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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남조선 국방경비대 창설
←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원들이 행진하고 있다.
우리나라 육군의 전신인 ‘남조선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제1대대가 1946년 1월 15일 현재의 육사(서울시 태능)자리에 설치됐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부터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해 운영해 왔다. 그러나,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국군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국권마저 상실하는 민족사적 비운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내ㆍ외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의병20년(1895~1915)ㆍ독립군 25년(1915~1940)ㆍ광복군 5년(1940~1945) 등 총 50년에 걸쳐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고국으로 환국한 이들 광복군은 지난 날의 나라없는 민족의 쓰라린 체험을 가슴깊이 되새기며 ‘국군준비대’와 학도병 중심의 ‘학도동맹’ 등 12개 자발적 군사조직을 창설, 창군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이들 군사조직 모두 미군정의 법령28호에 의해 해산되기에 이른다. 이유인 즉, ‘미 군정당국에 의해 조직되지 않은 일체의 경찰ㆍ군사조직을 금지한다’는 당시 법령때문이었다.
이에 미 군정당국은 친미성향의 고급간부를 국방경비대에 배치하기 위해 국방경비대 창설 1개월 전인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결국, 1백10명의 장교를 배출했고 이들 중 78명은 군장성에, 13명은 참모총장에, 7명은 합참의장에까지 올랐다. 미 군정당국은 이들을 기간(基幹)으로 1946년 오늘,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그 후 남조선 국방경비대는 (남)조선경비대로 개칭(1946.6.15)됐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국군으로 편입(1948.9.1)됐다가 육군으로 개칭(1948.9.5)됐다. 결국, 우리나라 국군은 대한제국 국군→의병→독립군→광복군→대한민국 국군으로 그 정통성을 계승한 셈이다. /조선
[1919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피살
← '마르크스 이후 가장 뛰어난 지식인 혁명가'이자 '불꽃 여인'으로 불리웠던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9년 1월 15일 독일 군부의 사주를 받은 갱단에 의해 피살됐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유태인 상인의 딸로 태어난 로자는 20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1898년 제2인터내셔널의 주도적 단체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혁명노선을 지지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바르샤바로 가 투쟁에 가담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로자는 사회민주당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하자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폴란드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창설해 혁명을 통한 전쟁 종식과 프롤레타리아 정부수립을 위해 매진했으나 결국 반혁명 세력에 의해 혁명 동지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피살됐다.
그는 국제 공산주의 단체에서 유일하게 레닌에 대적할 수 있는 이론가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마르크스 이후 가장 뛰어난 지식인 혁명가’ ‘불꽃 여인’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로자의 사상은 현실 속에선 뜻을 피우지 못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유럽 사회민주당의 개량주의에 모두 불만을 느끼는 상당수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녀의 사상은 1960년대 유럽을 풍미했던 뉴레프트 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조선
[1987년]박종철 사망 발표
← 6월민주화운동에 가담한 시민들의 명동시위(1987. 6)
1987년 1월 15일 경찰은 서울대생 박종철이 수사를 받던 도중 충격사했다고 발표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한 참고인이라는 이유로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불법 연행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경찰은 조사를 받던 중 박종철이 자기압박(自己壓迫)에 의해 충격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부검 결과 고문치사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뒤이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끈질긴 노력으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박종철이 대공수사관들에 의해 불법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음이 밝혀지자 국민들은 분노했다. 여론의 압력에 밀려 고문치사 은폐·조작에 관련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임했고,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등 다수의 경찰간부가 구속되었다. 그후 4·13호헌조치로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비난이 더욱 거세졌으며, 마침내 국민기본권 신장,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대통령 직선제 등을 요구하는 6월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브리태니커
