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근찬의 단편 소설로 <수난이대>가 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청준의 눈길, 이문구의 관촌수필 등, 유명한 단편 소설을 꼽자 들면 한정이 없겠으나 나는 수난이대를 열 손가락에 집어 넣는다.
한글로 수난이대라 하면 딸이 고생 고생해서 이화여대 들어간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한자 표기로 受難二代라 병기하면 더 빨리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2대가 수난을 겪는 가족 이야기로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아들은 6.25 전쟁에서 수난을 겪는다.
아버지 만도는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가 비행장을 만드는 작업에 투입되는데 산을 깎고 바닥을 고르는 일을 하다가 다이너마이트를 피하지 못하고 팔 하나를 잃는다.
내 어릴 때도 뒷산에서 공사를 할 때 남포 터진다고 했었고 쾅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날리던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 아버지도 그런 공사를 하다 사고를 당한 모양이다.
외팔이가 된 만도의 아들이 군대에 갔다. 이 소설은 1957년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배경이 육이오 전쟁 직후다.
군대 간 아들이 부상을 입어 병원에서 퇴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만도는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간다.
시장통에서 고등어 한 손을 사서 새끼줄에 매달고 아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만도 앞에 아들 진수가 목발을 짚고 나타난다.
진수는 전쟁에서 수류탄 파편에 부상을 당했는데 썩어 들어간다며 아예 한 쪽 다리를 전부 절단한 것이다.
기가 막히는 이 광경을 상상해 보자. 아버지의 몸통 한 쪽은 빈 소매만 흔들거리고 아들의 한 쪽 바지 또한 목발 옆에서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장애인이 된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뛰고 싶기도 하련만 아버지와 아들은 생각보다 차분하게 현실을 받아 들인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국밥 집에 들어가 우선 배부터 채우게 한다. 먹고 살기 위한 전초전이다.
밥을 다 먹은 아들이 말한다.
"아부지"
"와"
"이래 가지고 우찌 살까 싶습니더."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능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 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대겠나. 그제?"
이 장면을 읽다 보면 눈물이 핑 돈다. 당신 혼자서 외팔이로 가족 이끌어 가기도 벅찼는데 아들까지 이 지경이니 누굴 원망하기도 하련만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아들을 위로한다.
소설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소변 보는 장면을 아주 세밀하게 여러 번 묘사를 한다.
구체적으로 여기 옮기기 민망하지만 그들에겐 먹고 사는 일 만큼이나 볼일 보는 일도 대단한 일이다. 비장애인은 실감하지 못하는 불편이다.
아버지 장면은 민망하니 건너 뛰고 아들 장면은 이렇다.
<진수는 오다가 나무 밑에 서서 오줌을 누고 있었다. 지팡이는 땅바닥에 던져놓고, 한쪽 손으로는 볼일을 보고, 한쪽 손으로는 나무둥치를 안고 있는 꼬락서니가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집에 도착하려면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외나무 다리에서 문제가 생긴다. 다리가 멀쩡한 아버지는 문제가 없으나 목발을 짚은 아들이 걱정이다.
잠시 다리 앞에서 흐르는 물살을 바라 보던 아버지는 가장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한다.
<만도는 등어리를 아들 앞에 갖다 대고 하나밖에 없는 팔을 뒤로 번쩍 내민다.
진수는 지팡이와 고등어를 각각 한 손에 쥐고, 아버지의 등어리로 가서 슬그머니 업혔다. 만도는 팔쭉을 뒤로 돌려서 아들의 하나뿐인 다리를 꼭 안았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그동안 내가 겪은 고난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생은 수난의 연속이면서 낭패의 반복이기도 하다.
문득 기억에 남는 고사성어 하나가 생각난다.
낭(狼)과 패(狽)는 전설상의 동물 이리의 이름이다. 낭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모습을 하고 있고, 패는 앞다리는 짧고 뒷다리가 긴 동물이다.
낭은 패가 없으면 서지 못하고, 패는 낭이 없으면 다니지 못하므로 반드시 함께 행동해야만 한다.
낭과 패는 혼자서 다닐 수 없기에 항상 낭이 패를 등에 태워서 한몸처럼 돌아다니며 먹이를 구했다.
