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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 (10)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10일] 4월 13일(수) 청풍문화단지→ 단양향교 (선편13km-9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13일 퇴계선생]
◎ 청풍군수 이지번(李之藩)의 환대를 받은 퇴계 선생은 청풍관아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인 음력 3월 13일 말을 타고 남한강을 따라 단양으로 향했다. 단양 가는 길에 구담(龜潭)을 지나가면서 시를 지어 이지번에게 주었다. 〈過龜潭戱贈李而盛〉(과구담희증이이성, 구담을 지나며, 이이성에게 주다) 시 제목의 ‘而盛’(이성)은 이지번의 자(字)이다. — 《退溪集(퇴계집)》
依舊龜潭遶隱城 의구구담요은성 구담은 옛전처럼 은성을 둘러쌌는데
山人今與我同行 산인금여아동행 산인은 지금 나와 동행 하는구나.
杖藜慾共尋遊迹 장려욕공심유적 지팡이 짚고 함께 유람하던 곳 찾으려는데
其奈山前雨忽冥 기내산전우홀명 어이할거나 갑자기 비 내려 산 앞이 어두워지네.
◎ 그런데 이지번은 가까운 곳에 경치가 좋은 폭포가 있으니 보고 가라고 선생을 이끈다. 그러나 임금이 잡는데도 뿌리치고 서둘러 내려온 선생이다. 고향 갈 길이 멀어 마음이 바쁘다는 심정을 시에 담았다 - 《退溪集》〈而盛談瀑布勝致〉(이성이 폭포가 아름답다고 말하다)
玉澗源頭掛玉流 옥간원두괘옥류 옥 같이 맑은 시내 위에 옥류가 걸렸나니
拔荒君始發天幽 발황군시발천유 잡초를 해치고 그대가 처음 천유를 찾아냈네.
乞身歸路還多礙 걸신귀로환대애 사직하고 돌아가는 길에도 장애가 많아
不向雲間作勝遊 불향운간작승유 구름 사이 들어가 실컷 놀지 못하네.
—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는 처지여서 친한 벗과 함께 한가하게 유람할 수가 없다는 아쉬움이 담겨 있다. 구담을 지나가니 바로 단양이다. 단양은 퇴계가 48세 되던 1548년 10개월간 군수로 재직하던 곳이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 마지막 귀향 당시 선생은 이곳에서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다음날 아침 단양을 출발하여 죽령을 넘기에 앞서 ‘장림역’(지금의 단양군 대강면)에서 기대승, 김취려, 손자 이안도에게 안부편지를 보냈음을 《退溪集(퇴계집)》을 통하여 알 수 있다.
◎ 단양은 선생이 48세(1548년) 때 군수로 약 10개월을 머물렀던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지은 시문이 제법 많은데, 그중에서 백성을 위한 행정을 펼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는 시가 있다. 《퇴계집》〈買浦倉賑給 暮歸馬上〉(매창포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저물녘 돌아오는 말 위에서 짓다)이다.
一麾出守愧疎慵 일휘출수괴소용 수령으로 나왔는데 게으름이 부끄럽고
民困當春意自忡 민곤당춘의자충 궁한 백성 봄이 오니 나의 근심 불어나네
去傍紫崖殘雪外 거방자애잔설외 붉은 벼랑 남은 눈[雪]을 두루 밟고 달렸다가
歸吟斜景亂山中 귀음사경난산중 바뀐 해 어지러운 뫼 돌아보며 시 읊는데
陽噓草茁人還羨 양허초출인환선 봄바람에 풀 자라는 걸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天放鷗閑我未同 천방구한아미동 자유로운 해오라기는 나와 함께 놀지 않네.
十室不堪星在罶 십실불감성재류 열 집 작은 고을에 흉년마저 들었으니
絃歌那得變謠風 현가나득변요풍 예악(禮樂)인들 그 풍속 바꿀 수 있을 건가
◎ 선생이 단양을 떠나고 9년 뒤인 1557년 선생의 애제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해 5월 고을의 실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해결책을 제시한 〈단양진폐소〉를 조정에 올렸다. 5,000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상소에,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내용을 담았다. 명종은 그에 감동하여 10년 동안 단양에 세금을 면제해 주는 특별한 조치를 내렸다. 이후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던 백성들이 돌아와 농사에 힘쓰면서 고을이 차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당시는 임금의 외척 윤원형이 전횡을 일삼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애민정신이 투철한 목민관 황준량의 의지가 이를 극복하였던 것이다. 지금 단성면 ‘수몰이주기념관’ 마당에 있는 ‘황준량선정비’는 그러한 사적을 담은 기념비로서 그냥 관행적으로 세운 여타 선정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 [2022년 4월 13일 수요일 귀향길 재현단]
▶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우리 귀향길 재현단은 충주호 수몰지역인 청풍에서 단양의 장회나루에 이르는 13km의 물길을 유람선을 타고 이동하고, 장회나루에서 옛날 단양관아가 있었던 단성면 구간의 9km는 국도를 따라 걷는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 우측으로 단양팔경으로 꼽히는 명승 ‘옥순봉’과 ‘구담봉’을 지나가게 된다. 1569년 이날 마지막 귀향길의 퇴계 선생은 이곳까지 청풍군수 이지번과 함께 왔을 것이다. 지금 단성면에 있었던 단양 관아(丹陽官衙)는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었고, 선생 당시의 유적으로 단성면 소재지에 있는 단양향교(丹陽鄕校)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재현단은 단양향교 근처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단양에는 퇴계선생의 유적이라고 전하는 암각서(岩刻書)가 단성면 소재 ‘수몰이주민기념관’ 마당에 있다. ‘濯吾臺’(탁오대)와 ‘復道別業’(복도별업)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진 바위인데, 이 역시 수몰 때문에 옮겨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선생의 문인으로서 단양군수를 지냈던 금계 황준량의 선정비가 함께 서 있다. ‘수몰이주민기념관’은 단양향교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다.
▶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산록에 위치한 ‘청풍유스텔’에서 아침을 맞았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성긴 빗방울이지만 그치지 않고 내렸다. 아침 8시, ‘청풍유스텔’ 현관 앞, 우의(雨衣)를 차려 입은 일행은 출행에 앞서 퇴계 선생의〈도산십이곡〉제9곡을 다함께 불렀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뵈
고인(古人)을 못 뵈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할까.
