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살의 바다 「잉크편지」 해양문학 대상작/이재성 수평선으로 붉은 바람이 붑니다 하늘에 붉은 부리 갈매기가 저녁을 향해 무리지어 날고 있습니다. 귀향명령을 받고 처음으로 당신이 넣어준 금촉 만년필에 여기 북태평양 저녁 바다를 닮은 잉크 가득 채워 처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고백하자면 여러 번 전화를 걸고 싶었습니다. 바다가 고립무원은 아닙니다. 선박용 해상위성전화로 당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나 그리움이란 바다동물을 상하지 않게 소금에 절여 냉동창고 깊은 곳에 넣어 놓았습니다. 잊은 것은 아닙니다. 언제라도 녹이면 싱싱하게 되살아나도록 감춰두었을 뿐입니다. 북양은 거대하고 추운 바다입니다. 봄에서 여름부터 짙은 바다안개에 갇히고 시월부터는 안개가 눈이 되어 내렸습니다. 하루 종일 지나가는 배 한척 보지못하고 파도만 바라보다 잠드는 날이 많았습니다. 나에게 기다림이란 어창을 가득 채우는 일이어서 어창이 차면 남쪽 바다로 돌아가는 길이어서 보급품을 실은 운반선이 찾아왔을 때도 몇 자 안부를 담아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 편지는 나와 함께 귀국할 것입니다. 소인대신 하얗게 터진 내 입술을 찍었습니다
선원수첩SEAFARER’S BOOK을받으며 스물다섯 살의 바다●1
수첩번호 BS1117-01673 성명 스물다섯 살의 바다 국적 REPUBLIC OF KOREA 이수첩의 소지인이 선원의 직무를 위하여 모든 편의를 제공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대한민국 국토해 양부장관, 발급일 2011년 4월 27일 발급관청 부산지방해양항만청 장, 건강진단서와 한국해양수산연수원장의 교육훈련이수증, 잘 있어라, 달콤했던 강의실이여 이제 422톤 원양어선이 내 책상이며 망망대해가 친구며 애인이다 싱거웠던 수사修辭는 소금에 절이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바다의 문장을 봉수망으로 건져 올리리라 열망하던 바다사나이가 되었으니 하얀 제복 입은 사관이 아니어도 좋다 나를 위해 멋진 거수경례가 없어도 좋다 깨끗하게 다림질한 작업복에 두툼한 새 작업화 더블 백 깊은 바닥에 시집 한 권을 감추고 나는 바다로 간다 젖은 눈빛으로 바라보지마라 기다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다 심장이 뛰는 동안 내가 살아야 하는 바다 모두 46쪽인 네이비블루 사각 바다를 꼭꼭 접어 가슴 속에 넣는다, 지금 이 순간 스물다섯 살 나는 바다다 내가 살아온 청춘도 바다다 내가 살아갈 내일도 바다다.
나를선적하다 스물다섯 살의 바다●2
선석 가득 몰려들었던 납품차량들이 떠난다 마지막으로 80kg들이 쌀 일백 가마가 선적중이다 일등항해사는 출항 전 뱃일은 이것으로 마친다는데 나의 보급품은 아직 선적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얼큰한 김치찌개 너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아두었던 휴대전화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젊은 시인이란 이름표 미완성으로 남은 두툼한 습작노트 부치지 못한 여러 장의 편지여 일용할 부식이라면 어깨에 메고 가겠지만 스스로 선적금지물품으로 정하고 오직 72kg의 나만을 선적한다 원양어선 상갑판 아래 어창은 피도 눈물도 얼게 만드는 무정한 곳이지만 맨 몸뚱이의 나도 살아있는 선적용품이어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아흔아홉 번째 쌀가마가 선적될 때 슬쩍 눈물 한 가마쯤 싣고 싶었지만 눈물이야 바다에서도 얻을 수 있는 보급품이어서 바다 위에서 고장 나면 쉽게 수리할 수 있는 나를 가장 잘 아는 나를 선적한다.
출항전야 스물다섯 살의 바다●3
전깃불이 꺼졌다 온기가 다 빠져나간 낡은 모포 속에서 지난 귀항에서 남겨두고 간 가난한 삼등항해사 부부의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린다 달빛마저 들지 않는 선창 아래 나의 바다에 누워 스물다섯 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만지면 떠난다는 것은 차갑다는 말인 것을 안다 진실로 차갑다는 것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아픈 말인 것을 안다 바다로 가는 길은 내가 택한 운명 나무침대가 삐걱 거릴 때마다 바람벽을 고양이처럼 할퀴어보면 벽의 생채기에서 내 피가 흐른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문을 활짝 열어 저 바다를 불러 뜨겁게 동침하는 일 바다가 내게 은밀하게 감기며 사랑하다는 말을 건네 오지만 문득문득 스치는 두려움으로 나는 답할 노래를 잊었다.
