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도단
제가 열반에 대해 설명을 하자 한 분이 이런 견해를 내어주셨다.
“열반은 깨달음의 영역이므로 언급을 회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선(禪)에서 하는 말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언어도단 심행처멸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言語道斷 心行處滅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 글은 선의 핵심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이것을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열반, 즉 깨달음이라는 것은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 경전이나 교리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마음이 끊어진 곳이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희론은 그만두고 곧바로 마음을 보아 깨달음에 이른다.
나는 그렇게 선에 심취한 사람들에게 항상 반론을 제기한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열반이 무엇인지 대충 알아야 그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목적지가 어딘지 지도를 보고 대충 감을 잡아야 중간에서 헤매지 않겠습니까? 물론 지도를 보는 것과 목적지의 아름다운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곳은 각자가 깨달아야만 아는 것으로 선사들은 은유적으로 선문답 형식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구구절절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곳입니다.”
“언어도단이라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깨달음(열반)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입을 여는 순간 벌써 틀린 것입니다(開口卽錯). 단지 묵묵히 걸어가 보아야만 아는 것입니다.”
“선종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선종의 수행 가풍에서는 알 수 없는 의심덩어리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미리 알려주면 의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미리 대충이라도 알려주면 사람들은 그것을 관념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즉 ‘무아’다 라고 하면 어떤 텅 빈 것을 상상하며 관념으로 그런 상태를 만들어 눌러앉아 있습니다. ‘실체가 없다.’라고 하면 몸과 마음의 행위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하면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대승불교의 경전과 교리가 수행과 상관없는 관념철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승의 철학에 심취한 사람들이 실제로 수행은 하지 않고 머리로 헤아려 알려고 합니다. 선종에서는 그것을 거부하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남방에서도 언어도단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일일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경계한다. ‘열반은 무아를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하면 상상으로 어떤 텅 빈 상태를 만든다던가, 공한 상태를 관념으로 만들어 그곳에 들어앉아 있다. ‘열반은 생각이 끊어진 곳이다’라고 하면 생각을 정지시켜 놓고 깨달았다고 하거나 의식이 끊어진 무기(無記) 상태에 들었다 나와서 깨달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남방에서도 스승은 목적지를 설명하지 않고 방향만 잡아준다. 가다가 샛길로 빠지면 다시 바른 길로 데려온다. 호흡이 끊어지고 깜깜한 상태에 들었다 나와서 깨달았다고 주장하면 ‘그건 아니야. 무기야’라고 지적한다. 남방에서도 그렇게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언급을 회피한다. 그렇다고 남방에서는 열반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초기경전과 아비담마에 나오는 열반에 대한 설명을 모아 본다.
“열반은 사성제(고집멸도)의 세 번째 진리인 멸(滅)에 해당한다. 열반은 불사(不死)의 경지(amatapada)이고 불멸의 경지(accupada)이다.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 번뇌의 소멸, 오염원의 파괴, 이기심의 제거, 족쇄(속박)에서 풀려남이다. 열반을 체험한 성인은 얻음과 잃음,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즐거움과 괴로움에 흔들리지 않고 완벽한 평온 속에 노닌다.”
이렇게 열반을 설명하면 선에 취해있는 사람은 언어도단 심행처멸인데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하겠지?
"그런데 어쩝니까?. 이것은 붓다의 말씀인데요."라고 하면
"그러니까 그것은 여래선이야. 조사선은 그 위에 있어! 언어도단이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야!"
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나도 언어도단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언어도단이라는 말을 다르게 생각한다.
‘무아라고 설명하는 것과 실제로 무아를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열반이라는 말과 열반을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라고.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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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218번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닙바나를 간절히
바라며 마음을 기울여 나아가는 사람
도과의 기쁨을 맛보며
욕망의 세계로 물러나지 않는 사람
그를 향상일로(向上一路)를 걷는 사람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