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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대
날짜 : 1987. 11. 8(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하나님의 뜻은 사위기대를 완성하는 것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소원과 기대라는 말에는 미래가 개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대한다고 할 때, 그 말에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미래에 대한 바람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영원한 이상을 바라보면서 현실생활을 거쳐갑니다. 그 신앙 가운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 “내 마음대로 갈 수 없다.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요건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내가 계획한 대로 나는 실행하겠다. 이렇게 신앙해 나간다.”고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내용을 지금까지 타락 이후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세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 여러분이 늘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어떤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은 지극히 쉽고도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게 답변하는 신학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그럼,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 하면, 우리는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 개인의 뜻을 완성하는 것에 앞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창조이상은 어디에서 완성해야 되느냐?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에서 완성해야 됩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이상의 완성이 무엇이냐? 우리 통일교회의 원리로 말한다면 사위기대의 완성입니다. 사위기대를 완성하는데 무엇을 중심삼고 완성하느냐? 물론, 남자와 여자를 중심삼고 완성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이 바라는 이상적인 사랑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남자와 여자가 바라는 사랑이 다른데,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이 창조이상의 완성입니다. (170-61)
사위기대를 완성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어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와 부모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을 우리는 사위기대라고 합니다. 그 사위기대라는 말은 사람을 중심삼고 출발된 것이 아닙니다. 남자를 중심삼고 한 말도 아니요, 여자를 중심삼고 한 말도 아닙니다. 하늘과 땅과 미래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과거로 잡는다면 남자와 여자는 현재에 해당하는 것이요, 그 아들딸은 미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대표하는 남자와 여자, 그 다음에는 남자와 여자의 아들딸에는 우주를 창조한 모든 내용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개재되고, 하나님이 주체라면 그 주체의 앞에 창조이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영원한 대상으로 설 수 있는 남자와 여자가 개재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통해서 바라는 소망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입니다.
그러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같은 상징적인 과정을 중심삼고 어떻게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동서남북이 갖추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사랑은 남자만의 사랑이 아닙니다. 여자만의 사랑도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통일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연결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연결시킨 자리에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있음과 동시에 아들딸의 사랑도 개재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삼대상의 이상이라는 말도 남자를 중심삼고 보면 하나님이 있고, 아내가 있고, 그리고 자녀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삼사는 십이(3×4=12), 12수의 대상권을 말합니다. 또, 이것은 사랑을 중심삼은 사람들의 세 위치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창조이상을 완성하려는 그런 뜻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완성, 창조이상의 완성은 사위기대의 완성입니다. 사위기대를 완성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게 마련입니다. 하늘과 땅이 비로소 정착하게 됩니다. 하늘은 위의 축과 같고 땅은 아래의 축과 같아서 그 축을 중심삼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그 축과 하나될 수 있는 평면적인 형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원형(圓形)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사랑의 이상구형(理想球形)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인간이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 구형의 권내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실현된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시조의 사랑이 출발되었다면 인류는 그 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기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그 기준을 중심삼고 움직이게 되어 있지 그것을 벗어나서는 자기의 존재 가치, 삶의 이상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그 원칙기반을 중심삼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삶으로 말미암아 땅 위의 어디나 통할 수 있습니다. 중심을 통해서 어디나 연결될 수 있습니다. 동서남북의 사방을 중심삼고 도는 축이 있다면 그 축은 사방의 어디나, 그것이 길면 긴 대로 크면 큰 대로 어디나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 방향에서, 자기가 독자적으로 사랑에 일치된 그 자리에서 자기의 개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있으면 슬하에 많은 자녀들이 자라게 되는데 그 아이들에게는 개성이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개성을 가진 형제들이 살고 있지만 그 형제들이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과 뿌리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린 동생이 주장한 것이더라도 형제들이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 무시할 수 없느냐?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같이해 주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동생의 자리에 있더라도 그 동생이 부모의 사랑과 하나된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것을 인정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환영받을 수 있게끔 움직이는 것이 가정생활입니다. 문제는 부모와 하나 안 된 자리에서는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형님이 있고 누나가 있다면 형님의 뜻과 누나의 뜻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을 놓고 그러면 안됩니다. 