출항제 스물다섯 살의 바다●4
나를 감고 있던 뭍의 쇠사슬을 끊는다 양수처럼 가득 차있던 먼 바다가 터진다 어디선가 피 냄새처럼 바다 비린내가 난다 그 바다에 스물다섯 살의 배를 띄우며 독한 술잔을 높이 든다, 건배 뱃머리도 출렁이며 함께 잔을 든다 바다가 자꾸만 나를 불렀다 이유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닻 올려라, 부는 바람에 돛 올려라 그리고 내 인생의 조타륜을 잡아라 내 몸뚱이를 내가 밀며 바다로 길을 낸다 늙은 물고기들이 내 뼛속으로 알을 슬고 어린 새끼들이 내 늑골 사이로 헤엄쳐 나가리라 뱃길은 내 손금의 인장처럼 찍힌 뜨거운 운명선 그 운명을 따라 나는 끝없이 헤매어도 좋으리 선원들이 높이든 출항의 술잔은 내일의 바다를 찾아가는 신성한 의식이니 오늘이 떠나면 이 부둣가로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접시에 이등항해사가 부어주는 바다를 받아 마신다 독하다, 목젖이 탄다 이등항해사의 부평 같은 바다를 알기엔 나의 바다는 아직 젊다 포세이돈이여, 이것을 축복이라 말해다오 오대양 육대주는 나의 새로운 정처 새벽 별자리는 나의 시계 어디에서든 내가 나를 만나는 숙명의 시간은 있을 것이다 유빙을 헤쳐 가는 쇄빙의 항해가 있다면 그 어딘가 감춰 놓은 보물섬도 있을 것이다 가끔 태풍을 선물처럼 보급 받으며 기한 없는 항해일지를 쓸 것이다 뱃고동으로 미지의 아침을 깨우리라 바다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바다를 만지면 바다는 제 속살을 다 보여 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떠난다 수평선에 내일이 붉게 떠오르고 있다 뒤 돌아 보지 않아도 내가 떠나온 그리운 항구는 별로 지고 있을 것이다.
블루피터Blue Peter*를올리며 스물다섯 살의 바다●5
블루피터가 올라간다 출항이다 모자를 고쳐 쓰고 바로 선다 뱃고동이 내 몸을 울리며 길게 퍼져나간다 나는 이 제국의 푸른 노동자 신성한 의무는 바다를 그물째 건져 올리는 일 그 바다를 당신의 밥상 위에 푸짐하게 차리는 일 눈물 짓는 어머니란 이름의 여자여 행여 내가 돌아오지 않아도 잊지 마시라 블루피터 휘날리며 떠나간 하늘에 내가 남긴 노래를 당신께 드린 노스탤지어의 푸른 손수건 한 장을*.
* 블루피터Blue Peter: 출항을 알리는 기 * 유치환 시인의 시‘깃발’에서 변용.
항해의뒤편 스물다섯 살의 바다●6
계류삭繫留索*을 감아올릴 때 두 팔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두 손으로 잡아도 다잡지 못하는 질긴 인연의 외줄 끝에 무거운 네가 있어 가끔은 계류삭 따라 너의 안부가 매달러 올 줄 알았지만 언제나 경계의 날선 바다가 따라오고 있었다 등대도 사람을 향해 마주보고 있는데 용서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작별이란 말 끝내 하지 않았다 12해리 영해를 지나고 배타적 경제 수역을 지나면서 내 마음 속 배타적 바다를 쏟아 버린다 돌아오면 너의 바다에 내 그물을 던지리라 그것이 국제법 위반이라면 발포해도 좋다 산산조각이 나도 좋다
* 계류삭: 선박 따위를 일정한 곳에 붙들어 매는 데 쓰는 밧줄
SONG-DA* 스물다섯 살의 바다●7
독도 아랫목을 항해하고 있다 북위 36도 10분, 동경 131도 12분을 지날 때 태풍이 따라온다 가시적 해무가 굳어진다 손을 내밀어 만져보면 냉동 창고의 서릿발 같다 일순간 파도가 입을 닫고 고요해진다 바다도 두려운 지 깜빡이는 항해등만 바라보고 있다 정적은 뱃사람에겐 사치이지만 밤바다의 침묵을 이해하기로 한다 통신장이 가져온 기상예보에서 만나는 태풍의 이름은 SONG-DA 바다의 또 다른 얼굴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 선장의 첫 명령이 미드워치*로 전달된다 엉터리 삼등항해사에게 바다가 가르치는 항해술 특강이 시작된다 지금 바다의 푸른 등뼈를 타고 송다란 긴 뱀이 기어온다 휫—휫— 휘파람을 불며 온다
* 송다: 2011년 제2호 태풍, 베트남에서 지어졌으며 강의 이름을 뜻한다. * 미드워치: 자정부터 새벽4시까지 야간 당직.