고인(古人)은 퇴계를 포함한 유학자들이 따르고자 했던 성현(聖賢)이다. 그 성현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 성현들이 이루어놓은 학문과 참다운 인생의 도리[‘녀던 길’]는 내 앞에 있다. 참다운 학문의 도(道)가 앞에 있는데 어찌 정성을 다하여 공부하지 않겠는가. 성현을 따라 학문과 인격 수양에 힘쓰겠다는 다짐을 노래한 것이다.
‘고인’은 대표적으로 공자이다. 그리고 실제 퇴계선생에게 가장 큰 스승이자 동지는 주자(朱子)였다. 47세 무렵 퇴계는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접하고 뜨거운 감격을 맛보았다. 선생은 《주자전서》일자 일구도 빠뜨리지 않고 육화(肉化)하고자 했다. 주자의 철학뿐만 아니라, 그가 만난 사람과 사건들, 그가 느낀 감회, 의견을 올린 상소에 이르기까지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퇴계에게 있어 주자는 그야말로 ‘님’이었다.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에서 퇴계는 “주자는 나의 스승이고, 또한 천하고금의 스승이다.”고 밝힌 바 있다. 선생은 주자와 만나고 싶어서 벼슬길을 그만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풍호 유람선, 차가운 빗속에서 …
▶ 청풍나루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의를 갖추어 입은 재현단은 청풍나루에서 유람선에 올랐다. 오늘은 기존의 재현단에다 안동의 ‘국학진흥원’에서 원장과 부원장을 비롯하여 임직원 50여 명이 단체로 버스를 타고 올라와 우정 참가하였다. 그렇게 오늘 많은 재현단이 배 안을 가득 채웠다. 전체 인원이 대충 70명 이상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청풍(淸風)’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오늘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고 날씨는 음산했다. 차가운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유람선은 느리지만 청풍호의 물결을 가르며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풍나루를 출발한 유람선은 금방 82번 국도가 지나는 청풍대교를 지났다. 날씨가 추우므로 모두 1층의 객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실은 우리 재현단으로 가득 찼다. 김병일 원장이, 퇴계 선생이 청풍군수 이지번과 함께 수몰된 이 강변의 길을 따라 말을 타고 가셨을 모습을 상기하며 앞에 소개한 이지번의 아름다운 폭포에 대한 안내와 이에 대해 선생의 심경을 담은 시를 말씀하기도 했다. …
▶ 날씨 춥고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필자는 우의(雨衣)를 입고 선상의 갑판으로 올라갔다. 하늘에 활짝 열린 유람선의 좌석이 즐비하게 설치되었지만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성긴 빗방울과 함께, 둔중한 기관소리를 내며 달리는 배의 속도에, 체감하는 바람의 결은 더욱 거세게 느껴졌다. 선미에는 눈부신 태극기가 바람결에 펄럭이는데, 마치 청마 유치환의 깃발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몇몇 젊은 남녀들이 갑판에 올라와 사진을 찍고 잠시 노닐다가 내려가고 … 황상희 박사의 예쁜 두 딸, 정옥이와 정아가 갑판 위에 올라와서 포즈를 잡았다. 사진을 찍어주었다.
반전(反戰) 퍼포먼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 그 동안 서울에서부터 배낭을 매고 동행해온 진현천 님이 갑판에 올라왔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두 팔로 펼쳐들고 포즈를 취한다. 청/황색의 우크라이나 국기에는 ‘STOP WAR / SAVE UKRAINE’라고 쓴 구호가 적혀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푸틴의 러시아군이 무자비하게 우크라이나를 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이 멀쩡한 21세기에 한 독재자가 그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근본으로 보면 동족에 가까운 이웃나라를 초토화하고 선량한 인민을 죽이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전쟁은 마땅히 중지되어야 한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반전의 우크라이나 국기(國旗)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셔터를 눌러 주었다. 문득 퇴계선생의 ‘敬’(경)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이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항상 그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항상 그를 공경한다.(愛人者 人恒愛之 敬人者 人恒敬之)’는 맹자의 말씀도 연상이 되었다. 개인이든 국가든 상대방을 배려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청풍명월 금수산(錦繡山)
▶ 배는 청풍호의 구비를 크게 돌아 나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봄 가뭄이 심해서인지 호반의 수위는 아주 많이 내려가 있었다. 아직도 신록이 온전하게 피어나지 않은 호반의 풍경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유람선이 ‘옥순대교’ 아래를 지난다. 옥순대교는 남쪽의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와 북쪽의 수산면 상천리를 잇는 다리이다. 상천리에는 제천의 명산 ‘금수산(錦繡山)’이 있고 그 산줄기가 청풍호 옥순대교 앞에서 ‘가능산’으로 솟아 있다. 금수산은 멀리서 보면 능선이 마치 길게 누워있는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 ‘미녀봉’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원래 이름은 백암산이었다. 그러나 퇴계선생이 단양 군수로 재직할 때 단풍 든 이 산의 모습을 보고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며 감탄, 산 이름이 금수산(錦繡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서쪽으로 뻗은 지릉에 중봉(885.6m), 신선봉(845.3m), 미인봉(596m), 망덕봉(926m) 등 크고 수려한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금수산은 일대는 필자 일찍이 여러 번 등산을 한 바가 있어 더욱 친근감이 들었다.
옥순봉에 얽힌 이야기
▶ 배가 옥순대교를 지나자마자 천인단애의 절경인 ‘옥순봉(玉筍峰)’이 다가온다. 단양팔경 중 제6경인 옥순봉(玉筍峰, 286m)은 깎아지른 아름다운 절벽이 힘차게 솟아 마치 대나무 순[筍]이 쑥쑥 올라온 것 같다고 하여 퇴계선생이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필자는 2008년에 옥순봉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지금은 유람선을 타고 물길을 따라 가지만, 옥순봉 정상에 서면 청풍호 하류까지 긴 흐름을 볼 수 있고, 강 건너 금수산 정상과 가은산 암봉들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멀리 뾰족하게 솟은 월악산 영봉이 시야에 잡힌다.
1548년 퇴계선생이 담양군수로 있을 때 절경의 옥순봉(玉筍峰)이 단양이 아닌 청풍군 관할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퇴계선생이 단양팔경을 정하면서 옥순봉을 단양팔경에 포함하고자 청풍군수에게 옥순봉은 단양으로 할양하기를 청했는데 처음 정중히 거절당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선생은 옥순봉 아래 암벽에 ‘丹丘洞門’(단구동문)이라고 새겼다. ‘단양(丹陽)의 관문’이라는 의미다. 이후 청풍군수는 선생의 글씨에 감탄하여 옥순봉을 단양에 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글씨는 지금 물에 잠겨서 볼 수가 없다. 옥순봉은 단양8경으로 불리지만 지금도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의 산봉이다.
