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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고구려 東川王 20년(246년)조의 기록을 보면,
" 8월에 魏가 幽州刺史 관구검을 시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玄兎를 침공하니,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싸워 이겼고,적군 3천명의 목을 베었다.또 군사를 이끌고 양맥
(梁貊)의 골짜기에서 다시 전투를 벌려 패배 시키니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그 수가 3천명이나 되었다.
왕이 여러장수 들에게 말하길, '魏의 대군이 우리 고구려의 小軍만 못하다.관구검은 魏의 명장이나 오
늘날 그의 목숨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하였다.이에 왕이 鐵騎兵(무장한 강한 정규군) 5천을 거느리고
나가 치니 관구검이 方陣(사각형의 방어 전투대형)을 벌리며 결사적으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
여 죽은자 만 1만 8천명에 이르고,패한 왕은 겨우 1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
났다.10월에 관구검은 丸都城을 쳐 무찌르고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왕이 남옥저로 달아
나 죽령(竹嶺: 반도의 죽령이 아님)에 이르니 군사들이 거의 다 흩어졌다 "
란 기사가 있다.
2, *이 기사는 위군이 쳐들어와 처음엔 잘싸워 이겼으나 방심한 탓에 결국은 패하여 왕이 도망가 숨었다
는 얘기와,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져 모두가 상당한 피해를 보는 혈전을 피력해 놓고 있다.이것이 바
로 '梁口혈전(하남성 개봉부 일대의 옛 梁나라 지역)'이다.그러나 결국은 중국사를 치장하고 있는 魏의
침략 행위를 고구려의 방어보다 우위에 놓는 애고이즘의 고의적 식민사관 기사는 우리가 한것이 아니니
어쩔수 없다.이점은 몇년전 지금의 길림성 集安市 근처에서 관구검이 고구려의 환도성을 격파,점령했던
공적을 기록한 듯한 공적비 조각,파편 유물들이 발견 됐다는 중국의 동북 공정 연구자들의 일방적 발표
가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그래도 있다면 그건 중국측의 조작물 이란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이어서
남한의 강단사학에서 거짓말 하는 것중 하나로 지금의 길림성(集安과 通化)과 요녕성 지역이 역사의 조
선과 고구려의 시원및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정해놓은 정사서를 통해 바로 잡고자 한다.*
3, 당시 고구려를 침략했던 관구검과 왕기는 魏나라 장군들이다.여기서 魏란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세운
나라를 말하고 관구검(毋丘儉)은 위나라의 대신겸 장군으로 그는 지금의 '산서성 聞喜( 당시는 하동의 聞
喜)' 출신이다.반도나 길림성 集安에서 산서성의 문희(聞喜)는 아주 멀고도 먼곳이다.그는 산서성 聞喜縣
토호(豪紳)의 자식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유주자사(幽州刺史)와 진동장군(鎭東將軍)' 을 지냈다. 魏의 濟王
嘉平 6년(254년)에 사마사(司馬師: 하남성 북부 溫縣 출신으로 司馬懿 아들)가 魏主인 조방(曺芳:少帝)를
폐위 시키고,고귀향공(高貴鄕公)인 조모(曺髦)를 군주로 세우자 분개하여 이듬해(255년)에 양주자사 문
흠(文欽:안휘성 毫縣 출신으로 조조 가문과 동향)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司馬師를 쳤다.
그러자 사마사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관구검이 패했다.그는 도주하여 신현(愼縣:하남성 동남부의 汝南)
으로 달아 났으나 縣의 현령인 송백(宋白)이 그를 술에 취하게 한뒤 죽였다.그의 아들인 관구전(甸)도 이때
죽었다.그는 고구려 원정(246년)후 10년째 되는해(255년)에 魏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도 권력 투쟁에 휘말
려 비참하고 허망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4, 그러나 이러한 관구검과 왕기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황하 유역의 하동과 하남을 벗어나 본적이 없다고
그들의 列傳과 정사서 기사들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이들이 그들의 근거지와 주둔지(하남과 하북,하동)를
떠나 동북의 길림성 집안이나 반도의 고구려를 향해 침공해 왔다면,이들은 최소한 지금의 하남성 지역에
서 하북성 전체를 북동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발해만을 바라보며 요녕성을 경유해 길림성 지역으로 南下하
는 아주 먼 원정길을 와야 한다.때문에 관구검의 고구려 원정군은 최소한 6~7천리 이상을 걸어서 와야한
다.그러면 왕복으로 1만 2천리가 넘는 길이다.당시는 동력 장치가 없는 시대였으니 步騎兵들은 도보로 이
동해야 한다.사람이나 말이나 먹고 쉬어야 멀고 먼 원정길에 나서고 전투도 할수있는 것이다.이러한 원정
은 병사나 말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친다.그렇다면 군사들은 몇달을 견딜 전투 식량과 무기를 등
에 지거나 들고 노숙과 휴식을 번갈아 해가면서 북동의 고구려를 향해 가야 한다.
