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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라 (최한나)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절 말씀 아멘!!
이 밤, 예루살렘의 거리는 적막에 싸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긴 시간 동안 기다려도 변함없는 듯한 일상이 반복된다. 그러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앞에서는 세상의 흐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이야기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후,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으시고 그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조용히 입을 여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 모든 이들에게 영원히 새겨질 명령이었다. 그 어떤 율법의 교훈도, 그 어떤 인간의 철학도 이보다 더 강력하고 진실된 것은 없었다. 사랑,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자, 그분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가장 중요한 유산이었다.
“새 계명”이라는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그 의미는 단순히 이전의 사랑을 반복하거나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새로운 계명은 완전한 사랑을 요구한다. 기존의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이 주신 이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미 제자들에게 충분히 보여졌고, 그 사랑은 모든 다른 사랑의 모델이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과 사람들의 죄를 덮는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 사랑을 그대로 전하라 하셨다. 이 사랑은 감정적 애정이나 일시적인 동정심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셨다. 그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처럼, 그 사랑은 자기를 버리고 타인을 위하는 사랑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새 계명의 핵심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이셨다. 그 사랑은 배반자에게도 흘러갔고, 부인자에게도 흘러갔으며,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도 흘러갔다. 예수님은 사람의 조건을 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방식이어야 한다. 그것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이었으며, 자격이 없는 자에게도 다가가는 사랑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서로의 조건을 따진다. 사랑이란 말 속에 ‘이 사람은 사랑할 만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은 우리가 그럴 자격이 없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사랑은 단지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주신 이 명령은 단순히 서로를 좋아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돕고, 섬기고, 용서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다시 말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사랑이었다. 세상에서는 사랑을 조건적으로 주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랑의 삶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의 삶을 보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 우리의 사랑이 세상에 대한 가장 큰 증거가 된다.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며 “저들은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교회의 크기나 설교의 길이, 혹은 우리가 아는 신학적인 지식으로 세상에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명하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에 있다. 교회가 크고, 설교가 뛰어나며, 지식이 많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사랑이 없는 신앙은 아무리 뛰어난 교리와 형식을 갖추어도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 자체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세상에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 시작된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품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방식이다.
사랑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약하고, 감정적인 반응으로 여길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의 모든 죄와 고통을 덮는 강력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우리가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된다. 세상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세상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갈망하지만, 사랑을 경험할 기회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세상은 상처받고, 서로를 미워하며, 갈등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사랑으로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그 사랑을 보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단지 교회에 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 세상 속에서 살아나는 방식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 세상의 기준을 따를 것인가?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조건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사랑은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서로 사랑하라는 그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이 사랑을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 이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기도하며,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자.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증거가 될 것이다.
6.예수님은 양의 문(2)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7-9절 말씀 아멘!!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을 만난다. 집의 문, 학교의 문, 직장의 문, 그리고 새로운 인생의 문이 있다. 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다. 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이며, 보호와 안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때로 문은 기회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어떤 문은 철저한 배제와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에서도 문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셨을 때, 죽음의 사자는 그 집을 넘어갔다. 여기서 문은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한다. 또한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이는 구원의 길이 넓은 길과 다르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걸어가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문은 중요한 신학적 상징을 가진다. 그리고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 예수님의 이 선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삶과 구원에 대한 결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내가 양의 문이라”(7절)고 말씀하셨다. 문은 출입하는 곳이며, 길과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하신 것은 단순한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님뿐임을 강조하는 선언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와 철학이 있지만, 성경은 구원의 문이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임을 선언한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밤이 되면 양들을 우리 안으로 인도한 후, 직접 문 앞에서 잠을 잔다. 다시 말해, 목자 자신이 문이 되어 양들을 지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신 것은,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시며,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은 선한 행위, 철학적 깨달음, 종교적 수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
이 세상에는 수많은 문이 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참된 문이시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른 모든 길을 배제하는 선언이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구원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자유와 풍성한 양식을 제공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수 있다.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자유로운 생활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유를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자유를 다르게 정의한다. 참된 자유는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자유를 주시는 문이 되신다.
