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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랑이 머무는 곳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님은 ‘사영리’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해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사영리를 공과교제로 사용하는데 새신자부 교사들을 앵무새 비슷하게 만들려고 담당 전도사님은 노력을 하시는군요. 사영리가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별다른 대안도 없고 사영리에서 부족한 부분 예를 들어 제1원리의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구원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의 회개에 대한 부분을 첨가하려고 생각중인데....50 중반의 여전도사님은 교재의 문구에서 벗어나는 것을 싫어하시는군요. 오로지 교재설명에서 톳시하나 안 틀리기를 원하시니 답답합니다. 그리고 주력하는 것은 영접기도에만 신경을 쓰시니 이의를 제기해서 부딪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한 것 같고 해당 부목사를 만나 수정을 요구해도 교회에서 주일학교부터 다닌 목사라 교회 어른인 전도사님한테 말씀을 못하는군요..교회는 정체된 지 오래 이고 새신자부에서 그 해결점을 마련해야 하는데...고민입니다. 때로는 제가 잘못 되었나 돌이켜 생각해보면서 어떤 길을 모색해야 할지 답답해서 글을 올립니다. 사영리는 80년대 중반에 저도 공부를 했었고 좋은 교재라고는 생각하지만 보충해야할 점과 수정해야할 점이 있으면 간단하게 조언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참으로 오래 전에, 그러니까 제가 신학 공부를 하고 전도사로 활동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참으로 오래 전에 사영리로 된 몇 페이지 분량의 아주 작은 전도지를 본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으며, 나 자신은 그런 것을 가지고 전도지로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영리로 전도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얘기에는 제 자신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사영리를 가지고 전도할 마음을 제가 갖지 못하는데다가, 사영리를 비롯하여 그러한 것으로 전도할 어떤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님이 섬기는 교회에서는 사영리에 대한 신뢰와 의존이 참으로 큽니다. 사영리를 새신자부 공과교재로 사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한 사영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인하여 님과 새신자부 담담 전도사와의 사이에 갈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사는 사영리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여서 이를 통하여 효과를 거두려고 하고 있으나, 님은 이 사영리가 참으로 좋은 교재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 마음에 부담을 갖고 있으며 곤란히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님은 보완책으로 문제점이 있다고 여기는 사영리를 문제점을 해소하여 좋게 사용할 수 있고자 하여서 님 자신 스스로가 문제점이 있다고 하는 부분의 내용을 보충하여서 교재로 사용하고자 하면서, 과연 보충해야 할 점과 수정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며 알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답변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님이 사영리를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답변을 드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님은 사영리에 보충할 점과 수정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그것은 사영리가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연 사영리가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는지, 만일 정말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영리’란 四靈理, 곧 ‘네 가지 영적인 원리’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이 사영리를 전도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영리를 전도법으로 처음 사용한 곳은 교회가 아닌 한국대학생선교회로 불려지는 C.C.C.에서입니다. 즉 C.C.C.에서 사용하는 전도 프로그램에 의한 복음전도지입니다만, 많은 교회에서도 사용하는 복음전도지가 되었습니다.
사영리 전도법은 본래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사영리 전도법은 1965년 미국에서 발간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들어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영리 전도법은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사용된 전도법으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이 사영리 전도법은 간단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교회에서도 호응하며 교회 전도 프로그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영리 전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은 이것을 전도에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도요원 강습회(LTC)를 통해 이론, 실천, 점검으로 각각 5시간씩 총 15시간의 훈련을 받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친 후 전도에 사용되고 있는 사영리는 총 여섯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1원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2원리 :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제3원리 :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제4원리 : 우리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 각각의 원리에서는 간단하나마 이 원리들을 뒷받침하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영리에서는 이 네 가지를 영적인 윈리로 제시한 후, 이어서 구원을 확신시키는 방법, 그리고 신앙의 성장 원리와 교회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중심에 들어오시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입으로 하는 말보다는 중심의 태도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드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지금 이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 안에 들어오실 것입니다.
