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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4;1-16. 규례를 어기고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로다. 종교 개혁 주일 2023. 10. 22.
오늘은 506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 개혁은 교회의 역사학적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보통 기독교가 500년을 기준으로 전환기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중세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인 Protestant가 분리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같은 뿌리라고 하지만 시작의 뿌리는 같으나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많은 오류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처음의 초대교회의 본질로 돌아간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개신교인 Protestant입니다. 16세기 그러니까?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는데 이 변화의 물결이 교회와 함께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사회, 그리고 교육과 문화의 모든 영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그 개혁의 물결이 한 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개인과 공동체 속에 새로운 부흥과 개혁과 변화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인가를 기념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난 일들에 대한 회상이나 그것을 재연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기념은 그 시대정신을 기리고 오늘에 적용하여 새로운 변화와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결단과 실천과 출발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새로운 변화와 함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히메지 비전교회도 복음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하면서 설립된 지 17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왜 히메지비전교회가 개혁을 해야 합니까? 그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믿음으로 살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을까? 그래서 말씀대로 살고 믿음으로 영원한 기업을 이어가고 말할 수 없는 은혜와 복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이해서 우리는 무엇으로 기준을 삼고, 주시고 허락하신 영역의 기업을 어떻게 이어가야할까요?
종교개혁의 모토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변화와 개혁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의 대자보를 비텐베르그 성당의 정문 벽에 붙였습니다. 이유는 당시의 성도들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고, 말씀에 바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부패한 교회의 상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삶이 말씀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러웠습니다. 부패한 교회와 함께 신앙의 삶과 신앙의 기준과 신앙을 바로 세우는 정신이 말씀에 맞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카토릭 교회는 전통과 관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에 없는 많은 부분을 정당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기폭제가 되어서 교회를 바꾸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종교개혁에 불을 지핀 것은 당시 로마의 교황청과 교황과 종교 지도자들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하여 많은 돈을 마련해야만 했는데 돈을 마련하는 방법의 하나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교회는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제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고해성사를 받은 사제가 그 당사자의 죄를 벗겨주는 선행이나 고행을 하기 위한 과제를 내어 주는데 그것이 선행이고, 봉사와 헌신과 속죄 제물입니다. 특별히 속죄재물을 요구했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속죄라는 명목으로 구원을 위해서 물질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참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교리적으로 누구든지 세례를 받았으면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인데, 지옥에 가지 않는데, 대부분은 괴로움과 고통이 많은 연옥으로 가게 된다고 현혹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연옥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던지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값비싼 면죄부를 사야만 했습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말씀을 모르니까? 권위와 교회법에 눌려서 순종을 했는데 이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신앙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패에 대한 항의로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인 이 95개 항의 질의서를 게시판에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단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며 변화를 요구하고 고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것이 마르틴 루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모든 성도가 다 여기에 공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용기와 힘을 얻은 마르틴 루터가 교권주의 속에서 극도의 타락상을 보인 중세 가톨릭교회와 종교인에게 세 가지를 요구하는데,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이 것이 개혁의 본질이고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506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종교개혁이 필요한 상황이 아닙니까?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이루어진 개혁의 동기가 지금도 잘 지켜지고 완성되어 갑니까? 목표와 목적이 현저하게 드러났습니까?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삶은 채워가는 여정입니다. 