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박도령이라는 농사꾼 총각이 살고 있었다. 일가친척도 없이 혼자 농사일을 하고 나무를 해 팔기도 하면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박도령이 나무를 한 짐 해다 팔고서 돌아오려 하는데 저잣거리 한쪽에서 누가 물고기를 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나다가 무심코 건너다보니 빨간 잉어 한 마리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내가 그 동안 죽어라 일만 하고 맛난 음식은 통 먹어보지를 못했어. 저 잉어가 횟감이 그럴듯하니 한번 사서 먹어봐야겠는걸.'
이렇게 생각한 박도령은 나무 한 짐을 판 돈 전부에다가 쌈지에 들어있던 돈까지 가진 돈을 몽땅 털어서 그 잉어를 샀다. 그리고 잉어를 물통에 집어넣고는 빈 지게에 짊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맛난 고기를 먹을 생각을 하니 흥까지 넘실 났다.
박도령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령님, 도령님-."
누군가 하고 돌아보았지만 근처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박도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길을 가는데 또 다시 누가 자기를 부르는 것이었다.
"도령님, 도령님-."
다시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다. 누가 분명히 부른 것 같은데…….'
집에 도착한 박도령은 도마를 꺼내놓고 부엌칼을 한 손에 든 채 장에서 사온 잉어를 도마 위에 올렸다. 칼로 잉어를 치려고 하는데, 잉어의 눈을 보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슬픈 듯 초롱초롱한 눈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만 같았다. 박도령은 문득 집에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혹시 이 잉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왠지 찜찜한 마음이 남았다. 결국 박도령은 잉어를 죽이지 않고 다시 물통 속에 담가 두었다.
"에이, 난 맛난 음식을 못 먹을 팔자인가봐!"
다음날 박도령은 전날의 일을 까맣게 잊은 채 아침을 대충 차려 먹고 상도 치우지 않은 채 나무를 하러 나섰다. 저녁 때가 다 되어 나무를 한 짐 해다 부려놓고서 방에 들어간 박도령은 깜짝 놀랐다. 분명히 먹다 남은 상을 놔두고 갔을텐데 누가 그랬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과 맛난 반찬이 한 상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
어떻든 시장하던 차에 차려진 음식을 먹어보니 맛이 꿀맛이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같은 일이 거듭되었다. 밖에만 나갔다 돌아오면 누가 밥을 한 상씩 차려놓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날 박도령은 아침에 지게를 진 채 집을 나서서 고개를 넘는 척 하고는 몰래 샛길로 돌아서 자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뒤뜰 구석에 몸을 숨긴 채 집안 동정을 살폈다.
하루 나절이 다 가도록 별다른 이상한 일이 없었다. 박도령이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엌 쪽에서 이상한 서기가 뻗쳐올랐다.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살펴보니, 그 빛은 잉어를 담아놓은 통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통 속에서 어떤 사람이 쑥 나오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펴보니 세상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눈부시도록 예쁜 미녀였다. 처녀는 주변을 한번 둘레둘레 살펴보더니 방에 들어가 밥상을 들고 나와 남은 밥을 먹었다. 그리고는 깨끗이 그릇을 씻은 다음 밥을 짓기 시작했다.
'저 각시가 밥을 해놓았었구나!'
박도령은 소리를 죽인 채 살짝 발자국을 떼어서 처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뒤에서 처녀의 양팔을 꼭 잡았다.
"어머나!"
처녀가 깜짝 놀라서 돌아보자 박도령은 놓칠세라 그 허리를 꼭 안았다.
"아가씨, 나랑 함께 살아요!"
그러자 처녀가 얼굴에 수심을 지으며 말했다.
"아, 이를 어쩐담. 아직 때가 아니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그렇게는 못해요. 당신을 놔줄 수 없어요. 당장 나랑 산다고 약속해 줘요!"
박도령이 끌어안은 손을 풀어주지 않자 처녀가 말했다.
"그래요.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저를 살려주신 분이시니까요."
그 말에 박도령은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기뻤다. 시집을 오겠다는 처녀가 아무도 없어서 혼자서 보낸 긴긴 고독의 세월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눈물까지 핑 돌았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로부터 꿈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행복한 일인 줄을 미처 몰랐었다. 온 세상이 다 제 것과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색시가 말했다.
"서방님, 우리가 이렇게 짝을 맺었으니 저의 어머니 아버지께 인사를 드려야지요."
"그래, 그 생각은 하지도 못했군요. 그런데 처갓집을 어떻게 간담?"
"저를 따라오세요."
도령을 이끌고 길을 나선 색시는 어느 큰 강물에 이르러서 걸음을 멈추었다. 색시는 주변을 한번 쭉 살펴보고는 물위로 삐죽 솟은 풀줄기를 하나 쑥 뽑아서 강물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강물이 양쪽으로 쭉 갈라지면서 뽀얀 길이 열렸다.
"자, 들어오세요."