여기서 꼭 기억할 사실은 감정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지 우리 자신의 느낌에 근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느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한 결과,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2) 여러분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3)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4)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5).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었습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
이러한 사영리를 C.C.C.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에서도 전도 프로그램에 의한 전도법으로, 복음전도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님이 알고 있듯이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말입니다. 이는 사영리가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전도 효과가 크다는 생각에서가 아니겠는지요. 이는 전도 효과가 있어서 교회에 사람을 올 수 있게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교회가 부흥할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옳지 않은 생각에서 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영리가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는 것이 큰 문제인 것보다 교회가 전도법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의 문제점은 더 심각하며 클 것입니다.
님이여,
님은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사영리 전도법의 문제점을 단지 신학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것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그런 것인가? 하는 데에는 의문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사영리가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면 여기서 말하는 네 가지 원리가 그렇게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는 내용을 사영리가 담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영리는 복음 전도의 내용을 단지 이것을 만든 사람이 말하는 네 가지로 말할 뿐입니다. 사영리로 복음 전도를 하고자 할 수도 있고, 이것보다 좀 많은 ‘칠(7)영리’로 말할 수도 있고, 이것보다는 더 많은 ‘십(10)영리’로 말할 수도 있으며, 오히려 사영리보다 적은 ‘이(2)영리’나 ‘삼(3)영리’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 한 마디인 “주 예수를 믿으세요”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님이여,
님이 “주 예수를 믿으세요!”라는 이 하나를 가지고 누군가에게 전도하였다고 하면, 여기에 신학적인 문제점이 있으며, 그래서 신학적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지요. 여기에 단지 ‘주 예수’와 ‘믿으세요!’ 외에는 어떤 말도 들어 있지 않으니, 신론도 문제가 있고, 죄에 대한 인식도 없고, 구원의 개념도 없다며, 잘못된 전도라고 할 수 있겠는지요.
아닙니다. 사영리는 복음 전도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복음 전도지입니다. 얼마큼의 내용과 그 말을 담고 있는가에 의해서 신학적인 문제점 운운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사영리는 말이죠. 전도를 단지 네 가지 원리에 의해서 말하여 전하려고 하는 것이니만큼 많은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만큼 여기에서 담고 있지 않고,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영리 자체적으로 볼 때는 그렇게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일이 다 담고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단지 원리적으로 네 가지만 말하고자 할 뿐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문제점으로 두각을 시킬 필요가 있는가 싶습니다. 가령 사영리의 전도를 비판한 논문에 의하면 제1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선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문제 삼고(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선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신학적인 문제점으로 지적하려면 사영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말하고 있지 않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제2원리에서는 죄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이렇게 죄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것을 신학적인 문제점으로 지적하려면 사영리에서 죄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고 엉뚱하게도 다른 것을 말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어야 합니다)는 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까페인지 블로그인지에서 보고 퍼 온 것(출처 미확인)인데 (1) 죄의 대한 각성의 부분이 없다. (2) 회심을 인위적인 단계로 축약을 해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3) 하나님의 죄에 대한 미워하심이 없다. (4) 구원이 인간에 편에 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5) 주님을 섬기는 희생과 십자가가 없이 그냥 편하게 섬기는 것을 말한다. (6) 구체적인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 막연한 죄의 고백만 유도한다. (7) 수동적으로 따라하는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니다. 본인이 깊은 영적인 각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이 전도자를 흉내 내는 단순한 영접기도이다 라고 하는 식입니다.
만일에 사영리가 이러한 것으로 신학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그러한 내용을 다 담으려면 사영리의 전도지는 훨씬 많은 방대한 내용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님에게서도 그러한 행동을 취하려는 것을 보게 되는데 “현재로서는 별다른 대안도 없고 사영리에서 부족한 부분 예를 들어 제1원리의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구원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의 회개에 대한 부분을 첨가하려고 생각 중인데 ....” 라고 하고 있잖습니까? 반면에 전도사 한 분은 토씨 하나 손대지 않으려고 하구요.
하지만 말입니다. 사영리는 제1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 시작을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하고 있을 뿐이며, 제2원리에서는 사람이 죄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렇듯이 제3원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였을 뿐이고, 제4원리에서는 각각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겠죠. 이러한 것을 내용을 좀 더 보완하면 어떻고, 토씨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면 어떻겠는지요.
저는 사영리가 네 가지 원리를 가지고서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 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네 가지가 아닌 그 이상이나,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복음은 전파됩니다.