형님의 뜻도 부모의 뜻과 연결되어야 하고, 누나의 뜻도 부모의 뜻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 뜻을 논하게 될 때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형님으로서의 권위는 부모가 인정할 수 있는 기반에서 주장하게 될 때는 부모를 대신하는 형님으로서의 권한을 갖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주장을 해야 됩니다. 그럴 때 누나도 누나로서의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동생일지라도 부모의 사랑과 하나되어 주장할 때는 부모와 동위권(同位圈)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동위권, 같은 자리에 동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또,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은 상대적인 자리라고 하게 될 때는 부모의 전권이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서, 상속권이 개재됩니다. 부모가 “이렇다.” 하는 그 기준을 중심삼고 “나도 이렇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면 상속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부모를 중심삼고 연결된 것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과 부모가 하나의 축과 같이 되어 있다고 할 때는 지극히 작은 사람이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부모를 대표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한 자리에서 그렇게 주장한다면 사람이 아닌 만물까지도 동위권에 있게 됩니다. 그 가치는 대등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개성진리체라는 것은 이것을 주장할 수 있는 동등한 가치적인 내연(內緣)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된 자리에서 주장하게 될 때는 아무리 작은 뜻이나 작은 물건이라도 개성진리체이기 때문에 동등한 내적인 인연이 있습니다. 그 본질이 바라는 소원이나 이상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상과 접하는 것이고, 참부모가 바라던 이상과 접하는 것이고, 우리의 가정과 나라 그리고 세계가 바라는 이상과 접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170-62)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어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어디에 나타나느냐? 가정에 나타납니다. 가정에 나타나는데 어떻게 나타나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말하게 될 때는 사랑의 이상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느냐?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나 갖추실 수 있습니다. 우리 생활에 있어서 필수 요건이 되는 경제 문제, 돈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가운데서 우리가 보급받는 것입니다. 이 만물을 지으신 주체되신 하나님이 계셔서 언제나 보급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주체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은 물론 모르는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명예나 권력이라는 것이 역사시대에 언제나 죄를 낳기도 하고 죄를 제거시키는 놀음도 해 왔지만, 이 권력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유아독존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권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사랑뿐입니다. 세상에서 돈을 많이 갖고, 명예를 많이 갖고,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 가진 후에 빼낼 것이 무엇이냐? 남자가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가 있고, 권력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아내가 없으면 안됩니다. 지식이 있기 전에 아내가 있어야 되고, 권력이 있기 전에 아내가 있어야 되고, 또 명예가 있기 전에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주가 생겨나는 데 있어서 지식에 앞서 사랑의 이상이 먼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상을 중심삼고 모든 것이 생겨났습니다. 돈도 그것을 위해 있는 것이고 명예도 그것을 위해서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서 뭘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도달하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 전체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은 중앙에 정착해 있는데 그 중앙에 가려니까 경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온 피조만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한테 달려 있는데 하나님은 무엇에 달려 있느냐? 하나님도 언제나 자유롭게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약속을 해서 “내일 몇 시에 우리 여기서 만나자!” 하면 그 자리가 아무리 천한 자리라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왕궁에 사는 왕이라도 그 신하와 아무 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으면 그곳이 아무리 천한 바닷가라도, 강가라도, 산기슭이라도 그 약속은 지켜야 됩니다. 아무리 천한 사람과의 약속이라도 높고 낮음이 없이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는 데는 무엇에 의해 살고 싶겠습니까? 돈을 가지고 살고 싶겠습니까? 명예를 자랑하며 살고 싶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살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모든 전체에 긍(亘)해 가지고 모든 것이 화동할 수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남편의 것, 혹은 사랑하는 아내의 것은 크고 작고간에 서로가 귀하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느냐? 물건이면 물건의 주인이 생각하는 그 기준에 따라서 상대적인 가치가 지녀지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는 아내가 준 손수건을 휙 집어던져 버린다면 대번에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동위권에 설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남편과 같이 동참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걸 집어던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상대적으로 대등한 가치를 지니게 마련입니다. (170-65)
사랑이 개재될 때 인연이 맺어져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고, 하나님은 무엇에 달려 있느냐? 하나님이 부모의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 자녀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와 자녀는 무엇에 달려 있느냐?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달려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녀한테 달려 있는데, 그 말은 부모와 자식이 사랑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 아내도 남편에게 서로서로 달려 있는데 무엇에 달려 있느냐? 남편만이 아니고 아내만이 아닌 그 무엇에 달려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사랑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얽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연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사람과 인연이 있어서 만났다고 말입니다. 그 인연이 도대체 뭐냐? 좋은 인연이 무엇이냐? 서로서로 장사해서 이익을 남겨 가지고 서로서로 좋아하며 나눠 가졌다거나 동창생이 서로서로 좋아하면서 공부했다는 그런 인연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는 부모를 위해서 효도하는 마음을 가진 효자가 있고 나라에는 충신이 있습니다. 충신은 주권자에 대해서 모든 정성을 다하고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성인은 무엇이냐 하면 한 나라를 넘어섭니다. 성인은 세계의 중심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자는 뭐냐? 그건 하늘나라의 법, 나라의 법도 알지만 하늘나라의 왕궁법까지 아는 분입니다.