[2001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중국 방문(~20일)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1년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6일간 중국을 방문했다. 종래와 달리 베이징은 경유만 하고 일정의 대부분을 상하이에서 보냈다. 심지어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직접 상하이를 방문해 김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질 정도로 그의 상하이방문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정치적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고 철저한 ‘시장경제 탐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하이 도착 다음날인 17일 창장 하이테크 단지내의 일본 NEC반도체 공장을 시찰했으며, 푸동 개발구 정부와 진차오 수출가공단지도 방문했다. 18일에는 자본주의 꽃이라는 상하이 증권거래소를 방문, ‘자본의 힘’을 실감했으며, ‘제국주의’로 비난해왔던 미 GM자동차 공장도 방문했다. 이같은 그의 행적은 그동안 중국식 개혁 개방 노선을 사회주의 정통노선에서 이탈했다면서 내심 비판하던 태도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김위원장이 중국 방문을 마친후 북한이 중국식 개혁 개방노선을 채택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북한 방송들도 김위원장의 중국 방문 소식을 20여분 간에 걸쳐 상세히 보도하면서 과거의 보도 태도와 달리 김위원장의 참관 소감까지 소개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조선
[1929년]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 출생
1929년 1월 15일 태어남 / 1968년 4월 4일 죽음
"인생에는 믿어야 할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이 끝날 때까지 그 신념으로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열렬히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 마틴 루터 킹
킹은 1950년대 중반부터 1968년 암살당할 때까지 흑인들의 비폭력적인 투쟁을 주도하며 미국민권운동을 이끌었던 침례교 목사이다. 미국 남부 흑인 목회자 가정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간디의 비폭력철학과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덱스터가(街) 침례교회의 목사를 지낼 때 공중 버스 안의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운동이 벌어졌는데, 킹은 이 운동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몽고메리 시에서 공중 버스 안의 인종차별대우를 철폐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그는 1957년 남부 그리스도교 지도자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SCLC)를 조직했다. 1963년에는 노예해방 100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 행진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1964년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1966년부터는 시카고를 중심으로 주택 확보와 학교에서의 참다운 인종통합을 요구하며 현실적인 흑인 차별과 빈곤 타파를 위해 활동했다. 저서로는 <자유를 향한 걸음 Stride toward Freedom>, <사랑으로 강해지기 Strength to Love>,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 Why We Can't Wait?>,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Go from Here>, <양심의 승리 The Triumph of Conscience>가 있다./브리태니커
[1882년] 독립운동가 박문용(朴文鎔) 출생
1882. 1. 15 전남 보성 ~ 1929. 7. 20.
일명 박환(朴桓). 보성군 겸일면 면장으로 재직중 1913년 12월 8일 보관중인 공금 327원을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대한독립암살단(大韓獨立暗殺團) 군자금으로제공했다. 1919년 4월10일 대한민국대표 30인의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4월 18일 텐진[天津]에서 항일무장단체인 불변단(不變團)을 조직하고 부단장겸 의사부장(議事部長)을 맡아 항일운동에 진력했다. 10월 31일 상하이에서 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선언서와 공약을 발표하여 한국도 정부가 있는 국민임을 세계에 선언하여 전민족의 분발·협력을 촉구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국내특파원으로 밀파되어 전라도지역의 책임자로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2월 한우석과 함께 다시 상하이로가서 안창호(安昌浩)·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시영(李始榮) 등 임시정부 간부들과 회견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한 조선독립사령부(朝鮮獨立司令部)를 조직할 것을 협의했다. 3월 7일 귀국해 한우석 등 수명과 협의하여 모병·모금을 목적으로 한 조선독립군사령부결사대를 조직했다. 그는 행동대원으로서 권총을 휴대하고 전라남도 광주 본촌면에서 군자금 모집을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던 중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 일행이 내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등 일본고관을 제거할 암살단을 조직하고 준비작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거사 전 한우석의검거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도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18년] 이집트의 군장교·총리·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아랍어: جمال عبد الناصر - Jamāl, Abd an-Nāsir) 출생
1918년 1월 15일 ~ 1970년 9월 28일
나세르는 이집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1956년부터 1970년까지 이집트의 2번째 대통령을 지냈다. 무하마드 나기브와 더불어, 1952년 이집트 혁명을 주도했으며, 이집트의 산업화를 일으켰으며, 짧은 기간이지만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 민족주의를 일으켰다.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설립 및 비동맹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알제리, 리비아, 이라크, 예멘 등에서 반식민주의와 범아랍주의 혁명을 일어나도록 아랍민족을 고취했다.
