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선학 논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1) 선학 논쟁의 성격 조선 후기에 전개된 선가의 주요 동향으로는 백파긍선(白波亘禪,1767~1852)과 초의의순(艸衣意洵,1786~1852)의 대론으로 시작되어 우담홍기(優曇洪基,1822~1822), 설두유형(雪竇有炯,1824∼1887년), 축원진하(竺源震河,1861~1926)와 같은 당대의 선지식들이 참여하여 선사상의 분류와 해석을 둘러싸고 진행된 선학논쟁이 있다. 1790년부터 1926년까지 약130여 년까지 계속된 이 논쟁은 논쟁에 참석한 당사자들이 자신의 선사상을 정리한 논저(論著)를 통해 상대방의 선이해를 비판하는 지극히 학문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장소가 호남지역의 백파긍선이 주석하던 순창 구암사(龜巖寺)와, 초의의순이 주석했던 해남 대흥사(大興寺)라는 점에서 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조선 후기 호남지역 불교의 높은 수준을 알 수 있다. 2) 논쟁의 발단 이 논쟁의 발단은 순창 구암사의 백파긍선이 자신의 선문수경(禪文手鏡)에서 임제의현(臨濟義玄?-867)의 삼구에 의거하여 선의 심천(深淺)을, 격외(格外)의 도리를 깨달은 보리달마와 혜능 이후의 조사선(祖師禪), 자심이 본래 청정하여 여래와 다름 없음을 깨닫는 여래선(如來禪), 경론(經論)을 인증하여 언구에 사로잡힌 의리선(義理禪), 3종으로 나누어 선종 5가에 비교하고, 『기신론(起信論)』의 2문(二門 :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에 의한 신훈(新熏)과 본분(本分), 살인도(殺人刀)와 활인검(活人劍), 삼처전심(三處傳心), 원상(圓相)의 해설 3종선과 유식(唯識), 금강경의 4구게(四句偈), 삼신불관(三身佛觀)등 선문의 주요 명제들을 해설하자 초의의순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慢語)를 지어 반박한다. 백파긍선의 선문수경은 선과 교에 관한 백파 자신의 견해를 간결하게 요약한 일종의 불교개론으로서 선의 근본 정신을 임제의 3구(三句)에서 찾고 이 삼구를 기준으로 선의 여러 종파와 사상들을 분류하고자 했다. 그는 선의 근본 종지는 일기(一機)이지만 중생의 근기에 부응하기 위한 다양한 법문이 있다고 지적하고 임제의 3구 법문을 채용하여 조사선과 여래선, 의리선을 해명하고자 했다. 먼저 백파가 3종선의 분류 기준으로 삼은 임제의 3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3구를 설하는 임제의 설법을 함께 보자. 임제스님이 상당하시자 승이 묻되, “어떤 것이 제1구입니가?” 스님께서 이르시되 “삼요(三要)의 인(印)을 찍고 바로 뗀즉 빨간 점이 나타난다.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기 전에 이미 주인과 손님이 명백히 나누어지느니라”라고 하셨다. 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2구입니가?” 스님이 이르시되 “근본지(根本智)인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無着)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 그러나 방편의 후득지(後得智)가 일체를 끊어버리는 근본지와 모순이 있겠는가?” 라고 하셨다. 승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제3구입니까?” 스님이 이르셨다. “무대위에서 벌어지는 꼭두각시 놀음을 잘 보아라. 줄을 당겨서 인형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무대 뒤에 사람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스님께서 또 이르시되 “모름지기 제1구의 언어는 삼현문(三玄門)을 갖추어야 하며, 일현문은 모름지기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는 방편과 작용이 있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이 일단의 법어는 옛 부터 임제의 '삼현(三玄), 삼요(三要), 삼구(三句)'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공안으로서, 극히 난해하여 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적 해석이나 게송에 의해서 설명되어 왔다. 또한 임제는 제1구는 3현문(三玄門)을 갖추어야 하며 3현문은 각각 3요를 갖추어서 방편과 작용이 있어야 한다라고 설했다. 