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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 이것은 앞 단락의 권면을 간결히 요약한 것이다. 또한 이 부분은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에서 끌어낸 결론으로서 이제 더 이상 서로 판단,비판하는 습관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면은 강한 자와 약한 자, 양 집단 모두에게 주어진 교훈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마 7:1과 그 병행구에 나타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에 이 본문이 의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이것은 특별히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다. 사람의 행동이 형제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특히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다.
예컨대 바울은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바울은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할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바울이 믿음이 강한 형제라고 직접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형제 앞에 거치는 것을 놓치 말라는 이 훈계에서 믿음이 강한 형제를 염두에 두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앞에서도 믿음이 강한 형제들에게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말라고 경계한 바 있다(3, 10절). 이제 본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연약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주의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부딪힐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콤마'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게까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론'은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마련된 장애물 또는 덫을 뜻한다. 즉 이 용어는 죄로 끌어 들이기 위해 유혹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묘사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 지는 것을 만류하려 했을 때 '스칸달론'을 베드로에게 사용했었다. 그리고 이 두 용어는 의도적으로 형제를 꾀어 그에게 죄가 되는 것을 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경고로서 사용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동기가 한 형제를 '연약한 자'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순수한 열망에 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본절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1) 그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것과 (2) 다른 형제들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의 훈계는 강한 자들의 어떤 행동이 다른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도 있고 근심되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강한 자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일을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 ?'를 늘 생각하여 공동체의 건덕을 위해 사려깊은 행동을 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롬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 이는 강조적 문구로서 절대적인 자기 확신을 말한 것이다. '확신하다'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용례를 보면 갈 5;10;빌 2:24;살후 3:4에서 강조 완료 능동태 1인칭으로 '주 안에서'(엔 퀴리오)라는 어구와 그 뒤에 '호티'절과 함께 쓰여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페이도'의 완료 수동 1인칭 단수인 '페페이스마이'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이다 카이''내가 알다'가 앞에 놓임으로써 '페페이스마이'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또 본절에서는 다음에 '예수'라는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는 '호티' 의 내용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주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거기에다 '확신한다'는 말을 수동형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 바울이 가진 확신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생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얻은 객관적인 진리임을 의미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복음 안에서 갖는 확신임을 뜻한다. (2) 바울이 여기서 예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은 역사상의 예수의 어떤 특정 가르침, 즉 마 15:10, 11, 15-20;막 7:15-23 등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아울러 자기의 확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위의 세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여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합니다'고 강력하게 자기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 이 말은 바울이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진리로서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의 헬라어 '디 헤아우투'는 '그 자체가' 혹은 '본질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물 그 자체'를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인간들의 행위, 태도, 욕구, 사고 등에 대해서 논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피조 세계의 자원,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먹는 음식으로 주신 모든 것 그것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없으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의 헬라어 '우덴'은 본절에서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이논''속된 것 이란 단어 역시 그 자체는 불견하고 순결치 못한 것 특히 율법의 의식에서 깨끗치 못한 것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어떤 음식물도 그 자체는 속된 것, 즉 불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 결국 바울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본절에서 뿐만 아니라 딤전 4:4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확언함으로써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음식물에 대한 강한 자들의 기본 입장과 사도의 견해가 일치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취해야 할 정당한 원리가 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1) 바울의 주장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확신하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가운데는 모든 음식물이 그 자체는 깨끗하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2) 창조에 관한 말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의 견해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창조 기사의 말씀과 그 원리를 같이하고 있다. (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바울의 확신은 아주 타당한 것이다(히 9:12). 이는 '속되다', '속되지 않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구약 율법의 의식적 부분에 관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새 시대가 도래하여 옛 시대의 그 의식법에 문자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없다. 신약의 빛 아래 사는 우리는 이제 구약의 그 의식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즉 그리스도 그분을 믿을 때 그 의식에 순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구약의 의식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주어진 이상, 그리고 구약의 율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영원하신 속죄의 제물이 되어 거룩한 사역을 완성하신 이상,
이제는 더이상 구약의 율법 의식에서 불결한 것과 정결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문자적으로 매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런 진리를 파악하여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하여' 율법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음식이 더 이상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이런 진리를 아직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신자들, 즉 진리 안에서 내적 자유를 얻지 못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의식법에 대한 문자적 순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종교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금지되었던 고기들은,음식물은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스스로 속되게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여전히 불결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는 바울의 확신을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음식물을 깨끗하지 않다고 그의 마음에 확신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그 음식물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된다.