이런 원정길은 최소한 6~7개월 이상이 소요된다.왕복이면 1년이 더 걸린다.하남과 하북성과 요녕성,길
림성 지역을 가본 사람들은 알지만 이곳은 강이 많고 지형이 험준해 수많은 하천과 준령을 건너고 넘어
야만 오갈수 있는 곳이라,경력있는 무관이라면 이렇게 무모한 원정은 하지 않는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수익사업이기 때문에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워 진다.무모하면 생명을 비롯한
모두를 잃는다.
5, 당시 명장이었던 관구검과 왕기가 이러한 장거리 원정을 했다면 원정길을 오가면서 죽어나가는 병사
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그러나 관구검이 고구려 원정후에도 위나라로 귀국해 장군역할을 더했다고 했으
니,이들이 원정한 고구려는 반도나 길림성(요녕성 포함) 소재의 고구려가 아니였던 것이다.당시 魏나라
조정과 장군들이 활동무대는 중원이었고 근처에서 고구려가 있어 견제 했었던 것이다.이들이 보유한 私
兵에 의한 私的인 전투와 이민족들의 진압,원정 목적 역시,동한(후한)이란 통일국가가 무너지고 혼란해
진 중원(황하유역 일대)의 평정에 있었다.현재의 동북 3성이나 반도 소재의 고구려 평정엔 관심도 없었
다고 모든 정사서들이 밝혀주고 있다.반도나 동북 3성지역은 중원 천하의 평정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고 사절한다.역사서에 의한다면 당시의 군벌들과 魏,吳,蜀 이란 큰세력들 모두는 중원(장안과 낙양일대)
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을 했고, '關中(오장원 등)과 東漢의 중심지였던 하남,하동,하북,장강(호북의 형주,
양양,의창,황주 일대)의 일부지역을 전장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6,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魏의 장군들이 활약 할때,중원의 魏書와 蜀書,그리고 吳書를 총 망라해 분석을
해도 위나라의 장군들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반도로 올 일이 없었다.오직 중원과 관중을 평정,장악하는
데 있었다.오장원과 양구전투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이전투구와 군벌의 소멸,이민족들의 토벌과 평정등을
역사에서 찾아 보아도 이들은 오직 '중원과 관중의 평정과 장악' 과 연관되어 있었다.즉 군웅들이 전투를
통해 승리함으로서 통일국가를 만들어 '중원의 황제' 로 등극하고자는 욕망들이 강했다.동북지역과 반도
에 있었다로 강제 해설되는 어떠한 세력이든,당시의 魏가 중원을 평정하고 장악하는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특히 관구검은 지금의 산서성의 남부인 하동지방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주자사를 했고,
그의 부장이었던 왕기(王頎)도 하남성 동부사람으로 감숙성의 天水縣에서 태수를 하면서 그 위력으로
천수에서 가까운 남쪽 유비의 촉(蜀:사천성)을 치기도 했던 사람이다.이처럼 중원 장악을 위한 군웅들이
왜?고구려와 전투를 하면서 반도나 동북지역으로 올것인가?