그러니 사영리가 신론에서, 죄론에서, 기독론에서, 구원론에서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가져나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각각에서 문제되는 내용으로 전도법을 삼아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한 것을 님이 내용을 좀 더 담아서 전도지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러시면 됩니다. 그러할 필요성을 갖고서 그렇게 하고자 하는데 말입니다. 그것을 막을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 님의 교회의 새신자부 전도사님의 경우는 토씨 하나 손 안대고 그대로 사용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영리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러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잘못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분은 사영리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가장 좋게 여기며 만족하고 있으니 그분은 그러시면 됩니다. 그런데 한 교회에서, 그리고 같은 새신자부에 있으면서 사영리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입장에 있어 갈등을 겪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 문제의 갈등은 님이 사영리를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다고 알고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이니 만큼 님이 배려를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반면에 새신자부전도사님도 자신의 고집에서가 아니라, 새신자부에서 함께 교회를 섬기는 분들의 의견을 배려하여 얼마든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용납하며 유익하게 사용하는 자세를 가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존의 사영리 전도지가 좀 더 내용을 보충하고 수정하여서 더 나은 전도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이는 마다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님이여,
정작 제가 마음 쓰며 사영리에 의해서 전도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말이죠. 님에게서도 보게 되는 것인데, 교회가 정체 - 아마도 교회 부흥을 의식하고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 되고 있으니,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되겠으니까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사영리를 좀 더 낫게 만들어서 써 보기라도 하자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즉, 사영리를 교회를 부흥시키는 전도 방법의 하나, 교회를 부흥시키는 전도 전략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전도 의식(意識)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요.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에서 하고자 하는 전도 프로그램에 의한 전도법이기에 말입니다. 만일에 님이 이러한 것에서 보다 나은 사영리에 의한 전도법을 전략으로 삼고 있다면, 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알게 해 주시고 있는 ‘복음 전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경적 관점에서 ‘복음 전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에서 돌이키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결코 교회를 부흥시키는 수단과 방법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으로 복음 전도를 주신 일이 결코 없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복음 전도가 하나님이 주신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사영리 전도법이니 태신자 전도법이니 이런 저런 무슨 전도법이니 하며 온갖 전도법을 동원해서 사람을 끌어 모아 많게 함으로 교회를 커지게 하는 것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에 무엇이 다르겠는지요.
한편, 사영리를 복음 전도지로 사용함에 있어서 보게 되는 참으로 크고 중요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번째 원리에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라고 한 후, 그에 따른 구원을 확신시키는 방법으로 “당신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라고 하며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죗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게 하며, 이 기도가 마음에 드는지를 묻고, 그렇다고 대답하도록 유도하며,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바로 지금 이 기도를 드릴 것과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그 사람 안에 들어오실 것이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기도하게 하고 또한 결신하게 하여 카드를 작성케 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으로 여기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있어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으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새사람이 시작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영리에 의한 구원을 확신시키는 방법은 참으로 비성경적입니다. 누군가가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믿음에 있는 것은 사영리에서 보게 되는 전도자가 시키는 대로 주님을 믿고 싶다고 하며 주님이 자신의 죄값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니 그러한 자신의 죄를 용서하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한다고 따라서 기도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신자 카드에 등록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은 그가 그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그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영리를 가지고 전도하는 사람은 여기에 따른 네 가지 원리를 설명한 후 자신을 따라서 기도문을 따라 읽게 하고 또한 자신을 따라서 기도를 따라 하게 한 후 예수님을 영접할 것을 요구(유도)하며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단정하여 선포합니다. 그런데 사영리의 이러한 전도법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사람의 의지와 그에 따른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곧 선물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으로, 오히려 사람의 의지와 행위에 의한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참으로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어느 사람의 구주로 영접되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자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들어오시고 또는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구주로 영접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죄로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그가 전도자가 전하는 사영리를 듣고서 기도문을 따라하며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표명을 한다고 해서, 그래서 그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그의 구주로 영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은 위, 곧 하늘(하나님)로부터 난 자가 되어서입니다(요 1:12-13).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위로부터 주어진 권세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선택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일을 작정하신데 따라서 그를 선택하신데 따른 것입니다(요 15:16; 엡 1:4).