박도령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색시를 따라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둘이 길을 따라서 들어가고 나자 강물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물속에는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오색이 영롱한 문을 밀고서 안으로 들어가니 눈부시도록 화려한 궁궐 속이었다. 말로만 듣던 용궁이 분명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사시는 곳이랍니다. 아마도 부모님이 소원을 말하라고 하실 거예요. 그러시거든 다른 것을 다 마다하고 구석에 놓인 작은 궤짝을 하나 달라고 하세요."
"알았어요."
색시가 도령을 이끌고 용왕한테로 가서 얼굴을 보이고 그간의 사연을 아뢰니 용왕과 왕비가 무릎을 치면서 기뻐했다.
"네가 그물에 잡혀간 뒤로 죽은 줄만 알았더니 저 도령 덕분에 이렇게 살았구나. 고마운지고. 어디 우리 사위 얼굴 좀 보자."
용왕과 왕비는 박도령의 손을 잡고서 연신 치하를 하다가 소원을 물었다.
"우리 딸을 구해준 귀한 사위한테 선물을 해야할텐데 무얼 할꼬? 아무 것이든 원하는 것을 줄테니 소원을 말해 보게."
둘러보니 방안에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했지만 박도령은 색시가 알려준 대로 구석에 놓인 두 개의 궤짝을 가리켰다.
"저기 저 궤짝들을 저한테 주세요."
용왕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했다.
"귀한 보물을 용케도 알아챘구먼. 하지만 약속한 일이니 할 수 없지."
용왕은 그 두 개의 궤짝을 박도령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둘 중에 하나는 열어도 좋지만 다른 하나는 열어보면 안 된다네. 알겠지?"
"알았습니다."
그렇게 용궁의 보물을 얻은 박도령은 용궁에서 사흘 동안 꿈결같은 시간을 보낸 뒤 색시와 함께 용궁을 나서서 집으로 향했다. 들어갈 때처럼 나올 때 역시 물길이 쭉 갈라져서 무사히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박도령은 궤짝에 든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둘을 놓고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그 중 하나를 골라서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이 괭이와 삽을 들고 쏟아져 나와서 밖으로 나가더니 산자락을 일구어서 밭으로 만들어놓는 것이었다. 어찌나 재빠르게 일을 하는지 수십명이서 수백명 몫을 하고도 남았다. 그들은 날이 저물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궤짝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날마다 궤짝 속에서 일꾼들이 나와서 농사일을 거드니 너른 밭에 곡식과 채소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가을걷이를 해서 내다 팔면 큰 부자가 될 판이었다. 생각만 해도 어깨춤이 절로 추어졌다.
그런데 박도령은 아직 열어보지 않은 또 다른 한 궤짝이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열어보면 안 된다는 말이 귀에 간질간질했지만, 급한 마음에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틈만 나면 궤짝을 이리 살펴보고 저리 만져보던 박도령은 어느 날 아내의 눈을 피해서 그 궤짝을 살짝 열고 말았다.
궤짝을 여는 순간 그 속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이 도끼와 망치, 끌 같은 것을 들고서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나르고 망치질을 하면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땅 위에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텅 빈 허공 속에 집을 짓는 것이었다. 한나절 만에 훌륭한 집이 완성되어 공중에서 구름처럼 넘실거렸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집이었다.
"히야, 이럴 수가 있나!"
그때 어딜 갔다가 집에 돌아온 색시가 그 모습을 보고서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 그 궤짝을 열었군요."
"그래. 그랬더니 저렇게 신기한 집이 생겼어."
색시는 말없이 도령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복이 그렇지요……. 자 집을 지었으니 올라가 봐야지요."
색시가 집을 향해 손짓을 하니 집에서 계단 모양의 사다리가 내려왔다. 박도령과 색시는 그 사다리를 따라 공중에 떠있는 집으로 올라갔다. 그 집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넘실넘실 흘러갔다. 둘은 그 집에서 신비로운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색시는 박도령에게 어딘가 가야 할 곳이 있다며 길을 나섰다. 그러자 박도령 또한 아내를 따라 뒤를 나섰다. 색시의 무심한 발걸음은 전날 함께 들어갔던 큰 강가에서 멈추었다. 색시가 박도령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의 인연은 다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는 당신을 지켜드릴 수가 없어요. 부디 안녕히……."
박도령이 깜짝 놀라서 아내의 손을 잡으려 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안 돼요! 이제 겨우 시작인데!"
그러나 색시는 눈물을 머금은 채 돌아서서 곧바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로 들어간 색시는 잉어의 모습으로 변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박도령이 따라서 뛰어들려 했지만, 길이 없었다. 물풀 줄기를 뽑아 강물을 쳐봤지만 철썩 소리만 날 뿐이었다.
박도령은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다 힘없이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보니, 공중의 집은 어디로 흘러가 버렸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너른 밭에 심어놓은 곡식은 어느새 허옇게 말라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았지만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강가에 찾아와서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 잃어버린 아내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