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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융(풍류명리인,화가,시인) < 필자가 그린 천하명당 연화묘운지터>
책 갈피 속에는 지식이 들어있고 자연의 갈피 속에는 지혜가 들어 있다는 말처럼 넓은 자연의 세상 속으로 길 떠난다는 것은 '열려진 학교로 등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솔거가 그린 솔을 찾아 떠나는 길>이라는 주제를 갖고 전국의 솔나무를 찾아 2년간 기행 하면서 고귀한 마음들을 내어주시고 도움주신 분들의 참 뜻을 거두어 삶의 스승과 귀한 마음들을 많이 만나고 공부하고 돌아왔다.
특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천년기념물 소나무 40여그루를 만나고 길에서 만난 또 다른 나와, 뭇 이웃들과 글마음을 만저보며 나누던 이야기도 너무나 소중한 삶의 경험들이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 몇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당시의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터에 관한 내용들과 명당그림이 회자되는 것 같아서 그와 인연된 이야기 한 자락 내려놓을까 한다.
전국 산하를 다니면서 제일 많이 눈에 띠는 것은 역시 산과 강을 배경으로터를 잡고 있는 산 사람들의 집과 산자락을 곳곳에 점령해 있는 사자들의 집터인 묘지들이다. 산 사람이 사는 양택(陽宅)과 죽은 사람이 있는 음택(陰宅)을 불문하고 이들 거의가 풍수에서 가장 기본원리인 배산임수(背山臨水) 배치에 준해 어우러져 있다. 이렇듯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유난히도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목숨을 걸만큼 관심을 많이 보인다. 한 때 터라는 책이 출간되어 수 십 만부가 팔릴 정도로 터에 관심을 보이더니 근래에는 많은 대학이나 사회교육원에서 풍수학이 강의되고 예상외로 수강생들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필자 또한 역학과 명리학을 공부하다보니 풍수뿐만 아니라 명당과 터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지라, 길 다니다가 배산임수의 배경에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의 기본형국을 갖고 있는 묘지를 보면 빼놓지 않고 달려가서 좌향과 산세의 지맥을 관찰하고, 제법 기세를 갖추고 있는 묘터는 주인과 후세 자손들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여 여러 번 확인을 해본 경우도 있다.
필자가 기행을 막바지로 경북 북부동해안을 돌고 있을 때의 일이다.
백두대간과 동해바다 사이에 일곱 가지의 보물이 묻혀있다 하여 귀한 이름이 지어진 00산을 답사해 볼 요량으로 산마을 지나는데 ‘해뜨는너와촌’이라는 카페간판이 길섶에 비스듬히 서서 길손의 발길을 잡았다. 늦가을 날씨가 제법 쌀쌀하고 배도 출출한 터라 요기도 할 겸 카페을 찾아 들어갔다.
소박한 카페에는 어른들 몇 명이서 낮술이 거나하게 취해 술담이 오가는 풍경이었고, 테이블이 몇에 좁은 공간이라 등을 기대고 앉아 술담의 내용을 귀동냥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용인 즉 터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이었다.
필자도 내노라는 명당터를 다 찾아다녔지만 한강 이남에 하나 남은 명당이라는데 호기심이 발동했다. 술자리가 파할 때를 기다려 당장 곳을 물어서 가볼 생각으로 계속 노인들의 술담을 귀동냥하고 있었다.