[롬 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가르'('왜냐하면')는 바로 앞절(14절)과 연결된 접속사가 아니라 13절 하반절과의 연결 접속사이다. 14절은 삽입절이다. 즉 '연약한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말 것을 결심하라 왜냐하면(가르)는 만일 그것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렇게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강한 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수락한다는 점을 명백히하고 동시에 그러한 태도에는 잊지 말아야 할 중용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여기서 '근심하게 되면'의 헬라어 '뤼페이타이'는 '뤼페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수동형으로서 '어떤 일의 영향을 받아서 양심의 괴로움을 겪는 것'을 말한다.
또는 '어떤 일로 인하여 신앙의 압박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고민에 쌓인 것'을 뜻한다. 요컨대 상처받은 양심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즉 믿음이 약한 자가, 자유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 때문에 아직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어떤 일을 행하게 된다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의 신앙의 순결성과 성장에 손상을 입을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자유가 제한을 받아야 함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바울은 자유의 구가가 보다 중요한 형제 사랑에 의해 절제되어야 할 것을 호소하면서 성도의 생활과 행동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 의식적인 율법과 관련한 자신의 내적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강요함으로써 아직 깨달음과 행위가 거기에 이르지 못한 형제를 근심케하고 영적으로 파멸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짓밟는 행위임을 말한다. 루터(Luther)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어떤 것이 정당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형제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당신은 잔인한 살인자와 같다. 뿐만 아니라 내 형제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는 것이 되기에 그것은 온갖 종류의 잔인성을 능가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약한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도 죽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염두에 둔 것이다.
(1) 한 형제의 소중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한 형제임을 생각할 때 그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 하더라도 사랑으로 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도 남는 것을 교훈한다. (2) 형제를 근심케 하는 일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자유의 구가보다도 사랑의 원리를 따라 형제를 생각하며 행동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의 희생(犧牲)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내와 희생이 거절되어 자기의 판단대로만 행하므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근심케 되어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짓밟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모울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주께서는 너의 상처받는 형제를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너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의 행동은 너의 강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상처받은 형제에게 파멸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간주되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우둔하고 편협하며 이기적인 자유로 인하여 네가 경시한 이 상처받은 영혼을 주님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너무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망케 하다' 말은 대체적으로 네 가지로 해석된다. (1) 한 영혼을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2)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실족한 자리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3) 철저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Meyer). (4) 인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1), (2)의 견해를 취함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바울이 연약한 자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말 것을 촉구한 것(13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물론 연약한 자가 계속 죄를 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자리에 있다면 결국 멸망에 빠지게 됨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3)의 견해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형제를 넘어뜨리는 일의 위험성과 이로 인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강한 자들에게 하는 데 있다. 즉 자유에 대한 자기 본위의 주장은 연약한 자들을 무너뜨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냉엄하게 책망한 것이다.
[롬 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이 구절은 적어도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1) 이 구절은 강한 자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인가 ? (2) '휘몬 토 아가돈'('너희의 선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3) 사도가 언급한 비방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1)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너희의'는 강한 자들만을 가리킨다 (나)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를 가리킨다.
(가)의 견해가 더욱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도는 바로 앞절에서 강한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을 근심시키거나 망케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앞절의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2)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여기서 '너희의 선한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가)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언약적인 모든 축복을 총괄하는 선이다. 즉 의와 구원까지 포함한다. (나) 강한 자들이 누리는 자유, 특별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말한다. (다) 하나님의 왕국. (라) 믿음). (마) 복음. (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 전부와 복음위의 견해 중 (나)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첫번째 문제에서 이 구절이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지지했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 역시 강한 자들이 행사하는 '신앙의 자유'를 말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가)나 (마)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이 훨씬 더 심각한 한 가지 위험에 대해 강한 자들이 자유 행사를 이기적으로 고집함으로써 이 자유보다 훨씬 더 존귀한 '아가돈'('선')에 대해 해(害)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가돈'은 강한 자들의 '아가돈'임과 동시에 약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아가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아가돈'은 복음 그 자체, 곧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관거에 행하셨고 지금도 행사하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강한 자들을 향해서 경고되고 있는 현재의 문맥을 뛰어넘는 해석이다.
한편 (3)의 문제에 대해서도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가) 바울이 비방자들로서 염두에 둔 사람들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다/(나) 교회 내의 약한 신자들, 즉 채소만 먹는 약한 자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의 입장을 취함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선한 것'이 복음, 혹은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당연히 (가)번의 견해를 취하겠지만 이 구절이 강한 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또한 '아가돈'이 '강한 자들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다)번의 견해를 취함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본절은 강한 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약한 자들에게 여러 손상(13, 15절)을 끼칠 수도 있고 또한 교회내에 불협 화음을 일으킬 수 있기에 특별히 그러한 비방을 받지 않게 주의하라는 경고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이 생길 때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