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붙이 하나 없는 결혼식 사진... '38 따라지' 남자의 일생
▲ 38선 통과지점의 경원선 철로. ⓒ 윤태옥
한탄강철교 남단, 미군과 소련군이 만나 직접 세웠다는 38선 표지를 돌아보고는 한탄강을 건넜다. 이른 아침 물안개가 올라와 한 폭의 수채화가 펼쳐졌다. 마침 한탄강 강변에 일찌감치 문을 연 카페가 보였다. 테라스의 테이블에 동반자들과 둘러 앉아 쌉쌀한 커피를 마셨다. 커피 향이 아직 온기를 품고 있을 때 나는 한탄강을 일곱 번째 건너면서 비로소 38선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남두용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어느 청년의 일대기
▲ 학생 시절의 남두용. (사진 제공: 남명애)
남두용은 1920년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지금의 청진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함경도의 명문 경성고보를 다녔다. 일본인 수학선생의 실력이 형편없어 몇몇이 작당하여 백지 답안지를 내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4학년(1938년)에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경원선을 탔으니 철원, 연천, 전곡을 지나 한탄강철교 직후 바로 이곳을 통과했다. 첫 번째 38선 통과는 신나는 수학여행이었다. 물론 38선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로 진학한 남두용은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고 무난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독립운동이나 반일운동은 국내와 만주 모두 질식사를 할 정도로 위축된 상태였다. 국내의 조선공산당은 완전히 지하로 숨어들었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은 소련의 영토 연해주로 피신했다.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 역시 팔로군과 연합하고는 있었으나 혹독한 시련을 견디는 중이었다. 임시정부도 생존에 급급한 처지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남두용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도쿄-시모노세키-부산-경주-대구-개성-서울-경원선-함경선의 여정으로, 약간의 유람도 하면서 귀향했다. 한탄강철교를 네 번째 통과할 때도 그 지점이 북위 38도인 것을 인식할 리 없었다.
귀향하자 학도병(1941.1~45.8)으로 끌려가게 됐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술독에 빠져 허우적댔고 입대 후 세 달이 지나자 체중이 48킬로그램까지 빠졌다. 당시 조선 청년들의 시대적인 고민 그대로였다. 그는 중국이나 남방 전선으로 차출될 것에 대비해 나름의 방책을 세웠다. 전선으로 끌려가면 탈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탈출 이후의 생존자금을 24시간 몸에 지닐 방법을 찾았다.
▲ 남두용은 탈출자금을 오마모리에 숨겼다 - 일본군에서 개인용품은 검사대상이었지만 오마모리는 상관들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제공: 남명애)
집에 연락해 조선은행이 아닌 일본은행이 발행한 1백 엔짜리 지폐로 2백 엔을 마련했다. 도쿄 유학생 한달 하숙비가 20엔이었으니 결코 작은 돈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인 병사들의 호신용 부적인 오마모리라는 주머니에 현금을 넣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오마모리는 소지품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 학도병들 누구나 끊임없이 탈출을 생각했을 것이다.
탈출 자금을 준비하는 한편 남두용은 학도병 생활에 적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군사훈련과 내무생활에 모범이 되려고 애썼다. 그의 상관은 남두용을 좋게 평가하여 교육 조교로 내심 정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남두용은 전선으로 차출되지 않고 조교로 남을 수 있었다. 남두용은 함경북도 회령의 관동군 보병부대에 배치됐다. 같은 부대에 조선인 학도병은 27명이 있었다.
복무 중에 애국가 사건이 있었다. 남두용이 내무실 오락시간에 노래를 부르라고 지목되자 충동적으로 애국가 1절을 불렀다. 우리말을 모르는 일본 병사들은 박수를 쳤다. 조선인 병사들은 나라를 생각하는 노래라는 것은 짐작했다. 정작 남두용 자신은 조선인 병사가 밀고하지 않았을지 한동안 불안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국가를 아는 병사가 없었다.
