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면부지의 땅.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
나를 사랑해 주고 내가 사랑했던 대련 성당 식구들에게 떠난다는 인사조차 변변히
드리지 못하고 대련을 떠나 한국에 돌아 온지 5일만에 새롭게 둥지를 튼 이 동네
이름입니다.
옷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정착한 이 곳.
허허 벌판위에 원룸 몇 개만 덩그머니 서 있는…
마치 초기 長兴島(창씽따오)의 적막한 풍경을 연상케 하는 그런 곳이지요.
한가지 다른 게 있다면 그래도 말은 통한다는 것.
“거시기”라는 단어와 “혔당께로”란 억양이 좀 낯설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2009년 7월 20일 첫 출근 하던 날.
명색이 중역인지라 겉으론 반갑게 맞아 주는 척 하면서도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 뼉다귀 인겨?’,
‘지 까이께 얼마나 버티나 보지!’ 하는 경계와 질시의 눈빛이 내 잘생긴 뒤 통수에 날카롭게
꼽히는 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내가 누굽니까?
중원 무림의 고수들과의 서바이벌 게임에서도 죽지 않고 버텨낸 난데 그 까이꺼 뭐
눈썹이나 하나 까딱 하겠는지요.
‘겁 없는 하룻 강아지들에게 진정한 무림 고수의 내공은 차차 보여 주기로 하고… ‘
대충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다 보니 벌써 일주일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오늘로는 벌써 3주가 되었습니다만)
회사 일이야 뭐 워낙 高手이다 보니 별게 아니라지만 문제는 퇴근 후에 뭘 해야할지를
모르겠더라는 겁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주변 회사에 자리잡고 있는 옛 동료들의 환영 파티와 이 곳에
먼저 정착한 선배제현들의 생존 방법을 전수받는 오리엔테이션(?) 으로 보냈다 치지만
매일 밤마다 그 친구들 불러내 술판을 벌릴 수 도 없는 노릇이고…
어쩌다 맨 정신으로 숙소에 돌아오면 무림고원에 갖혀 버린 자신을 발견 합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멀거니 T.V를 보다가 눈을 감아보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럴 땐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으라고 하지만 우선 마음의 안정이 되지않으니 분심이
가득한지라 이리 저리 뒤척이다가 밤 바람이라도 쏘일 겸 밖에 나가 풀밭에 앉아 봅니다.
그런데 덤벼 드는 모기 때문에 그 짓도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여기 모기들은 한번 몸에 붙으면 날아 가지를 않거든요.
빨대를 꼽고 배에 포만감을 느낄 때 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떨 땐 종아리에 너 댓 마리 씩 동시에 붙어 빨아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잡풀 우거진 공터를 바라보다가 언뜻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아 그래! 바로 그거야. 이 곳에 텃밭을 일구는 거야.”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공터로 나가 칡 넝쿨을 걷어내고 잡풀을 뽑습니다.
숙소 옆 원룸 신축 공사장 관리실에서 삽을 빌려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산 흙을 파다 조성된 부지인지라 돌 덩어리들이 박혀 있어 삽질하기도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일구어낸 여섯평 내 땅.
돌멩이 반, 흙 반의 薄土를 밭으로 만드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갈퀴를 사서 잔 돌 들을 골라내고 씨앗가게에서 퇴비를 사다 밑거름을 주고
씨앗을 뿌립니다.
상추와 쑥갓은 파종한지 이틀 만에 싹을 틔웠고,
파 는 나흘 만에 싹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웃 텃밭에서 들깨 모종을 얻어다 심고, 산에 가서 취나물을 캐다 심습니다.
그렇게 여섯평 내 텃밭은 어엿한 농장의 모습을 갖춰갑니다.
퇴근 후엔 물을 주고 풀을 뽑아 줍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새벽 두시든 세시든 상관 없이 그냥 텃밭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 잘 잤니?”
그 녀석들도 반갑게 인사 하는듯 합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에궁 잠도 안주 무시고…”
“인석들아 니들이 보고 싶어 잠이 오지 않는걸 워쪄.”
그 녀석들과 헤어져 혼자 방에 들어가 잠자는 시간 조차 아쉬워 하며 매일, 매시간을
함께하던 어느 날.
밖에 나갔다 와서 차를 주차하고 텃밭부터 들여다 봅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참담한 광경에 그만 숨이 턱 막히고 말았습니다.
깻잎은 모가지가 댕강댕강 부러져 있었고 취나물은 이파리를 다 잘라가 버렸습니다.
어린 순이 예쁘게 올라오던 파밭은 여기저기 발자국으로 짓이겨져 있는겁니다.
“으~~아~~~~~~~~아! 내 윌스~~은”.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란 영화가 생각납니다.