<준경묘>
삼척에 음택명당인 묘터라면 소위 천하제일의 명당자리로 알려진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濬慶墓)로 이성계의 5대조부묘를 말할 것이다. 필자도 몇 번 둘러본 터이지만 준경묘엔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목조 이안사는 고려시대 전주에 살다 모함을 피해 아버지를 모시고 삼척으로 이사해 1년간 살았고 그때 세상을 뜬 아버지를 삼척의 명당에 장사 지내고 함경도로 떠났다고 알려진다. 그 명당이라고 하는 자리는 목조가 부친의 묘 자리를 찾던 중, 지금의 산소자리에 쉬다가 문득 잠이 들어 꿈결에
상자승이 "허허, 대지로다. 이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왕이 나겠구나!" 앞에 가던 도승이 "네 이놈, 어디 함부로 떠드느냐?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 다고 했거늘, 어디 함부로 입 밖에 내느냐?" 하고 꾸짖자,
목조가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나 도승에게 달려가
"대사님, 방금 지나가시면서 하신 말씀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하고 애원하자, 도승이 “이곳에 묘를 쓰자면 개토제에 소 백마리를 잡아 써야하고, 관은 금관으로 해야 하며, 술은 백 동이를 준비하여 장사를 지내야 하오."라는 말을 듣고 의심쩍어 하자
"내가 간 뒤에라도 믿어지지 않거든 오늘밤에 이 자리에 계란 하나를 묻고 멀리서 지켜보면 알 것이오. 그리 해 보시오."하고 도승들은 수십 보를 걷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이날 밤 목조는 이곳에 계란을 묻고 멀리서 지켜보니, 자정이 넘어 과연 수탉이 홰를 치며 산골을 흔들어 놓았다 한다.
목조는 가난하여 소 백 마리와 금관을 구할 길이 없어 여러 날 궁리한 끝에 때마침 처가에서 흰소[白牛]가 있어 그를 잡아 백(百) 마리 대신하고, 누런 (黃色)귀리 짚으로 관을 엮어 금관(金棺) 대용으로 하고, 술 백 동이를 준비하여 180호 근속자들과 장례식을 성대히 치렀다. 그로부터 162년후 조선창건 이성계가 5대 손이 되는 것이다.
후설의 이야기이지만 百牛를 白牛로 대신하였기에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는 설과,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1백년씩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준경묘(濬慶墓)는 활기리에서 앞재를 넘으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향(辛坐乙向)의 장군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 뒤로는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 싸여 있다.
<남연군묘>
또 하나는 조선 후기의 최고의 명당이라는 남연군(南延君)묘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다. 터의 형세는 가야산 석문봉이 주산(主山)으로 사방 5·60리까지 펼쳐지는 용(龍)과 혈(穴)과 사(砂) 형(形)의 배산(背山)에 임수(臨水)의 지세와 전순(氈脣)에 요석(耀石)까지 얻었으니 과히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속설에 따르면 충청도 내포지방에는 명당 중에서도 최상의 땅인 자미단국이 있다 하여 이를 찾기 위해 순례하는 풍수사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미단국이란 산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마치 큰 집의 울타리와 같이 생긴 형국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이러한 땅은 흔히 도읍지나 왕도처로 적합한 곳인데 내포 땅에 맺힌 단국은 음택지로서 왕후재상이 나올 터라는 것이었다.
근자에도 자미원에 30억 군왕지기터가 있다하여 모기업 회장이 국토개발의 목적으로 이 일대를 몽땅 사서 명당을 찾아보려 했으나 귀(貴)한 것은 천하명당은 절대 주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하듯 묘하게도 그 주인공은 고인이 되어 북한 고향땅에 묻혀있다.
당시 흥성대원군도 수 차례에 걸쳐 내포 땅을 답사하였으며 끝내 자미단국을 찾지는 못하였지만 정만인이라는 유명한 지관을 만나 그가 제시한 충청도 덕산 땅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와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으니 둘 중에 한 곳에 선친의 묘를 선택하라고 했는데, 당연히 흥선군은 후자를 선택했고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 주정뱅이로 세월을 보냈던 이하응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었으니 혈기방자한 흥선군의 야심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흥선대원군은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지금의 묘가 있는 자리에 있었던 가야사까지 불태우고 이장했고, 7년후 1852년(철종 3)에 둘째 아들 재황(아명 명복)을 얻었고, 11년 뒤인 1863년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 21대 고종으로 왕에 올랐다. 고종의 아들이 순종이 되어 비록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운의 황제 였지만 망정 2대째 천자를 본 것이 틀림이었다. 명당터는 어디든 많은 전설과 비화가 있기 마련인데 이 묘터에도 국제적 사연이 있을 만큼 비화가 많지만 생략한다.