구담봉(龜潭峰) 이야기
▶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재현단이 승선한 유람선은 옥순봉을 지나고 나서 금방 ‘구담봉’(龜潭峰, 338m) 앞을 지난다. 깎아지른 듯한 장엄한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아름다운 구담봉의 모습은 많은 시인묵객들의 시제(詩題), 화제(畵題)의 대상이 되었다. 단양의 풍광에 매료되었던 퇴계선생은 구담봉을 중심으로 한 절경을 보고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이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면서 훗날 사람들이 단양에 오면 꼭 보고가도록 명승지 여덟 곳을 정했는데, 일컬어 ‘단양팔경(丹陽八景)’이다. 바로 단양 상류의 ‘도담삼봉’과 ‘석문’, ‘구담봉’과 ‘옥순봉’ 선암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인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그리고 운선계곡의 ‘사인암’을 말한다.
특히 구담봉은 율곡 이이, 서포 김만중, 추사 김정희 등이 아름다움을 찬양한 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진경산수로 유명한 겸재 정선, 이방운 등이 그린 구담봉의 모습이 산수화로 남아 있다.
구담봉(龜潭峰)은 남한강의 풍수설에서 ‘거북’의 이미지가 강조된 경승이다. 퇴계 선생은 구담의 물이 너무 맑아 “봉우리들이 그림과도 같은데 협문이 마주 보고 열려 있고, 물은 그곳에 쌓였는데 깊고 넓은 것이 몹시 푸르러 마치 새겸재로 산 거울이 하늘에서 비추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선생의 구담봉에 관한 시이다.
曉過龜潭月在山 효과구담월재산 새벽에 구담 지나노라니 달은 산마루에 걸려 있고
高居想像有無間 고거상상유무간 높이 웅크린 구담봉은 무슨 생각 저리 많을까
主人今作他山隱 주인금작타산은 예 살던 신선은 이미 다른 산으로 숨어버렸나
鶴怨猿啼雲自閒 학원원제운자한 다만 학과 원숭이 울고 구름 한가로이 흘러갈 뿐
▶ 건국대 조용헌 교수는 ‘남한강을 품고 있는 청풍, 단양, 제천, 영춘은 ‘사군산수(四郡山水)’라고 부른다. 남한강을 중심으로 물과 바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승경(勝景)을 두고 하는 말이다. 청풍의 한벽루(寒碧樓)가 청정한 강물의 풍경이 아름답다면 구담봉(龜潭峰)은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깊고 그윽한 동천(洞天)이다. 그야말로 은둔거사의 고향이다.
산과 물이 깊은 곳은 피신(避身)하기에도 좋다. 2021년 귀향길 재현행사 ㅡ 4월 24일 밤 단양의 찻집에서 조용헌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다. … 구한말 동학의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스승인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당하기 전에 건네받은 쪽지가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이 날아서 멀리 가라)’였다. 이후로 해월은 평생 도망 다니면서 살았다. 근 35년. 끊임없이 도피처를 찾아다니는 신세였다. 해월이 도망 다닐 때 가장 오랫동안 숨었던 곳이 바로 여기 사군산수 일대라고 한다. 이 지역이 산골 깊숙한 오지여서 숨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1294] 四郡山水 (2021.04.26)
구담(龜潭), 이지번과 이지함의 은둔처
구담봉에는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 인종 때 백의재상이라 불리던 이지번(李之蕃)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했다. 토정(土亭) 이지함의 형이었던 그를 신선(神仙)이라 불렀다고 한다. 구담봉 일대는 지금도 이지번의 자손들의 소유라고 한다.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 1508~1575)은 48세부터 이 단양의 구담봉(龜潭峰)에 들어와 은둔생활을 하였고, 말년인 60세에 청풍군수를 하였다. 이지번과 동생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모두 일찍부터 서경덕(徐敬德)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화담학파의 특징이 자연 속에서 은둔하여 수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스승인 서경덕이 화담(花潭)에서 살았듯이 이지번도 구담(龜潭)에서 은거하였다. 토정의 아홉 살 위의 형인 이지번 본인도 이미 천문, 지리에 깊은 공부가 있었다.
◎ 1569년 오늘 퇴계 선생은 마지막 귀향길 단양 가는 길에 구담(龜潭)을 지나가면서 시를 지어 이지번에게 주었다. 〈過龜潭戱贈李而盛〉(과구담희증이이성, 구담을 지나며, 이이성에게 주다) 시 제목의 ‘而盛’(이성)은 이지번의 자(字)이다. — 《退溪集(퇴계집)》
依舊龜潭遶隱城 의구구담요은성 구담은 옛전처럼 은성을 둘러쌌는데
山人今與我同行 산인금여아동행 산인은 지금 나와 동행 하는구나.
杖藜慾共尋遊迹 장려욕공심유적 지팡이 짚고 함께 유람하던 곳 찾으려는데
其奈山前雨忽冥 기내산전우홀명 어이할거나 갑자기 비 내려 산 앞이 어두워지네.
퇴계, 단양의 아름다운 산수를 노래하다
퇴계 선생은 1548년 1월 단양 군수로 부임했다. 재임 중 공무로 남한강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청풍관아를 오가기도 했다. 그 왕래 중에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취하여 오언절구(五言絶句) 여섯 수를 지었다. 삼지탄(三智灘), 화탄(花灘, 일명 串灘), 장회탄(長會灘) 등 세 곳의 여울[灘]과 도토담(都土潭), 내매담(乃邁潭), 구담(龜潭) 등 세 곳의 담(潭)을 제재로 하여 지은 것이다. 선생의 이 여섯 수의 시들은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에 소상한 설명과 함께 한글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삼지탄(三智灘)’은 청풍군 수산면 능강리를 싸고도는 남한강의 지류인 능강 앞에 있는 여울이다. ‘삼지탄’은 한자로 세 가지 명칭이 있는데, 삼지탄(三砥灘)은 지주(砥柱) 세 개가 여울 한 복판에 있는 것이고, 삼지탄(三之灘)은 물이 그곳을 지날 때 갈 지(之) 자 모양으로 어지럽게 흐른다는 것이며, 삼지탄(三智灘)은 이러한 여울을 지나려면 상당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 된다. ‘화탄(花灘)’은 청풍군 수산면 괴곡리 서쪽 옥순봉(玉筍峯) 앞에 있다. ‘고지여울’ 또는 관탄(串灘)이라고 한다. 뾰족한 바위 사이로 여러 물줄기가 서로 앞서려고 다투듯이 흐른다.