그 채워가는 여정가운데 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내, 자신이 알고 세웠던 목적이 있고, 그리고 내 자신이 알 수 없었고 깨달았다 하더라도 온전하지 않았던 그 목적과 목표가 있고, 어렴프시 알았던 그 목적과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표와 목적이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시고 작정하시고 계획하셨던 목적과 목표이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오늘의 삶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결정과 결단과 결심을 하고 나아갔던, 여전히 나아가는 목표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표이든지 내가 스스로 인지 하고 이루기 위한 목표와 목적이든지 그 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 나의 인생의 빈 그릇을 채워 가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이 빈 그릇을 채워다는 것은 세상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류에 따라가는 것도 아닌, 나만이 가야하는 그 길이고 이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이 되었을 때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이 여정의 채움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개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혁은 쉽지 않고 고독하고 외롭고 홀로 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즐거움이 아니고 새로운 도전이지만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오늘 모르드게와 에스더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입니까? 1-5.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며,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에스더가 왕의 어명으로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엇 때문인가 알아보라 하매 6-12. 하닥이 대궐 문 앞 성 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모르드개가 자기가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를 하닥에게 말하고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하닥이 돌아와 모르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알리매 10.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12.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13-16.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겠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13-14.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가 각오를 합니다.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 앞에 설 수 있는 규례를 어겨서 자신이 죽임을 당하면 죽겠다는 각오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에스더서는 완전한 멸망에서 완전한 구원을 이룬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에스더서에서 네 명을 주목하게 되는데, 모르드개, 에스더와 하만,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모르드개는 남 유다 멸망 후 1차 포로 때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포로 중에 바벨론은 바사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면서 그는 바벨론의 포로에서 바사의 포로로 바뀌었습니다.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은 인도로부터 아프리카까지 127지방을 다스렸습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되는 해에 그가 다스리는 모든 지방의 신하와 장수 와 귀족들을 불러 180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어서 수산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불러 7일 동안 잔치를 열었습니다. 왕후인 와스디는 왕궁에 여인들을 불러 잔치하였습니다. 잔치의 마지막 일곱째 날 왕은 술에 취했고 왕후의 미모를 자랑하고 싶어 왕후 와스디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왕은 진노하심으로 법관들을 불러 자문을 구할 때 이 일을 그대로 넘어가면 바사의 모든 아내들이 이렇게 남편을 멸시할 것이고, 분노가 일어나면 나라가 시끄러워질 것이니 와스디를 내어 쫒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왕이 조서를 내려 아내들에게 남편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도록 했고 전국에서 아리따운 여자들 중에 왕후를 뽑게 하였는데, 에스더는 여러 여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선발이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일찍 부모를 잃었고 그의 사촌인 모르드개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모르드개는 바벨론의 수산에서 대궐의 문지기로 일하면서 에스더를 돌보았습니다. 에스더는 와스디가 폐위된 지 4년 만에 바사 제국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훗날 모르드개의 삶을 바꾸는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궁궐의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원한을 품고 암살을 계획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저들의 암살 음모를 알게 되었고 이 사실을 에스더를 통하여 왕에게 보고하므로 왕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이 사실을 궁중 일기에 기록하였습니다. 하만은 아말렉 왕 하각의 후손으로 바사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자주 괴롭혔던 나라입니다. 아말렉 출신으로 바사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능력과 처세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는 증거입니다. 하만은 왕의 명령을 받아서 모든 신하들을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 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유대인 모르드개는 하만의 발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만은 분노했고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다 사람들을 전멸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날짜를 잡습니다. 에3:7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하만은 은 1만 달란트의 사용을 왕으로 부터 허락을 받았고 지방에 왕의 조서를 내려 아달월 13일에 남녀노소 모든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탈취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가 이 사실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왕의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면서 유다인들도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웠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입을 옷을 보내 굵은 베 옷을 벗기려 했습니다. 