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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
공자부 의 유교철학의 집대성은 "중용" 입니다.
중용은 원래 "禮記" 편에 들어있는 내용인데.
당나라 시대때 "이고" 라는 학자가 중용에 대하여
단편집을 세상에 내건 것이고.
송나라 시대로 거슬러 내려와서 주자가 성리학으로
집대성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한 것이 역사적 배경입니다.
중용의 첫 내용은
"天命之謂性 이라 率性 은 修道之謂敎니라"
천명지위성 솔성 수도지위교
"하늘의 명은 性 을 말하고 성을 거느리고 이끄는 것은 오로지 도 인데 수행을 가리킴이니라"
우리나라 의 유림의 전문가 중에 유명하신 분은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를 들 수 가 있읍니다.
중용이라는 학문에 대하여 아주 쉽고 선명하게 강연하시는 데. 사실 중용을 설명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의 중도
예수님의 말씀의 사랑
공자님의 말씀인 중용 의 대목을 몰록 다 이해하시는 분이라고 여기면 정확하다고 말 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아주 수준이 높으신 분입니다.
주역을 공부함에 있어서, 중산간의 괘상은 몰록 중용의 자리를 행하는 것을 보는 象 인데
괘사 "艮其背 면 不獲其身하며 行其庭하야도 不見其人 하여 无咎/리라.
간기배 불획기신 행기정 불견기인 무구
그 등에 머물면 그 몸을 얻지 못하며 정원에 다닌다 해도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음이니라.
이 괘사가 바로 중용의도를 말함인데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대목입니다.
이기동 교수님의 강연을 모음집하고 이기동 교수님의 강연 개요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본인이 필요한 부분을 첨부 소개 하면서 중용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장을 소개하여
공부하는 분들을 위해보고자 합니다.
당나라 시대때는 불교가 아주 흥행하던 시대 였읍니다.
국교 가 불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유림학자들이나 보편적인 시대적 정서로 경제적인 관점으로 보거나
불교는 한편으로는 문제가 상당하게 많이 내포 되고 있었읍니다.
그것은 불교라 함은 사실 소비문화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페단으로 지적되기 시작한 때 입니다.
요즈음 도 불교를 믿는분 들을 자세하게 보면 돈을 아주 물 쓰듯이 쓰려고 하는 페단은
분명하게 있는 것입니다.
소비문화이기 때문이지요.
고려 시대의 불교 가 쇠퇴한 것 역시 온통 소비문화가 들 끓었기 때문에 나라 살림이나
백성들의 가정 경제에도 큰 골치거리가 불교 문화 였읍니다.
무조건 보시하라 하지 않나 사치스럽고, 공양하면 무조건 복 준다 라는 개념만 팽배해서
돈이 히프다라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웬만한 사찰에 정기적으로 다니면 , 그넘의 보시 보시 하는 통에 돈 없는 사람
절에도 가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읍니다.
당시 당나라 때에도 불교의 소비문화가 팽배 하였는데, 사찰공장이 잘 안돌아 가면
나라에서 보조비를 주어야 하고, 사람들 중에서도 할일이 없으면 불교에 귀의하고
절에 가면 돈도 주고 밥도 주고 아주 편안하게 대우를 받는 풍조가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보면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집안에 돈이 궁해도 사찰에 나가게 되면
차려 입어야 하지요.
서로 신도들 중에서도 빠지지는 말아야 하므로 단 몇푼이라도 자기 자존을 위하여 눈에 맞추어
내 놓기 시작하다 보며는 집안 거덜나기 딱 맞읍니다.
사실 불교가 이러한 문화가 성행하면 크일납니다.
물론 제대로만 믿고 수행하는 도리를 잘 지킨다면 이러한 문화팽배문제는 없게 됩니다.
불교의 특징은 돈 불교가 아닙니다,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문화를 조장하여
오히려 가정사의 평화와 경제에 피해를 주면서 까지 믿어야 하는지는 좀더 숙고하고
태도를 수정하여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사찰에서 공양하고 보시하는 가치는 스님들이 굶어죽지 않을만큼 보호해주고 기본적 삶의 보장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성직자는 또한 항상 "헐벗고 굶주려야 합니다"
단지 불사를 일으키는 것은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지만 요즈음은 스님들을 너무나 신도들이 많이 맥여 놓아서
배가 툭 하고 튀어나오고 기름이 아예 번질 번질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불교는 아주 매력적인 특징이 있읍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히 우리나이 정도 되면 말입니다, 무엇이 제일 싫을 까요.
죽는것이 싫은 것입니다, 죽는것을 좋아하는 사람 있읍니까?