7, 정사서의 기사를 보면, 3세기초 고구려를 쳤다는 이 두사람도 고구려를 치기는 했지만,반도나 지금의
길림성 집안에 있었다로 比定 또는 해설되는 국내성이나 환도성의 고구려로 온일이 없었다고 말한다.더
하여 고구려 국명의 뜻이 '가운데 나라인 중원(중앙의 나라)' 을 뜻하기 때문에 더 더욱 반도로 올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당시 위나라의 요동태수로 등장하는 '公孫氏들인 度,康(공손도의 아들),淵(공손강의 차
남)' 등도 중원(하남성)에서 요동태수를 지내면서 고구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의 하동이자 하남지방
을 떠난적이 없다고 그들의 '傳' 들이 밝혀주고 있다.근거는 후한(東漢)의 국도이자 도성은 하남성 낙양부
일대가 아니였던가?후한 말기에 흥기한 황건적들도 자연재해로 먹을 것이 궁해지자 지금의 하남성 동남
부지역을 시작으로 궐기해 전국으로 번졌던 것이다.그들의 최종목표는 밥을 위해 부패한 낙양의 후한을
붕괴시키는 것이였다.그러한 혼란속에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군벌들이 천하를 3분하여 삼국을 만들어
설왕설래 한 것이 바로 삼국지(삼국演義가 아님)다.
8, 원문에 등장하는 비류수(沸流水)는 황하의 별칭이고,양맥(梁貊)은 지금의 하남성 鄭州 동부와 개봉부
를 말하는 것이다.압록원은 황하의 지류중 한 곳을 말하는 것으로 정확한 지점은 없다.특히 고구려와 싸운
위의 '梁口대전' 이란 곳은 지금의 '개봉과 封丘' 의 황하 유역에서 벌어진 대회전을 말하는 것이다.이곳에
고대 梁나라가 여기에 있어 그지역 입구를 梁口라고 했었다.당시 고구려를 친 魏의 장군들은 결국 황하의
남북,그리고 지금의 하남성 일대와 산서성 남부지역을 벗어나 고구려를 공격한 적이 없다고 '위서 관구검
傳' 이 잘 말해주고 있다.유주자사는 지금의 산서성 남부와 하남의 북부일대를 관할했고,遼東太守도 河東
지역의 태수를 말하는 것으로 동류 황하를 중심으로 하남성 황하 남쪽과 북방지역을 말하는 것이다.탁군
(涿郡) 역시 이때는 하남성 북동부의 郡이었고,중심은 지금의 安陽과 복양(濮陽) 일대가 된다.요수는 황하
의 지역별 별칭이고 요동은 역사의 河東과 같다.
9, 이런 역사 기사들 중 대륙 전체를 중국으로 강제해 넘겨주고,반도를 삼국과 고려를 포함한 조선의 전부
를 옮겨놓고 해설을 하면서 유주와 요동이 지금의 하북성과 동북3성 지역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여기서
장강의 남부(절강성 남부와 복건성 지역)에 있던 倭의 본거지를 지금의 열도로 옮겨 역사의 일본으로 만들
어 놓은후 반도 한정의 조선사를 논하게 되면서 창작의 역사 조선은 완전히 뒤틀렸다.즉 식민지 역사로 꾸
며졌다.이렇게 되자 정사서에 西에서 東으로 흐른다고 기록한 遼水(황하)가 지금의 요녕성으로 옮겨 지면
서 동북에서 西쪽으로 흐르는 역류의 강이 된 것이다.조선사 모두는 조선을 흐르는 大江들은 모두 동류 한
다고 기록하고 있다.宋나라의 서긍이 직접 고려를 다녀와 썼다고 전해지는 '고려도경' 에도 고려의 서쪽은
요수가 흘러 遼水로 막혀 있다고 쓰고 있는데 이를 간과 한 것이다.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물려 받은 나
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10, 더 흥미로운 기사는 고구려 동천왕 10년(236년) 2월에 있다. ' 吳王인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을 요구하자 동천왕은 그 사신을 잡아 두었다가 7월에 베어 죽이고 머리를 魏 나라로 보냈다' 라
는 기사가 있다.손권(182~252년)은 지금의 '절강성 東吳지역 富春(지금의 소흥과 춘양)' 출신으로 孫堅의
차남이며,실제로 吳나라를 건국한 황제였다.그는 동한말 그의 형인 손책(孫策)의 뒤를 이어 長江의 중하류
지방인 강동 6주(6군:지금의 강서,강소,절강,복건의 대부분)다스리자 조조(曺操:안휘성 毫縣 출신)가 황제
에게 표(상소의 일종)를 올려 그를 토로장군(討虜將軍:남부를 토벌 평정한 장군의 뜻)직함을 내리게 하고
동시에 회계(會稽)태수로 임명하게 했던 인물이다.그는 建安 13년(208년)에 촉의 유비와 연합해 형주의 적
벽(호북성 포기<蒲圻>)에서 조조군을 대파했다고 전하기도 한다.건안 24년(219년)에는 다시 형주(荊州:
호북성 남부,장강유역의 황주<黃州>와 포기<蒲圻>)를 공격해 빼앗고,촉의 연합군 관우(關羽)를 체포하여
장강유역의 촉과 위의 요충지 모두를 차지 했었다고 한다.