그리고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꼴을 얻으리라”라고 약속하셨다. 이는 단순한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만족과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문이 되실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을 거부하면 생명의 문이 닫힌다. 예수님은 문이 되어 우리를 생명으로 초대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문이 영원히 열려 있는 것이 아님을 경고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이 도착했을 때, 미련한 처녀들은 문 밖에 서서 애타게 두드리지만, 이미 문은 닫혔고 그들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마태복음 25:10-12). 노아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을 때, 밖에 있던 사람들은 구원의 기회를 놓쳤다(창세기 7:16).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셨지만, 우리가 거절하고 머뭇거린다면, 어느 날 문이 닫힐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문이시다. 예수님은 단순히 좋은 스승이나 선한 지도자가 아니라, 유일한 구원의 문이시다. 예수님은 단순히 마음의 위로자가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문이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들어가야만 하는 유일한 문이시다.
여러분은 어느 문 앞에 서 계십니까?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문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예수님을 우리 삶의 유일한 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7.예수님은 선한 목자(1)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요한복음 11:15절 말씀 아멘!!
성경에서 목자는 단순히 양을 기르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목자는 양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존재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목자로 묘사되었고(시편 23:1),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셨다(요한복음 10:11).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1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나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이 말씀은 단순히 나사로의 부활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진정한 선한 목자이심을 나타내고 계신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왜 선한 목자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 수 있는지를 함께 보겠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1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목자는 단순히 양을 기르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존재였다. 다윗은 어린 시절 사자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삼상 17:34-35), 모세도 광야에서 양 떼를 돌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준비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선한 목자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요 11:15)라고 말씀하시며, 직접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신다. 이 말씀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실 예수님의 희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8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 속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곧 죽음의 위협이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으시고 “그에게로 가자”고 말씀하시며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신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때때로 우리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가장 위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로,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나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1:15)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과정임을 알고 계셨다. 우리의 삶에도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슬픔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절망에서 소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다. 이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26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한 인도자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 자체이시다. 우리는 세상의 길을 따라가려 하지만, 참된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요한복음 10:27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리고 나사로는 죽음에서 일어나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 나왔다. 이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들도 있음을 경고한다. 요한복음 10:26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전통에 갇혀 예수님의 음성을 거부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러나 참된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른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목자이시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1:15을 통해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심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목자이시다.
둘쨰,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다.
이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정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나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 있는가?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지만, 참된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님께 있다. 오늘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8.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태복음 11:7-11절 말씀 아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단순히 과거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 질문은 단순히 세례 요한에 대한 궁금증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이다. 우리는 오늘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신앙의 목적, 우리의 기대,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려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을 왜 찾았냐고 묻지만, 사실 그 질문은 우리 각자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활동하는 예언자였다. 당시 유대 사회는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부패 속에 있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라고 외쳤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알려졌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이 광야로 나가게 된 이유는 단순히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싶어서였으며, 그가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에 대해 큰 기대와 소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 구원자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가 단순히 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실 구원자가 올 것이라는 예고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품고 광야로 나갔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단순히 외치는 자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기대 속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물으셨을 때, 그 질문은 그들의 기대와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점검하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의 질문 속에는 담긴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찾은 이유에 대해 묻고 계신다. 그들이 광야에 나가면서 무엇을 기대했는지, 무엇을 보려 했는지 묻고 있다. 이 질문은 사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목적을 돌아보게 한다. 예수님은 그들이 세례 요한을 단순히 ‘예언자’로만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역사를 찾고 있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단지 외치는 자로 보지 말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원하셨다.
우리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묻는 이 질문을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목적과 기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왜 믿고, 무엇을 기대하며 신앙 생활을 하는가? 우리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일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길을 예수님에게 내어주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게 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두고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갔더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기 위한 준비였음을 설명하셨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높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우리의 신앙 생활을 예수님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세상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는 단지 세례 요한을 향한 질문이 아니다. 우리 각자에게 던지시는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따라가면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구속자로 믿고 따라가야 한다.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오늘 이 질문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계획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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