낭과 패가 외모는 닮았지만 기질과 능력은 크게 달랐다. 낭의 성질은 사납고 용맹한 반면에 슬기로운 꾀가 부족했고 패의 성질은 순하고 겁이 많았지만 꾀가 많았다.
하여 패가 작전을 짜고 낭이 공격해서 먹이를 잡곤 했는데 호흡이 척척 맞아 항상 사냥에 성공했다.
어느 날 둘이 다퉜고 감정이 상한 낭과 패는 떨어져 지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가 몹시 고팠지만 둘이 고집을 피우며 상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서로 상대가 먼저 사과하고 다가오기를 바랄 뿐 자신이 먼저 화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낭과 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먹잇감을 발견해도 그저 입맛만 다시며 배고픔을 참았다. 중국 당나라 때 단성식이 지은 수필집 유양잡조에 나오는 설화다.
오늘날은 어려운 곤경이나 처지에 빠질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인생에서도 낭패는 다반사다.
어디 낭패지간이 저 소설처럼 부자간에만 있겠는가.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친구간에도 심지어 회사 동료 사이에도 낭패지간이 있다.
세상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 내게 없는 것이나 부족한 것을 채워줄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것, 오늘 맛난 점심 먹고 와서 든 생각이다.
이렇게 세상엔 배울 것들이 널려 있고 때론 낭패가 나를 여물게도 한다.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ㅎ 까치호랑이님을 오랜만에 봅니다.
오래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과 기억에 담고 있는 고사성어를 연관 시켜 글을 써봤습니다. 님도 늘 좋은 날 되시길요.
수난이대.
시험 점수에 급급해서 대충
내용만 알고 넘어 갔는데
유현덕 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공부를 합니다.
이대가 겪는 수난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능 기다."
낭패에 대해서도
공부했고요.
고마운 마음으로 글 잘
읽었습니다.
아하~ 이베리아님처럼 저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능 기다>라는 이 대목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때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살면서 더욱 생생하게 느낀 것이지요.
수난시대를 기억하는 이베리아님은 공부를 잘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은 없고 책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한 소설이지요.
유명한 소설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답니다. 어쨌든 같은 소설을 두고 이렇게 공감할 수 있으면 된 거지요. 공부가 되었다는 말이 가장 기분 좋답니다.ㅎ
일제 강점기와 6.25의 비극을
간략하면서도 밀도있게 그려낸 작품이구나
하고 생각이 들지요
외나무 다리는 우리민족의 수난이자 역경이고
아버지와 아들이 외나무 다리를 걷는다는건
역경극복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제강점기와 6.25사변에 대해서
책으로 또는 어른들의 이야기로만 듣고
그랬었구나 하고 생각만 했을뿐이지
정작 몸으로 느끼는건 10퍼도(%) 안됩니다
아버지 만도와 아들 진수의 애절한 수난이대
유현덕님 덕분에 상기시켜 봅니다..
오늘의 점심메뉴~
김에 뼈없는 매콤 달콤 닭발싸서 먹고
크림치즈 빵에 발라먹고..
페퍼민트차 한잔 드링킹 한 후..
오후시간 열근 합니더..ㅋ
와우~ 칼라풀님은 이 소설도 무지 관심 있게 읽은 모양이군요.
님 의견처럼 제 생각에도 이 소설은 초단편이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촘촘하게 담아낸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일제시대뿐 아니라 육이오도 겪지 않아서 저도 몸으로 온전히 느끼는 건 쉽지 않지요. 그럼에도 소설이나 영화 속에 묘사된 장면을 보며 그 참상은 알 수 있습니다.
뭐든 닥친 당사자가 가장 아프게 실감합니다.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 전쟁이 터져 애먼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민 우리가 피부로 크게 느낄 수 없는 것은 그 전쟁이 먼 나라 이야기이기 때문이듯이요.
칼라풀님은 고요한 靜과 활달한 動을 함께 겸비한 분처럼 보입니다. 저는 오늘 점심에 구내식당처럼 운영하는 한식뷔페에서 먹었습니다.