임제록 백파긍선은 자신의 선불교관을 피력한 선문수경에서 임제의 3구를 채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1구는 대기대용(大機大用)과 기용(機用)을 두루 펴는 조사선(祖師禪)의 도리라고 보았으며 허공중에 진리의 도장을 찍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활인검(活人劍)이며 선의 전승을 나타내는 삼처전심(三處傳心)중에서 염화미소(拈華微笑), 곽시쌍부(槨示雙趺)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 제1구를 체득하면 불조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특히 백파긍선은 제1구를 설명하면서 우리나라 선불교의 전통에서만 전해져 온다고 알려져 있는 진귀조사(眞歸祖師)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신라 불교계가 고수해 온 기존의 교학적 가치체계를 뒤흔들어 버리고 선의 우위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진귀조사설은 불교의 개조이며 사상과 신앙의 원천인 붓다 석가모니가 진귀조사에게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원천이 되는 현극지지(玄極之旨)를 전해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진귀조사설은 고려 진정국사 천책이 편찬한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과 청허휴정의 『선교석(禪敎釋)』에도 수록되어 있다. 천책은 진귀조사설의 전거로서 달마밀록(達摩密錄)을 들고 있으며, 청허휴정은 사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국사집(梵日國師集)을 인용하고 있다. 제2구는 3현(體中玄, 句中玄, 玄中玄)의 소식을 갖춘 여래선(如來禪)의 도리로서 수면 위에 진리의 도장을 찍은(印水印), 공(空)과 유를 통한 살인검이며 삼처전심 가운데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 제2구를 체득하면 인천(人天)의 스승(人天爲師)이라고 하였다. 제3구는 유, 무, 중의 3구를 갖춘 의리선의 도리로서 진흙 위에 진리의 도장(印泥印)을 찍은, 중생의 근기에 따른 법문이며 이 제3구의 체득을 궁극의 견처로 여긴다면 자신마저도 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백파긍선은 이3구의 도리에 의해서 선종의 각 선문을 분류한다. 즉 임제종과 운문종은 제1구에 의한 종이며 조동종, 법안종, 위앙종은 제2구에 의한 종, 하택종 북종 우두종은 제3구의 소식에 의한 종이라고 있어서 3구에 의한 선문판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3구를 떠난 설법은 망설이라는 선문판석(禪門判釋)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판단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비판의 제일성이 해남 대흥사의 초의의순으로부터 터져 나오게 된다. 3) 초의의순의 반론 선문사변만어의 서문에서 고덕(古德)이 말씀하시기를 성은 곧 불심(불심)이니 마음을 얻으면 곧 삼장(三藏), 교문(敎文), 한담(閒談), 지저귀는 새소리조차도 모두 성의 종지요, 마음을 잃으면 염화미소나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법도 한갖 교적(敎迹)에 불과하다라고 밝히면서 백파긍선이 너무 언어와 범주에 의해서 선3종의 우열을 가리는 견해에 불만을 표시한다. 또한 임제3구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하여 백파의 임제 3구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義理禪)이라는 2종선(二種禪)을 주장한다. 즉 여래선과 의리선은 본래 하나요 둘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격외선은 언어를 넘어선 조사선이며, 의리선은 언어의 시설(施設)에 의한 여래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3구는 백파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의리선으로 분류될 수 있는 하나의 독립범주(격별구隔別句)가 아니라 제1,제2구에 모두 해당되는 병본구(竝本句)로서 의리선에 떨어지면 타인의 언구에 사로잡혀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는 사구(死句)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조사선는 언어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지 않는 불인언교(不因言敎)이며 여래선은 분명하고 또렷한 언교역연(言敎歷然)일 뿐, 3종선을 우열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초의는 3구에 의해서 3종선의 우열을 따지는 백파의 분류를 부정하고 조사선은 문자의 시설을 초월한 격외의 선으로, 여래선은 방편문자를 활용하는 의리선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또한 살인검과 활인검은 중생근기의 차이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선사의 역량에 의한 살인과 활인의 차이이며, 삼처전심도 모두 격외선이요, 조사선의 원천을 나타내는 소식이므로 여래선으로 격하시켜서 볼 수 없다고 백파긍선의 입장을 부정했다. 