[1998년] 국립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
국립진주박물관은 1980년 10월에 착공, 1984년 11월 2일 개관하였다. 대지 1만 5882.6㎡(4,804평), 건물 4,949.41㎡(1,497.2평)이다. 개관 초기에는 선사시대 및 가야시대 유물을 중점적으로 전시하였으나, 1998년 1월 15일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1, 2층으로 나뉘어진 상설전시실 2곳과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 전시실에는 임진왜란의 결과로 남겨진 여러 문제점들을 테마별로 구분·전시하여 전쟁을 통한 문화교류와 전파양상을 보여주고, 2층 전시실에는 울산성전투를 묘사한 그림병풍, 천자총통, 거북선 모형 등 전쟁에 사용된 무기류와 전선 등을 비롯하여 의병들의 항쟁상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한편, 2001년 11월 새로이 개관한 두암관(斗庵館)에는 재일교포 두암 김용두(金龍斗)가 기증?회화, 도자기, 목가구, 금속공예품 등 179점의 유물 중 100여 점을 전시해 놓고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南城洞) 169-17번지 진주성(晋州城) 안에 있다. /naver
[1992년] 유고슬라비아연방 사실상의 해체 시작
유럽공동체와 영국이 1992년 1월 15일, 전해 6월에 독립을 결의한 유고연방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대해 독립국가로서 수교를 할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유고연방은 사실상 해체의 길에 들어섰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도 이들 국가들과 곧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는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에 대해서는 소수민족의 권익보호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 독립승인을 연기했다.
유고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티토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정권의 지배하에 균형을 유지해 오다 1990년대에 들어 지배가 흔들리기 시작, 역사적인 민족간의 증오가 표면화되면서 연방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
[1981년] 민주정의당 창당
← 전두환
1981년 1월 15일 민족, 민주, 정의, 복지, 통일을 5대 이념으로 내건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이 창당됐다. 전두환씨를 비롯, 신군부세력이 중심이 된 민정당은 주요 기구로 전국대의원대회, 중앙집행위원회, 사무국, 시도위원회 등을 두었으며 그 해 3월 전두환씨가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곧이어 제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제5공화국의 집권여당이 됐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창당 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으나 대표위원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위기를 수습하고, 12월16일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승리했다. 그러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총 299석 중 125석을 차지해 여소야대라는 불안정한 정국을 맞이하며 1990년 2월 9일 민주당, 공화당과 합당하여 민자당을 탄생시키고 해체됐다.
9년 만에 해체된 민정당은 건국이래 당의 주인을 바꿔가며 연속집권한 유일한 정당이면서도 ‘집권도중해체’라는 또 다른 기록을 세웠다. 민정당은 국민투표에 의한 재집권으로 헌정사상 초유의 정권재창출을 이룩했고 국제경제여건의 변화에 기인한 바 크지만 1970년대말의 경제위기를 물가안정ㆍ고도성장으로 뒤바꿔 놓은 점이 대표적인 업적이다. 반면 박정희정권의 18년 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려던 1980년을 5ㆍ17 및 광주사건으로 짓밟고 정치발전을 저해한 과오는 이같은 경제업적을 퇴색케했다. /조선
[1975년] 정부, '부처님 오신 날(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
1973년 3월 당시 불교신자인 용태영 변호사는 총무처장관을 상대로 서울고법에 석가탄신일 공휴권 확인 등을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즉 기독교의 성탄일인 12월 25일이 공휴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 오신 날(석가탄신일)인 4월 8일도 공휴권(公休權)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공휴일로 지정 공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부처님오신 날(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할 수 없다면 성탄절의 공휴일 지정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서울고법은 1974년 10월 “원고는 성탄절이 공휴일로 지정됨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권리나 법률상 이익이 침해 당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부적법하다고 판결 각하해버렸다. 그러나 용태영 변호사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에 계류 중인 1975년 1월 15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부처님오신 날(석가탄신일, 음력 4월 8일)'을 법정공휴일로 지정 공포하였던 것이다. /naver (지식iN)