FEDEX. 라는 유명한 물류회사의 부사장이었던 주인공(톰 행크스)은 잠시의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날 회사의 명령으로 전용 비행기를 타고 이동 하던중 기체 추락으로 무인도에
기착하게 되고, 문명세계와 철저하게 격리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칩니다.
관계와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엄청난 외로움을 이겨 내기 위해 짐 꾸러미에서 발견된
배구공에게 상표에서 딴 『윌슨』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머리카락을 만들고 눈,코,입을 그려넣고
마치 사람이기라도 한 양 대화를 하다가 화가 나서는 『윌슨』을 발로 걷어차 버립니다.
그러고는 이내 허전함을 이기지 못하고 미친 듯이 『윌슨』을 찾아 헤매다가 해변가에서 그를 발견
하게 되고 미친듯이 반가워 하며 『윌슨』 에게 용서를 청 합니다.
"윌슨! 우리 화해 한거지? "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때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이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윌슨과 더불어
무인도에서의 처절한 외로움을 이겨내 나갑니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이 흐르던 어느날 마침내 탈출의 기회가 찾아 옵니다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날 주인공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인간적 나약함과 고뇌를 친구
『윌슨』 에게 토로합니다.
."잠이 안와?"
"나도 안와"
"두려워?"
"나도 두려워"
완성된 뗏목에 친구 『윌슨』을 매달고 육지로의 탈출을 감행 하던 중 그만 끈이
풀리면서 친구 『윌슨』과 생이별 하는 장면은 정말 눈물 겹습니다.
파도에 떠밀려 떠나가는 배구공 친구를 향해 “윌~~~스은~~~” 하면서 주인공은
울부짖습니다.
고독한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배구공 『윌슨』
인간이란 동물이 얼마나 고독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치는지를 보여주었던 영화 『패스트 어웨이』.
이 상황에서 그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목이 잘리고 발로 짓 이겨진 내 친구 『들깨 윌슨』을 보면서 나도 울부짖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누웠지만 참담한 심정은 잠을 못 이루게 합니다.
자꾸만 약이 오르고 노여움에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어떤 개쉐히 이든 잡히기만 해 봐라. 내가 우리 『윌슨』 모가지 잘라 버린 것 처럼 똑 같이 해줄껴"
목이 잘리는 순간, 발에 밟히는 순간 얼마나 고통 스러웠을까 생각하니 지켜 주지
못한 미안함에 가슴이 아려 옵니다.
그러나, 이대로 친구 『윌슨』 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다음날 이웃에서 텃밭을 하시는 할머니에게 매실 음료수를 한병 사드리고 들깨 모종을
새로 얻어왔습니다.
달려드는 모기에게 뜯겨가며 겨우 원상회복을 해 놓고 나니 그제서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풀립니다.
어젯밤과 새벽 사이에도 세 번 이나 들여다 보고 왔네요.
물론 오늘 아침 출근하기 前에도 『윌슨』 에게
“다녀올 때 까지 울지 말고 잘 있어” 라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구요.
이대로 무사히 잘 자라 준다면 얼마후엔 상추 모종과 파 를 옮겨 심어줄 계획입니다.
깻잎은 따서 짱아치를 담그고, 파 는 잘 키워서 김장때 마눌에게 보내줄 요량입니다.
상추와 쑥갓은 이웃들과 나누고요.
이 삭막한 곳에서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는거.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또 다시 가족과 떨어져 살아 가야 한다는거.
밤이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반겨줄 이 아무도 없다는 거.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는 말처럼 어차피 이게 내 운명이라면 고독을 즐기려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사랑스러운 내 친구 『윌슨』과 낯선 땅 에서의 모진 삶을 오순도순 함께
꾸려 가려 합니다.
l 또 새로운 곳에 정착한다는게 만만한 일이 아닌지라 카페에 글을 올릴 엄두를 못냈습니다.
사랑하는 대련 성당 가족 여러분께 자주 안부 전하지 못한 죄송함을 글로 표 합니다.
l 하얀거미의 『윌슨』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쭈~~욱
첫댓글 한국으로 아주 들어가셨네요..자매님께는 인사도 못드렸는데...어디계시던지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
대련을 떠난다는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떠나기가 싫어서 변변히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카페지기님이 이 카페를 잘 지켜주고 계셔서 마치 함께 있는것 처럼 편안하답니다, 아주 떠난게 아니라 잠시 다니러 갔다고 여겨 주시면 안될까요? 며칠후면 다시 미사시간에 뵐사람인듯 말입니다.
하얀거미님!저도 남편이 대우통신 다닐때 주말농장을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면 주님이 주시는 비와 햇빛을 머금고 자라는 식물을 보면 얼마나 신기하던지요.윌슨이야기가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가 되길 기대하겠습니다.힘내시고 화이팅!!