마침 필자는 촌노들의 술자리가 파했기에 터의 이야기를 주도했던 어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청해 듣고 지금 당장 그 곳에 함께 동행 해 주길 부탁했고 흔쾌히 응해 주어서 우리는 내 봉고차를 타고 산길은 올랐다.
그런데 산 중턱 쯤에 다다르자 갑자기 차창 밖이 안보일 정도로 어두워지더니 천둥과 비바람이 기세를 부리는데 더이상 차를 몰수가 없었다. 동행한 어른이 내심 무서운지 오늘은 내려가고 내일 날씨가 좋으면 다시 안내하겠다고 했다. 필자의 생각에도 날씨가 심상찮은 것이 터의 기운이 보통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필자가 여기저기 많은 터와 4~5백년 된 소나무들을 만나러 갈 때 느껴보는 일이지만 가끔 이상한 기운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터라 지금의 현상도 심상치 안는 터임에는 분명하다는 짐작을 했다. 천하의 보궁 이라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길손에게 속내를 보여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빗줄기가 약해지길 기다려 차를 돌려 마을로 내려 왔는데 마을에는 비가 온 흔적조차 없었다.
필자가 기행을 하면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숙식을 내 차안에서 거의 해결했다. 차가 봉고차를 개조해서 모든 살림살이를 실고 다니는 움직이는 집이었다. 그날도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하룻밤을 지세우면서 풍수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 봤다. 물론 풍수는 풍부한 경험과 현장성에 능통해야 함을 알지만 그러한 현장성이 나오기 까지는 폭넓은 이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풍수의 원리이론에 대해 얕은 필자의 한 부분의 식견임을 밝힌다. 또한 단어들의 의미를 역학(易學) 원리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론을 들추다 보니 한문의 뜻이 많이 들어있는데 먼저 양해를 구한다.
풍수(風水)는 기운(氣運)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기(氣)와 운(運)이란 무엇이냐? 기와 운의 학설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풍류(風流)라고 말하고 싶다.
풍류는 ‘우주정신(宇宙精神)을 바름하여 참살이 하는 것’이며 이것을 나눔하는 것이 풍류도(風流徒)이다. 풍류의 구체적인 내용은 필자의 자료에 참고하여 각설하고 풍수와 연관된 내용만 간략하게 정리하여 본다.
우주정신이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상생상극(相生相極)의 무목적(無目的)적 현상이다.
우주는 이러한 작용 속에서 모든 천지만물(天地萬物)은 생장소멸(生長消滅)로 회귀(回歸)하는 현상이 있는데 이것이 원시반본(原始反本)의 자연현상(自然現象)이다.
즉 모든 자연은 원래 우주정신(宇宙精神)으로 회귀하는 것이 목적이듯 우주변화원리(宇宙變化原理)인 오운육기(五運六氣)의 현상 속에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가 대화생극(對化生剋)하며 일어나는 순환작용(循環作用) 즉 생명운동(生命運動)으로 이것을 풍류(風流)라 한다.
이러한 풍류의 현상 속에 일어나는 것을 기운(氣運)이라 하고 이 기운을 운용(運用)하고 활용(活用)하는 것이 풍수(風水)라 할 수 있겠다.