하지만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느정도 숨을 쉬고 살아가니까 뭐! 아주여유가 있듯이
인생이란 한번은 죽는것이 아닌가 하고 무신 만감을 지니고 회감을 가지는
듯 여유있는 시적인 표현을 하지만
숨이 거칠어지고 답답하기 시작하면 이미 얼마 안남은 것입니다.
아주 오래 더 살고자, 밥만 먹으면 운동하러 산에가고 강변을 찾고
영양많고, 좋다는 약은 다 먹으면서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그 죽음은 진짜 왜곡스러운 표현이지면
죽기보다 싫은 것은 이 세상에 는 없는 것이지요.
불교에는 안 죽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해탈문화를 말합니다.
부처님 법만 잘 수행하면 죽을리가 없는 영원한 무량하게 생사를 초월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말 합니다.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영생불사 합니다.
그렇지 않읍니까?
안 죽는다는데서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읍니까?
에이! 다 죽는데?
아니 그렇다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다 사기꾼이라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지 않읍니까?
사기꾼이 그렇게 수천년이 가도록 변하지 않고 계속 백성이나 중생의 사표가 되어
스승이 되어 현존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유림학자 이고는
우리 유림의 공자님 말씀이나 성인이신 복희씨 문왕 의 말씀등에서는
죽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없는가 하고 살펴본것입니다.
틀림없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러한 것이 없는 것 같아 계속 문헌을 찾아 본 것입니다.
불현듯 찾아낸것이 예기편에 공자부의 말씀인 중용을 드디어 찾아낸 것입니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하늘 입니다,
그렇지 않읍니까,
하늘이 변하는 것 보았읍니까?
내 마음에는 하늘이 있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에는 하늘이 들어가 있으므로 천명지의성인 것입니다.
아! "유림의 성인들 말씀에도 이처럼 죽지않는 법이 있구나 " 한 것입니다
이로서 이고는 죽자 살자 하고 중용에 대하여 엄청나게 파고 들어서
내 놓은 책이 "복성서" 라는 중용의 단행권을 세상에 출시 한 것이고
이를 성리학으로 집대성한 주자의 성리학이 만세에 드러낸 것이
주자의 성리학으로서 우리나라 퇴계 역시 이 성리학의 대가가 된 것입니다.
성리학의 중용부분은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죽지 않는 법을 배우신 분 중에서 제대로 깨친 우리나라 학자가 한 분 계십니다.
남명 조식 선생님을 말합니다.
남명 선생은 단성이라는 고을에 현감을 지내셨는데.
당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던 시절인데
단성현감 사직상소를 읽어보면.
다 늙은 과부 하나가 어린 왕을 데빌꼬 조정을 수렴하면서 이렇게 저렇게국정농단
한다는 식으로 사직서를 올립니다.
그 당시 이러한 글을 중앙정부에 올려서 제대로 성할 리가 없겠지요.
지엄한 왕권에 도전하는 것 아닙니까?
당장 문정왕후는 남명 조식에게 사약을 맥이고 황천길을 빨리 가게 하라 하고
엄명을 내렸는데.
충직한 신하가 문정왕후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지금 남명 조식을 죽이면 나라가 흔들린다고 또한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이러한 연고로 남명 조식은 무사하였읍니다.
왜 이러한 말을 하는가 하며는,
남염조식은 중용을 터득하여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깨쳤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남명조식 선생님 사전에는 겁 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안 죽으니까요!
저도 어떻게 보면 겁대가리 없는 것을 많이 합니다.
직언이라고 막 권력자들에게는 막 대듭니다.
안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역64 괘상을 말씀하신 성인들께서도 영원하게 안죽는 것입니다.
공자부, 석가모니, 예수, 마호멧 , 문왕, 복희, 기자, 퇴계 등 중용을 익히고 수행한 사람들
모두 다 안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안죽는게 어디있어? 한다면 공자, 예수, 석가 다 사기꾼 아닙니까?
공자 예수 석가 의 말씀 제대로 공부하고 수행한 사람은 이 안 죽는 법을
다 터득했기 때문에 길이 길이 빛날 뿐입니다.
단지 소인은 이를 이해할 수 도 없을 뿐이지 군자지상으로 자세를 반듯하게 되면
공자부의 말씀을 몰록 이해하여 죽지 않게 되는 도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선비 라 이름합니다.
곧 죽어도 왕한테 바른말 하고
왕이 그냥 죽이려 하여도 태연하고 죽음을 맞이 합니다.
여유가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 중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도 죽을때는 庸(용) 을 씁니다.
