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부터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중국의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미 우수한 문화를 가진 민족으로 형성된 뒤에 중국 땅에 건너갔다. 그들은 한민족과 한 핏줄을 타고 난 동일 민족으로서 사회역사적 발전단계를 함께 경유하면서 민족문화를 꽃피워 왔다. 중국에 이주한 이후 그들은 반만년의 풍부한 민족문화 유산을 토대로 하고 그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중국문화의 테두리 속에서 중국문화의 자양분을 섭취하여 주체적인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국 조선민족문화는 한민족의 전통문화에 깊이 뿌리박고 중국 및 주변 여러 민족 문화들과 상호 교류와 영향 속에서 자기의 좌표를 확립하였으며 광활한 중국의 동북대지를 활동무대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 오면서 고유한 민족적 정기를 세워왔다.
일반적으로 중국에 조선족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엽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대량적인 집단 이주는 1895년 청나라의 봉금령이 해제될 때부터이다.(정판룡, 1999 : 291) 그러므로 중국 조선족은 19세기말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될 때까지 중국에 건너가 정착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민가서 오늘까지 중국의 강토를 개척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였으며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서의 주인공적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80년대부터 중국에서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위 중국 조선족의 생활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진출하는 중국 조선족인구가 증가되었으며 대외개방과 함께 한국, 일본 등 국외로 진출하는 사람도 날로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고 점차 동북아세아 경제권이 확립되고 외국과의 교류가 잦아지는 형세는 중국 조선족으로 하여금 점차 선진공업민족으로 발전될 전망이 뚜렷해지도록 하고 있다. 특히 두만강 하류지방이 국제적 경제발전 중심지의 하나로 되면서 연변 등 많은 조선족 집거구들은 멀지 않은 앞날에 중국에서 경제발전의 속도가 비교적 빠른 지역의 하나로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조선족들도 머지 않아 현대화된 선진민족으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며 문화교육의 새로운 번영도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중국 조선족이 지금처럼 자기의 민족 특성과 문화를 계속 보존하며 우리말과 글을 보존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서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데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오늘까지 많은 경우에는 나라의 힘으로 유지되던 조선족 문화교육사업이 시장경제의 도입과 함께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고 있으며 조선족들이 상대적으로 집중되고 있는 농촌에서 농민들이 도시로 들어가면서 민족문화 보존의 터전이었던 일부 민족 집거구들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 이리하여 일부 지역에서는 민족교육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날 대부분 소수민족 도서 및 신문, 잡지의 출판은 국가 재정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는데 시장경제 체제가 확립되면서 국가의 재정지원이 줄고 한글 독서 범위가 날로 축소되면서 민족도서출판업 등 민족문자 사용의 주요한 매체들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적지 않은 조선족들로 하여금 중국에 살면서 조선어를 배워 무슨 쓸데가 있는가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중국 조선족의 미래에는 자칫하면 민족교육이 쇠락되거나 민족언어 및 문자 사용 등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생길 수 있으리라는 것이 예견된다.(정판룡, 1999 : 294)
조선족들은 중국에 살면서도 우리말과 글을 잊지 않고 잘 갈고 닦아 왔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 초중고등학교를 세우고 자손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우리말로 된 신문사와 방송국을 세워 민족언어를 보급하였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
중국에서는 해방 전부터 우리말 신문을 만들어 왔다. 연변일보,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료녕일보, 중국조선족소년보, 라지오 텔레비신문 등 많은 한글 신문을 200만 조선족들에게 보급하고 있고 연변인민방송, 연변텔레비전 등 연변지역 방송뿐만 아니라 북경에 있는 중국 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 등이 매일 우리말 방송을 하고 있다.
중국 조선문 출판사업은 1882년 봉천(심양) 문광서원에서 조선문으로 ‘예수성교 누가복음서’를 출판, 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1909년 조선족의 첫 신문인 ‘월보’가 연길에서 발간되었고, 1938년 연길방송국이 연길에서 조선어방송을 개시하였다. 이렇게 중국 조선족 언론은 전면적인 생성,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광복전 수십년간 동북 각지는 물론 관내의 북평, 천진, 상해, 항주, 남경, 장사, 무한, 중경, 광주, 계림, 서안 등 중국의 광활한 지역에서 백수십종에 달하는 조선신문 간행물이 발간되었다.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3중전회는 중국신문사업의 발전에 새길을 열어 놓았다. 특히 시장경제체제의 건립은 신문경영의 발전에 전례없는 새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1992년 중국 공산당 제14차 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건립하는데 대한 목표를 제기한 후 신문사업은 계획 경제조건하에서의 발전모델로부터 시장경제 조건하의 발전모델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신문은 ‘기관형’으로부터 ‘봉사형’, 또는 ‘기업형’으로 전환되면서 경제력도 크게 증강되었다. 신문사업경제가 발전되면서 적지않은 언론매체들은 규모화, 집단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 인터넷 구축은 첫걸음을 내딛은데 불과하지만 그 발전추세는 놀라울 정도이며 언론매체 및 대중의 인터넷 활용률은 급성장을 보이고 있다.
1999년 11월 16일 국가신문출판서에서 반포한 ‘신문간행물 주조를 조정할데 대한 중앙 두 사무실 30호 문건을 실시할 데 관한 의견’은 2000년 1월 1일부터 중앙과 국가기관 각 부문은 원칙상에서 기관지를 발간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각 지구(시)급의 국(局), 판(辦), 부(部), 위(委)에서는 신문 간행물을 발간하지 않으며 현재의 신문간행물을 일률적으로 넘겨 주거나 정간한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때까지 정부의 품에 안겨 ‘시장경제’를 운운하던 신문들까지 이제는 시장경제의 참뜻을 피부로 체험해보게 된 것이다.
조선족 언론매체들은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동안 국가 보조를 받지 않으면 안될 처지이다. 그러나 조선족 언론매체들도 신문보도로부터 신문발행, 신문경영, 광고경영 구조조정, 신문업집단화, 나아가서는 인터넷 구축 및 활용 등에 이르기까지 참다운 연구와 개혁이 진행되어야 함은 의심할 바 없다고 하겠다.(최상철, 2000 : 3)
조선족이 그들 지식과 정보를 얻고 생활의 반려자로 삼으며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조선족 언론이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에 관해서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 또한 조선족 언론이다. 그러므로 조선족 언론의 발전은 곧 조선족의 발전과 직결된다.
중국 조선족 언론문화에 관한 연구에서는 조선족언론의 이념과 특성을 살펴보고 조선족 언론의 현황을 알아본 다음 조선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을 분석하여 조선족 언론이 처한 현실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보는 내용으로 연구하였다.
2.연구방법
본 논문은 문헌연구와 자료조사, 그리고 현지 설문조사방법을 연구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먼저 중국언론과 조선족 언론의 이념과 특성, 조선족 언론의 현황을 문헌과 자료를 통해 알아보고 현지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현지 설문조사는 연변대학 동북아 국제문제연구소의 협조로 진행되었다. 연변지역에 조선족이 밀집된 지역의 인구분포와 연령분포를 고려한 할당 표본 추출법을 이용하여 20세 이상 300명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설문의 내용은 조선어와 한어(중국어)를 병행하여 작성하였는데, 특히 조선어는 현지 조선족이 사용한 언어적 특성을 고려하여 뜻과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현지어로 하고, 조선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인을 위해 한어를 병행하여 설문내용을 더욱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외국인이 연변에서 사회조사를 실시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으므로 현지 대학 기관의 협조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연변대학 동북아 연구소와 긴밀히 연계하여 현지 설문기간중 필요한 제반사항에 대하여 협조를 받았다.
조사기간은 2,000년 2월부터 4월까지였으며 지역이 넓고 조사대상이 흩어져 있어 조사원들이 편리한 시간에 현장에 나가 조사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표본의 특징을 살펴보면, 성별로 남자 150명과 여자 149명이었다. 그리고 연령별 분포를 보면 10대 1명(0.3%), 20대 64명(21.3%), 30대 64명(21.3%), 40대 69명(23.0%), 50대 58명(19.3%), 60대 이상 42명(14.0%)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주지역별로 보면 연길 73명(24.3%), 훈춘 51명(17.0%), 화룡 50명(16.7%), 도문 47명(15.7%), 용정 46명(15.3%)이고 나머지 지역은 3.0%에서 0.3%의 분포를 보여주었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당·국가공무원 38명(12.7%), 공인 50명(16.7%), 농업 13명(4.3%), 군인 2명(0.7%), 교원교사와 교수 58명(19.36%), 언론방송인 19명(6.3%), 개인사업 21명(7.0%), 학생 93명(31.3%), 무응답 6명(2.0%)이다.