‘구담(龜潭)’은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에 있는 소(沼)이다. 소 가운데 바위와 주위 절벽의 돌이 거북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그 주위에 구담봉(龜潭峯)이 솟아있어 그 산수가 단양팔경의 으뜸이다. 구담봉 북쪽에 세 암봉이 있는데, 채운봉(彩雲峯), 현학봉(玄鶴峯), 오로봉(五老峯)이라고 한다. 층암절벽이 기묘하게 생겨서 신선이 학을 타고 구름 사이로 나는 모양이어서 이 세 봉우리를 학봉(鶴峯)이라고 한다. 학봉과 구담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장회탄(長會灘)’은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에 있는 여울이다. 물줄기가 드세어서 청풍에서 단양에 들어가는 막바지 배를 젓기가 힘들다고 한다. — 권갑현 집필, 이광호 외 지음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푸른역사, 2021) pp.206~212
그러나 퇴계 선생이 시(詩)로 쓴 이 절경들은 청풍호 담수로 인하여 다 수몰되고 말았다.
권섭의 황강구곡가
근래에는 구담봉(龜潭峯)과 관련하여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이 주목받고 있다. 권섭은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노론의 중심인물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조카이다. 그는 구담봉을 몹시 사랑하여 유언을 남겼고 자신은 물론 두 아내, 손자와 함께 이곳에 묻혔다. 권섭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비로소 《옥소 권섭의 시가연구》로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고 단양(丹陽)을 찾은 많은 시인 가운데 최고의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단양공원에는 그의 동상(銅像)과 시(詩)가 새겨져 있다. 권섭이 구담봉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10수의 연시조 중에서 제10수)이다.
구곡(九曲)은 어드메요 일각(一閣)이 귀 뉘러니
조대단필(釣臺丹筆)이 고금(古今)의 풍치(風致)로다
저기 저 별유동천(別有洞天)이 천만세(千萬世)인가 하노라
권섭은, 아우가 대사간 권영(權瑩)이고, 큰아버지는 학자 수암 권상하(權尙夏)이며, 작은아버지는 이조판서 권상유(權尙遊)다. 노론 가문이다. 송시열(宋時烈)을 위시한 주변 인물들의 사사(賜死) 또는 유배의 참극을 겪은 뒤, 관계(官界)의 길보다는 일생 동안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서 시를 지었다. 한시 3,000여 수, 시조 75수, 가사 2편이 전한다. 시조 75수 중에는 연시조가 많다.
권섭의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는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와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맥을 이은 작품으로, 시사적 의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1704년(숙종 30)에 지은 기행 가사 〈영삼별곡(寧三別曲)〉과 1748년(영조 24)에 지은 〈도통가(道統歌)〉는 각기 나름대로 특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시는 주제·소재·시어·기법 면에서 모두 파격적인 참신함을 보여 준다. 시기적으로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윤선도(尹善道)의 맥(脈)을 이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장회나루
“열 걸음 걷다가 아홉 번 뒤돌아 볼 만큼 절경이로다!” ㅡ 조선 연산군 때 사림파 언관이었던 김일손(金馹孫)이 이곳을 지나던 중 그 절경(絶景)에 도취해 토해낸 찬사이다. 그 자리에서 이곳을 ‘단구협(丹丘峽)’이라 칭했는데 바로 청풍호(충주호) 유람선 관광지로 유명한 ‘장회나루’를 일컫는다.
▶ 낮 12시 35분 우리 재현단 일행을 태운 청풍호 유람선이 ‘장회나루’에 닿았다. 이제 단양군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구담봉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다. 남한강 연안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한 장회리(長淮里)는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지금은 높은 곳에 장회나루 유람선매표소와 식당과 휴게소, 상점 등이 있다. 충주호—청풍호 유람선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이다.
장회나루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구담봉과 청풍호는 천혜의 절경이다. 날이 맑으면, 이곳에서 금수산, 제비봉(옥순봉), 만학청봉, 강선대 등 경관을 볼 수 있다. 금수산이 남한강을 향해 남쪽으로 달리다가 천 길 낭떠러지를 이루며 펼쳐진 말목산과 장수들이 쓰는 투구와 비슷해 붙여진 투구봉과 강물이 굽이쳐 흐르다 큰 소(沼)를 만든 용수구미동이 있다. 여기에는 이곳 지세와 관련된 ‘투구봉의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투구봉 이야기
투구봉 아랫마을에 사는 인동 장씨 집성촌 종갓집에 건장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삼칠일(21일)만에 시렁(선반)에 올라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도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장사로 성장해 기쁨보다는 한숨만 깊어졌다. 이런 아이를 보며 종가의 어른들은 아이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아이의 겨드랑이 비늘을 잡아당겨 긴 날개를 뽑아 아이가 죽자, 말목산에서 용마 한 필이 나타나 길길이 뛰면서 울어대었고, 용수구미에서는 용 한 마리가 나와 슬피 울다가 승천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퇴계 선생과 두향과의 사랑 이야기
장회나루 건너편 강선대 자리 위에는 퇴계선생과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두향(杜香)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단양군(丹陽郡)에서는 장회나루 언덕에 ‘매화를 들고 선 퇴계와 거문고를 타는 두향’의 모습과 함께 ‘퇴계와 두향,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12개의 돌비에 새겨놓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1548년, 단양 군수로 부임한 48살의 퇴계는 단양에서 관기 두향을 만나 그녀를 매우 아꼈다. 그러나 퇴계는 열 달 만에 풍기 군수로 옮겨갔고, 애달픈 이별을 하게 된 두향은 장회나루 건너편 강선대(降仙臺)에 초막을 짓고 퇴계를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퇴계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자결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렸고 전한다. 장회나루에는 전해지는 사랑 이야기는 이렇다.