이 사건 이외에 다른 불령한 행동은 없었다. 청춘의 반항심은 날카롭지만 일상의 굴복은 밋밋해보여도 묵직했던 게 보통의 삶이었다. 남두용은 일군의 조선인 병사들을 일본 나고야 근처의 아이지현까지 인솔해가는 임무가 주어졌다. 경원선 열차를 타고 한탄강철교 남단의 38선 그 지점을 또 지났다. 이번에는 일본군 병사로서 공무출장이었다.
그렇게 더딘 시간이 흘러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그날, 남두용은 두만강 철교의 경비부대 소속이었다. 그는 일본군 병사 신분이었기에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가 된 채 도문(투먼)역 근처의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후 일본군은 소련으로 이송된다는 소문을 듣고는 남두용은 탈출을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조교로 교육시켰던 조선인 병사들을 모아 자신의 탈출계획을 알리고 동참하려면 내일 모처에 모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모처에 조선인 병사 전부가 모였다. 이 순간에 정말 뜨거운 환희를 맛보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남두용은 이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4일 동안 170킬로미터를 걸어 귀향했다. 징병으로 끌려갔으나 운 좋게 살아서 돌아왔다.
귀향한 남두용은 청진시의 나남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6년 1월 교사들이 반탁시위를 일으켰으나 인민위원회에 의해 바로 해산됐다. 교사들은 연금처분을 받았다. 남두용은 토지개혁까지 눈앞에 닥쳐오자 38선을 넘기로 결심했다.
1946년 1월 출발했다. 걸어서 경성까지, 트럭을 얻어 타고 북청을 거쳐 원산까지 남하했다. 불시검문을 피하려고 원산과 성진(지금의 김책시)에서는 노숙을 했다. 경원선은 원산에서 복계역(철원 직전의 역)까지만 운행하고 있었다. 이 구간은 화물칸 지붕에 얹혀 갔다. 그 다음엔 다른 세 사람과 함께 걸었다. 얼어붙은 한탄강을 새벽에 건넜고 건넌 지 얼마 가지 않아 미군 초소가 나왔다. 별다른 문제없이 통과했다. 아직은 38선이 얼어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일곱번째 건넌 한탄강철교
남두용은 한탄강철교 남단을 일곱 번째 통과하면서 비로소 북위 38도가 운명의 구획선이 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여섯 번이나 무심하게 통과했던 이 지점을 통과하는 것은 이제 특별한 정치적 행위였다. 남으로 가면 본인은 타향의 외톨이였고, 북에 남은 가족은 반동분자라는 불이익을 고스란히 덮어써야 했다.
남한에서는 식민지 관리와 지주 계층은 해방 직후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미군 진주와 함께 빠른 속도로 주요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남한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친일청산과 토지개혁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부농이나 중농이거나 식민통치의 관리나 경찰 출신들은 많은 수가 월남으로 몰렸다.
▲ 남두용의 혼례 사진. 피붙이는 한명도 참석하지 못한 '38 따라지' 신세 그 자체였다. (사진 제공: 남명애)
38선을 통과한 남두용은 동두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단 한명의 친인척도 없는 완전한 혈혈단신, 소위 '38따라지'가 됐다. 그래도 좋은 학력과 학연이 생존의 실마리가 됐다. 와세다대학의 선배 한 사람이 적산으로 불하받아 경영하는 토건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1947년 회사에서 알게 된 서울 출신 여성과 결혼을 했다. 친구들이 들러리를 서주었으나 피붙이는 단 한 명도 없이 혼례를 치렀다.
1948년에는 모친이 월남했다. 집을 떠난 지 29일 만에 아들 집에 도착했다. 1947년 중반부터 38선 통행이 상당히 어려워졌으니 모자 모두에게 다행스런 일이었다. 38따라지 생활은 버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터졌다. 남두용 부부와 처가에 상상도 못할 비극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개전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로 들이닥치자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숨었다. 그런데 대한청년단 성동구 단장이었던 큰 처남이 체포됐고 소식은 두절됐다. 고등학생이었던 셋째 처남은 서울 수복 이틀 전에 친구들과 놀다가 끌려갔고 며칠 후 성동경찰서 방공호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마지막 남은 처남도 피난 중에 화롯불 가스에 중독돼 사망했다. 세 아들을 잃은 장모는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세 아들의 뒤를 따라갔다. 남두용은, 고향의 친가는 갈 수 없는 세상으로 막혔고, 그나마 의지했던 처가는 참혹하게 무너졌다.
