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빈티지가 오래된 프랑스 보르도산 레드와인을 한 병 주문했다. 소믈리에가 다가와 주문한 레드와인의 레이블을 보여주고 조심스럽게 병마개를 따 코르크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더니 와인을 호리병 같기도 하고 오리 모양 같기도 한 투명한 주전자에 다시 따르기 시작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와인 한 병을 온전히 투명한 용기에 따르고 유유히 사라지며 좋은 시간을 보내라 한다. 그런데 비싸게 주문한 와인을 모두 다 따른 줄 알았던 우리는 주문한 와인의 일부가 병 속에 남아 있어 당황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오래된 레드와인은 장기 보관하는 중에 죽은 효소의 찌꺼기나 색소, 탄닌, 주석산염 등의 침전물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침전물들을 와인에서 분리해 와인에 섞이게 되는 나쁜 맛들을 제거한다. 또한 아직 숙성이 덜된 와인들은 강한 떫은 맛인 탄닌을 가지고 있어 거칠기도 한데 디켄터에 한 번 더 따름으로써 와인과 공기가 접촉해 맛을 부드럽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을 디켄팅이라 부른다.
이처럼 와인을 다른 용기에 옮겨 담아서 와인의 맛과 풍미를 증가시키는 작업인 디켄팅을 하는 용기인 디켄터는 오래된 포트 와인의 침전물들을 거르기 위해 영국에서 최초로 발명됐다.
와인의 침전물을 걸러내려면 마시기 전 병의 움직임을 최대한 줄이고 똑바로 세워서 찌꺼기들이 아래에 쌓이도록 해야 한다. 디켄터에 따를 때에도 천천히 조심스럽게 기울여야 찌꺼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이때 디켄터에 침전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병 밑에 촛불 같은 발광체를 놓고 찌꺼기가 병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관찰하면서 따르는 것이 좋다.
이제는 왜 소믈리에가 따른 병에 와인이 남아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 동안 디켄팅은 대부분은 레드와인에만 해왔는데 요즘은 화이트와인의 풍미를 더욱 좋게 하기 위해서도 많이 이용한다.
하지만 모든 와인이 디켄팅을 한다고 맛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된 와인은 공기와의 접촉으로 쉽게 그 맛을 잃어버리거나 특유의 향이 날아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디켄터는 원래 와인 병보다 주둥이가 넓기 때문에 공기와의 접촉면이 많아 일단 디켄팅하면 오래된 와인은 빨리, 새 와인은 조금의 시간을 두고 산화되는 것을 생각하며 마셔야 한다.
요즘은 디켄터의 모양도 여러 가지 디자인으로 나오고 있지만 공기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도록 입구와 목 부분이 좁고 몸통 부분이 넓으며 맑고 투명한 재질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
디켄터가 없다면 와인의 병을 똑바로 세워 찌꺼기들을 가라앉힌 다음 와인을 조금씩 잔에 따라서 마시고 찌꺼기가 보이면 더 이상 와인을 따르지 않도록 한다. 거친 와인을 공기와의 접촉으로 부드럽게 하려면 병을 딴 후 조금의 시간을 두고 마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