[1971년] 이집트, 아스완 하이 댐 완공
1971년 오늘, 이집트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이 준공됐다. 착공 11년만이다. 준공식에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소련의 코시킨 총리가 참석했다. 소련의 기술 원조로 만들어진 아스완 하이댐은 높이 111m에 제방길이 3.6km로 나일강 급류를 막아 건설했다. 전력생산과 홍수조절, 그리고 관개용수 확보용으로 만들었다. 이집트는 B.C. 13세기에 지어진 아부심벨 신전이 물속에 잠기지 않도록 신전을 저수지 수면보다 높은 위치로 옮기는 대대적인 공사까지 벌였다. /YTN
[1925년] 소련 스탈린 집권, 트로츠키 실각
← 스탈린(1950)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10월혁명을 지도하였다. 10월혁명 뒤 소비에트정부의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으로서 세계대전의 모든 교전국에 민주적 강화를 제안,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의 대독일강화교섭 단장을 맡고, 독일쪽의 병합적인 최후통첩에 <전쟁도 않고, 강화에도 조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1918년 군사인민위원, 당정치국원, 코민테른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한편, 1919~1920년 노동에 군대적 규율을 도입하는 노동의 군대화와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장하였으나 당내 논쟁에서 패하였다. 1923년 레닌이 질병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자 트로츠키는 당내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창당멤버인 G.E. 지노비예프·L.B. 카메네프·I.V. 스탈린 3인조로부터 당반대파로 비판 받고, 1925년 군사인민위원 사임을 강요당하였다. 1926~1927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등과 합동반대파를 결성하였으나, 스탈린과 N.I. 부하린의 연합에 패하여, 1927년 당에서 제명되었다. 1928년 알마아타로 추방되었다가 1929년 국외로 추방당하였으며, 1937년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1938년 코민테른에 대신하는 제4인터내셔널을 창설하였으나, 1940년 8월 20일 스탈린의 수하에게 암살되었다. /yanoo
[1906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Onassis, Aristotle) 출생
← 오나시스의 동상
1906. 1. 15 ~ 1975. 3. 15
터키 이즈미르에서 부유한 담배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922년 터키인의 이즈미르 점령 때 그리스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이주, 아시아 담배 ·양털 ·피혁 등을 취급하는 수입상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았다. 1931년 중고 선박을 사들여 해운업에 손을 댔는데, 1939년 그리스 최초의 탱커 선주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과 미국에 협력하여 소득세 면제 ·전략보험 등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잉여선박처분법에 의하여 미국의 전시형(戰時型) 유조선을 포함한 여러 척의 선박을 헐값에 사들인 후, 베슬리헴스틸사의 조선소에 대형 탱커 6척을 발주하는 등, 선복(船腹) 증강에 힘썼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시민권을 가진 두 아들의 명의로 뉴욕에 해운회사를 설립하여 유리한 미국적 선박 불하와 탱커 건조융자 등을 통하여 오나시스패밀리 해운왕국을 구축하였으며, 6·25전쟁 때는 해운업의 붐을 타고 거액을 벌어들였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여러 탱커 선대(船隊)를 편성하여 소코니 바큠 ·텍사스 회사 등과 장기용선계약을 맺고, 석유업의 발전과 함께 번영하였다.
1954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생산되는 석유수송의 독점계약을 맺음으로써 세계 해운업계와 석유업계에 군림하였다. 1968년 미국 대통령 J.F.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Jacqueline Lee Bouvier)과의 혼인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가 죽자 유언에 따라 유산(130억 달러 추산)의 반은 전처(前妻)와 자녀에게, 나머지는 비행기사고로 죽은 자식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오나시스재단에 기증되었다. /naver
[1759년] 대영박물관 개관
1759년 1월 15일 세계최초의 공공박물관인 대영박물관이 개관했다. 18세기 영국의 학자인 한스 슬로언 경이 국가에 6만여 점에 이르는 수집품을 기부하고 사망하자, 의회가 박물관을 세워 사람들에게 개방하게 됐다.