소득수준별로 살펴보면 수입없음 61명(20.3%), 500원 이하 55명(18.3%), 중산층인 500-1,000원이 149명(49.7%), 고소득층인 1,000-2,000원이 33명(11.0%) 그리고 무응답 2명(0.7%)이었다.
학력별로 보면 소학교 졸업 9명(3.0%), 중졸 71명(23.7%), 고졸 96명(32.0%), 대졸 121명(40.3%), 대학원졸 이상 2(0.7%) 였다. 조사대상 중 조상의 출생지에 대해 북한은 151명(50.3%), 남한 54명(18.0%), 중국 89명(29.7%), 기타지역 2명(0.7%), 모른다가 2명(0.7%), 그리고 무응답이 2명(0.7%)으로 나타났다.
남북한을 방문한 경험에 대해 한국 12명(4.0%), 북한 108명(36.0%), 한국과 북한 13명(4.3%), 없음 161명(53.7%), 무응답 2명(0.7%)으로 나타났다.
2.중국 조선족 언론의 이념과 특성
가)모택동과 중국언론
모택동은 1919년 7월 14일 그가 25세때 湘記評論을 창간하고 그 대부분의 글을 자신이 썼다. 창간호 2천부는 불과 하루만에 매진되었고 그후 각 호마다 5천부를 인쇄하였다.
그는 중국대중, 특히 농민의 대다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감안, 간단하고도 쉽게 글을 썼기에 잠재적인 독자가 많이 늘어났다.(Stuart Schram, 1966 : 36)
이 잡지는 5호를 끝으로 호남성 총독 장경효 장군에 의해 폐간 처분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장사의 대표적 일간지 ‘대공보’에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국민장 중앙선전부장 대리로 일하면서 국민당 기관지 정치주보의 책임 편집자가 되기도 하였다.
1934년 장개석 정부군의 제5차 포위 토벌작전에 밀려 강서성 단금의 혁명 근거지를 버리고 1년여의 장정 끝에 陜西省 연안으로 간 후 모택동은 포위망과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이를 위한 전략이 ‘내전정지 일치항일’이었고 국내외에 대한 여론환기 및 선전공세였다. 국내외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모택동은 외국언론을 초빙하여 대담하고 그것을 선전공작에 이용하였다.
모택동은 마르크스나 레닌 못지 않게 신문의 역할과 위력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 기능과 영향력을 철저히 이용했다. 중국 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친필로 제호를 쓴 일과 아끼던 이 신문이 실권파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리자 이를 되찾기 위해 ‘대자보’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하여 그 뜻을 이루었던 일들이 그같은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준다 하겠다.
중국도 다른 공산국가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공산주의 언론 이론을 원칙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중국이 처해 있는 독특한 사회적 구조와 전통, 그리고 정치적인 이념 등에서 그들의 의견에 부합되도록 소비에트 공산주의 언론이론에 다소 수정을 가하고 있음을 또한 엿볼 수 있다.
모택동은 레닌이 제시한 신문의 3대 역할, 즉 신문은 ‘집단적 선전자요 선동자 그리고 조직자(Frederik T.C. Yu, 1963 : 274) 라는 개념에 대해서 ‘조직, 자극과 격려, 선동, 비판 그리고 추진’이라는 5대 역할로 신문의 개념을 정립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신문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의 주요 무기라는 개념에는 소련이고 중국이고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중국언론은 두 가지 점에서 레닌의 신문이론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 첫째는 ‘신문은 당과 정부의 정치적 구조와 완전히 일치되어야 한다.’는 이론이고 둘째는 레닌이 주장하는 신문의 내용에 대해 찬의를 표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의 경우 신문이란 독립된 사회적·정치적 기구가 될 수 없으며 그 대신 신문은 정부와 당의 주방파제 역할을 담당하는 종속적인 기구라야 하며 후자의 경우는 신문의 내용이 공산당에 의해 계획되고 지휘되는 국가발전을 돕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업과 밀접한 협동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신문에 관한 두 가지 레닌주의적 개념은 정치적·사회적 동원에 관한 소위 모택동 주의 전략의 세 이념과 관련되고 있다.
모택동의 첫째 이념은 통일전선이다. 통일전선이란 공산당의 지도체제하에 4개의 계급, 즉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 그리고 민족자산계급이 통합된 인민주의 정치를 뜻하는데 이 원칙에 의거해서 중국은 비정당신문의 존재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둘째 이념은 반주지주의와 대중동원의 취향이다. 즉 이 철학은 반제도적이며 대중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원리는 인민주의적이며 대중선동적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중국 신문경영의 제도 변화와 밀접하게 관계되고 있다.
셋째 이념은 반전문가주의이다. 기자의 역할에 관한 모택동의 관념은 정치와 사회를 중개하는 기자의 객관적 역할을 강조하는 서구식 관념과는 다르다. 즉 모택동이나 레닌은 다같이 기자는 우선 일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행동하는 정치요원들이며 그들 유일의 임무는 공산당에 의한 혁명 수행을 돕는 일이며 기자가 되기에 앞서 정치인이라는 것이다.(Alan P.I., Liu, 1971 : 44)
중국의 이와 같은 저널리즘에 있어서의 반전문가주의는 소련보다 강하다. 그 까닭은 소련이 중국보다 훨씬 근대화 되어 있어 어느 정도 전문가주의가 불가피하나 중국에 있어서는 반전문가주의가 전반적인 경제의 미발달로 인해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모택동의 언론사상은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모택동은 1939년 10월 4일 ‘공산당인’ 창간에 즈음해서 당내 간행물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당내 간행물의 임무란 전국적 범위의 광범한 대중성이 있는 사상적·정치적 또는 조직적으로 완전히 견고한 볼세비키화된 중국공산당의 건설을 돕는 일이다.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이와같은 당을 건설한다는 것이 당장 필요하다. 이 위대한 공사의 진행을 돕는 임무는 일반적인 당기관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전문적인 당기관지가 없으면 안된다. 이것이 공산당인의 발행 이유이다.’고 하였고 1940년 2월 7일 노동자 신문인 ‘중국공인’의 발간을 계기로 모택동은 ‘중국공인은 노동자를 교육하고 노동자 간부를 훈련하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며 중국공인을 읽는 사람은 곧 이학교의 학생이다. 노동자 중에서 지식이 있고 능력을 가진 간부를 많이 육성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간부가 많지 않을 것 같으면 노동자 계급이 해방을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모택동은 1948년 4월 2일 담화에서 ‘우리들의 정책은 지도자에게 알리고 간부에게 알릴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에게도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지금 토지제도의 개혁을 추진 중이다. 토지개혁에 관한 제 정책은 모조리 신문이나 라디오에 발표하여 광범한 대중에게 알려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함으로써 레닌과 마찬가지로 언론의 선전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나)중국언론의 구조와 기능
중국언론은 중국 공산주의 체제의 형성기라고 볼 수 있는 1949년 이래 중국 공산주의 체제의 근대화 전략 과정에 특수한 임무를 띠고 반영되어 왔다. 중국 공산주의 체제의 형성기라고 볼 수 있는 1945년-1953년 사이에는 신문의 기능은 주로 당과 대중과의 결합을 돕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1950년에는 당간부의 잘못에 대한 인민의 비판으로 신문지상에서 상호비판, 자기비판 투쟁을 전개하므로써 당과 대중과의 거리를 극소화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중국의 제1차 경제 5개년이 시작된 1953년부터는 신문기능은 공업화 선전에 집중되었고 그후에는 전국적인 투쟁, 즉 ‘백화재방(1957)’이나 ‘대약진(1958-1960)’, ‘문화혁명(1966-1969)’을 거치는 동안에 신문은 특히 이들의 운동을 적극 추진하도록 명령되었다.
중국언론의 기능은 대중에게 공산주의이론을 교육하고 대중을 훈련하고 대중을 조직화하고 나아가 당의 위대한 성취를 선전하는 유력한 무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모택동은 뉴스의 임무를 대중에게 사회주의를 교육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그래서 모택동은 뉴스의 객관성이나 불편부당성을 극력 배격하였다.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뉴스란 객관적이어야 허고 진실을 알려 주어야 하며 동시에 불편 부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데 대해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반격을 가한 일이 있다.