스토리 텔링
……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고 두향은 18세였다. 두향은 나이는 어리지만 시문(詩文)과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와 난초를 좋아하여 품성마저 아름답고 재기가 넘쳤으며 매화를 분에 심어서 기르는 재주도 있었다. 두향은 퇴계선생의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어 흠모하며 사모의 정을 떨칠 수가 없었고, 처신이 고고하고 깨끗한 퇴계선생 역시 두향의 총명과 재능을 인정하여 서로 시와 음율을 논하고 산수를 거닐며 잠시나마 인생의 여유를 가지게 되지만 부인 허 씨와 사별 한 후 또 후취 권 씨와 두째 아들까지 잇달아 잃게 되었던 퇴계선생의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와 같았던 두향이기에 차갑게만 대할 수 없었기로 날이 갈수록 은근하게 깊어졌지만 사랑은 겨우 10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갑자기 퇴계선생이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듯한 일이었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 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선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며 두향의 치마폭에 붓을 들어 “死別己呑聲 生別常惻測”(사별기탄성 생별상측측,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다.)" 라고 썼다. 두향이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조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덧 술 다 하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선생이 6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年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관기로 머무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했던 어른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여 지방관에게 간곡한 청을 올려 관기에서 빠져 나와 퇴계선생과 자주 갔던 남한강가 강선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건네 준 수석(壽石) 2개와 매화분(梅花盆)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는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두향을 보듯 매화를 곁에 두고 애지중지했다. 선생(先生)이 병환이 깊어 행색이 몹시 초췌하게 되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이기 민망스럽다며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의 마지막 한 마디는 "매화에 물을 주거라."였다.
퇴계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드디어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선생에 대한 고절(高節)한 절개를 지켰다. 선생을 향한 두향의 사랑은 목숨과도 바꿀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매화향기 만큼이나 그윽했지만 그 애절함에는 가슴이 시리고 저리지 않을 수 없다. …
퇴계선생과 두향의 사랑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지금도 장회나루에서는 퇴계 이황과 애틋한 사랑이 전해오는 두향을 추모하는 두향제(杜香祭)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고 한다. …
단양군은 ‘스토리텔링 관광정책’ 일환으로 2억원의 예산을 들여 이 공원을 만들었다. 지역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발굴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2017년 공원을 열면서 단양군은 보도 자료를 통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이황과 두향의 사랑 이야기는 단양의 소중한 자산”이라며 “공원을 잘 가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만들겠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2019년 1월 9일자 “‘48세 이황과 19세 두향이 사랑을 했다’…기려야 할 서사라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두 사람의 연애담과 지자체의 ‘스토리텔링’을 비판했다. ― 사실 공원의 조형물을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이곳을 직접 답사하고 이야기의 사실 관계를 연구한 권갑현 교수는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두향(杜香)이 단양의 기생이라는 설(說)은 퇴계보다 약 150년 뒤에 단양군수를 지낸 수촌 임방(任埅, 1640~1724)의 〈杜陽墓〉(두양묘)라는 시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름도 ‘두향’이 아니고 ‘두양’이며, 퇴계와 관련짓지도 않았다. 그 뒤 호사가들의 시에 더러 등장하기도 하고, 구한말 심암 조두순(趙斗淳)의 시, 운양 김윤식(金允植)의 글 그리고 정비석의 소설 등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인(情人)으로 묘사하였으나 정설은 아니다.” — 권갑현 집필, 이광호 외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푸른역사, 2021) p.204
결국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야기’는 호사가(好事家)들의 ‘하기 좋은’ 입담에 의해 ‘흥미로운 사실’로 왜곡하거나 몇몇 작가에 의해 세인의 관심을 끄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꾸며진 것이다. 전 고려대 교수 김언종 박사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어, ‘전해오는 퇴계 선생과 두향과의 사랑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퇴계는 기생과의 접촉을 끝까지 거부한 특이한 선비였다. — ‘그는 왕명으로 평안도에 내려갔을 때도 평안감사가 아름다운 기생을 안겨주었으나 끝내 거절했다. 또 어느 해인가 안동부사가 행차에 기생을 동반하자 퇴계가 나무랐다.’《퇴계 언행록》
문학적으로 재생산되는 사랑이야기
▶ 사실 퇴계 선생과 두향의 사랑이야기를 기록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다. 1970년대 조선일보에 연재한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 ; 단양기 두향》을 통하여 세상에 널리 퍼졌다. 작가 정비석(鄭飛石)은 단양 지방과 퇴계 후손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토대로 엮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야사(野史)에 살을 붙여 쓴 소설(小說)이다. 최인호도 소설 《유림》에서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그렸다. —
필자의 소견으로는,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의 가공된 에피소드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 자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情), 그 그리움을 지극하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소통했던 미담, 어려운 시기 현실의 삶이 힘들 때 서로 의지하면서 정을 나누었던 자연스러운 인연, 신분과 나이 차이를 넘어서 고절한 인품으로 서로를 공경하고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인간적인 스토리이다.
장회나루에서 단성(단양수몰이주기념관)까지
▶ 장회나루 식당에서 많은 재현단이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했다. 오늘은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 원장과 부원장을 비롯하여 임직원 50여 명이 동행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오늘의 청풍—단양 구간 재현 행사에 참여한 분들은 ‘수요일에 국학!’ 회원이다. 줄여서 ‘수국’이라 한다. — ‘수요일(水曜日)’은 ‘국학진흥원(國學振興院)’에서 재직하는 직원들의 국학에 대한 소양 함양을 목적으로 일과 학습을 병행하는 소양강좌와 학습동아리를 운영하는 날이다. 그래서 이날을 ‘수국 향기가 있는 날’이라고 명명했다. 오늘이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청풍—단양 구간 걷기 행사 10일째이며, 마침 ‘수요일’어서 그 일정에 맞추어 안동에서 청풍까지 올라와 참여한 것이다. 오늘이 첫 ‘수국’이란다.
식사를 마치고, 휴게소 앞에서 오후의 출행식을 가졌다. 먼저 재현단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이 ‘이제 우리 일행이 퇴계 선생의 유덕(遺德)이 있는 단양 땅에 들어왔다.’면서 선생의 후덕한 체취가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국학진흥원 정종섭 원장이 인사를 겸하여 재현단 행사에 참여한 의의를 말씀하고, 국학진흥원 권진호 본부장이 옛 고을 단양에 대해 조리 있는 해설을 했다.
긴 행렬, 빗속을 걷다
▶ 장회나루,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가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 비닐우의를 갖추어 입었다. 이제 장회나루에서 단성(단양)까지 9km의 노정은 39번 국도를 따라 가는 길이다. 39번 국도는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옛날의 기리 수몰되고 나서, 새로 난 도로이다. 충주의 3번 국도에서 단양의 5번 국도를 잇는 월악산국립공원 입구의 송계리와 장회나루를 경유하는 단양에 이르는 도로이다. 호반을 따라 산허리에 만들어진 길이라 굴곡이 심하다. (장회나루 앞에서 제비봉을 올라 도로와 같은 방향으로 하산하면 얼음골에서 도로와 만나게 된다.)