백성과 궁중에 사는 사람이 다릅니다. 백성은 국법에 의해서 살고 궁(宮)에 사는 사람들은 궁법(宮法)에 의해서 삽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궁에 사는 사람들이 백성의 법을 어겨서도 안됩니다. 그게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는 하늘나라의 궁법, 또는 하늘나라의 법, 또 성인들이 말하는 세계의 법,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야 할 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성인은 하늘나라의 궁전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란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을 들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그 궁의 법을 알고 궁을 중심삼고 사는 생활의 심정을 체득해 가지고 생활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성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연이다.” 하는데 그 인연은 무엇을 중심삼고 출발했느냐? 이것은 돈 거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끝나는 것입니다. 혹은 “배움의 길이다.” 하는데, 물론 사제지간의 인연이 남아지기는 남아지지만 그것도 평면적인 한계선을 못 넘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인연이 연결되어 내려오는 곳에는 사랑이 개재되어야 합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장사하고, 공부를 하더라도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이 앞서야 됩니다. 그래야 인연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공부할 때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나하고 깊은 인연이 있었다.” 하게 될 때, 그것은 지나가는 말 같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그때의 것이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있습니다. 사랑만이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의 인식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과거인 동시에 현재와 통할 수 있고, 사랑만이 현재인 동시에 미래와 통할 수 있습니다. 그것 이외에는 그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170-67)
사랑이라는 것은 닮은 데서 인연을 맺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근원적인 어떤 분이 있다면 그분은 사람보다 더 훌륭해야 됩니다. 우리가 눈을 보고 서로가 사랑한다고 하게 되면 그분도 우리가 눈을 보고 좋아하듯이 그렇게 좋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체라면 그 주체되시는 분은 우리 인간들이 갖춘 인격보다도 더 차원 높은 인격을 갖춘 신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닮은 하나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구를 닮았어?” 하고 물으면 누구를 닮았다고 합니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구를 닮기는 누구를 닮아? 나를 닮았지!” 하는 그게 제일 가까운 답입니다. “누구를 닮기는 누구를 닮아?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았지!” 하는 답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구를 닮았노?” 할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지 않고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나를 닮았다.” 할 때 100점은 안 돼도 50점은 맞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뜯어보면 코든가, 귀든가, 어디가 닮아도 닮았거든요. 웃는 꼴도 닮고, 다니는 꼴도 닮고…. 어딘가 닮았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잘난 아들딸이 있으면 아버지가 “저 애는 나를 닮았어!”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듣고는 “자기를 닮을 게 뭐야? 저이는 언제나 저렇게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해!” 하면서 불평합니다. 그러나 “저 애는 우리를 닮았어!” 하게 되면 불평하고 싶던 여편네도 꼼짝을 못 합니다. 자기를 닮은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지을 때 어떻게 지었겠느냐? 우리 원리로 말하면 이성성상을 닮아 지었다고 표현하는데 그게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지었겠느냐 할 때 자기를 닮게끔 지었다고 하면 하나님도 “그렇지!” 하십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낳은 아들딸들 중에서 좀 쓸 만하고 희망이 있는 자식을 대해서는 자기를 닮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걸 볼 때, 누구든지 자기를 닮은 것을 좋아하는 것이 전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닮은 것을 좋아하는 전통을 만드는 그 힘이 무슨 힘이냐? 그게 사랑의 힘입니다.