‘뉴스의 객관성 같은 것은 본래적으로 있을 수 없다. 과연 신문은 단지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 한 장의 종이는 프롤레타리아가 점령하지 않으면 브르죠아가 반드시 점령할 극히 중요한 한 장이 아니겠는가. 초계급적인 신문이라든가 또는 뉴스의 객관성과 같은 것은 전적으로 실없는 소리인 것이다.’(삼호수, 1972 : 258)
중국언론에는 외견상 언론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헌법 제19조에는 당노선과 일치하지 않는 의견이나 당노선에 위배되는 견해는 일체 표현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James W. Markham, 1970 : 367)
다)중국의 언어정책
언어는 문화를 담고 있는 일종의 용기로서 민족문화심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잃게 되면 민족문화심리가 정착할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한어라는 그릇으로는 조선족의 문화심리를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어의 의성의태어에서 보여주는 감수의 다양성과 섬세성이라든가, 시제에서 보여주는 과거, 현재, 미래 등의 명확성이라든가, 경어에서 보여주는 서열관계, 상하질서의 엄격성이라든가 하는 것은 한어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개 민족으로 말할 때 그 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문화심리에서의 사유와 인지를 결정하고 제약하는 역할을 하며 따라서 그 민족의 성격, 그 민족의 의식, 그 민족의 정감, 그 민족의 습관 등에 의한 민족문화심리의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인 문화요소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언어의 이 결정적인 역할은 일부 단어나 일부 문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적 의미에서의 언어심층구조에 의해 수행된다고 볼 수 있다.(김경일, 1994 : 283-286)
한 민족에게 있어서 언어는 그 민족을 특징지어주는 공통성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언어의 공통성을 떠난다면 민족의 형성을 운운할 수 없거니와 민족의 번영을 운운할 수 없으며 나아가서는 민족의 발전도 운운할 수 없다. 중국 특히 연변 조선족 자치주 경내에서 우리 민족이 자기의 말과 글을 대를 이어 계승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중국정부에서 민족평등정책과 소수민족 정책을 확고히 지켜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의 여러 소수 민족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소수민족들이 자기의 말과 글을 계승, 발전시키도록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국가적 정책과 법률 그리고 지방에 따르는 규정들을 세워 놓았다. 따라서 중국 경내의 우리민족, 특히 연변조선족 자치주 경내의 조선족은 중국에서 민족의 말과 글을 계승, 발전시키는 면에서 정책적 및 법적 보호를 받으면서 민족의 말과 글을 자치기관에서 민족적 자치권리를 행사하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로 이용하고 있다.(로주철, 1997 : 171)
중국 헌법에는 중국의 소수민족 언어 문자 사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여러 민족은 자기의 언어, 문자를 사용 및 발전시킬 자유를 가진다.(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조)
한 나라에 있어서 가장 기본으로 되는 법률인 헌법이야말로 다른 여러 가지 구체적인 법적 규정과 조치들이 파생할 수 있는 모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헌법에서의 이런 법적 규정이 있음으로 하여 연변 조선족 자치주 경내에서는 우리민족의 제반 생활과 교제에서까지도 민족의 말과 글을 이용하고 있다.
한편 민족구역자치법에서는 ‘민족자치지방의 자치기관은 본지방의 여러 민족들이 모두 자기의 말과 글을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를 보장한다. 민족자치지방의 자치기관은 임무를 집행할 때 본 민족자치지방 자치조례의 규정에 좇아 당지에서 통용되는 몇 가지 말과 글을 동시에 사용하며 구역자치를 실시하는 민족의 말과 글을 위주로 할 수 있다(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 자치법 제10조)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소수민족 학생을 위주로 모집하는 학교들 중 조건이 허락되면 마땅히 소수민족문자로 된 교과서를 사용하여야 하며 아울러 소수민족언어로 강의를 하여야 한다(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 자치법 제37조)고 한 규정은 소수민족 학교의 설립과 소수민족언어 강의를 명문화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들은 우리 민족을 비롯한 여러 소수 민족들의 실제적인 수요와 절박한 염원을 구현하였거니와 소수 민족들의 자치권리와 민족평등을 존중하는 국가의 원칙을 구현하고 있다.
한편 연변주 조례에는 ‘자치주의 자치기관은 직무를 집행할 때 조선어와 조선문, 한어와 한문을 통용하되 조선어와 조선문을 위주로 한다(연변 조선족 자치주 조례 제18조)고 명문화되어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규정에 의하여 연길 공항을 비롯한 연변주 내의 모든 간판과 안내문은 한글을 위에 먼저 쓰고 그 아래 한자를 쓰게 된 것이며 공식적인 행사에서도 조선어를 먼저 말한 후 한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 민족은 재판에서 소송할 때도 조선문과 조선어로 할 수 있다. 즉 헌법에 ‘여러 민족 공민들은 본 민족의 언어, 문자로 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가진다(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134조)고 하였고 이에 따라 자치법에서도 ‘민족자치지방의 인민법원과 인민검찰원은 당지에서 통용되는 언어로써 사건을 검찰하고 심리하며 여러 민족 공민이 모두 자기 민족의 언어와 문자로 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가지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당지에서 통용되는 말과 글을 잘 모르는 소송 참여자에 한해서는 통역을 해주어야 한다(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 자치법 제47조)고 못박았다.
주민신분증 제도가 실시되면서부터 중국에는 소수민족문자 사용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규정이 세워졌다. ‘민족자치 지방의 자치기관은 본 지역의 실정에 따라 본 민족의 문자를 동시에 사용하거나 당지에서 통용되는 어느 한 민족의 문자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중화인민공화국 주민 신분증 조례 제33조) 이 규정에 좇아 연변지역의 주민신분증에는 조선족은 물론자치주 경내의 다른 민족들도 우리 민족문자와 한문이 찍혀져 있는 신분증을 휴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에는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그들의 언어, 문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책적, 법적 규정들이 다양하게 세워져 있다. 따라서 중국의 우리 민족 특히 민족자치를 실시하는 지역 내의 우리 민족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에서부터 학교 교육, 그리고 신문과 방송, 출판사업에까지 우리말 우리글을 마음껏 사용하여 문화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3.조선족 언론의 현황
가)조선족 신문
연변일보
‘연변일보’는 중국내 조선족 언론지 가운데 가장 먼저 생겨난 신문이며 대표지이다. 이 신문은 또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위원회 기관지이며 한글 외에 중국어문을 출간하고 있다. ‘연변일보’(한글판)는 1948년 4월 1일에 창간되었고 현재로 4개면에 매주 6기를 출간하며 발행량은 13,642부(우체국 최신집계)로서 중국내 조선족 언론지 중 발행량이 가장 많은 신문이다. 중국어문 ‘연변일보’는 1958년 1월 1일에 창간되었다. 연변일보는 또 한글로 된 ‘종합신문’(시사주간지), ‘조선족 중학생 신문’(주간지)을 출간하고 있다. ‘종합신문’(1979년 10월 1일)은 현재로 16개면이고 발행량은 3,000부이다. ‘조선족 중학생보’(1989년 5월 1일 창간)는 8개면이고 발행량은 57,000부이다.
연변일보는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노선, 방침, 정책을 선전하고 중국내 200만 조선족들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분야의 다양한 양상과 생활모습을 담고 있으며 한민족의 각종 정보를 다루고 있다. 더불어 지정학적 우위의 연변의 현실정에 근거해 주변국들의 경제상황도 보도하고 있다.
‘연변일보’ 창간시 연변지역은 일본군이 투항하고 이미 해방되었다. 중국 연변지방 사업위원회는 연변내 백성들을 참군 참전에로 동원하고 토지개혁을 진행하며 해방구를 공고히 건설하고 중국범위에서 해방전쟁의 승리를 힘껏 지원하고저 ‘연변일보’를 창간해 기관지로 하였다. 당시 4개면으로 매주 6기를 출간했으며 1949년 3월말까지 306기를 출간했다.
1949년 4월 1일에 당시 동북지역에서 만들던 3개 한글신문들인 동만지역 ‘연변일보’, 남만지역 ‘단결일보’ 북만지역 ‘민주일보’를 ‘동북 조선인민보’로 합병하였다. 이 신문은 중국 연변지위의 기관지이기도 했고 동북 3성의 조선족 일간지이기도 했다. 이 신문은 4개면에 매주 6기를 출간했다. 중국 중앙 동북국이 취소된 후 ‘동북 조선인민보’는 1954년 12월 31일에 정간했고 1,583일분을 출간했다.
