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내 눈이 있고 바깥에 대상이 있어서 본다고 생각합니다.
바깥에 대상이 없으면 못 볼까요?
바깥의 대상을 눈을 감으면 안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걸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갖가지 색깔을 다 보고 있는데, 사실은 빛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 색깔 저 색깔로 드러날 뿐이지 이 색깔 저 색깔이 따로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전부 다 검게 보이잖아요. 사실은 이 색깔이 실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빨간색이 진짜 빨간색이 아니고 파란색이 진짜 파란색이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분별해서 봤을 뿐입니다.
우리는 가시광선(可視光線)의 영역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시광선 영역에 있는 빛의 파장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파란색이야, 빨간색이야’라고 분별하지만 우리와 좀 더 다른 것을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색맹(色盲)이나 색약(色弱)이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다른 색깔로 봅니다.
또 가시광선이 아닌 자외선(紫外線)만 보는 곤충이 있고 적외선(赤外線)만 보는 곤충도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 세계는 다르게 보이겠지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하나의 물을 천상세계의 신들은 아주 투명한 유리로 보고, 물고기는 그냥 집으로 보고, 아귀(餓鬼)들은 피고름으로 본다고 합니다.
우리도 똑같은 물이지만 목마를 때는 마시고 싶은 시원한 물이지만, 예를 들어 물고문을 당한다면 물이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오겠지요.
이와 같이 고정된 실상이 없는데 우리가 분별해서 보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봄이라는 그 자체는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으로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첫 번째 자리에서는 분별 이전에 ‘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저것을’ 본다는 ‘분별’이 두 번째로 일어납니다.
첫 번째 자리, 분별 이전에는 그냥 하나의 ‘봄’, 하나의 ‘들음’만이 있습니다.
경전에서 ‘볼 때는 볼 뿐, 들을 때는 들을 뿐’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곧 ‘있는 그대로 보라’, 위빠사나, 정견하라는 말인데, 이것이 곧 보는 나와 보는 자로 둘로 나누어 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
(내일 계속)
<법상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