▶ 이한방 교수와 김병일 원장을 비롯하여 뒤를 잇는 재현단 일행은 도로의 크고 작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인도가 따로 없으므로 길의 좌측 가장자리를 따라 열(列)을 지어 걷는다. 길의 좌측으로 가면 다가오는 차를 볼 수 있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신 별유사가 앞장서서 경광봉(警光棒)을 들고 안전을 도모했다.
▶ 장회나루 출발하여 도로를 따라 걷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모두들 귀향길 지원단이 제공한 비닐우의를 입고 있거나 각자 우산을 받들고 걸었다. 길의 좌측에는 청풍호 남한강이 위치하고, 우측에는 해발 721m의 제비봉이 솟아 있어, 도로는 그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므로 수시로 차가 다니는 도로는 완만하지만 오르내림과 커브가 많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도 도로의 연변에는 군락을 이루고 있는 노란 개나리와 하얀 벚꽃이 만발하여 봄의 정취를 더했다.
39번 도로— 우화삼거리— 단성(구 단양)
▶ 제비봉 끝자락인 얼음골에서부터 도로는 거의 직선으로 뻗어있다. 단성면 외중방리 수중보를 지나고 다시 고개를 넘어 산굽이를 크게 돌아가면 굽이치는 남한강 물굽이가 비단자락이 휘감은 듯한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우의 속의 옷은 땀으로 젖고 비바람을 차갑다. 점점 다리는 무겁고 찬 기운에 이미 솟은 땀이 식어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몸이 심한 한기를 느낀다. 몸이 점점 굳어지는 느낌이다.
▶ 백두대간 벌재-상선암-하선암(단양천)을 따라 내려오는 59번 국도와 만나는 ‘우화삼거리’를 지나, 단양천 ‘우화교’를 건너 단성(면)에 이르렀다. 단성은 본시 이곳이 예전에 ‘단양관아’ 소재지였다. 단양향교(丹陽鄕校)는 현재 단성면사무소 뒤에 있다. 단양향교는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웠으며, 선생이 대성전의 석전에 직접 참례하였고 공무의 여가에는 향교의 유생들과 강학을 하였다고 한다.
단양군수 퇴계 이황
◎ 퇴계 선생은 1548년(48세) 1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약 10개월을 임직한 곳이다. 그해 단양에 도착해 보니 전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온통 굶주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선생은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부임한 지 한 달여 지난 2월에 둘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으나, 눈앞의 굶주리는 백성을 돌보기 위해 관내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대책을 강구했다.
수령으로 나왔으니 게으름이 부끄럽고
궁한 백성 봄이 오니 나의 근심 불어나네.
붉은 벼랑 남은 눈[雪]을 두루 밟고 달렸다가
비낀 해 어지러운 뫼 돌아오며 시 읊는데
봄바람에 풀 자라나는 걸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유로운 해오라기는 나와 함께 놀지 않네
열 집 작은 고을에 흉년마더 들었으니
예악인들 그 풍속 바꿀 수 있을 건가.
시 〈매창포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저물녘 돌아오는 말 위에서 짓다〉(買浦倉賑給 暮歸馬上)이다. 매포창(買浦倉)은 지금의 단양군 매포읍 매포리에 있는 곡식창고이다. 이 시는 매포창에 비축되어 있던 곡식을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관아로 돌아오는 길에 지은 것이다. 지금까지 대궐에서만 근무하다가 외직인 단양군수로 나와 보니, 백성들이 보릿고개에 굶주리고 거기다가 흉년까지 들어 예나 음악[絃歌] 같은 것으로 교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 퇴계 선생은 1548년 10월에 단양을 떠나 죽령을 넘어 풍기군수로 옮겨갔다. 형 온계(溫溪) 이해(李瀣) 선생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어 관례에 따라 상피(相避)한 것이다.
◎ 선생이 단양을 떠나고 9년 뒤인 1557년 선생의 애제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해 5월 고을의 실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해결책을 제시한 〈단양진폐소〉를 조정에 올렸다. 5,000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상소에,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내용을 담았다. 명종은 그에 감동하여 10년 동안 단양에 세금을 면제해 주는 특별한 조치를 내렸다. 이후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던 백성들이 돌아와 농사에 힘쓰면서 고을이 차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당시는 임금의 외척 윤원형이 전횡을 일삼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애민정신이 투철한 목민관 황준량의 의지가 이를 극복하였던 것이다. 지금 단성면 ‘수몰이주기념관’ 마당에 있는 ‘황준량선정비’는 그러한 사적을 담은 기념비로서 그냥 관행적으로 세운 여타 선정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스승[퇴계]과 제자[금계]가 같은 고을을 맡아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의 전형(典型)을 보여준 것도 매우 흔치 않은 일이다. 퇴계 선생은 황준량에 대하여 학문적으로도 크게 기대하였다. 그러나 1563년 스승에 앞서 이 제자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매우 상심하고 애통하여 직접 쓴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써서 그 슬픔을 담았고, 장례 때에는 명정(銘旌)까지 손수 써서 제자의 영혼을 위로하였으며, 뒷날의 행장(行狀)까지 지었고, 그의 문집(文集)도 스승이 손수 간행하였으니,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었던 것이다.
금계 황준량
퇴계가 매우 사랑한 제자
◎ 조선 중기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 선생은 퇴계 선생 문하로, 약관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가는 곳마다 백성의 칭송이 자자해 영주 선비의 높은 절의와 품격을 드높인 인물이다.
단양군수 시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5천 자가 넘는 상소를 올려 명종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고, 단양군민들은 이후 10년간 가혹한 공납과 세금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미래를 위해 교육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백학서원(白鶴書院) 공곡서당(孔谷書堂) 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워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점도 큰 업적으로 남아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조선조 청렴의 표상으로 목민관의 모델로 칭송받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선비다.
황준량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고, 문명(文名)이 자자했다. 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 중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었다.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했으며,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 경상도 감찰어사(慶尙道監察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앞서 청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해 신녕현감으로 부임했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단양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였다. 그러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별세하였다.
신녕현감으로 있을 때 긂주린 백성을 잘 돌보아서 소생하게 하였다. 또한 전임관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特恩)을 받기도 하였다. 벽지에 있던 향교를 군내에 옮겨 세우고, 이 지방의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문묘 서편에 따로 사우(祠宇)를 마련해 제사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주목사로 나아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녹봉정사(鹿峰精舍)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우애가 돈독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자식이 없어 아우 수량(遂良)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풍기의 욱양서원(郁陽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이 있다.