운용의 현상을 보면 지형(地形)인 공간성(空間性)과 지세(地勢)의 시간성(時間性)을 구분하여 활용할 수 있는데, 역리(易理) 현상으로 보면 공간성은 하도(河圖)의 원리이며 오운(五運)과 기후(氣候)의 외상(外像)이고, 시간성은 낙서(洛書)의 원리로 육기(六氣)와 사상(四象)으로 내정(內情)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변화하는 것인데 운행(運行)의 절도(節度)와 변태(變態)인 차서(次序)에 의하여 운용하는 것이다. 즉 모든 만물은 양의(兩儀) 사상(四象) 팔괘(八卦)의 현상을 통해 생성소멸하는 것이라 그러한 원리를 두고 풍수의 이론이 근거(根據)하는 것이며, 그러한 이치(理致)를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야만 확실한 혜안(慧眼)이 열려 바른 터를 경계(境界)할 수 있는 것이라 본다.
다시 말해서 풍수원리의 핵심도 원시반본(原始反本)인 완전한 자리인 공(空)의 자리 즉 우주정신(宇宙精神)에 정위(正位)하게 하는 것에 있다. 즉 정신적 공간성으로 볼 때 종교적인 신(神)의 성품(性品)이며 진아(眞我) 이고 불성(佛性)이라 하며, 인간이 살아서 정신적 노력으로 갈 수 있는 자리이고, 또한 죽어서나마 방편(方便)으로 갈 수 있게 후인들이 마련해 주는 것이 피라미드, 능, 성전, 미라, 혹은 명당 터 등에 안치(安置)함으로서 우주정신으로 회귀하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완전한 자리에 좌위(座位)하면 시간성의 물리적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주도하는 것이 곤(坤)인 토(土)로 오행의 중심에서 사행인 목화금수(木火金水)의 중앙에 토가 자리하고, 4방위(方位)의 형세(形勢)와 중앙토의 정세(精勢)가 상호 대화작용(對化作用)을 통해 토화작용(土化作用)을 일으켜서 모든 물질(物質)을 오행성(五行性)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술토(戌土)가 정신(精神)의 완성자리 즉 우주정신인 공(空)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죽은 육신이라도 풍수의 요건이 잘 갖춘 명당에 놓여 지면 완전히 토화작용을 마칠 때 까지는 육신에 저장된 습(習)이 대화작용을 통해 열반에 들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유식론(唯識論)자들이 말하는 8식(識) 중에 윤회(輪回)의 주체인 아뢰야식은 육신인 물질에 의해서 생성된 의식이 저장되어 있던 것으로 완전히 탈각(脫却)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무의식이 습습(習),업(業)이라 하여 다시 윤회(輪回)를 하게 되는 현상인데, 이 아뢰야식이 오행의 정신인 술토(戌土) 자리에 물질인 유골과 함께 있게 되면 오행의 대화작용으로 자화작용(감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어머니(坤土)의 보궁(穴)에서 태어나서 다시 흙(坤土)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며 물질(物質)인 유골(遺骨)이 완전한 토화작용을 하기까지는 주위환경과 어떤 대화작용(對化作用)을 하느냐에 따라 유골 속에 잠재한 유전자(遺傳子)의 기운이 좋게 나쁘게 작용한다. 이러한 작용이 유사 유전자를 갖는 혈족에게 동기감응(同氣感應)을 일으키며 그 영향을 자손들이 받게 된다고 유전학자들이 밝힌 바도 있다. 실례로 시신이 물에 잠겨있는 묘는 자손 중에 신경통이나 관절염을 호소하고, 큰 바위로 시신이 눌려 있으면 그 부분에 신체적 이상이 오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또한 명리학(命理學)의 육친(六親)으로도 작용성을 응용해 볼 수 있는데 좌청룡(左靑龍)은 목(木)이요 목은 문관이고 직업이니 어떤 관직의 기운이 많겠다는 것을 아는 것이요 ,우백호(右白虎)는 금(金)이요 금은 무관이고 자식이고 식솔이고 신하의 뜻을 갖추고 , 북현무(北玄武)는 수(水)요 조상들의 대업을 이야기하며 후세에 어떤 후광으로 남을 것인가를 가름하는 것이며 ,남주작(南朱雀)은 화(火)이며 이는 나를 도와주는 우군과 적군이 얼마나 되는가를 가름해 보는 원리이다.