처음, 박물관은 런던 외곽인 몽태규 하우스에 있었지만 1850년에 이사해 지금까지 런던 블룸스버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후 1881년 자연사 소장품들은 사우스켄싱턴의 자연사박물관으로 옮겼고, 민족학 부문 소장품은 1970년에 웨스터민스터 벌링턴가든스의 인류박물관에 따로 전시했다.
대영박물관은 44개의 이오니아식 원기둥으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94개의 전시실에 이집트, 그리스, 로마, 아시아 등지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타우네레, 엘긴 대리석 조각, 크니도스의 데메테르 여신상, 소크라테스의 소형상,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흉상 등이 있다. 2000년 11월 구석기 유물부터 청자, 백자 등 250여 점의 수집품을 전시한 한국관이 신설되었다. /조선
[1850년] 러시아의 수학자, 소설가 코발레프스카야(Kowalewskaya, Sofya) 출생
1850. 1. 15 ~ 1891. 2. 10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다. 소냐라고도 한다. 여자로서 유럽 최초의 대학교수가 되었다. 아버지는 러시아 황제의 친위대 장군이었다. 어려서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1868년 지질학도였던 W.코발레프스키와 결혼하였다.
처음에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1870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베를린대학교의 수학과 교수 K.바이어슈트라스(Karl Theodor Wilhelm Weierstrass)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뒤 편미분방정식, 목성 고리의 모양, 대수함수에 관한 3개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1874년 편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으로 괴팅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83년 스톡홀름대학교의 정교수가 된 뒤, 연구에 전념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1888년 〈하나의 고정된 점을 중심으로 하는 무거운 물체의 회전운동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파리아카데미에서 수여하는 보르댕상을 받았다.
1890년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특별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어린시절》, 《조교수 Privatdozent》 등의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naver
[2000년] '발칸 백정' 아르칸 피살
‘발칸의 백정’으로 불린 아르칸이 2000년 1월 15일 암살됐다. 본명이 젤리코 라즈나토비치인 아르칸은 이날 베오그라드 인터콘티넨탈 호텔 로비에서 입과 눈, 관자 놀이에 총탄을 맞고 사망했으며 현장에선 38구경 리볼버 권총 탄창이 발견됐다.
아르칸은 자신이 조직한 악명높은 민병대 ‘타이거즈’을 이끌고 크로아티아-보스니아 내전에 개입, 악명을 떨쳤고, 1999년 코소보에서도 인종청소를 자행,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아왔다. 17살 때부터 범죄 경력이 있는 아르칸은 1970년대에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서 은행강도를 자행, 적어도 두 차례나 투옥된 바 있다.
이후 고향 구 슬로베니아 공화국으로 돌아와 도박과 밤무대 비즈니스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열정적인 성격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흘러 1990년 민병대 ‘타이거즈’를 창설하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과도 교분을 쌓게 됐다. 미국과 영국은 아르칸 피살 소식에 그를 법정에 세울 수 없게 됐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조선
[1909년] 나철, 대종교 창시(음력)
←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왼쪽에서 두 번째)은 ‘을사오적’ 암살단 행동대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의사(義士) 이절, 나철, 홍필주, 오기호(왼쪽부터)
1909년 1월 15일(음력) 나철이 단군 숭배를 기본으로 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창시했다. 당시 일제치하 속에서,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힘은 민족 의식 고취라고 생각하여 동료 오기호 등과 함께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고 700년 동안 단절됐던 `단군교`를 세웠다. 단군교 창시 1년 만에 ‘대종교’로 개칭했다.
대종교의 근본정신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 인간(弘益人間)`의 정신으로 민족의 평화와 복지를 향상시키려는 데 있었다.