어떤 부부를 가만히 보면 남자는 허우대가 좋은데 여자는 허리도 꼬부라지고, 걷는 것도 별스럽고, 둘이서 걸어가는 모습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누룩떡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중심삼고 박자를 맞추면서 아주 재미있게 잘산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를 닮은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옛날부터 그런 소질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여 척 바라보면서 “나 닮은 사람이 여기의 남자들 가운데 있나 보자!” 했습니다. 비교를 잘합니다. 쓱, 보고 “아! 저 사람의 귀는 내 귀를 닮았구만. 내 코를 닮았구만. 내 눈을 닮았구만!”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빨리 기억됩니다. 내 코를 닮았다고 한 사람은 이름은 잊어버려도 보면 대번에 기억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기억시키는 작용을 하느냐? 그까짓 것 코 하나를 닮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기억되느냐? 그것은 우주의 원칙입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이 닮은 것을 하나되게 하려고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지남철을 보더라도 플러스만 있으면 움직이지 않지만 플러스의 성격이 있고 마이너스의 성격이 있으면 “아하, 나는 플러스인데 저기에 마이너스의 성격이 있구나!” 하면서 주고받는 것입니다. 벌써, 하나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하나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코만 닮아도 그와 같은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 무엇 때문이냐? 사랑을 중심삼고 그런 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적으로 표시한다면 사랑을 중심삼고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여자를 닮았다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자기같이 작지 않고 골격이 좀 큰 남자가 딱 자기를 닮았다면 기분이 나쁘겠어요, 좋겠어요?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한번 봤으면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 때 어디서 나 같은 남자를 봤는데, 그 남자가 내 남편은 못 됐지만 잊을 수 없어!”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닮은 데서 인연을 맺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상대적인 관계에서 내적인 인연을 통하여 묶어진 힘이 있기 때문에, 그 힘의 작용이 사랑의 작용이기 때문에 내게서 떼어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작용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이 나를 끌고 가고, 나를 주관하고, 나의 모든 것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170-72)
잘생겼어도 하나님의 형상, 못생겼어도 하나님의 형상
초등학교의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무엇부터 그리는지 생각해 봤어요? 나무부터 그려요, 엄마나 아빠의 얼굴부터 그려요? 엄마나 아빠의 얼굴부터 그립니다. 아이들한테 “너 무엇을 좋아하느냐? 좋아하는 것을 그려라!” 하게 되면 엄마나 아빠의 얼굴을 그립니다.
무엇을 먼저 그리나 보면 눈을 그립니다. 눈을 좋아합니다. 언제나 눈을 봐야 엄마가 좋아하는지, 나빠하는지를 알지 다른 데 봐 가지고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눈부터 그립니다. 그 다음에는 입술을 그립니다. 코도 그리지만, 중요하게 그리는 것은 입술입니다. 왜 그렇느냐? 입술은 뽀뽀를 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도 우리 엄마를 그리라고 하면 그렇게 그리겠습니다. 왜 그래요? 그 배후에는 사랑이라는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닮았느냐 할 때 “틀림없이, 백 퍼센트 이상 나를 닮았소!”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누구를 닮긴 누구를 닮아? 우리 삼촌을 닮고, 우리 할아버지가 잘났으니까 할아버지를 닮았지!” 하는 사람 중에서 점수를 주려면 누구에게 더 많이 주겠어요? 하나님은 백 퍼센트 나 닮았다는 사람한테 점수를 더 많이 주겠어요, 자기의 삼촌을 닮았다는 사람한테 점수를 많이 주겠어요? 나를 닮았다는 사람한테 점수를 많이 주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내적인 면에 더더욱 가까울 수 있는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석온 할머니를 알지요? 새벽 모임에는 그 할머니가 늘 먼저 나타납니다. 쓱, 보면 얼굴이 얽어서 쪼글쪼글하고 허리가 요렇고, 또 얼굴은 왜 그렇게 못생겼는지 모릅니다. 그 얼굴이라도 잘 씻고 오지 그냥 자다 말고 그대로 쓱쓱 하고 와 가지고 “선생님, 나 왔소!” 하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면 모르지만 매일같이 그러니까 기분이 좋을 수가 있겠어요? “이놈의 늙은이, 무엇 하러 또 나타났어?” 하고 보기 싫다고 해도 언제나 그러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어디 가려고 하면 벌써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수원에 간다면 수원교회의 앞에 미리 척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떠억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어디 가시지요?” 