▲ 정훈장교 시절 남두용. 사진 우측이 남두용이다. (사진 제공: 윤명애)
남두용은 유엔군이 곧 북진하여 통일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1950년 12월 정훈장교로 자원하여 입대했다. 북진하면 고향에 부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그의 희망은 깨졌다. 1956년 제대했다. 제대 후에 일생에서 가장 힘든 경제적 곤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60년 고등전형시험을 거쳐 상공부 과장으로 들어갔다. 퇴직 후를 대비하여 대학원도 다녔고 특허업무를 열심히 공부했다. 1975년 퇴직하고 특허국 경력으로 변리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남한에서의 생활은 무난했다. 현직에서 은퇴하면서 1986년부터 2년간은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았으나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남두용은 러시아에 살고 있던 조카를 만났을 뿐, 다른 실향민과 마찬가지로 고향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2012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8선인 줄 알고 일곱 번째 넘은 그 38선은 운명선이 되었던 것이다.
▲ 남두용의 학도병 탈출 귀향길과 이향·월남길 ⓒ 이은영
아버지가 남긴 자서 박스
남두용은 은퇴 후에 본인의 일생을 회고하여 자서를 썼다. 이것을 관련 자료들과 함께 셋째 딸에게 맡겼다. 그녀는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2020년 코로나19로 바깥출입이 줄어들면서 선친의 자서 박스를 떠올렸다. 자서와 여러 자료들을 읽어보고는 정리하기 시작했다. 형제들의 앨범까지 뒤져 사진을 찾아 넣고 선친의 행적을 지도에 그리기도 했다. 몇 달이나 걸려 정리한 끝에 281쪽짜리 <어느 실향민의 수기>라는 책자로 제작했다. 형제들에게 책을 돌린 다음엔 선친의 월남 여정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나의 휴전선 답사여행을 알게 되자 주저 없이 동반을 청했다.
그녀는 연천의 한탄강철교 남단의 38선 표지를 보는 순간 목소리가 한 옥타브 이상 치솟았다. 마치 선친의 발자국 화석이라도 발견한 양 감격스러워했다. 자서에 쓰기를, 새벽에 얼어붙은 한탄강을 건넜고 잠시 후에 미군 헌병을 보았다고 한 바로 그곳이었으니. 철원의 백마고지역에서도 그랬고, 경원선 예정부지 팻말이 꽂힌 철원 민통선 부근에서도 그랬다. 그럴 만하다. 선친의 팍팍한 단신 생존투쟁의 현장을 찾았으니!
▲ 어느 실향민의 수기(남두용 자서 남명애 정리)(사진제공: 남명애)
38선이 그어진 이후 정전협정으로 새로 그은 군사분계선이 강력한 봉쇄선으로 굳어질 때까지 월남한 사람들은 대략 150만 명으로 추정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 또는 비슷한 이유로 살던 곳을 떠나 월남했다. 숫자로는 월남인보다 적지만 월북인도 많았다. 30만~35만 정도로 추산한다. 애초에 일제강점기부터 좌우의 경쟁과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 각기 다른 성격의 점령군이 들어앉자 서울과 평양을 원점으로 하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격렬한 정치적 인구이동을 야기했다. 북한 체제가 불편하면 남한으로 이동해서 극렬한 반북한이 되었고, 남한에서 부대끼면 북으로 넘어가서 더욱 날카로운 반남한이 되었다. 개인도 버겁고 불행했지만 두 개의 힘은 결국 무지막지한 비극의 전쟁으로 정면충돌을 했다. 남두용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연히 접하게 된 그의 일생에서 월남인의 생존 분투를 조심스레 읽었다.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지만 그가 겪은 현실은 우리에게 아직도 살아 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남두용의 한국전쟁을 꼼꼼하게 정리한 작은 역사가는 셋째 딸 명애씨, 본인은 자신이 사학과를 졸업한 것은 우연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부녀의 필연인 것 같다.
▲ 백마고지역 경원선의 남측 종점. 사진 속 인물은 남두용의 셋째 딸인 명애씨다. ⓒ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