군수 황준량의 ‘단양진폐소’
황준량(1517~1563)은 영주 풍기 출신으로 퇴계 제자였다. 24살에 과거 급제하여 1557년(명종12년) 40세 나이로 단양군수에 부임하여 국왕에게 백성을 위한 상소문을 올리는데 이 상소문이 조선 오백년사에서 가장 빼어난 애민(愛民) 상소문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제갈량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하는데 조금이라도 어진 마음을 가진 자라면 금계의 상소문을 다 읽기도 전에 목이 메게 될 것이라고 사관은 말했다.
당시 탐관오리 학정으로 백성 곤궁이 극에 달해 임꺽정 난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적지 않은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는 때였다. 금계는 선정과 어진 마음만으로는 이 어려움을 타개할 수 없다며 천 번 생각하고 세 가지 계책을 올린다고 했다.
상책(上策)으로 10년 동안 단양 고을의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흩어진 백성이 돌아오고 버려진 땅이 다시 낙토로 변해 근본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10년간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줄 수 없다면 다음 계책(中策)으로 단양 고을을 강등해 큰 고을 아래로 들어가 그나마 남아있는 백성이라도 참혹한 폐해에서 벗어나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하책(下策)으로 백성을 병들게 하는 10가지 민폐를 진달 하오니 시정해 달라고 했다. 이는 큰 것만 뽑은 것으로 눈앞의 급함을 구제하는 것이라 했다.
첫째, 관아에 공납하는 목재를 줄여달라고 했다. 40호 가구가 매년 큰 목재 4백개, 작은 목재가 수만개이니 백성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둘째, 종이 공납의 폐단이다. 종이는 관리 관청뿐만 아니라 예조·교서관·관상감에도 모두 공납해야 하니 그 폐해가 막심하다고 했다. 셋째, 매년 짐승을 사냥하여 바치는 공물이 노루가 70마리, 꿩이 200마리가 되니 민생은 오래전에 죽었다고 했다. 넷째, 대장장이에 대한 폐단으로 도망간 대장장이 몫을 백성에게 부담시키지 말아 달라고 했다. 다섯째, 악공(樂工) 노비 차출을 줄여주고 다른 고을 악공 몫까지 부담하고 있다고 했다. 여섯째, 보병으로 나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일곱째, 향리 자제를 조정 관청으로 올려보내는 기인(其人)제도를 없애 달라는 것이고 여덟째, 병영에 바치는 사슴·노루·소가죽의 양을 줄여달라는 것이고 아홉째, 다른 고을에 부과된 세금, 공주의 노비, 해미의 목탄, 연풍의 목재, 영춘의 꿀벌상자, 황간의 기인까지 떠맡고 있으니 없애 달라고 했다. 열째, 무식한 시골 백성에게 약재 공납을 부담 시켜 포목으로 대신 바치고 있으며 웅담, 사향, 인삼, 복령, 지황은 더욱 폐해가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집도 없이 떠돌다가 궁벽한 산골짝에서 원망에 차 울부짖는 백성들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으니 삼가 전하께서 신의 어리석음을 가엽게 여기시어 용서해 주시고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상소를 받들어 올린다고 했다.
명종은 '상소를 보건대 10개 폐단을 진달 하여 논한 것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이를 아름답게 여긴다'며 비답을 내렸고 우의정 윤개는 조정 관리에게 금계 상소문을 모두 읽도록 했다. 10년 동안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아 단양 고을은 살아났고 충주호반의 금계 선정비가 그날의 일을 말하고 있다.
훗날 퇴계는 먼저 세상을 떠난 제자 금계의 행장을 지으면서 '공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은전을 입었겠느냐'고 그를 칭송했다. 금계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네 가지 잠언을 '거관사잠(居官四箴·청렴·인자·공정·부지런함)'이라 새겨 뒷사람에게 남겼고 목민관의 사표가 됐으며 풍기 금계촌의 평해 황씨 금계종가에서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 영남일보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靑史에 이름 올린 영남선비 (2022-04-29 )
황준량의 금선대와 금선정
경상도 풍기읍 삼가리 금선계곡(錦仙溪谷)
◎ 백두대간 소백산 비로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산을 타고 계곡을 흘러내려 한바탕 휘돌아 소(沼)를 이루는 곳이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금선계곡(錦仙溪谷)이다. 옛 사람들은 이곳 풍광이 ‘소백 제1경’이라고 손꼽는 곳이다. 이곳은 겹겹 암반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협곡(峽谷) 양 벽면은 절벽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층층 절벽 위에는 정자를 지을 만한 ‘너븐바우’가 있기 때문이다.
황준량은 관직에 있을 때도 고향에 오면 이곳을 먼저 찾아 금계(錦溪)의 풍광을 감상하고 찬탄하곤 했다 한다. ‘금계(錦溪)’를 아호로 삼았다. 조선 명종(明宗) 때(1550년경) 황준량은 이곳을 ‘금선대(錦仙臺)’라 이름 지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 영조 32년(1756)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바위벽에 금선대(錦仙臺)라고 삼대자(三大字)를 암벽에 새겼다.
그리고 25년 후 정조 5년(1781) 이한일(李漢一) 풍기군수 재임 때, 황준량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며 금선대에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錦仙亭)’이라 이름 하였다. 처음 지은 정자는 오랜 세월 속에 허물어지고 1989년 유림의 공의를 거쳐 후손들이 영풍군에 지원을 받아 중수했다.
단양에서 지은 학봉(鶴峰)의 경모시(敬慕詩)
퇴계 선생 시호(諡號)를 받들고 가며
◎ 1576년 12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조정으로부터 스승 퇴계의 시호(諡號)를 받들고 안동으로 내려가던 중 이곳 단양의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퇴계 선생의 시호는 ‘文純’(문순)이다) 단양은 퇴계 선생이 군수(郡守)를 지낸 곳이니 그 감회가 남다른 것이다. 객사에 머물면서 그곳 어디엔가 30년 전 스승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 그래서 다음과 같은 병서(幷序)와 함께 그 감회를 오언율시(五言律詩)로 담았다.
[병서(幷序)] — ‘퇴계 선생께서 무신년(1548년, 명종 3년) 봄에 단양 군수로 나갔는데,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이미 삼기(三紀, 30년)가 지났는데, (스승의) 시호를 받들고 이곳을 지나면서 눈물을 흘리며 쓰다.(退溪先生 戊申春 出守丹陽 俛仰之間 已經三紀 奉諡過此 攪涕書之)’
絃歌忽三紀 현가홀삼기 현가(絃歌) 소리 어느 사이 벌써 삼십년
歲月空崢嶸 세월공쟁영 세월은 부질없이 빨리도 가네.
