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15일(수) 1시20분에 종묘에서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기념 대국민 보고회 및 고유제 봉행"이 있습니다,
조선왕릉 42기중 북한에 남아있는 제릉과 후릉을 잠시 소개 합니다,
조선왕릉 42기중 2기가 북한에 있습니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이 되었는데 북의 2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B2C0D4A58836791)
제릉齊陵 (소재지 : 개성시 판문군 지동(북한소재)
제릉은 신의왕후의 능이다 사진은 동쪽에서 바라본 제릉의 모습입니다,
무성한 잡초위에 낡을대로 낡아 제대로 된 문짝 하나 없는 정자각,겨우 건물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비각,동축의 곡장은 허물어져 자취만 남았고,서측과 북측의 곡장은 담장형식이 아닌 축대형식으로 남아있다,
초기 조선왕조의 능이지만 장명등 앞에 정중석은 없어 보였고,망주석에 뭉퉁스럽게 세호는 보였다,이곳에 신의왕후 제릉의 원찰 원경사가 있다,
신의왕후 [神懿王后, 1337~1391]
본관은 안변(安邊)이고 성 한(韓)씨이다.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이성계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는 고려말 고려 동북 지방에서 밀직사부사증영문하부사였던 안변 한씨 안천부원군 한경과 어머니 평산 신씨사이에서 1337년 출생하였다. 안변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풍류산(청학산)이 위치하고 있던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이 부근지역에 조상 3대가 묻혀있다고 전한다.
한씨 나이 15세때 당시 신분이 비슷한 17세의 이성계와 가례를 올리고 함흥 운전리에 살았으며 이때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과 경신, 경선의 6남 2녀를 낳았다. 정계의 1인자로 부상하기 전까지 고향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는 등 내조가 지대하였다.
고려말 우왕 14년인 1388년 요동 일대와 철령 이북땅을 정벌하기 위해 동원된 10만 대군을 이끌고 우군도통사로 원정에 참여하게 된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의 중지도인 위화도에서 우왕과 최영(우왕의 장인)의 무리한 행군 어명으로 10만 대군이 몰살당할 뻔하는 위기에 처하자 위화도에서 5월 회군하였다. 이때 이성계의 5남 방원은 포천 재벽동에 살던 어머니와 철현에 살던 둘째 부인 강씨를 동북면으로 피난시키던 중 조정에서 이성계의 가족을 체포하려 한다는 전갈을 듣고 숲속으로 피신하여 한동안 노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한씨는 위장병이 악화되어 조선 개국 1년 전인 1391년 55세에 사망하였다.
한씨는 처음에는 해풍군 치속촌에 묻혔다가 1392년 7월 17일 조선 개국 다음날 절비로 추존되고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칭하였다. 이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봉릉하였다. 1398년 11월 한씨 소생 2남 방과 정종에 의해 신의태왕후로 추존되었고 1408년(태종8)에는 태종에 의해 승인순성(承仁順聖) 신의왕태후로 시호를 높였으나 1683년 숙종9년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다시 격하되었다.
자녀
경선공주(慶善公主), 하가(下嫁) 청원군 심종(靑原君 沈淙)
![](https://t1.daumcdn.net/cfile/cafe/170B2C0D4A58836792)
후릉厚陵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북한 소재)
후릉은 조선2대 정종과 정안왕후를 모신 쌍릉이다,
정종은 태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왕후가 1412년에 먼저죽고,1420년에 정종이 죽어 이 능에 묻혔다,
정안왕후 [定安王后, 1355~1412]
조선 제2대 왕 정종의 비.
본관 경주. 성 김(金). 월성부원군 김천서(金天瑞)의 딸. 1398년(태조 7) 남편 영안군(永安君:방과)이 세자가 되면서 세자빈이 된 뒤 덕빈(德嬪)에 책봉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덕비(德妃)로 진봉되었다. 야사에서는 정안왕후가 잠자리에서 정종에게 이방원에게 왕위를 이양할 것을 권하였다고 전한다. 1400년(정종 2) 정종이 세제(世弟) 방원(芳遠)에게 양위하자 순덕왕태비(順德王太妃)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으며, 1412년 5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681년(숙종 7) 온명장의(溫明莊懿)의 존호가 추상되었다. 능은 풍덕(豊德:개성 개풍군)의 후릉(厚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