특히 모체(母體)인 땅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보니 목(木),화(火),금(金),수(水)의 기세(氣勢)인 기본 배산임수와 용혈 등의 양명(陽明)기운이 생하여 물질(物質)인 유골(遺骨)이 땅 속에서 지수화풍으로 잘 돌아가 망인은 물론 그에 영향을 받는 후손들에게 까지 좋은 영향을 오래 오래 받을 수 있는 곳을 길지(吉地)이라 하고 명당이라 한다. 반대인 것은 폐지(廢地)라 한다.
부족한 필자의 식견을 여기서 절언하고...
필자가 잠깐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이상한 꿈에 일어났는데 너무나 생생하여 오늘 가는 곳이 보통 땅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처님이 큰 산을 걸터앉았는데 필자는 부처님무릎 위에 서서있고 여러 사람들이 가마득하게 아래인 발등과 발가락 위에서 나를 처다 보며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부처님발이 바닷가에 놓여 있는데 발가락들이 붕긋한 큰 바위산들처럼 컸다. 00산 이름처럼 불국토의 산이라는 뜻이고 거기에 혈(穴)자리 라면 술(戌)터라는 뜻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운육기(五運六氣)의 작용에서 보면 육기의 자화운동(自化運動)으로 진술토(辰戌土)가 정신의 완성자리이며 공(空)의 자리로 부처의 깨달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갈려는 터는 분명 해인의 지혜를 갖춘 성인이 발복할 수 있는 대 명당임이 아닐까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서둘러 약속한 노인과 함께 산길을 올랐다.
날씨가 다행히 화창한 가을 날씨라 주변 풍광이 좋았다. 그리 높고 큰 산은 아니지만 위용은 큰 산의 품새를 갖추고 특별한 지세를 하고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다보이는 산세의 형국이 어제 밤에 꿈에 본 그림과 거의 흡사함을 느꼈다. 다음날 혼자서 다시 터를 찾아 주위 산을 밟아 보았다. 아직 풍수의 식견이 미흡한 터라 한눈에 터의 형세를 판단하고 감응을 받기는 쉽지 않았지만 과히 사환수포(砂環水抱)의 조건을 갖춘 길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백두대간을 휘어 내려오던 기맥을 태조로 하고 잠시 기운을 모우는 00산을 주산으로 등운봉을 모산(母山)으로 용혈이 내려오는 오봉혈로 박환유정(剝煥有情)이라 오행의 순행을 따르고 있으니 용혈(龍穴)이 내려 맺혀 정좌한 혈처(穴處)인 술궁(戌宮)은 흡사 용상에 앉은 형세인데 내명당에는 여느 터와는 다른 요석들이 정연하게 박혀 정승 판서들이 5품 순서로 계단을 형성하고 있고, 혈장(穴場)에서 바라다본 조안(朝案)은 멀리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다뵈고 밀려오는 파도와 안산들이 만조백관(萬朝百官)이 제왕을 향해 조아리고 있는 형상(形象)으로 과히 빼어난 형세였고 수포(水抱) 또한 동해에 뿌리를 한 곡수의 반룡이 영동지에서 쉬었다가는 다시 힘차게 승천하는듯하여 대회명당(大會明堂)임에 손색이 없었다.
하루 종일 터의 기운을 느끼면서 형세를 스켓치도 하고 일기의 변화와 지기의 기운을 감응하다보니 동해 바다위에 연화가 피어올라 그 꽃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꽃 봉우리가 시간의 변화에 따라 피고 지는 변화의 형상은 만개한 연꽃 속에 감춰둔 운지인 연화묘운지지(蓮花妙雲之地)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지명(地名)은 필자가 붙인 것임을 밝힌다.