장례식에 입는 베옷을 입고는 성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보낸 옷을 받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이 왕의 허락을 받아 유다인을 멸하려는 왕의 조서 초본을 에스더에게 건네주면서 왕에게 나아가 민족의 구원을 간절히 구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지 삼십 일이 지났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왕에게 나갈 때 왕이 손에 든 지팡이를 내밀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르드개의 말 앞에 주저했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향하여 말합니다. 4;13-14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그래서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신을 하는데 에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모르드개는 유다인을 모아 에스더와 유다인의 구원을 위하여 밤낮 삼일을 온전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를 하고 왕을 찾았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죽일 수 있는 에스더를 왕은 기쁘게 맞이하면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며 소원을 묻습니다. 에스더는 잔치를 배설하고 하만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하만은 잔치에 초대받은 것으로 의기양양 했습니다.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궐 문에서 모르드개를 만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엎드려 절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음이 상해서 돌아온 하만은 모르드개의 일을 그의 아내와 친구들에게 말했고 저들은 높이 50규빗 약 25미터 아파트 9층 높이의 장대를 세워 모르드개를 그것에 매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날 밤 왕은 잠이 오지 않아 궁중 실록을 가져다가 읽는데, 오래 전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구한 대목을 보았고 그에게 포상을 내리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침 밖에 모르드개를 장대에 달아 죽이는 일에 왕의 허락을 받으려 찾았던 하만을 불러 포상할 방법을 물었습니다. 하만은 자신에게 주어질 일인 줄 착각을 하고 왕에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왕은 하만을 시켜 그가 대답한 그대로 모르드개에게 황제의 옷을 입히고 황제의 말에 태우고 황제께서 이렇게 대우하신다고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게 했습니다. 다음 날 잔치에 왕을 청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왕은 에스더에게 다시 소원을 묻는데, 에스더는 비로소 자신과 동족 유대인을 학살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화가 난 왕은 밖으로 나갔고 하만은 에스더를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되는데, 그 때에 다시 돌아온 왕이 마침 이 광경을 보고 하만이 에스더를 겁탈하려는 것으로 알고 하만을 장대에 매달게 하였습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만이 세워놓은 바로 그 장대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었고 에스더는 비로소 자신과 모르드개와의 관계를 말했습니다. 왕은 모르드개를 불러 하만에게 주었던 반지를 주고 하만의 집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자신과 모르드개는 살았지만 그녀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곧 전멸을 당할 동족 유대인을 살리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울며 왕에게 하만이 유다인을 해치려 한, 이미 내린 왕의 조서를 신속히 거두어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왕은 모르드개에게 전권을 주었고, 왕의 조서가 철회되었음을 전국에 알렸습니다. 왕은 모르드개를 높여 주었고 수산성의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유다인들은 기쁨으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에9:3-4.각 지방 모든 지방관과 대신들과 총독들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므로 다 유다인을 도우니 모르드개는 왕궁에서 존귀하고 점점 더 창대하게 되었고 그의 명성이 그의 세력이 각 지방에 퍼졌습니다.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존귀하여 점점 창대하매 이 사람 모르드개의 명성이 각 지방에 퍼지더라. 그래서 부림 절을 지킵니다. 부림 절은 유대 절기 중에 가장 기쁜 날입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연회를 즐기고 가면도 쓸 수 있는 날입니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을 수 있고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을 수 있는 날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 자유와 기쁨이 있고 예배가 있고 나눔이 있었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개혁이 유다인의 기업이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17년간 여러 가지 우여곡절 속에서도 히메지 비전 교회를 보호하시고 강하고 크신 오른팔로 이끌어 오신 주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묵묵히 주의 일을 함께 감당하신 교우 분들 모두에게 축복을 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7년 동안 비전교회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왔고, 주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복음을 이어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통하여 때마다 복음의 역사를 이루시고, 중요한 시기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교회를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물론 여러 위기도 있었고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이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비교가 되고 선뜻 수용하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교우 여러분들을 통하여 순종과 복음 전파를 위한 섬김과 가르침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종교개혁507 주년 기념주일에 다시 한 번 바로 세워지고 다시 한 번 주실 은혜와 복을 사모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시고자하는 기업을 이어가는 그런 일을 감당하며 주의 나라가 비전교회와 여러분을 통해서 견고히 세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기업을 이어갔나요?