11, 또 吳나라 黃武 원년(222년)에는 호북성의 이릉(夷陵:지금의 호북성 宜昌)에서 촉의 유비를 대파하고,
황룡 원년(229년)에는 손권이 마침내 지금의 호북성 무창(武昌:형주,무한)에서 스스로 稱帝했다.국호를 吳
라고 했으며 도읍을 建業(지금의 강소성 남경)으로 옮겼다.그의 성장과 함께한 主활동 무대는 주로 東吳인
절강성(항주,소주일대)에서 출발해 강동의 장강유역을 평정하고,지금의 '강소성,강서성,호남성,호북성' 일
대를 장악했다.이어 손권은 주유(周瑜),노숙(魯肅),여몽(呂蒙),육손(陸遜)등을 중용하면서 수십년 동안 동남
부 지방(장강의 중하류 지역)의 강력한 군웅으로 군림했다.조조도 일찌기 감탄하며 말하길 아들을 낳으려
면 '손권(孫權)같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生子當如孫仲謀!)' 고 하였다.중모(仲謀)는 손권의 字이다.손권은
재위기간 동안에 둔전(屯田:군대가 주둔하며 농사 짓는 제도)을 실시하여 강남지방의 개발을 촉진시켜 큰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12, 이처럼 장강 일대와 강동 6주(동남부)에서 활동하며 위와 촉을 공격해 타격을 주었던 강력한 吳나라의
황제(229년 즉위)가 바로 손권이다.그런 손권이 자신의 강남 패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대륙의 북방
과 북동의 변방에 자리 잡도록 해설한 고구려에 무엇 때문에 먼저 화친을 먼저 청할 것인가?손권의 吳나라
도읍지 건업(강소성 남경)과 자신의 출생지인 東吳(절강성 항주)에서 북동쪽(길림성 집안시)의 고구려로
사신을 보낼려면,長江과 淮水등 수많은 강하천을 건너야 한다.이곳을 지나도 또 수많은 호수와 신악지방을
지나야 올수가 있다.이길은 수행원과 장애물 없이 오간다 해도,1만리 먼길이며 소요시간 만 1년 쯤 걸린다.
당시 손권이 고구려로 사절을 보내 화친하려 했던 이유는,중원 고구려 근처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魏軍의
동정을 살피고 침공 위기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함 이었다.당시의 魏는 중원을 침략한 이민족,내부의 황건
적과의 전투,군벌간의 중원 패권을 놓고 이전투구의 전쟁을 하면서 지쳐 있었다.따라서 이때 오나라의 손
권이 고구려에 화친 사신을 보낸 이유는 중원에서 고구려와 魏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염탐의 사
신을 보냈던 것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유투브에서 활약중인 책보고씨가 이 글을 봤으면 합니다.
정용석 선생님의 이 글만으로도 삼국에서 조선까지의 강역이 현재의 한반도가 아님이 여실히 증명되는 셈입니다.
좋은 글, 너무 감사드립니다.
감사 합니다.책보고 그 사람은 유투브에서 책소개하는 사람 아닌가요?
@상선거사 책보고는, 구독자 7.88만명을 보유한 인기 유투버입니다.
후원금도 공개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삼국에서 고려까지의 강역을 대륙 중원으로 설명하여 인기를 얻었으나,
조선 건국부터 현재의 한반도로 규정하고, 대륙조선의 강역은 명나라로 규정하여
강단의 식민사학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강의하면서 구독자수가 주춤거리고 있네요.