오직하면 요단강을 건널때 아예 똥도 한 무데기 싸고 갈까요.
용(庸) 을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中庸(중용) 을 쓰지 못하고 庸(용) 만 써서 안타까울 뿐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 를 나이 젊은 이 들에게 해 보았자
실감도 안나는 것이고 아직도 살날이 창창한데 귀때기에 들어가지도 않읍니다.
저 양반 미쳤나? 할 뿐입니다.
우리는 안 그랬나요? 젊었을때는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읍니다.
아예 영원성 그 자체로 살날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사는것도 헤죽거리며
삶에대하여 고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정도 나이가 되어서 죽음의 그림자가 이제 언제나 끼잡아 올지 불안한
입장에 서 있으면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공부를 해서 안죽어야 합니다.
이 해탈문화가 반드시 유림의 중용사상에 그대로 반영하여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性 은 마음이 태어났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공자부께서도 이 마음이라는 性 의 본질이 하늘임을 간파하시고
복희팔괘 나 문왕팔괘 등을 집대성하신 성인들께서는 빛의 진리와 생명을
발견하신 것을 깨치시고 만세에 변하지 않는 지상의 4 대성인의 한분으로
추앙 받는 부분이 바로 중용 사상입니다.
마음은 하늘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늘은 변하지 않읍니다.
사람살아가는데 서로의 인간성으로 교제 함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의리가 충족되면 바로 이것이 중용입니다.
하늘처럼 한번맺으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도리중에 가장 높은 것이고, 사람이 뜰앞에 서성거리고 행하지만
결국 사람이 보이지 않는 그러한 상택를
"艮其背면 不獲其身 하야 行其庭하야도 不見其人 하여 无咎/리라"
삶의 최종적인 가치는 "무탈" 입니다.
그저 무탈하라 하시는 옛 어른들이 자손에게 내래는 덕담의 최고조는 무탈입니다.
무탈함은 중용에서 비록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늘같은 마음이 내 몸 속에도 있다는 것인데
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 보아야 하지 않읍니까?
이 찾아나서는 여행을 수행이라 하고 공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모습을 보면 이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자리인
하늘을 찾아나서는 공부는 절대로 시키지 않았읍니다.
전부 무신 경제학 법률학아닙니까?
옛날에 살아가는 방법은 힘이 강하면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것을
우선하여 행동하는 것을 배웠는데
힘도 안쓰고 돈 잘벌고 남보다 이에 서는 방법론만 가르킨 것이
현대 교육일 뿐입니다.
이 악순한의 공부방법은 결국는 인간들 끼리서로 경쟁하는 방법만
최고저로 발달하게 만들었지
사로 중용하는 법을 점점 밀어낸 것 밖에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법공부하고 경제학 공부한 사람은 마음은 아주 교묘합니다.
하지만 한 꺼플만 벗겨보면 대부분 욕심이 산을 이룹니다.
그쳐야 하지요. 죄 받읍니다.
그러므로 성인들께서는 정치하는 사람도 , 대통령질 하는 사람도 포함해서 모든 백성들 보고
불쌍하고 불상하다, 어리석다 라고 하시는 분이
바로 성인이신 것이며 중용을 터득한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중용을 소개 한다며는
마음이 하늘과 같으면 性 을 보는 것입니다.
어릴때 우리들은 작은 돌맹이와도 통했읍니다. 공기돌을 하면서
돌 하고 놀았기 때문입니다,
땅위를 돌아다니는 벌레와 함게 놀았고 풀피리도 입데다 대고 불면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고,
소곳 소곳 피어난 꽃들과 열매에 젖어서 놀기도 했읍니다.
초등시절의 고향의 인연은 이토록 소중한 하늘 소식인 것입니다.
괜히 초등학교 시절 끼리 모여 만나고 하겠읍니까?
초심의 지절이기 때문에 하늘 소식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하늘안에 주어진 모든 만물과도 통했던 지절이 우리 스스로의 마음속에
었었다는 사실입니다.
철이나고 나이가 들다보니 오로지 돈만 친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회력을 배양하면서 인위적으로 만든 상품만을
다 선호하고 이를 선호하다보니 돈을 지녀야 하므로
온 세상이 돈칠을 했읍니다, 돈 은 무엇인가? 바로 돼지 입니다.
돼지는 욕심을 말하지요.
하늘에서 생겨난 빛이 서북방의 乾 으로 빛으 6 水 인 亥 로서
욕심의 빛이 들어앉읍니다, 亥 는 돼지입니다.
오금과 장딴지에 빛 한번 얻어맞으면 오금을 띠지 못하는
죄를 지니고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하늘도 있지만, 욕심이 들어올 수 도 있읍니다.
