모님이 지시한 말씀을 듣고도 거역해 지키지 않을 때에는 매를 들고 '불효한 자식'이라 하여 호되게 책망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이치를 근거로해 기독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 지키는 일들을 '들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기독인들이 세상을 정복해 이기는 믿음을 가질려면 반드시 이런 '들음'에서 발생되며, 이 '들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선생은, 신학자들이나 그들의 제자된 목사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언행을 그대로 전하는 성령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육신의 육감(肉感)으로 감지할 수 없는 성령의 말씀을 어떻게 친히 들을 수 있느냐고 반박하며, 오직 주의 종들로 자처하는 목사들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신학적 지식을 순종해 지키는 '들음'으로만 죄악이 만연한 세상 사람들과 논쟁 없이 공생공존하며 평안하려 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이라고 단호히 규정한 일에 대해 오늘날의 신앙인들, 곧 신학자들이 심히 곡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예수님을 진실로 믿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믿는 자들의 심령에 오셔서 개인 교수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하심 같이, 하나님의 실체가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체 또한 그가 하신 모든 말씀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임한 성령 또한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의 언행을 귓속말 같이 은밀하게 나직히 생각나게 하실 뿐, 육신의 육감(肉感)이 경천동지할 정도의 뇌성벽력 같은 소리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육신의 생각을 장악한 마귀는 항상 목소리 큰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악한 생각을 불어넣어 허잡스러운 부흥 강사들처럼 강한 액션을 동반한 말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려 할 뿐, 귓속말 같은 심령의 생각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의 권면으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은 하나님께 대한 일기당세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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