1962년 6월 23일 당시 총리 주은래는 연변시찰시 연변일보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조선문 신문을 잘 만들 것을 주덕해 등 주당위 책임자에게 지시한 바 있다.(연변일보사, 1998 : 3)
문화대혁명 개시후 연변일보사 군접관소조는 1967년 2월 25일에 ‘연변일보’ 한글 및 중국어판을 모두 ‘신화사 전신’으로 고쳤다. 한글판은 4개면에 일간지로 중국어판은 4개면에 매주 6기로 출간되었다. 이 신문은 1968년 8월 1일에 연변일보로 복간되었다.
연변일보는 1987년에 건평 7400 평방미터의 12층 사옥을 신축했다.
연변일보사는 국가보도출판서로부터 1996년-1997년도 전국 지방신문사 관리 선진 단위로 명명 받았다. 현재로 서울과 북경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한국의 중앙일보, 대구 매일신문, 한라일보, 조선의 민주조선, 일본의 니키다 신문과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한국, 호주, 미국, 캐나다, 러시아, 조선 등 해외 많은 나라에 신문이 보급되고 있다.(허룡석, 2000 : 15)
1998년 창사 50주년을 맞아 노후 설비를 전격 교체, 또 중국내 조선족 1호 언론 메이커로 도약하기 위해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문화센터 등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재 화광 7형 칼라 전자 출판 시스템과 컴퓨터 시스템을 보유하고 칼라 옵세트 윤전기 2대, 옵세트 평판기 3대, 포장기 등이 갖추어져 있고 CTS화 구축을 추진하였다. 부단히 발전하는 시장경제에 순응하고 신문업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업계에 대응하고자 최근 몇 년 동안 연변일보사는 관리 메커니즘 인사제도 분배제도 등 여러 면에서 일련의 개혁을 진행하였다.
연변일보는 50년 연륜을 지역발전과 겨레의 정신력 향상에 이바지해왔고 민족경제의 부흥 문화 창달에 적극 기여해 200만 동포의 선구자 역할과 지역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명실 공히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흑룡강신문
흑룡강신문은 1962년 10월 1일에 하얼빈에서 창간되었다. 그것은 흑룡강성 조선족의 사상, 생산, 사업, 생활을 제때에 반영·지도할 수 있는 전성 규모의 신문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신문은 흑룡강성 동포 농민과 기층 간부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종합적 신문이다. 당의 노선, 방침, 정책을 선전하고 국내외 소식을 널리 보도하고 흑룡강성 조선족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중에서 거둔 성취와 경험을 공급해주는 것을 사명으로 내세웠다.
흑룡강신문의 창간초기 신문제호는 흑룡강일보(한글·주간)로 4절지 4면이었다. 1963년부터 신문제호를 흑룡강일보로 고치고 매주 2회씩 발행하고 그해 7월부터는 격일간으로 발행했다.
1979년 12월 12일부터 신문제호를 흑룡강 조선문보로 고쳤다. 1983년 1월 1일부터는 흑룡강신문사에서 따로 나와 조선어신문사를 만들었다. 그해 7월 1일부터 신문제호를 ‘흑룡강신문’으로 고치고 2절지 4면으로 지면을 늘렸다. 발행량도 원래의 2만3천부로부터 4만부 정도로 늘어났다.
1985년 4월에는 조선문신문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위 선전부의 비준을 거쳐 한문 경제지 ‘치부정보신문’을 창간하였다. 한편 7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12층 사옥과 숙소를 완공, 1986년 8월에 입주하였다. 1986년 5월 13일 성위 상무위원회에서는 흑룡강신문사를 처급으로부터 부청급으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하였다.(북경대학 조선문화 연구소, 1999 : 257-264)
흑룡강 신문은 민족에 대한 보도를 우선하는데 노력하였다. 최근 조선족 보도의 비례는 1면에 70%, 2-3면은 80-90%에 달하였다. 특히 1면 머리기사를 민족보도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1997년에 68%, 1998년에 70%, 1999년에 70%를 기록하였다. 작은 일이라도 민족사회의 생존발전에 관계되는 뉴스는 머리기사로 취급하고 있다.(홍만호, 2000 : 7)
료녕신문
료녕신문은 1966년 1월 1일에 중국 요녕성 기관지의 하나로 심양에서 창간되었다. 이 신문이 나오기에 앞서 요녕에는 료년농민보(조선어판)가 있었다. 료녕농민보는 1958년 8월 1일 심양에서 창간되었다. 료녕신문은 료녕농민보의 편역판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신문은 4절지 4면으로 매주 2회씩 발행됐다.
1961년 료녕농민보가 폐간된 후 5년만에 료녕신문이 창간되었다. 초기 신문제호는 료녕일보(조선문, 농촌판)였다. 4절지 4면으로 매주 2회씩 발행된 이 신문은 요녕성 기관지 료녕일보와 한 부분이었다. 주요 독자는 요녕성의 조선족 농민과 기층간부 및 기타 분야에 종사하는 조선족이었다.
주요 과업으로는 당의 노선과 방침, 정책 선전을 통해 전 요녕성의 조선족으로 하여금 형제 민족과 단결하여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 보다 큰 공헌을 하게 하자는데 있었다. 이 신문은 1968년 5월 27일 10년 동란으로 인해 정간되었다. 1979년에 복간된 이 신문은 제호를 료녕일보(조선어판)로 고치고 4절지 4면 격일간으로 발행했다. 1982년 6월부터는 제호를 료녕조선문보로 고치고 다시 1986년 1월부터 료녕신문으로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7년에는 최고 발행량이 10,020부에 이르러 료녕성 조선족 4세대에 신문 1부씩 해당하는 발행부수를 기록하였다. 1991년 2월에는 4절지 4면으로 된 신문을 2절지 4면으로 확대하였다.(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1999 : 264-272)
길림신문
길림신문(길림조선문보)은 1985년 4월 1일에 창간된 성급 조선문 언론지로 주요독자 대상은 길림성내 120만 조선족이며 그밖에 동북 3성과 북경, 연해지구, 내륙지구의 28개성시 자치구에 광범위한 독자권을 형성했다. 2000년에 창립 15돌을 맞게 되는 길림신문은 정부의 지원과 동포사회의 호응 속에 중국 경내 동포 언론지 중 발행량이 많고 영향력이 큰 유력지로 성장하였다.
1987년 창간 3년만에 발행량 3만부를 돌파하여 중국 땅에 소수민족 문자신문 중 최대 발행량을 기록한 길림신문은 해외발행권과 해외광고 게재권을 부여 받아 선후로 한국, 조선, 일본, 미국, 캐나다, 오스트랄리아 등에 보급망을 넓혔고 또 한국, 미국 등의 기업단체들과 다방면의 교류와 협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부터 한국 서울에 지국을 설립, 한국내의 뉴스, 발행, 광고업무를 직접 취급하고 있다.
길림신문의 최고 정책기구는 편집위원회이고 그 산하에 편집국, 경제부, 사회생활부, 문예부, 시사부, 발행부, 광고부, 경영부, 대외 연락부 등 부서가 있다. 조선족이 집거한 연변조선족 자치부 연길에는 분사를 설립, 길림, 통화, 장백 조선족 자치현, 반석, 집안 등 동포 중점 거주지에는 기자소를, 북경, 상해, 청도, 천진 등 주요 도시에는 특파원을 두고 있다.
길림신문사에서는 길림신문외에도 동북3성의 200만 조선족과 중국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을 위한 해외판 경제, 문화, 생활정보지 동북저널(주간)과 문화생활 전문지 문화주간을 출판하고 있으며 2000년 1월 1일부터 인터넷 길림신문을 내보내고 있다.
성정부의 배려로 지난해에 건평이 2,000여 평방메터 되는 새 사무청사에 입주한 길림신문은 국내외 지성인들의 성원 속에서 21세기를 향한 도약에 나서고 있다.(차룡수, 2000 : 18)
중국 조선족 소년보
1950년 4월에 소년지로 창간된 이 신문은 1957년 7월 1일 정식으로 어린이 신문사를 설립, 소년신문을 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50년대 초중기는 중국 공화국이 창건된지 얼마 안되어서 중국어로 된 어린이 신문잡지도 두셋밖에 없던 때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 민족의 후손들에게 이 신문은 큰 배려를 안겨 주었다. 지난 40여년간 이 신문은 연변이라는 작은 지역의 조선족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변소년보’로부터 중국 전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국 조선족 소년보’로 자라났다. 주 2회 발행하는 이 신문의 발행량은 창간 초기 7천부로부터 6만부에 이르러 중국 경내에서 출판되는 한글로 된 신문 중에 발행부수가 제일 많은 신문이 되었다.