遺愛留桐社 유애유동사 끼치신 사랑 동사(桐社)에 남아 있고
仙遊祕赤城 선유비적성 신선의 유람 적성(赤城)에 감춰져 있네.
山川曾賁飾 산천증분식 산천은 아름답게 꾸밈을 더했고
草木尙光榮 초목상광영 초목들은 아직 광채가 빛나네.
奉諡南行路 봉시남행로 시호(諡號)를 받들고 남쪽으로 가는 길
誰知此夜情 수지차야정 오늘 밤의 이 심정 누가 알리오.
‘현가(絃歌)’는 수령이 정사(政事)를 함에 법도가 있어 백성들이 안락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노나라 때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백성을 예악(禮樂)으로 가르쳤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는 퇴계 선생을 말한다.《논어》(양화편)에 나온다.
‘동사(桐社)’는 동향(桐鄕)의 사당으로, 어진 수령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동향(桐鄕)은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이다. 한나라 때 주읍(朱邑)이 젊어서 동향의 색부(嗇夫)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 존경하였다. 그 뒤에 주읍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옛날에 동향의 관리가 되었을 적에 그 백성이 나를 사랑하였다. 그러니 반드시 여기에 장사 지내라.” 하였다. 주읍이 죽자 그 아들이 동향에 장사 지내었는데, 동향의 사람들이 과연 사당을 세워서 세시로 제사를 지냈다. —《한서(漢書)》(권89) 循吏傳 朱邑(순리전 주읍) ㅡ ‘적성(赤城)’은 단양의 옛 이름이다.
학봉, 단양에서 선생을 그리워하다
◎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다른 날 단양을 지나면서 또 시(詩)를 남겼다. 〈이요루(二樂樓)에서 퇴계 선생의 운(韻)을 차하다〉이다. 학봉이 단양의 이요루(二樂樓)에 올라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선경에 비유하여 찬탄하고, 한때 퇴계 선생이 단양 고을에 선정을 베풀었음을 상기하며, 지금은 떠나신 선생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長川滾滾玉虹流 장천곤곤옥홍류 시냇물 끊임없이 옥무지개로 흐르는데
川上何年構此樓 천상하년구차루 시냇가 어느 해에 이 누각을 지었는가.
雪逕細通丹竈峽 설경세통단조협 눈 덮인 길 가느다랗게 단조협과 통해 있고
人家近住白鷗洲 인가근주백구주 인가는 새들이 사는 강 가까이 터를 잡았네.
儒仙一去風何遠 유선일거풍하원 유선(儒仙) 한 번 떠나자 그 풍모 아득한데
俗客重來地更幽 속객중래지경유 나른한 객(客) 다시 오니 땅은 다시 그윽하네.
憑檻欲尋當日迹 빙함욕심당일적 난간에 기대앉아 당시 자취 찾고프나
武城絃斷不勝愁 무성현단불승수 무성의 현가(絃歌)가 끊겨 시름 금치 못하겠네.
‘이요루(二樂樓)’는 단양에 있는 누각이다. ‘단조협(丹竈峽)’은 신선이 사는 골짜기를 말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제14권 단양군조에 보면, 김일손이 〈이요루기〉에, “내가 절경이 이름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처음으로 ‘단구협(丹丘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였는데, 혹 이를 말한 것인 듯하다. ‘무성의 현가가 끊겨’는 고을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었던 수령이 떠나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것을 말한다.
오늘의 마지막 포인트, 단양수몰이주기념관 마당
‘濯吾臺’(탁오대)와 ‘復道別業’(복도별업) 암각자 / 황준량선정비
▶ 오후 6시, 일행은 단성면 마을 뒤 높은 곳에 위치한 ‘단양수몰이주기념관(丹梁水沒移住記念館)’ 마당에 도착했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는 도착점이다. 이곳 마당에는 퇴계선생의 친필 ‘濯吾臺’(탁오대)와 ‘復道別業’(복도별업) 암각한 바위가 있다. 수몰지역에 있었던 각자(刻字) 바위의 부분을 옮겨온 것인다. ‘탁오(濯吾)'는 나를 씻는다는 뜻으로 "창랑에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는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서 따온 것이다. ’탁오대는 선생이 평소 정사(政事)에 지친 심신을 풀고자 매일 물가에 나가 손발을 씻으며 마음까지 깨끗이 씻으려는 의미에서 이름을 짓고 친필로 써서 새겼다고 전한다.
단양 ‘復道別業’(복도별업) 암각자는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에 있는 자연 암석에 새긴 글씨이다. 복도소(復道沼)는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貯水池)이다. 물이 맑고 깨끗하며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목욕을 하면 몸과 마음까지 깨끗해질 만큼 훌륭하여 선생이 이곳에서 별업(別業, 특별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선생의 친필인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리고 이곳에는 황준량의 선정비(善政碑)도 함께 있다. 선생의 애제자 황준량이 1557년 단양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세운 송덕비(頌德碑)이다.
청풍호—단양, 하루 일정을 마치고
▶ 오후 6시, ‘단양수몰이주기념관’ 마당 앞에, 안동의 국학진흥원에서 우정 참여하신 많은 분들과 재현단이 모인 가운데 퇴계 선생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이곳 단양에서 김병일 원장이 선생의 발자취를 상기하는 말씀을 하고 이동신 별유사가 내일의 일정을 이야기하고, 다함께 상읍례를 끝으로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쳤다.
▶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 청풍호 배를 타고 나서, 자동차가 다니는 팍팍한 도로변을 따라서 걸었다. 걸은 거리는 평소보다 길지는 않았지만, 비닐우의(雨衣) 속, 뜨거운 몸에서는 땀이 솟고 그것이 축축하게 식어서 오한(惡寒)까지 스며들어 온몸이 전율했다. 잔뜩 흐린 날씨에 몸은 물먹은 솜덩이처럼 무거웠다. 그야말로 오늘은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날이었다. 그러나 ‘청풍명월’로 대표되는 청풍호의 아름다운 산수자연에 취하고 거기에 깃든 선생의 발자취에 마음이 젖고, 힘들게 걸어서 도착한 옛 고을 단양에서 선생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곳곳에 숨은 이야기들, 그리고 그 후 선생의 애제자 학봉 김성일이 단양을 지나면서 쓴 애틋한 경모시(敬慕詩)와 금계 황준량의 군수로 와서 선정(善政)을 펼친 이야기는 필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불순한 일기(日氣)에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충만한 하루였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