@한강대로 근세 이씨조선은 고려를 물려 받았고,고려는 통일신라를 물려 받았다고 역사서는 쓰는데 어떤 역사서 어디에 이씨조선은 반도에서 건국되었다고 씌여져 있는지 궁금하군요?역사는 강역과 그강역에 살던 조상들의 이어 달리기 얘기 인데 말이지요?그사람의 저술이 없다면 입으로만 역사 장사하는 유투버 군요?
@상선거사 출판사 책 팔이 입니다. 생계 수단으로 역사를 만지니 오디오와 비디오만 난무합니다.
@avansor 그런 감이 옵니다.역사의 원전 얘기가 없으면 허당 입니다.
저의 닉네임이 요동입니다
요동의 중요성 때문에 요동으로 일어난 역사적 근거가 너무많아
진실을 파악해보고자 닉네임을 정했습니다
요동에는 단군왕검의 왕검성이 있고 요동에서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일어났던것들을 알면
요동이 어디인가 매우중요 합니다
카스피해가 옛날에는 물이 넘처 흑해와도 연결된바다였고
그바다의 면적이 지금보다 3~4배정도 크기의 바다로 그바다가 요해 라보고 요해의 동쪽 이 요동이라 봅니다
타슈겐트 동쪽산이 갈석산으로 갈석산 넘으면 한강이 흐르고 그것을 넘으면 페르가나분지 코칸트가
왕검성이요 한나라때 낙랑군이 점령하고 고구려가 남하정책으로 평양성을 세운곳이라 봅니다
고구려 당나라에게 패망한후 안동도호부를 두었던곳 으로 우리고대 역사는 모두 중앙아시아에 있던것을
진조선 한조선 수조선 당조선등 모두에 나라가 현중국땅으로 옮겨놓으니 그나라의 동쪽에 있던 한국옛나라들이
한반도또는 한반도 북쪽으로 몰리게 되는것입니다
사마르칸트가 마한이였고 백제가 점령하고 고려개성으로 이성계가 활동한 지역입니다
지금도 그곳에 티무르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그티무르는 이성계와 동일 인물입니다
님의 글을 읽고 의견을 피력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뭔말인지 알겠습니다.그러나 요동,조선,백제,이성계,왕검성,낙랑군 등등의 고유명사는 역사서에 한자로 쓰여져 있으니 한자 문화권의 강역이 우선이 겠지요.우리가 삼국,고려,근세조선을 말하는 것의 근거도 한자로 쓰여져 있는 史記,書,志,實錄 등의 원전을 통해서가 아니겠습니까?너무 멀리서 찾으면 추정이 추정이 추정을 낳지요.요동님이 생각하신 것과 주장하신 글들을 사서들의 근거를 통해 저술을 하시면 빨리 구입해 읽겠습니다.역사는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이거든요.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쓸 적에 동한(東韓), 접역(鰈域), 해동(海東) 등 다양한 명칭이 나옵니다.
근데 이런 말을 왜 썼냐고 생각하면 동한은 韓나라의 동쪽이기 때문이고, 해동은 발해의 동쪽이기 때문이죠.
韓나라는 거슬러 올라가면 전국 시대에 이르는데, 당시 韓나라의 무대가 지금의 하남성(중국) 일대입니다.
이러한 근거로 접역은 가자미 모양처럼 동서가 넓은 모양이기 때문이고,
해동은 발해의 동쪽으로, 발해를 언급하면 자연스럽게 요하(遼河) 또는 요동(遼東)이 나오죠.
근데 이 요동의 설명을 보면 평안도나 영안도(함경도) 같은 지역이 아닌 호남(湖南)과 가깝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발해가 호남과 가까이 있으니 이런 얘기가 가능한 것이니 반도와는 전연 사정이 맞지 않죠.
손권, 유비, 조조 등이 아무리 난리치고 설쳤어도 북방의 패자 고구려한테는 깜이 안 되는 존재였을 겁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상선거사 동한은 동쪽의 왕국,해동은 천하를 4등분 하여 동쪽에 있어 해동,접역의 설명은 동의 합니다.그밖에 靑丘,槿域,동국,
暘谷,계림,부여,단국,진역 등등의 120여개 이상의 국명 이칭이 있었지요.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