이 신문사는 조선족 어린이들의 성장에 떼어 놓을 수 없는 언론중심, 활동중심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전 중국의 300여개 어린이 신문·잡지사 협회인 중국소년아동 신문잡지협회 부회장 신문이다.(한석윤, 1997 : 13)
이밖에 중국내에는 한글로 책을 출판하는 전문출판사 5개, 부분적으로 우리의 문자로 책을 출판하는 소수민족 공동 출판사 3개, 우리 문자로 출판하는 각종 잡지사 40여개가 있다. 그중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에 우리 민족의 출판사 3개, 각종 잡지사 37개가 집중되어 있다.
나)조선족 방송
연변인민방송국
중국내에서 살고 있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하여 2백여만명의 조선족 동포가 살고 있다. 이들은 독립된 문화권을 형성, 발전시키고 있는데 이의 일환으로 50여년간 독자적인 우리말 방송을 계속해왔다.
연길에 있는 연변인민방송국은 유서깊은 방송국이다. 이 방송국은 연변주 일대가 가청지역이다. 연변인민방송국은 1945년 5월 1일에 창립되었다. 이 방송국은 창립이래 당과 국가 그리고 연변 조선족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그러나 이 방송국이 전파를 발사해온 것은 이보다 훨씬 오래전인 일제시대때부터였다. 1931년 4월 1일 일인들이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침략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이곳에 방송국을 세워 연길방송국이라 하였다. 1945년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사옥과 장비들은 같은 해 11월, 연길에 주재한 소련 홍군 사령부가 접수하였다. 1946년 7월 1일부터는 연길신화방송국 XNYR, 주파수 785Hz로 정식 방송을 시작했다. 47년 여름, 1Kw 송신기를 갖추고 주파수 1,353Hz로 변조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00w의 중파 송신기를 단파기로 바꾸어 중앙과 동부로 송신하였다. 연길신화방송국은 중국어 보통화를 위주로 방송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어를 사용한 프로그램을 방송하였다.
48년 3월 9일 길림성이 해방되자 연길신화방송국은 직원을 길림방송국에 파견하여 방송업무를 도왔으며 같은 해 10월 19일 장춘이 해방되자 연길방송국장이 장춘방송국으로 옮겨가게 된다. 길림성 당위원회에서는 연길방송국을 연변지역위원회의 영도 아래 넘겨 마침내 48년 11월 1일 연변병송국이 성립된다. 그후 49년 5월 1일 연길방송국은 연길인민방송국으로, 51년 4월 1일에는 현재의 명칭인 연변인민방송국으로 바뀌게 된다.
연변인민방송국이 설립되었을 때는 두가지 언어를 사용해서 방송하였다. 조선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원래 신화방송국때 사용했던 비율 18.2%에서 51.2%로 증가했다. 49년 하반기에 들어서서는 중앙방송국의 중요한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조선어를 사용하여 방송하였다. 출력은 최초의 50w에서 7.5Kw까지 점차 확대되었다.
62년에는 당시의 총리 주은래가 연변을 시찰할 때 “훌륭한 조선어방송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63년에는 연변인민방송국의 조선어는 평양어를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65년 9월 15일 당시 주석 모택동은 “훌륭한 방송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중국인민과 전세계인민을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고 방송사업에 관한 특별교시를 하였다.
66년 문화대혁명 때는 모든 것이 정체되었다. 방송내용은 주로 문화대혁명의 선전이었다. 따라서 방송내용상에는 별 진전이 없었으나 기술은 많이 발전하였다.
이 방송국의 종업원은 48년 경에는 20여명이었던 것이 65년에 와서는 140여명으로 늘었으며 80년에는 396명, 현재는 약 500명 가량의 국원이 방송현업에 종사하고 있다.(김원태, 1992 : 297-302)
연변인민방송국에서는 1979년부터 외국어 방송 강좌를 설치하고 일본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일본어는 매주 월, 수, 금, 일에 25분씩 진행하고 영어강좌는 화, 목, 토에 30분씩 진행하였다. 개혁개방 초기에 연변방송국에서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안도현 산골에 장치하였던 200Kw 송신기를 연길에 옮겨오고 1982년 5월 1일부터 정식으로 조선어 방송에 사용하였다.
1988년부터는 ‘대중가요무대’를 신설하고 대중 속에 있는 많은 가수들을 방송무대에 출연시켰다.
개혁개방시기 상품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연변인민방송국의 광고실무도 크게 발전했다. 단순한 상품판매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광고의 창작, 출연, 녹음 등 종합적 제작수준을 보여주었다. 광고의 창조능력과 기획능력을 높이기에 유의하였으며 광고의 언어문자를 다듬고 형식을 다양화하며 그 질을 높이고자 노력하였다. 1986년부터 1988년 기간에 8편의 광고 프로그램이 전국상을 받기도 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연변인민방송국은 전국도시 방송국 광고협조회의 부비서장, 중국광고협회 방송위원회 위원, 우수 프로그램 심의위원회 위원, 중국광고협회 학술위원회 위원 등 직책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1999 : 534-542)
중국 대외 조선어 방송
중국 국제방송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외방송으로서 베이징 방송국이라고도 불리우며 통상 Radio Beijing이라고도 한다. 중국국제방송국은 1947년 9월 11일에 창건되어 현재 38개 외국어와 중국표준어 그리고 네가지 중국방언으로 세계 여러나라 지역에 방송하고 있다. 중국 국제방송국의 외국어방송은 모두 종합적인 방송으로서 보도와 국제논평, 중국소개, 음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언어파트에서는 대상국의 실정에 따라 여러 가지 고정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중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 과학기술, 풍토,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 국제방송국에서는 한국의 국제방송과 마찬가지로 세계 각지의 청취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고 있으며 이들에게 수신확인증과 기념품, 달력 등을 보내고 있다.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1950년 7월 2일에 창설되었다. 창설 이래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북한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이곳 아나운서들은 북한 말씨를 쓰고 북한에 가서 연수를 받는가 하면 북한의 방송요원이 이곳에 와서 지도를 하는 등 대북한 방송의 역할을 주로 해왔다. 그러나 수교 후에는 한국과의 교류도 넓어져서 남북한 한반도를 방송대상으로 삼고 있다. 처음 30분이던 조선어방송은 오늘날 4시간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중국 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은 중국정부의 입장과 대외정책을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반영하고 있다. 2000년에 중국 국제방송국 조선어 방송은 반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국 국제방송국 조선어 방송은 오늘날 22명의 기자, 편집, 번역, 아나운서를 가진 중국의 유일한 대외조선어 방송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조선어 방송부는 중국 국제방송국 38개 외국어 방송부 중 제1 아시아국 산하의 방송부로서 현재 매일 평양과 서울시간으로 20시부터 24시까지 조선반도를 상대로 방송하고 있다. 한편 1999년 3월 28일 베이징 수도권 첫 FM 조선어 방송을 시작하였고 이어 12월 10일 조선어 인터넷방송을 개시해 중국 국제방송 조선어방송의 전성기로 접어들고 있다. 중국 국제방송국 조선어 방송은 대외 외국어 방송으로서 방송시간과 인원, 규모에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조선어 방송은 중국의 대내외 정책과 개혁 개방정책, 그리고 중국의 건설성과와 중국 인민의 생활모습을 제때에 청취자들에게 소개하고 친선의 유대 역할을 함으로써 청취자들로부터 ‘중국의 목소리’로 불리우고 있다.(백일승, 2000 : 21)
수도 북경에서 방송하고 있는 중앙인민방송국(CHINA NATIONAL RADIO. CNR)은 중국의 국가방송국이다.
1956년 7월 6일 개국한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 방송은 지난 40여년간 조선족 청취자들에게 국내외 시사와 생활에 유익한 다양한 정보들을 폭 넓게 전하면서 청취자들의 정다운 벗이 되고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왔다.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은 국내외 최신 동태를 정확하게 포괄적으로 전하는 뉴스 이외에 초점화제와 중국의 발전상, 스포츠 소식을 곁들인 ‘오늘의 화제’와 조선족 지방동정과 조선족 인물을 소개하는 ‘내 고향 우리 겨레’, 경제, 생활정보를 제공하고 기업과 기업인을 순방하는 ‘경제와 생활’, 움직이는 세계의 동향을 알아보는 ‘세상만사’, 젊은이들의 모습과 미래지향의 생활을 엮어보는 ‘청춘유보도’, 문화예술계 동향을 알아보고 흥겨운 민요와 세계 명곡을 감상하는 ‘예술무대’, 희망음악과 함께 재미나는 재담 소품을 방송하는 ‘즐거운 일요일’ 등 다양한 주간 프로를 취급한다.