또한 초의는 백파가 3구에 의거해 분류한 5가 7종의 평가가 그릇되었다고 비판하고 여래선과 조사선을 최초로 구분한 위앙종을 여래선이라고 격하하는 판석은 틀렸으며 선문을 고정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변고역상(變古易常)의 무리라고 비판한다. 결국 초의는 백파긍선의 3구의 분류에 의한 지나친 임제종 우위의 신념을 비판하고 “선문의 진정한 조사, 가르침은 임제종 이외의 다른 종파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4) 우담홍기의 제2비판 백파긍선의 선문수경에 대한 반론으로 초의의순의 사변만어가 발표되자, 부휴선수(浮休禪修)의 제10대 법손 우담홍기(優曇洪基1822-1881)는 자신의 학문적인 선배이기도 한 백파긍선의 선문수경에 대한 제2의 비판으로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발표한다. 그는 만약 선문의 종지를 논하건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도리를 체득한 인물은 알 것이며, 심인(心印)을 얻지 못한 자는 알 수 없다. 비유컨대 황성(皇城)의 일은 직접 본 사람만이 알 뿐이며 직접 목격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다라고 지적하며 선문판석을 둘러싼 논쟁은 언어로써 해결할 수 없으며 참다운 경계를 체득한 견성자(見性者)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선의 근본 종지를 논하는 분상에서 능히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나는 능히 지견을 갖추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망설이다(不能知而我能知見者妄也)라고 준엄하게 지적하면서 고금에 변함없는 선가의 도리를 바르게 증명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나타내는 『선문증정록』을 썼다. 우담홍기는 백파긍선과 초의의순의 대론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삼처전심은 선문의 원천이며 선문의 근본을 보인 소식이므로 그 원천이 맑다면 흐름도 맑다. (夫三處傳心 禪文之源 源淸卽流淸) 둘째, 임제의 제1구는 조사선이며 제2구는 여래선이라고 본 백파긍선의 입장은 틀리지 않으나 초의의순처럼 조사선은 곧 격외선이며 여래선은 의리선이라고 보아야 한다. 더불어 조사선이나 의리선 모두 선문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주장한다. 즉 의리선, 격외선이건 여래선, 조사선이건 모두 선문을 가리키는 명칭이니 명칭이 바르면 그 실질도 바르다는 것이다. (義理禪 格外禪 如來禪 祖師禪 禪門之名 名正卽 實正) 셋째, 살인검과 활인검은 선문의 방편을 비유하여 설하는 장치이니 비유가 진실로 바르다면 가르침도 지극한 것이다.(殺人刀 活人劍 禪門之喩設機關喩極卽法極) 넷째, 3구 1구는 선문이 본래 갖추고 있는 문채이니 근본을 통달하면 지엽적인 것도 통달한다. (三句日句 禪門之本有文彩 本達卽末達也) 다섯째, 우리나라 선문 또한 중국과 같아서 『전등록』, 『이천안목』,『선문염송』,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등 조사의 문헌을 참고하고 있으나 백파긍선은 이들 옛 문헌을 고쳐서 본래의 모습을 바꾸어 인용하였으므로 참조할 수 없다. 이상과 같이 우담홍기는 초의의순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세우고 백파의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5) 설두유형의 백파 변호 우담홍기의 『선문증정록』이 나오자 백파긍선의 4대 법손인 설두유형(雪竇有炯1824-1887)은 『선원소류(禪源遡流)』를 발표하여 그간 진행되었던 『선문수경』에 관한 비판들을 극복하고 다시 『선문수경』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백파긍선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는 1889년 간행된『선원소류』의 서두에서 자신의 논저 제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서 선의 원류를 증명하여 백파긍선을 변호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즉 ‘선’이란 조사선·여래선·의리선으로 구분되는 3종선을 뜻하며 ‘원’(源)이란 향상일규(向上一竅)이니 선의 원리를 궁구하여 근원에 도달하면 최초와 말후의 2구가지 자연히 체득하게 되므로 원천에 이르는 것(원자향상일규 통최초말후2구)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소’에는 원천에 거슬러 올라가는 것(소상遡上)과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遡下), 즉 연역법(演繹法)과 귀납법(歸納法)이 있다. ‘류’(流)에는 순류와 역류가 있으니 최초의 1구에서 3구를 설하는 것은 순류하는 것이요, 말후구에서 3구를 설하는 것은 역류라고 한다. 