벱새 보금자리에 뱁세가 알을 놓고 새끼를 부화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뻐꾹이가 살짜기와서 자기 알을 낳아놓고 가버립니다.
나중에 뻐국이 새끼가 부화되어 뱁세 새끼들을 다 밀어내어
죽이고 뻐꾹이가 벱새 새끼 노릇을 합니다.
벱새가 불쌍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뱁세 입니다, 뱁세는 스스로 뻐꾹이 새끼를 자기
새끼라고 여기고 온갖 고생을 다 하여 키웁니다.
욕심이 마음자리에 들어서면 하늘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 욕심을 밀어내는 자리에 중용이 있는 것입니다.
이 하늘 마음이 있다하니 반드시 이를 찾아나서야 하고 지켜야 합니다.
주역 64 괘상은 이 중용의 자리를 찾아나서는 여행입니다.
돌맹이 하나와도 대화가 통하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어떤 틀을 벗어날때
온 세상이 보이는데 인위적인 조성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영혼의
자리를 볼 수 있읍니다.
이를 남들은 유체이탈이라고 지나가듯이 말합니다.
아닙니다
오롯이 하늘마음을 지닌 본래의 자신 마음을 보기 때문에
인위적 형태의 제조나 제품, 건축물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자리가 환 한 광명이며 황상치마이고 하늘에 속한 우리들 마음이
주어진 고향인 것입니다.
욕심으로 빛어진 모든 물질이나 인위적 가치는 전부 망상인 것이며
스스로 우리들은 천당에서 살고 있는것이며 극락지경이 지금 이 자리이고
선경의 경지에서 서로가 불가분을 노래하는 곳이 우리가 살아지니는
이 장소입니다.
하나의 인연을 맺더라도 변하지 않는 마음!
이 경지가 무아지경이 되는 것이고
간기배라 뜰에 사람이 노닐고 행하여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 상태로서 유지하는
지점이 바로 중용인 자리이며 止 (지) 라 마음이 그치고 고요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중용의 길이 있는 자리는 道(도) 입니다,
道 는 길입니다, 길을걸으며 자세하게 우리가 갈구하는 옹달샘 하나를
찾아야 합니다.
옹달샘을 찾으로 산 으로 올라간다 합시다, (상향점을 추구)
올라가다보면 옹달샘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읍니다.
옹달샘에서 는 물이 흘러 아래로 어떤 흔적을 남기며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흔적만이라도 찾을 수 가 있읍니다.
그 흔적에는 옹달샘의 물이 있으므로 잘 가두면 물을 먹을 수 있읍니다.
물이흐른 흔적은 자세하게 찾아 봅시다.
옹달샘은 그지 얺이 계속 용출하고 있을 것이며 흘러 아래지면으로
내려 오고 있을 것입니다.
사통 팔달 이 무엇입니가.
옹당샘은 팔방으로 흘러 다라르는 곳이 있는 것과 같읍니다.
팔방애 다다른다 입니다.
이를 옹달샘은 사방에 통하고 팔방에 다다르지 않는 법이 없다는 것을 말 합니다.
배달민족이 무슨 뜻일까요.
짝을 이루면 다다른다 입니다, 함께 다다르는 진리의 처인 옹달샘 이 흘러오는 맥을 잡는 자리 입니다.
서로 서로 중화 해애 하는 자리가 중용의 자리입니다.
서로 함께 해야 합니다.
이 자리가 중용의 자리인 고로,
학도들은 이 주역의 64 괘상을 자세하게음미만 하더라도
하늘마음이 자연하게 들어서고 무엇을 하더라도 자유자재하는
"간기배 면 불획기신하며 행기정하야도 불견기인 하여 무구하니라"
의 심경을 볼때 중용은 반드시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중용의 자리는
말을 하여도 말이 아니고
내 몸을 드러내어도 몸을 볼 수 엇는 자리입니다.
하늘에 다 속하므로 모두와 통하므로 지목하는 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변치않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변치않는다 함은 죽엄이 원래 없는 자리이고 태어남이 없는 자리가 되어
늘 깨어있는 者 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이 또한 그러하고
예수님 말씀이 이 또한 그러합니다.
점점 더 늙어지면서 더욱더 비참하고 어렵고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럴수록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지점이 영원한 소식처라고 믿고
무엇이라도 한가지를 믿어지니며 평화하고 고요한 마음의 그침상태를
찾아보시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명상이라도 해야 하는 자리가
중용이 됩니다.
다음에 계속 주역 중산간의 육4 효 부터 소개 하겟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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