중앙 조선어방송의 가청지역으로는 흑룡강, 길림, 요녕, 내몽골, 북경, 산동이 포함되며 조선, 한국, 러시아, 일본 등 지역에서도 수신이 가능하다. 매일 두 차례 방송되는 조선어 프로는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첫방송, 다음날 아침 5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재방송 한다. 주파수는 다음과 같다.
북경지역: FM 101.8 MHz, 심양지역:FM 88.8 MHz, 연변지역:MW(중파) 1,210 KHz
기타지역: SW(단파) 8,566, 9,920MHz
중국국제방송 FM 조선어 방송 편성표
시간\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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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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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텔레비전
연변인민방송국에서는 1973년 12월 1일 화룡현 방송소에서 1Kw의 텔레비전 시설을 갖추고 중국 최초의 우리말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하였다. 1977년 12월 1일 연길텔레비전 중계방송소를 연길텔레비전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 12월 16일 연길텔레비전 방송국을 연변텔레비전 방송국으로 개칭했다.
이 방송은 처음에는 중국 중앙TV방송을 중계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었으나 1977년말부터는 자체 프로그램을 제작 송출하고 있다. 1983년에는 방송 송신시설을 건립하여 연변주의 약 70%가 가시청권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80년대에 들어와서 연변주의 주내 각 현들은 자체 방송국과 텔레비전 중계시설을 완비하게 되었다.
1980년에 1만대였던 텔레비전 수상기는 1985년에는 17만대에 달해 매년 3만대씩 증가했다. 그러나 그중 반 이상이 흑백 텔레비전이었다.
1981년 8월 15일부터는 연변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칼라 방송을 시작 매일 3시간 동안 방송하였다. 그러나 제작능력의 한계로 자체로 제작한 프로그램은 수요일과 토요일만 방송하고 나머지 5일간은 한어 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송하였다.
중앙텔레비전과 성텔레비전 방송의 주요한 뉴스에 대하여 처음에는 한어 방송을 직접 중계하였으나 중계효과가 좋지 못하자 1981년 8월 15일부터는 비디오 중계방법을 취하였다. 즉 장춘성 텔레비전 방송국에 가서 중앙텔레비전 방송의 ‘뉴스 중계방송’ 프로그램을 비디오에 담아 기차로 연길에 가져다 방송하였다. 화면은 맑고 선명하지만 뉴스보도가 북경보다 이틀 늦어졌다. 1984년 부터는 북경과 연길 사이에 마이크로 웨이브가 개통되어 북경의 뉴스를 당일에 시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족은 한어를 알아 듣지 못했다. 때문에 1984년 6월 4일부터 중앙 텔레비전 방송의 ‘뉴스 중계방송’ 프로그램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국내외 뉴스’란 이름으로 방송하였다.
연변 텔레비전 방송은 해마다 전국 도시 텔레비전 방송국 광고 교류회와 북방 텔레비전 광고 교류회에 참가하였다. 1987년에 30편의 광고 프로그램을 40개소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교환하였다.
연변텔레비전방송은 ‘연변 라지오 텔레비신문’을 매주 1회씩 발행하고 있고 텔레비전 방송국에 예술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프로그램 내용을 보면 뉴스, 다큐멘터리는 물론이고 코미디쇼, 어린이 프로그램 등 다양하며 거의 모두를 조선어로 제작 방송한다.
연변텔레비전은 ‘우리 선생님’, ‘민들레꽃’ 등 수많은 드라마를 제작해서 소수민족 소재 드라마 평의회 경연대회 등에서 각종 상을 타기도 했다. 문화프로그램 중 일부는 중앙TV를 통해 전국에 자주 소개되고 있다.(북경대학 조선문화 연구소, 1999 : 542-545)
연변인민방송국과 연변텔레비전 등 우리말 방송은 다같이 한민족의 방송국으로서 동포들이 우리말을 갈고 닦아 한민족으로서의 동질성 유지와 우리의 전통문화 보존과 창달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이 방송들이 중국에 사는 한민족들을 하나로 묶는 단단한 끈이 되고 있으며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일깨우고 우리말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쓰게 하는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다.
40 예술영화:신마 방원
35 TV련속극:사랑 하기도 어렵다 (9)
00 TV련속극:생사 동행(9,10)
03 다채로운 시공 간
42 TV련속극:찬란 한 봄빛속의 저팔계(28,29)
20
06 TV련속극:뜨거 운 사랑을 갈 구(9)
00 TV극
00 유선뉴스
43 TV련속극:사랑 하기도 어렵다 (10)
52 일기예보
55 건강생활
21
40 경제보도
41 일기예보
34 TV련속극 유정 한 세상(1)
49 TV련속극: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지 마세요
(14,15)
15 세계명영화전 시방영(전편)
36 녀성
22
17 자정극장
15 TV극
06 빙천극장:내각의 밀정
15 세계명영화전 시방영(후편)
23
19 TV련속극:정탐 베라미(18)
21 영화관
24
15 성화과학기술
20 TV련속극:자마 (31)
4.조선족의 언론관에 관한 연구
조선족 언론관에 관한 연구는 모두 20문항의 설문조사로 이루어졌다. 먼저 신문방송 매체를 얼마나 자주 보거나 듣는가 하는 질문에 조선어신문은 25.5%(76명)가 매일 본다, 20.8%(62명)이 1주일에 두세차례 본다, 14.8%(44명)이 1주일에 한번, 그리고 5.7%(17명)이 한달에 한번, 21.5%(64명)가 거의 보지 않는다고 답변하였다. 즉 조선어 신문은 4분의 1 정도가 매일 보고 있는데 1주일에 한번 또는 두세번 보는 사람까지 합해 보면 60% 이상의 많은 독자들이 신문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다음, 한어신문(중국어신문)은 매일 보는 사람과 일주일에 두세번 보는 사람이 24.5%(73명)로 같고, 10.4%(31명)는 1주일에 한번, 3.4%(10명)는 한달에 한번, 그리고 거의 안보는 사람도 20.1%(60명)로 나타났다.
한어신문은 매일 보는 사람이 조선어 신문에 비해 약간 떨어졌으나 일주 한번, 또는 두세번 보는 사람들을 합하면 59.4%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조선족의 60% 정도는 1주에 한번 이상 조선어 또는 한어 신문을 보고 있다고 하겠다.
조선어 라디오 방송은 매일 듣는 사람이 18.5%(55명)이고 일주 두세차례는 13.1%(39명), 1주일에 한번은 6.7%(20명), 한달에 한번이 5.0%(15명), 거의 안듣는다는 33.9%(101명)이었다.
한편 한어 라디오 방송은 매일 듣는 사람이 12.8%(38명), 주 2-3회는 10.4%(31명), 주 1회는 7.0%(21명), 월 1회는 4.7%(14명), 그리고 거의 안듣는 사람은 37.9%(113명)였다.
조선어 라디오 방송은 5분의 1정도가 매일 듣고 있는데 한어방송은 10분의 1이 조금 넘는 사람이 매일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조선어건 한어건 라디오를 안 듣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텔레비전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텔레비전 시청에 관한 질문에서 조선어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은 매일이 66.8%(199명), 주2-3회 8.7%(26명), 주 1회 6.0%(18명), 월 1회 1.3%(4명), 그리고 거의 안보는 사람이 9.7%(29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중국어 텔레비전 방송 시청자는 매일이 74.2%(221명), 주 2-3회 8.1%(24명), 주 1회 1.3%(4명), 월 1회 0.7%(2명), 거의 안보는 사람은 6.4%(19명)였다.
텔레비전은 조선어의 경우 라디오보다 3.5배 가량 보는 사람이 더 많았고 한어의 경우는 5.5배 정도 더 많았다. 이것은 조선족이 텔레비전 시청을 생활화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수치라고 하겠다. 그런데 한어 텔레비전 시청이 조선어보다 더 많은 것은 중국 주류사회에 더많이 접촉하려는 조선족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방송에 관한 질문에 10.4%(31명)가 매일 듣는다고 대답했고 주 2-3회는 7.4%(22명), 주 1회 역시 5.4%(16명), 월 1회도 5.4%(16명), 거의 안듣는 사람은 44.3%(132명)였다.