설두유형은 먼저 선에는 선지(禪旨)와 선전(禪詮)의 구별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활구를 참구하는 안목에서는 일체가 교외별전의 도리라는 것이 선지이며 선전은 수기설법하기 위한 선의 종류를 나누어 요약한 것이니 이를 3종선이라고 한다. 먼저 설두유형이 밝힌 3종선의 내용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한다. 첫째, 여래선이니 여래께서 성도한 내용으로 인천(人天)을 위해서 설법한 것이다. 둘째, 조사선이니 진귀조사가 여래 성도의 내용이 아직 궁극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고 여래께 전심(傳心)한 선이다. 석가는 이를 다시 삼처전심으로써 가섭에게 전했다. 셋째, 의리선이니 하택신회(荷澤神會)가 6조의 지해종도(知解宗堵)가 된 뒤부터 생겼다. 의리선은 어로(語路)와 의로(義路)를 구해서 진흙으로 흙투성이 몸을 닦는 것이니 스스로도 구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설두유형은 진귀조사가 석존에게 전한 삼처전심의 선에 대해서 설명한다. 첫째, 분반좌(分半座)는 법공좌(法空座)이니 곧 살인도(殺人刀)이다. 둘째, 염화미소(拈華微笑)는 꽃을 표상으로 널리 가르침을 보였으니 활인검이다. 셋째, 곽시쌍부(槨示雙趺)는 가섭이 관을 세 번 두드리자 석존은 두 발을 내어 보였다. 이에 가섭이 세 번 절했으니 살, 활을 모두 보인 것이다.(表殺活濟示也) 또한 설두유형은 조사사선의 원류를 해명하는 문헌적 전거로서 『보요경의(普曜經)』의 “4월8일 밝은 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으니 이름하여 천인사(於四月八日見明星悟道 號曰天人師)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진정국사(眞靜國師)의 선문보장록에서 설해지는 진귀조사설을 원용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따라서 설두유형은 백파가 선문수경에서 설한 3종선의 내용과 삼처전심설을 더욱 구체적으로 논증, 변호한 셈이다. 6) 선문수경에 관한 축원진하의 제3비판 선문수경을 둘러싸고 1세기 반이 넘도록 진행된 논쟁은 설두유형에게 경학을 사사하던 축원진하(竺震河1861-1926)의 선문재정록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축원진하는 백파긍선과 설두유형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고 초의순의 입장에 서서 이와 같은 언구 논쟁의 무의미함을 강조했다. 또한 『선문재정록(禪文再正錄』에서는 초의와 우담이 선의 종지를 분명히 밝혔지만 세간에는 아직도 선을 오해하고 있어서 선가의 큰 병을 일으키는 병근(病根)이 되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축원진하는 초의의 2종선의 입장에 서서 옛부터 선을 논할 때 인명(人名)을 사용하여 여래선과 조사선으로 나누었으며 법명(法名)을 사용하여 의리선과 격외선을 세웠다고 한다. 백파에 대한 축원진하의 비판에 의하면 백파는 조사선과 여래선을 합해서 격외선으로 분류하고 이보다 열등한 선을 의리선으로 분류하였다는 점이다. 즉 백파의 의리선은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 열등선이라고 지적하고 불조의 방편 설법이라고 하였으나 축원진하의 의리선은 본래 여래의 법이며, 조사의 법이라고 설한다. 따라서 의리선은 열등한 선이라고 폄칭해서는 안 되며 다만 활구(活句)인가, 사구(死句)인가라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 후기 선가들이 20세기 초엽까지 전개한 선문 논쟁은 선문의 중요 문제에 대한 이해의 척도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 대론(對論)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세기 영(英),정조(正祖)대의 새로운 시대사조인 실학적(實學的) 경향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한국선 특유의 자생적인 선해석과 근대적인 사상 평가의 맹아(萌我)를 보여준 이 논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조선 후기 선학 논쟁에서 보이는 쟁점들은 단순히 선사상의 범주론이 아니라 선의 근본 입각점으로 돌아가 현실을 파악하고 참여하려는 노력 그 자체였다. 우리는 이 논쟁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를 통해 이 논쟁에 참여하던 인물들의 고민과 사상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고 그 비판적 대론(對論)의 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논쟁은 전통적인 교학과 순한문 저작을 통해 이루어진 근대불교계의 사상적 논쟁으로서는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논쟁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
출처: 중이 싫으면 절은 어디로 갈꺼나? 원문보기 글쓴이: 단속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