9천 원인데 늦게 가면 자리 없을 정도,,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먹은 식판을 찍어 두는 건데요.ㅎ
서로
존심 팽팽 세우느라
먹잇감도 못 구하고
암것도 이루어 내지를 못하고
혼자 서는 이루어 내지 못하고 살수가 없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자
서로 협력해서 최선을
이루어 내는거죠
어떤 처지 에서도
절망과 낙망만 하지 않으면 불편 하더라도
다 살아가기 마련이죠
참으로 현명한 리야님이십니다.
님처럼 너그럽게 살면 마음에 생채기 날 일도 많지 않고 낭패가 생겨도 순조롭게 지나갈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저는 입으로는 그러겠다고 해놓고 막상 닥치면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 공부를 더 해야 하지요.ㅎ
부족한 글에 공감 댓글 감사합니다.
수난이대 읽을 때 저도 지긋한 가난에 몸서리 쳐지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지요
당시는 전쟁 가난 병마 불구라는 설정이 꽤나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이라 공감하며 읽은 거 같습니다
주변에 상이군인도 자주 보이던 시절였죠
이렇게 주관적인 평과 낭패의 어원을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운선님도 수난시대 팬이었군요.
말씀처럼 저 어렸을 때 종종 상이군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물건을 강매하는 사람도 봤구요. 그때는 안쓰럽다는 생각보다 무섭단 생각이 먼저 들어 가능한 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인 중에 월남 전쟁 갔다가 장애인 된 사람이 있는데 연금 타서 평생 술로 보내다 세상 뜬 분이 생각나네요. 전쟁은 이기든 지든 이렇게 곳곳에 후유증을 남깁니다.
낭패는 제가 살면서 자주 겪은 일이라 어원을 확실히 알고 있답니다. 저는 소설도 전래성어도 제 방식 대로 읽고 해석을 하지요. 좋은 저녁 되세요.ㅎ
네 잘 읽어요. 세상은 다 함께 살아 갑니다.
혼자 못 살아요
네, 자연이다님께서 지당하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ㅎ
언제나 기쁜 날 되세요.
지나온 세월속 낭패야 어찌 저찌 견뎠으니 여기까지 왔을테고
이렇게 세상엔 가르침을 주시는 분들이 많으니 앞으로의 낭패는 맞이하지않을 지혜가 생기겠지요.
수난이대. 빈약한 저희 집 책 꽂이에 있습니다. 물론 안타깝게 읽었지요.
점심드시고와서 이런 깊은생각과 멋진 글을... 역시 유현덕님이십니다.
하근찬 선생의 소설이 꽂혀 있는 커쇼님의 책장은 안 봐도 양서로 가득할 겁니다. 저 또한 숱한 낭패를 뚫고 살아온 과정에서 하나씩 쌓인 게 경험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낭패를 마주할 때가 있을 테지만 그 경험이 있어 조금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겠지요. 제겐 타산지석도 유비무환도 낭패에서 얻은 지혜의 일부입니다
점심 먹을 때도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대화하거나 상대 눈동자 속에서 교감을 얻습니다. 이 글도 그렇게 나온 열매일 수 있구요.
고운밤 되시길요.ㅎ
아는것이 너무많아 위축감을 주는 유현덕님,
잘 읽었어요
호반청솔 선배님 잘 지내시나요?
아는 것이 많은 게 아니라 깊이가 없는 자잘한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밑천이 금방 바닥을 보이지요.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집안에 이산가족도 없고
전쟁의 상처도 없으니
참으로 운을 타고 났구나 싶습니다
이런소설을 접할 때마다
부모님에 남편복까지 주심에 감사하며 두손 모읍니다
감사합니다
진정 국민을 위한 전쟁은 없는데
지금도 지구곳곳 전쟁터가 널렸으니
수난시대를 겪는분들이 많죠ㅠ.
잘쓴글 단숨에 읽고
늦은 댓글입니다
감사하며 사는 정아백~^^
ㅎ 정아님 늦게 다녀가셔도 좋습니다.
아홉 갖고도 열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 이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사시는 정아님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전쟁 벌이는 곳을 보면 지도자들은 벙커나 궁궐에 들어앉아서 입으로 싸우고 실제 다치고 죽는 사람은 죄없는 국민이기에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 또한 이렇게 누릴 수 있고 살아 있음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지요. 오곡백과 여물어 가는 계절이네요. 항상 건강하셨으면 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