한국방송은 텔레비전 주사선이 서로 다르고(한국은 525 NTSC 방식, 중국은 625 PAL 방식)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시청하기 어렵다. 그러나 리디오 방송은 중국 연변과 심양지역에서 중파방송이 잘 잡혔으며 특히 중국 조선족을 상대로 하는 KBS 사회교육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연변 조선족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프로그램으로 인기가 높다. 조선족 10명 중 한명이 매일 듣고 있다는 조사 결과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으며 이 지역에 대한 방송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특히 1999년부터는 연변지역의 각 호텔과 연변대학 근처에 위성 안테나를 설치해 KBS, MBC, SBS 등 한국TV방송이 그대로 선명하게 수신되고 있음을 본 연구자가 확인한 바 있다. 이 한국TV방송은 위성방송 시청시설이 없는 일반인들이 보기는 어려우나 그 내용이 조선족에게 매우 인기가 높아 머지 않아 조선족 사회에서 한국방송 시청이 일반화될 것이고 조선족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 그리고 언어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북한방송에 관한 질문에 2.3%(7명)가 매일 듣고 1.7%(5명)가 주 2-3회, 3.7%(11명)가 주 1회, 2.7%(8명)는 월 1회, 거의 안듣는 사람은 59.1%(176명)이었다.
북한방송은 한국방송에 비해 청취비율이 매우 낮았다. 불과 2.3% 만이 매일 들을 뿐 전혀 안 듣는 사람이 60% 정도나 되었다. 자본주의식 방송에 익숙해진 조선족들은 사회주의적 방송을 고수하고 있는 북한방송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집에서 정기 구독하고 있는 신문은 연변일보 39.9%(119명), 텔레비죤신문 10.4%(31명), 생활안내 6.0%(18명), 스포츠신문2.3%(7명), 길림신문 3.0%(9명), 흑룡강신문 1.0%(3명), 가정신문 2.0%(6명), 중학생신문 0.7%(2명), 경제신문 0.3%(1명), 인민일보 0.7%(2명), 참고소식 1.0%(3명), 족구보 1.3%(4명), 법제일보 0.3%(1명), 기타 9.1%(27명) 등이었다.
연변일보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다음으로 텔레비죤신문(정식 명칭은 ‘라지오 텔레비 신문’이며 우리나라의 TV가이드 같은 주간지임)의 구독자도 매우 많았다. 흑룡강신문은 내용이 다양하고 공산주의 이념보다는 조선족의 관심사를 주로 다루어 구독자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였다.
즐겨 읽는 기사는 경제 2.0%(6명), 정치 5.7%(17명), 사회 8.8%(26명), 스포츠 11.8%(35명), 오락 및 연예 2.4%(7명), 생활 6.4%(19명), 사설 및 논설 0.3%(1명), 기타 14.9%(44명) 등이었다. 즐겨 읽는 기사의 1위가 스포츠일 정도로 조선족은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으며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였다. 그들은 특히 연변 ‘오동’ 축구팀의 활약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연변일보는 일주일에 한번씩 매주 월요일에 ‘주간스포츠’란 이름으로 한주일 동안의 스포츠 기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수요일에는 ‘수요경제’가, 금요일에는 ‘주말’판이 특집으로 제작되고 있으며 평일에는 1면이 종합, 2면은 경제, 3면은 교육, 4면은 시사면이었다. 일요일에는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다.
1시간 정도가 가장 많이 읽는 시간이고 그 다음이 30분인데 우리나라 신문과는 단순 비교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신문의 면수가 대체로 4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지오 텔레비 신문’은 구독자가 두 번째로 많지만 한국의 ‘TV 가이드’처럼 주간잡지형태가 아니고 신문형태로 되어 있다.
소유하고 있는 텔레비전은 칼라 텔레비전이 83.9%(250명), 흑백이 12.4%(37명), 없음은 1.7%(5명)이었다.
칼라, 흑백 공히 86% 이상이 텔레비전을 소유하고 있어 텔레비전은 조선족에게 생활의 일부분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주말에 텔레비전 보는 시간은 30분이 1.3%(4명), 60분이 2.4%(7명), 90분은 1.3%(4명), 120분은 10.8%(32명), 150분은 2.7%(8명), 180분이 8.1%(24명), 210분(3시간 반)이 2.0%(6명), 240분(4시간)은 11.1%(33명), 270분(4시간 반)은 3.7%(11명), 300분(5시간)은 9.1%(27명), 330분(5시간 반)은 2.4%(7명), 360분(6시간)은 4.7%(14명), 390분은 1.7%(5명), 480분은 2.7%(8명)로 나타났다.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은 사람마다 같지 않고 같은 사람일 경우에도 자신의 일과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것이 현실이지만 평일에는 2시간 정도 보는 사람이 가장 많고 주말에는 4시간 시청이 가장 많으며 다음 2시간, 3시간 순으로 기록돼 비교적 시청시간이 길었다.
가장 많이 보는 텔레비전 방송은 연변TV 36.%(107명), 연변유선TV 3.0%(9명), 길림제1TV 1.7%(5명), 길림제2TV 0.7%(2명), 중앙제1TV 16.5%(49명), 중앙제2TV 1.0%(3명), 중앙제4TV 0.3%(1명), 중앙제5TV 10.4%(31명), 중앙제6TV 2.0%(6명), 중앙제8TV 1.0%(3명), 한국방송 1.7%(5명), 기타 4.4%(13명) 등이었다.
평일 라디오를 듣는 시간은 30분이 15.4%(46명), 60분이 13.4%(40명), 90분은 1.3%(4명), 120분은 4.7%(14명), 150분은 0.7%(2명), 180분이 0.7%(2명) 등이었고 주말에 라디오를 듣는 시간은 30분이 6.0%(18명), 60분이 12.4%(37명), 90분은 2.3%(7명), 120분은 7.4%(22명), 150분은 1.0%(3명), 180분이 1.3%(4명) 등이었다.
일반적으로 라디오 방송청취시간은 텔레비전 방송시청시간보다 짧았다. 30분, 60분이 가장 많았으며 주말에는 평일보다 더 적어져서 60분이 12.4% 정도로 제일 많았다. 주말에는 평일보다 텔레비전을 더 보거나 다른 활동 때문에 라디오 청취시간이 줄어드는 현상을 보여 주었다.
가장 많이 듣는 방송은 연변방송 44.7%(132명), 북경방송 1.4%(4명), 도문방송 1.0%(3명), 중앙방송 10.2%(30명), 한국방송 5.1%(15명), 기타 3.1%(9명) 등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의 제목 문항에서는 자유기입방식을 사용했는데 빈도 수가 많은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거명되었다.
연변TV의 요청무대, 중앙 제5TV의 축구의 밤, 연변TV의 소품, 중앙 제1TV의 신문연합보도(소식보도), 중앙 제1TV의 초점방담, 연변TV의 청춘스타트, 연변TV의 한국 드라마(사랑이 뭐길래, 그대 그리고 나, 의가형제 등), 연변TV의 추적프로, 연변유선TV의 한국영화
가장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제목 문항에서는 연변인민방송국의 각종 조선어 프로그램들을 자주 듣고 또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질문 역시 자유기입방식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한국방송 프로그램 중에서 즐겨 듣는 프로그램은 자유기입 방식으로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거명 되었는데 대체로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KBS의 ‘이산가족 찾기’,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가요무대’, ‘노래자랑’, ‘통일열차’, ‘가요톱10’ 등인데 이 프로그램들은 KBS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소리만 따서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방송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텔레비전은 중국과 주사선이 다르고 전파도 약해 위성 안테나를 설치하지 않으면 잘 볼 수 없기 때문에 KBS에서는 사회교육방송을 통해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방송하고 있다. 그러나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KBS에서 조선족 동포를 위한 라디오 방송으로 특별히 만드는 프로그램인데 청취자가 많고 인기도 매우 좋았다.
한국방송의 이미지에 대해서 5점척도로 문의한 결과 ‘재미있다·재미없다’ 항목에서는 재미있다 쪽으로 지수 4.40을 나타냈고 ‘생활에 도움된다·안된다’는 도움이 된다쪽으로 지수 4.43, ‘배울 것이 많다·없다’에서는 많다쪽에 지수 3.90, ‘내용이 쉽다·어렵다’에서는 쉽다 쪽에 지수 3.43, ‘친근하다·생소하다’에서는 친근하다쪽에 지수 3.74, ‘좋다·나쁘다’ 항목에서는 좋다쪽에 지수 3.88을 기록했다. 대체로 한국방송의 이미지는 재미있고 생활에 도움이 되며 배울 것이 많고 쉬우며 친근하고 좋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쉽다·어렵다에서 지수가 그중 낮게 나온 것은 한국방송에 생경한 외국어가 많이 나와 이해하기 어려운 때문으로 생각되었다.