운지(雲地)는 주역에 (☳☷)뇌지예(雷地豫)로 ‘도리에 순응하여 나라에 공 있는 자 제후로 봉하고 역자는 정벌하도다. 생명력이 충만한 봄날 처음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우뢰 소리와 비를 동반하니 만물이 성장하여 희망이 샘솟고 기쁨이 넘쳐 만민과 함께 제왕이 기뻐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인연된 연화묘운지지의 방문이 잦았고 이 터의 인연은 어떤 이들과의 인연되어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언제부터 개간을 하고 농사를 지었으며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은 이 땅이 예사치 않는 터임을 알고 있었을까?
필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소유주를 찾았고 이 땅을 구입하게 된 경위를 듣고 그 사연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고향이 인근인 소유주는 몇 해 전에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들어왔는데 워낙 산을 좋아 하는 터라 00산을 자주 산행을 했는데 하루는 영리(옛지명은 법흥, 혹은 버멍)이라는 마을에 필자가 갔던 ‘해뜨는너와촌’ 카페에서 한 노스님을 만났는데 워낙 노쇠한데다 병색이 짖어보였지만 눈빛이 워낙 맑고 강해서 보통분이 아니라 생각하고 노스님을 집으로 모시고 와서 몇 일간 몸을 보살펴 드리고 간호를 해 드렸더니 건강이 금방 회복되었다고 한다.
근 한 달간을 집에 머물었는데 어느 날 갈 길을 떠난다며 그동안 고마움에 보답을 해야 하겠는데 특별히 가진 것이 없어 사례를 할 수는 없고, 혹 00산에 땅이 있는데 그걸 사 놓으시면 후에 덕이 좀 될 거라고만 하고 홀연히 떠나가셨다는 이야기였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그 노스님은 00산에서 10여년간 공부를 하던 스님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땅을 수소문 끝에 찾았는데 누가 절을 지으려고 벌써 팔렸다고 해서 인연이 아닌 모양이다 하고 포기하고 잊었는데 마침 그 사람이 사연이 생겨 그 터를 지금의 소유주가 구입하게 되었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국내 최고의 S기업 에서 식물원을 개발한다며 영리 마을 인근의 임야를 많이 사들였고 개발지와는 많이 떨어져 있지만 같은 산자락이라며 본인의 땅까지 도 팔라고 했다. 그것도 만만찮은 금액을 재시하기에 선 뜻 계약을 했으나, 아무래도 미심쩍어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이 땅이 보통 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약을 취소하려고 했으나 대기업과의 관계라 법적인 소송 등 적잖은 곤욕을 3년간 치렀고 했다. 개발을 한다던 기업도 속샘이 다른데 있었던 것이라 결국 개발은 취소하고 현제까지 방관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유주도 이 땅으로 인해 반풍수가 다되었다며 진짜의 주인이 나타나면 기꺼이 넘겨주겠다며 국내에 내 노라는 지관들을 모시고 확실한 터의 명암을 확인했다고 한다.
필자는 터의 인연으로 소유주와도 관계를 가지면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명당에 소식과 안부를 묻곤 한다. 필자의 혜안이 부족하여 터의 명암을 확실히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림으로 그려 봐야겠다 생각하고 소유주와도 상의를 했는데 흔쾌히 동의해서 지금의 명당그림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근자에 와서 이 터에 많은 분들과 지관들이 관심을 갖고 분주히 마음을 낸다고 들어서 필자와 특별히 인연된 터이기에 지난 인연의 시간을 기억하며 지면을 통해 명당그림인 연화묘운지지(蓮花妙雲之地)의 모습을 선보이고자 했다.
이 명당그림을 소장하는 분은 물론이고 그림만 감상해도 터의 기운 못지않게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귀한 지면을 할애해준 00사에 큰 행운과 좋은 기운 받으시리라 기원하며
끝으로 이 터에 관한 전문가님의 소견을 들으며 글을 맺을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