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두 번의 부르심 (창12:1-5)
* 첫 번째 부르심: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15: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디에서 부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갈대아인의 우르입니다. 우르에서 그를 처음 부르신 게 분명합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15:7) /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수24:3 상)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 역시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타미아, 곧 갈대아 우르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행7:2)
그때도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의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그에게 보일 땅으로 갈 것입니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행7:3) 창12:1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아버지의 집’이 빠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절)
어째서입니까? 그의 아비 데라도 가나안 행에 동참하였고, 동생 나홀도 조금 늦기는 했지만 출(出)우르에 합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 부르심을 좇아 메소보타미아의 변방(邊方) 하란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제 하란만 넘어서면 가나안 땅입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하란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의 체류 기간이 예상 외로 길어진 것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다는 점으로 보아 장거리 여행 등으로 인해 데라의 건강이 악화되었거나 노환(老患)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데라가 그의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11:31,32)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우르를 떠나긴 했지만 여전히 메소보타미아 문명 가운데에 머물고 있었으며,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창24:10 하) /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창28:10) 수도권을 떠나 국경에까지 왔으나 여전히 그 울타리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부르심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긴 했으나 하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나아간다고 하지만, 여전히 부르심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의 현실 문제에 발목에 잡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지 않느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란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듭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이제라도 과감하게 넘어서기 바랍니다. 중간에 멈춰버린 믿음의 여정을 계속해서 다시 이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미완(未完)의 여정을 완수해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