이래 놓고는 자기도 같이 가야 된답니다. 죽어도 같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나를 얼마나 미워했겠어요! 없었으니 망정이지…. 그래서 하루는 “이놈의 늙은이, 왜 이러고 있어?” 하고 한바탕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선생님이 좋아서 따르는데, 그렇게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던지 “나 죽소!” 하고 담판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 재미가 없어서 나 죽습니다.” 하고 며칠동안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했다나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야, 철없는 것아! 이러지 마라! 내 좋은 답을 해주마! 가서, 문 선생보고 얘기해라! 하나님이 못생겼어도 내 형상, 잘생겼어도 내 형상이라고 했다는 말만하면 꼼짝못한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하루는 새벽같이 웃는 얼굴로 나타난 것입니다. 선생님이 “며칠 동안 안 나타나더니 왜 나타났어, 새벽같이?” 그랬더니, “이젠 선생님도 할 수 없소!” 이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쌍놈의 늙은이, 뭐가 할 수 없어?” 하니까 정색을 하며 하는 말이 “내가 며칠 동안 담판기도를 하면서 죽지 않으면 못살겠다고 야단했더니, 하나님이 답하여 가라사대 ‘문 선생한테 가서 이런 얘기를 해 주라!’고 합디다. 못생겼어도 하나님의 형상, 잘생겼어도 하나님의 형상!” 이러는 것입니다. 그 답이 얼마나 멋져요! 아이구, 내가 가르쳐 준 원리로 반박해 버리니까 내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참 멋진 답이었습니다. (170-76)
인간은 사랑의 인연에 의해 태어난 존재
자식은 아무리 얼굴이 찌그러졌더라도 자기의 어머니나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의 인연을 따라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나 아버지보다도 더욱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의 여자들 가운데 못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은 거울을 바라볼 때 기분이 나쁘지요? “요놈의 입술이 요렇게 생겼으면 얼마나 좋겠노! 다른 것은 괜찮은데, 요 입술이 틀렸단 말이야! 다른 것은 괜찮은데, 콧등이 조금 틀렸어!” 그러지요? 여자는 한번씩 다 그랬을 것입니다. 남자야 한번 쓱쓱 세수하면 그만이지만, 여자들은 집게로 뽑고 뭘 바르고 야단입니다.
사람들이 다 저 잘난 맛에 산다고 그러지요? 그래, 무엇 때문에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까? 저 잘난 맛에 산다는 그 말 자체는 우주에 흐르는 사랑의 인연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저 잘난 재미에 산다는 말도 맞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하나님의 기대’인데 하나님이 무엇을 기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중심삼고 기대할 것입니다. 또, 제일 귀한 것을 중심삼고 기대할 것입니다. 그게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기대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제일 좋아할 수 있는 여자나 남자를 만나 보았소?” 할 때, 만났다면 “하나님이 그래도 하나님 노릇을 하누만!” 그런다는 것입니다. 남자 대해서 “자식을 가졌소? 아들딸이 있소?” 물어 보게 될 때, “있구 말구요!” 한다면 아버지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되었구만!” 하는 것입니다. 또,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아들딸을 가졌으니까 어머니가 됐구만!” 하게 됩니다. “손주를 가졌다.” 할 때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손주를 못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할아버지의 사랑을 알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여자에게는 왜 남자가 필요합니까? 또, 남자에게는 왜 여자가 필요합니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결혼이 중요한 것은 남자가 남자를 알고 여자가 여자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자기를 안다는 것은 여자를 중심삼고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보게 될 때 “내가 그래도 남자치고는 60점짜리는 된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돈을 잘 쓴다고 해서 남자가 아니고 말을 잘 한다고 해서 남자가 아닙니다. 남자가 자기를 평가해서 점수를 매기는 데는 여자를 대했을 때 여자가 좋아할 수 있는 기준이 60퍼센트는 돼야 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60퍼센트는 돼야 남자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점수를 받고 싶으냐? “제일 좋은 남편!” 하면 무엇을 중심삼고 제일 좋은 것입니까? 돈 보따리 펴놓고 그런 것입니까? 사랑을 중심삼고 좋은 것입니다. 제일 좋은 남편이라고 하면 그 말 가운데는 사랑이 개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싫은 남편, 나쁜 남편이라고 할 때는 사랑과 관계가 없는 남편을 말합니다.