하나님은 이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십니다. 복음 전파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시는 뜻에 순종하게 하시며 또한 불순종하여 그 마음의 강퍅함에 있게 하십니다. 이 권능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서 일하시는 성령께서 행하십니다. 복음을 듣는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거나 또는 영접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그에 따른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성령의 권능이 그에게 행사되는 것에서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서 사람의 듣는 귀를 막으시며 보는 눈을 감기게 하여 그에게 화가 미치게 하는가 하면, 그의 귀가 그리스도를 들음으로 복 있고 그의 눈이 그리스도를 봄으로 복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각 사람을 정복하고 다스려 가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사영리를 전하는 전도자가 자신이 말하는 대로 사영리를 들은 사람이 따라 기도하며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하게 하며 그것을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에 있다고 단정하며 믿음의 결단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구원 사역의 주체를 하나님에게서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로 두는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정한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없이는 사람은 그 누구이든지 간에 복음의 부르심에 따를 수가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에게로 결코 나아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이 칼빈의 5대강령(5대교리)의 하나인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Irresistible grace)입니다.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한하여 그 기쁘신 뜻대로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이 정하신 뜻을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참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0장 ‘효과적인 부르심’)
복음 전도자는 복음을 전하며 “주 예수를 믿으라!”라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그와 그의 집에 임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언이 복음을 듣는 사람이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의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복음을 전하며 주 예수만이 그와 그의 집의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이심을 선언하며, 그 복음의 진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는 그 복음의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를 맡는 냄새가 되게 하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의 향기를 맡는 냄새가 되게 하십니다(고후 2:14-16).
그러한 것을 사영리에서의 구원을 확신시키는 방법에서는 사영리의 전도법에 의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의 의지적 행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해진 기도문을 따라하게 하고 그것을 그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것인양 결단하게 하며, 그렇게 결단한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결신의 카드를 작성하게 하며 교회로 오도록 권유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영리 전도법의 구원을 확신시키는 방법은 비성경적인 잘못된 것으로 사영리 전도법을 비판하는 분들에 의해서 반펠라기우스 사상, 알미니안 주의, 찰스 피니의 영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란 비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당연한 것입니다.
님이여,
그러기에 말입니다. 사영리의 ‘네 가지 영적인 원리’를 가지고 신학적인 문제점이 있는가 운운하는 것은 ‘네 가지 영적인 원리’ 자체로서 만은 그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보아 무리가 있다고 판단됩니다만, ‘네 가지의 영적인 원리’를 가지고서 구원을 확신시키는 방법에 사용되고 있는 것은 구원을 확신시키는 방법의 잘못됨으로 인하여 참으로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영리의 내용을 보충하거나 수정해서 될 일이 결코 아닙니다. C.C.C. 이든 교회이든 사영리를 가지고서는 얼마든지 복음전도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서 사람을 결신케 하며 교회로 오게 하는 것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전도법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영리를 가지고 어느 사람과 복음을 말할 기회를 가지며, 그것이 만남의 기회가 되어서 지속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교제를 가져나갈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의 교제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에 이르게 하는 은혜를 볼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하지만, 사영리를 가지고서 여기서 말하는 구원을 확신시키는 방법으로 사람을 결신케 하여 소위 교회를 성장시키는 부흥의 수단과 방법으로 가져나간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이 교회에 맡기신 복음이 아니며, 따라서 복음의 올바른 전도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여 사영리를 새신자부 공과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교회에 필요하며 유익할 수 있는 것으로 잘 가져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영리가 총 여섯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영리는 이 제목이 말하는 바인 ‘네 가지 영적인 원리’(또는 그 이상의 원리로나 그 이하의 원리로도)로 복음을 전해 나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며 그 역할과 기능의 족함이 있습니다. 여기에 불필요하며 비성경적인 전도법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부분은 있음으로써 오히려 복음의 바른 전파에 해악을 끼칩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모쪼록 본 답글이 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에 맡기신 복음을 바르게 전파하는 것에 교회가, 그리고 여기에 속해 있는 새신자부가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복음 전도를 가지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는 것에 있는 것, 그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교회들이,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인식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잘못된 전도관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좋은 글을 주신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랫만에 들어왔는데
언제나 친절하시군요...
비성경적인 전도법으로 복음의 바른 전파에 해악을 끼친다는 말씀을 명심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