대종교는 항일독립운동에 앞장 서 항일구국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중국에서 동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청산리 대첩에서도 대종교인의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1911년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단체인 중관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대종교는 3대교주 윤세복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는 등 일본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았고,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이 생기자 지하로 숨었다가 해방이후에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조선
[69년] 제7대 로마제국 황제 오토 즉위
황제의 근위대를 사주해 갈바 황제를 살해한 오토가 69년 1월 15일 제7대 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원로원 의원도 오토가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대세에 따라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는 공화정시대부터 명문 귀족가였던 갈바와 달리 신흥 원로원 계급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는 2대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문하생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비롯해 많은 요직을 거친 인물이었다.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오토는 소년시절부터 다섯살 아래인 네로와 함께 어울렸으나 성인이 되어 네로에게 자신의 부인 포파이아를 빼앗기고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쫓겨나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임지(任地)에 도착한 오토가 실의에 빠지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현지 주민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갈리아 총독 빈덱스가 네로 타도의 기치를 들었고, 타라코 속주 총독 갈바가 거기에 홍응해 일어나자 어느 속주 총독보다 먼저 갈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황제가 된 갈바에 의해 로마로 돌아온 오토는 게르마니아군이 자신의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어수선한 틈을 타 갈바를 살해하고 황제에 올랐다. 황제가 된지 삼개월 후 비텔리우스가 다시 내란을 일으키고 초기진압에 실패한 오토는 자신의 침대에서 자살을 함으로 내란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그는 황제시절엔 원로원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지만 그의 뜻깊은 죽음으로 그의 위상이 회복되었다.
[69년]제6대 로마제국 황제 갈바 암살
제6대 로마제국 황제 갈바가 제7대 황제인 오토에 의해 69년 1월 15일 암살됐다. 즉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오토의 사주를 받은 갈바의 근위대는 로마 중심지인 포로 로마노에서 가마에 타고 있던 갈바 황제를 끌어내려 살해했다. 보름전에 집정관에 취임한 비니우스와 30세였던 갈바의 양자 피소도 함께 살해됐다.
오토가 갈바를 살해한 이유는 게르마니아군 7개 군단이 갈바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의했기 때문이었다. 게르마니아군은 라인강 상류를 지키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루푸스를 해임하고 후임에 비텔리우스를 임명하자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판단, 갈바에 반기를 들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런 시대변화를 읽고 있던 원로원 의원 오토는 이 기회를 놓치면 자기한테는 영원히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 갈바를 살해하게 됐다. /조선
그 밖에
2001년 박세리, LPGA클래식대회에서 우승
2001년 백남억 전공화당 의장 별세
1998년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첫 정상회담
1997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내 헤브론시에서 이스라엘 철군에 관한 협정 조인
1991년 제2차 남북체육회담 개최
1991년 언론인, 국사학자 천관우 사망
1990년 한국-알제리 국교 수립
1989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열차 충돌 100명 사망
1987년 김만철 일가 11명 북한 탈출
1980년 문공무,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 재개설을 허가(1977년 5월 폐쇄)
1976년 박정희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영일에서 석유 발견해 매장량 조사중이라고 언명
1974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장준하, 백기완 구속 발표
1973년 미국, 월남전 전면정지 발표
1968년 이탈리아 시실리에 강진, 6,000명 사망
1966년 나이지리아 육군 쿠데타
1964년 키프로스 평화회담
1962년 서울시 시민헌장 선포식
1962년 광화문 전화국 개국
1957년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사망
1956년 소련, 제6차 5개년계획 발표
1951년 파푸아뉴기니 래밍턴산에서 화산가스와 먼지 분출로 4천여 명 사망
1950년 한일무선전화 개통
1948년 분광태양사진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델랑드르 사망
1945년 북조선중앙은행 창립
1943년 미 국방부 건물(펜타곤) 완공
1915년 윤상태, 서상일 등 30여 명 달성에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1910년 영국 총선거에서 자유당 압승
1908년 미국의 핵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 출생
1896년 영국, 프랑스 샴보호조약 선언
1842년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조셉 브로이어 출생
1622년 프랑스 극작자 겸 배우 몰리에르 출생
1597년 정유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