바다폐선장 스물다섯 살의 바다●8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자 바다는 거대한 폐선장이었다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일본 동북부 지방을 강타했던 쓰나미는 현재진행형이었다 하늘은 맑고 시정거리는 5마일 눈이 시리도록 평온한 물빛이지만 쓰나미의 잔해는 유령선처럼 해류를 타고 떠돌고 있었다 저 고장 난 고철덩어리 속에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실종된 주검이 있을 것이다 소리 없는 통곡이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그물을 손질하는 상갑판에서 무릎 꿇고 코란을 꺼내 읽는다 침묵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라 처용의 얼굴을 보았다 용서를 비는 역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본열도가 휘어지고 있는지 쓰나미 주의보는 계속 타전 됐다.
나는보았다 스물다섯 살의 바다●9
배는 바다를 항진할 때 제 이름을 갖는다 그걸 거대한 쇳덩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한 척의 배가 바다를 건너갈 때 그건 한 마리 살아있는 물고기다 하나의 목적지를 가진 것이 그어놓은 항로선은 우정 같은 것 북양에서 사나흘 전쯤 지나간 배가 차가운 바다에 남긴 흔적을 볼 때 나는 따뜻함을 느낀다 세상 모든 것은 바다로 흘러온다 바다에서는 가장 빛나는 것만이 떠간다 파블로 네루다의‘스무 개 사랑의 시’는 모두 바다로 흘러오지만 바다를 헤쳐갈 수 있는 것은 ‘한 편의 절망 노래’뿐이다 바다가 거칠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도 거칠다 지구가 둥글 듯이 바다도 둥글다 그 바다에서 나는 보았다 순명하는 것들이 바다에 와서 알처럼 둥근 생명을 품는데 오직 욕심 많은 사람의 손만이 바다를 움켜쥐려 한다는 것을.
황천바다 스물다섯 살의 바다●10
TV에서 보던 태풍은 한낱 드라마 세트장에 불과했다 바다 한복판에서 만나는 태풍은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카메라로 모두 기록할 수 없는 황천荒天* 파산선고 받은 듯 방향 잃은 나침반이 춤을 춘다 수신하지 못하는 레이더는 이미 불능 선회창*밖 바다가 엿가락처럼 바스라진다 백파白波에 수천수만 장의 참회록을 써도 황천은 우리를 풀어주질 않는다 나는 몇 번이나 오줌 지렸는지 모른다 일등항해사는 심각한 얼굴로 구조용 조명탄을 준비한다 만약 조명탄이 터진다면 그것은 러시아 룰렛 같은 것 한 알의 총알이 바다의 머리에 박힐 때 피가 빠져나가는 바다의 체온은 대책 없이 낮아 질 것이다 혼이 빠져 나간 사람의 육신도 썩은 생선처럼 허물어질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성호를 긋는다 황천바다에서 돌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북양 빙하처럼 떠돌 것이다 뒤죽박죽된 감정선에 수평선이 활시위처럼 튕기듯 솟구친다 라이프 재킷 입고 망치를 든다 부러진 마스트를 곧추세운다 죽음 앞에서 이미 배도 사람과 한 몸 입을 열면 모두 터져 나올 것 같은 밸러스트 수水를 스스로 삼키며 오뚝이처럼 수평을 잡는다 수평이란 바다와 한 몸이 되는 것 오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는 것 때로는 태풍의 진로도 경전처럼 읽어야 하는 밤이 있다.
* 황천: 거친 날씨에 바다가 사나워져 있는 상태. * 선회창: 원판 유리를 고속으로 회전시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창
바다신기루 스물다섯 살의 바다●11
바다에도 신기루가 있다 하늘을 뒤덮던 별이란 별은 불을 끄고 잠들었는데, 반짝 수평선에 별 하나가 빛난다 하지만 레이더는 묵묵부답 깜짝 놀라 몇 번이나 확인해도 별이 빛나며 서서히 흘러간다 육지다, 육지일지 모른다 삼등항해사는 허둥대는데 조타륜을 잡으며 선장이 웃는다 신기루라고, 바다에서 절망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신기루라고 바다에서는 황천변주곡의 마지막 악장이 끝나고 있는데 내가 보는 신기루는 무엇인가 바다든 사막이든 죽음의 바닥을 지나는 사람들이 희망처럼 보는 신기루 반짝, 반짝하며 유혹하는 바다의 신기루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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