1.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으로 기업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합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괜히 신앙생활을 잘하고 괜히 열심을 내고 괜히 주의 뜻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업을 이어가려면 그리스도의 몸을 바로 세워야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어떤 몸입니까? 정체성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나에게 무슨 능력과 무슨 권세가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오늘 유다인이 온전하게 세워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먼저는 바벨론의 수산에서 대궐의 문지기로 일하면서 에스더를 돌보았습니다. 에스더를 왕비의 자리에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궁궐의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원한을 품고 암살을 계획하였는데, 모르드개는 저들의 암살 음모를 에스더를 통하여 왕에게 보고하므로 왕이 목숨을 건지도록 했습니다. 이 사실을 궁중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의 발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만은 분노했고 모르드개와 유다 사람들을 전멸시키려고 제비를 뽑아 날짜를 정했습니다. 에3:7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아달월 13일에 남녀노소 모든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탈취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가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유다인들도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웠습니다. 4;13-14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그래서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신을 하는데 에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이 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 네가 만일 잠잠하면 유다인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의하여 놓임을 받을 것이지만 너와 너의 집안은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에스더가 기도를 요청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고 존재입니다. 왜 이런 정체성을 소유하게 하게 하셨을까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신 기업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책임을 다했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 거룩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도 무너질 수 없는 것이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건히 세워지고 그리고 주신 기업과 주시는 은혜를 계속해서 받아 누리시는 그래서 이 땅의 거룩한 존재와 복된 사람들의 증거가 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감독자로 기업을 이어가게 합니다.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감독은 bishop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bishop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bishop, 감독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over seer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역입니다. over seer는 외부로부터 위협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외부로부터 틈을 노리는 그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보호하는 사역입니다. 내부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이 것이 bishop이고 감독자입니다. 양 떼를 지키고 먹이는 비숍입니다. 외부를 주시하는 over seer 감독자입니다. 감독자의 권세가 무엇이고, 어떤 존재입니까?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over seer했습니다. 삼상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어떻게 다윗이 곰이 와서 양 떼를 물어 가는 줄 알았을까요? 어떻게 그 입에서 건져 낼 수 있었을까요? 사자와 곰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었을까요? over seer 감독했기 때문입니다. 비가 올지? 구름이 낄지? 아플지? 먹지 않을지? 복을 받고 은혜를 덧입을지? 기업을 이어갈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흥하고 창성할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엇이라 합니까? 숙맥이라 합니다. 숙(菽)은 콩이고, 맥(麥)은 보리입니다. 크기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확연히 다른 곡식인데, 눈으로 직접 보고도 분별하지 못하니 답답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쑥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숙맥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콩과 보리뿐이겠습니까? 상식과 비정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과 평상 어를 구별하지 못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해를 보고 달이라 하고, 달을 보고 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낮과 밤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진시황제가 죽고 2세인 호해(胡)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곁에는 환관인 조고(高)가 있었습니다. 간신 조고는 진시황제의 가장 우둔한 아들 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했습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시험하기로 했는데, 신하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사슴 (鹿)을 호해에게 바치며 말(馬)이라고 했습니다. 호해가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 조고는 신하들에게 물어보자고 했는데 신하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한 부류는 침묵하는 신하들이었습니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잘못 말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침묵을 했습니다. 또한 부류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들입니다. 분명 말이 아니었기에 목숨을 걸고 사슴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한 신하들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부류는 숙맥이었습니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슴이라고 하는 순간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슴과 말도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이 되기를 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록위마라는 사자성어가 나오게 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떤 혼란의 시대보다 더욱 혼란했습니다. 상식은 몰락하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도술(道術)이 성행했습니다. 혹세무민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주머니를 터는 일이 능력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오직 말씀과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숙(寂)과 맥(麥)을 분별해야 할 기독교가 숙맥의 시대에 기름을 부으며 부추기고 있고, 각종 권력은 그 위에서 마음껏 난세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콩과 보리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의 세상을 침묵파로 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입니다. 그래서 개혁이 필요했고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감독자가 되신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과 공동체와 교회와 사업장과 삶의 현장에서 내부와 외부를 살피고 보호하며, 책임을 지시는 over seer하시는 그래서 여러분 모두에게 영원한 주의 기업이 있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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