제일 좋은 부모가 어떤 부모냐? 얼굴이 잘생기고 그 나라에서 유명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제일 좋은 부모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제일 좋은 부모라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부모란 밤이나 낮이나 나에게 그늘을 드리우거나 슬플 때는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래요? 말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좋을 때도 더 좋게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슬플 때는 위로해 주고, 좋을 때는 더 좋게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좋은 선군이라고 할 때 선군이라는 말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까? 단순히 선할 선(善) 자가 붙어서 하는 말입니까? 선군이란 말에는 사랑이란 것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한 백성이라 할 때 그 선한 백성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악한 나라의 백성과 구조적으로 형태가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도(度)와 양(量)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을 빼놓게 되면 삭막한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나 남자한테서 사랑이 떠나면 얼마나 보기가 싫겠어요! 그럴 때는 분석비판하면서 “눈이 저렇게 생길 게 뭐야? 저 얼굴에….” 이런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예쁘장해 보이던 것도 전부 다 못생겨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중심삼고 만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170-78)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사랑의 키가 필요
하나님이 우리한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의 때는 천주사적인 때입니다. 우주적인 시대에 왔다는 것입니다. 영계와 육계를 통합한 천주시대를 향해 진입할 때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나랏님을 대신해서, 여러분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들을 대신해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 나랏님을 대표한 분이 참부모입니다. 가정에 있어서 첫 번의 사랑을 중심삼고 참부모의 기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 나라도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돼야 합니다. 세계와 하늘땅도 참부모의 사랑을 뿌리로 하지 않고는 연결이 안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교인들이 참부모라는 말을 알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와 같은 뜻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가야만 되느냐? 그것이 하늘이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그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대하는 것이 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붙어 가지고 쉬자는 것입니다.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인류의 모든 선지 선열들, 선한 사람들이 나에 대한 기대, 통일교회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기대냐? 잘먹고 잘사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여편네를 중심삼고 아들딸을 거느리고 잘사는 게 아닙니다. 좋은 집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심정적인 면이 없습니다. 인류를 구하고 하나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 아내와 내 자식, 내 부모를 희생시키고 나설 수 있는 결의가 앞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주만민이 여러분을 환영 못 합니다.
천지창조의 이상이 사위기대의 이상입니다. 타락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렸어요? 어머니를 잃어버렸고, 아내를 잃어버렸고, 아들딸을 잃어버렸고, 남편과 아버지를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같은 것을 대신 제물로 삼아야 됩니다. 그걸 탕감해서 찾으려니까 그 이상의 것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사탄세계에 남아질 것이 없습니다. 그 이하의 것을 가지고는 남아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아침에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고 생각해 보자구요. 하늘에 갈 수 있는 가정이에요, 사탄세계에 머물 수 있는 가정이에요? 여러분은 역사 이래의 충신들의 가정만큼 살지 못했습니다. 효자를 거느리고 살던 그러한 일가족의 기준만큼 살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이 시대에 있어서 바라는 것은 남북통일입니다. 북한과 남한을 연결시켜 가지고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을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에 마련할 수 있기를 하늘은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하나님을 모실소냐? 무엇으로 씻어야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시느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어머니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상,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이상, 자식을 사랑하는 이상의 사랑을 중심삼고 환경을 닦고 그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제물적인 제단을 쌓겠다고 하는 자리에 비로소 이상적인 남북통일이 나오는 것이요, 이상적인 동서문화의 통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분리되었던 지상세계와 천상세계의 이상적인 통일이 벌어지는 것이요, 지옥과 천국의 해방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안 해 가지고는 풀 수 없습니다. 사랑의 키(key)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입니다. (170-103)
하나님과 인류를 해방시키는 해방자가 되자
나에게 하늘의 기대가 있고, 나의 집에 하늘의 기대가 있습니다. 그 기대를 어떻게 이룰 것이냐? 하나님은 남북을 통합한 기대에 설 수 있는 가정을 바라고, 그 기대에 설 수 있는 어머니를 바라고, 그 기대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을 바랍니다. 남북이 하나되어 가지고 공산세계를 퇴치해 버리고 아시아의 모든 제국이 하나된 기반 위에 설 수 있는 그러한 부모님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기대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서의 문화를 통합시켜 가지고 그 이상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앉아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책임지고 그렇게 되게끔 창조해야 됩니다.
인류는 역사이래 지금까지 이상적인 창조권을 이루어야 할 문화발전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이 최종적인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하늘의 심정과 더불어, 인격적인 참부모와 더불어 영계에 연결시켜 가지고 해방이라는 결론을 지어 하늘과 땅이 공히 출전하여 승리를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없어 가지고는 안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운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어느 때인가 이것을 못 하면 여러분은 해방자가 못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이상의 완성입니다. 창조이상은 사위기대의 완성입니다. 사위기대는 무엇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이루어집니다. 우주를 대신해서 가정을 사랑할 줄 알아야 됩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가정만을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천국과 지상세계뿐만 아니라 전부 다 대신해서 가정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단지 두 사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해와의 결합은 하늘과 땅의 결합이었습니다. 동서남북이 합한 총 방향성에 있어서 주체적인 입장의 결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했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권을 중심삼고 내연을 다시 결속시킨 사랑의 터전 위에 서 가지고 그것을 재현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재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소명을 받고 그런 짐을 짊어지고서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가정의 터전을 만들어서 하나님과 인류를 해방시켜야 할 해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땅 위의 통일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라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17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