황무지에 텃밭을 일구는 마음자세로 황무지 같은 제 마음에도 신앙의 싹을 틔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화이팅 하겠습니다. 저는 방금 목포 옥암동 성당 10시30분 교중 미사 참례를 하고 왔습니다. 격려에 감사 드리며 말씀하신 대로 생활해 보겠습니다.
한국에 계시는군요....윌슨 이야기 다음번을 기다리겠습니다.... 시원스럽게 삶을 그려주신 글이 감동입니다 무공해적인글..ㅎ 항상 평화 있으시길 빕니다!!
그냥 저냥 숨쉬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옮겨 보았는데 시원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녀석들을 유기농 농법으로 키워 보려고 발효 퇴비만 주고 화학 비료는 일체 쓰지 않았는데 '쑥갓'윌슨이 살은 찌지 않고 비리비리 키만 쑥쑥 자라서 걱정입니다. 요소비료를 써야 할지 고민중입니다. 님께도 평화 있으시기를~~
역시 하얀거미님 이십니다. 소식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뭐 좀 좋은글 하나 안올려 주시나 많이 기다렸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간에 믿음생활을 바탕으로 의연하게 생활하시고 개척해 나가시는 모습은 하느님 보시기 좋을뿐만 아니라 저희들에게도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 같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주님의 평화가 항상 하얀거미님 가족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안부 늦어 죄송합니다. 누군가에게 괜챦은 사람으로 기억 된다는거. 그거 아주 행복한 일이랍니다. 안셀모님의 격려 덕분에 다시한번 "으라차차" 힘을 내 봅니다. 더운 여름 날씨에 건강 유념하시구요. 항상 기쁜일만 있으시기를 기도 합니다.
형님! 모처럼만에 들어온 성당카페에서 그러잖아도 이 양반이 분명 글을 올려 놓으셨을텐데 하는 기대를 가지고 글을 검색했더니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군요.. 머나먼(?!?!) 전라도 땅에 가셔서 창조를 이어가시는 형님은 분명히 하느님의 사업을 계속 이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양로우추완 집에서 위미(옥수수)를 구어놓고 맥주 한잔에 위미 한알을 뜯어먹던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옵니다. 이렇게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신 형님께 다시 한표 꾸~욱!!! 항상 건강하십시요,.. 그리고 대련 천주교 공동체를 위하여 쫄깃하고 맛있는 수필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지금 대련은 "양로우 추안" 거리 카페가 한창이겠군요. 그대와 함께 했던 즐거운 순간들을 기억 합니다. 좀더 함께 있었더라면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텐데..., 떠나고 보니 모든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안주의 貴賤 , 술의 淸濁과 자리의 高低를 마다 않던 나의 사랑하는 酒友여. 나 여기서 이렇게 필부의 삶을 이어가리니 언젠가는 다시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기다림으로 살아 갑시다. 더운 날씨에 건강 유념 하시고 항상 활기차게 살아가시기를...
아~~~윌슨을 많이 설명하시드니... 이제야 ..자매님이 계시니 지금은 괘안치요... 자다가도 웃음이 나서 씩씩대며 그 누눈가를 꼭 잡고야 말텐데 하실떄 필요한 사람이니 봐주라고 하였지만 ???? 그래도 윌슨들이 잘자라고 있네요~~~ 샬롬
워더 흐언 하오 펑요우! 니 하오?새로 얻어다 심은 들깨 모종이 잘 자라서 첫 수확을 거뒀다오. 깻잎에 양념한 된장을 발라 짱아치를 담궜더니 맛이 일품이라오.정성스레 물을 주고 풀을 뽑아 주었더니 그새 많이 자랐습니다. 이달 말쯤이면 쑥갓과 실파가 어우러진 상추쌈을 먹을 수 있을것 같소이다. 방문해 주신다면 멋진 무공해 야채쌈 파티를 벌여 보련만... 안되면 사진으로라도 함께 즐겨 보십시다.
흰 거미씨^^ 그대 농장의 윌슨...희망. 기다림. 셀레임. 환희. 감동... 그 무엇으로 표현이 가능할까? 그대는 나의 윌슨 그대는 그대 앞에 모셔두고 있는데... 나만 덩그러니... 그래도 또 하나의 나의 윌슨이 지켜주고 있어 행복 하오이다...^^
내 친구 방가! 오랫만이오. 내가 그대의 윌슨이 되어드리리니 희망을 갖고 사시구려. 늘 그러했듯 나의 삶은 고단한 일과의 연속이라오. 다만 표현하지 않으려 애쓰고 살아갈 뿐이지요. 참고 또 참다가 안되면 숨어버리고..., 그리 살아온 대련에서의 일상을 그대는 아시지 않소이까? 숨어 있으면 바로 찾아내 위로가 되고 함께 고민해 주었던 그대의 사랑을 기억하오. 그리고 그대가 보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