한국방송 이미지
1 2 3 4 5
재미없다
(4.40)*
재미있다
생활에 도움이
안된다
(4.43)*
생활에 도움이
된다
배울 것이 없다
(3.90)*
배울 것이 있다
어렵다
(3.43)*
쉽다
생소하다
(3.74)*
친근하다
나쁘다
(3.88)*
좋다
한국방송은 주로 어느 방송을 즐겨 듣느냐는 질문에 KBS가 24.2%(72명)로 1위, SBS가 0.7%(2명)로 3위, 기타는 3.4%(10명)로 2위였다.
한국방송에서 방송하기를 희망하는 프로그램 종류는 한국소식 17.1%(50명), 교양교육 7.9%(23명), 오락 및 연예 16.8%(49명), 대조선족방송 6.2%(18명), 이산가족 방송 5.5%(16명)로 나타났다.
한국방송에 바라는 정책은 남북한 방송교류 16.8%(49명), 중국 조선족방송과의 교류협력 25.8%(75명), 대조선족 방송 확대 4.5%(13명) 대 중국방송(중국어)시간 및 방송확대 2.1%(6명), 조선족 방송인 초청연수 1.7%(5명), 한국방송의 중국 현지 제작 2.1%(6명), 이산가족방송 확대 2.7%(8명) 등이었다. 중국과의 교류 외에 남북한 방송교류가 두 번째로 많은 것을 보면 남북한의 통일을 바라는 조선족들이 남북한의 활발한 방송교류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족의 언어사용에 관한 질문에서 조선어와 중국어 가운데 편리한 언어는 조선어가 56.0%(167명)이었고 중국어는 24.8%(74명), 그리고 똑같다는 응답은 13.4%(40명)였다. 아직은 조선어가 더 편리한 상황이었다. 한국어 능력을 세분화해서 문의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선어(한국어) 능력은 듣기가 매우 못함 2.4%(7명), 못함14.1%(42명), 보통 43.4%(129명), 잘함 16.8%(50명), 매우 잘함 19.2%(57명)로 나타났다. 말하기는 매우 못함 5.0%(15명), 못함26.8%(80명), 보통 33.2%(99명), 잘함 10.4%(31명), 매우 잘함 11.4%(34명), 읽기는 매우 못함 4.7%(14명), 못함 13.4%(40명), 보통 33.9%(101명), 잘함 14.8%(44명), 매우 잘함 18.8%(56명), 쓰기는 매우 못함 7.0(21명), 못함15.4%(46명), 보통 32.2%(96명), 잘함 14.1%(42명), 매우 잘함 16.4%(49명)로 나타났다.
한국어 능력은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가 모두 보통 이상이라고 답한 사람이 압도적이었으나 매우 잘한다고 자신있게 말한 사람은 모두 20%를 넘지 못했다.
조선어(한국어)를 학습하는 이유로는 민족의 언어이기 때문에 47.3%(61명), 문화보존을 위하여 10.9%(14명), 한국을 방문하기 위하여 4.7%(6명), 학문적인 목적에서 5.4%(7명),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하여 1.6%(2명), 돈을 벌기 위하여 8.5%(11명), 통역을 위해서 1.6%(2명), 배우고 싶지 않다 12.4(16명) 등으로 나타났다.
조선어(한국어)는 한국방문이나 좋은 직장, 통역, 학문 등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민족의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반수에 육박해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가 확연히 나타났다.
조선어 또는 한국어를 어디서 배우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가족 11.8%(34명), 학교교사 17.7%(34명), 친구 6.9%(20명), 신문 2.4%(7명), TV 23.3%(67명), 라디오 4.2%(12명), 서적 6.3%(18명), 조선어문화센터 1.0%(3명), 한글학교 0.3%(1명), 기타 4.5%(13명), 모른다 6.9%(20명) 등이었다.
전통적인 교육기관과 개인 접촉을 통한 학습방법 못지 않게 언론매체를 통해 배우는 경우도 36.2%(104명)로 많았는데 이것은 언론매체가 언어교육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국을 알게 되는데 많은 영향을 준 것은 TV 38.1%(106명), 라디오 5.0%(14명), 신문 5.4%(15명), 부모 2.9%(8명), 친구 11.5%(32명), 학교 1.1%(3명), 여행자 11.5%(32명), 서적 2.5%(7명), 한국기업광고 1.8%(5명), 올림픽 5.4%(15명),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2.5%(7명), 기타 4.7%(13명)로 나타났다.
언론매체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TV가 압도적인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한국TV 시청이 일반화되면 한국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언어문화생활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5.맺는말
지금까지의 조사 및 연구결과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 한국을 알게 된데는 언론매체의 영향이 가장 컸고 특히 텔레비전의 힘이 컸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한국의 신문·방송·서적 등 언론매체는 조선족에 대한 영향력이 큼을 감안해서 그들에 대한 배려를 높이고 정책을 세우는데 노력해야 하겠다.
중국 조선족에 대한 중국정부의 민족정책의 기원은 중국 공산당이 성립하고 만주지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고 조선인 문제에 눈을 뜨면서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인 문제가 가지는 국제정치적인 미묘성에서 중국 공산당은 사실상 중국 민족주의의 한 형태인 영토적 통일성을 추구하게 되고 그것이 만주에서의 중국 공산당의 지도력 확립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중국 공산당의 조선 공산주의자 및 조선족에 관한 정책은 선언적 의미에서 민족 자결이나 공산주의적인 면을 강조하지만, 실제적인 면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이진영, 1999 : 84)
소수민족문화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소수민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스스로 계승 발전시키게 하고 그들 자신의 글로 신문을 만들고 책을 출판하며 자신의 말로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중화인민공화국 헌법과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 자치법에 명문화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중국 조선족은 말과 글은 물론 거리의 간판을 조선어로 쓰고 재판과 송사도 조선어로 하고 학교 교육도 조선어로 받는 등 중국땅에서 민족언어를 생활화하고 민족교육을 받아 우리말과 글, 그리고 우리 문화를 보존해 오고 있다.
조선족이 집거해 사는 연변은 1998년에만도 농촌에 19개소의 조선족 중학교와 33개소의 민족연합중학교가 있어 조선족 중학생이 8,836명이었었는데 1995년에 와서는 조선족중학교가 6개소, 민족연합중학교가 19개소로 줄어들어 조선족 중학생 수가 2,730명밖에 안되어 6년 사이에 학생수가 3분의 2가 줄어든 셈이다. 소학교도 상황은 같아서 1989년에 농촌에 조선족 소학교가 188개소, 민족연합소학교 147개소에 학생이 2만 2,460명이 있었는데 1995년에 와서는 조선족 소학교가 77개소, 민족연합소학교가 100개소로 학생이 2만1,778명으로 줄어 들었다.(김종국, 1999 : 35)
그러나 언론은 위축되지 않고 해가 갈수록 발전을 거듭해와 이제는 학교교육 못지 않게 사회교육과 언어교육의 중요한 터전이 되고 있다.
동란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실시된 후 관계부문에서는 조선어 언어가 혼란한 실정에 비추어 조선어문 사업에서 주은래 총리의 지시에 따라 조선 평양을 기준으로 하되 기계적으로 모방할 것이 아니라 중국 조선족 자체의 특징과 수요에 좇아 개진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여 중국의 조선어 방송언어나 화술은 조선 평양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 국제방송국 조선어 방송은 줄곧 조선전문가를 두고 있었고 적지 않은 방송인들은 조선중앙방송위원회와 조선 김일성대학에 파견하여 연수 교류하도록 하였다. 물론 이 시기의 방송언어나 화술은 기본상 조선의 평양식이었다. 후에 중국 조선족의 한국나들이와 한국인의 중국나들이로부터 시작되어 한국과 수교가 이루어진 후 중국 조선족의 언어환경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자 중국에서 조선어, 다시 말하면 한국어가 중시되게 되어 한때 중국 한족들 가운데서까지 한국어를 배우는 열풍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조선어에 한어의 영향과 사투리 등 사용으로 한어식 조선말과 연변식 조선말이 적지 않은데 거기에다 순수한 영어라면 몰라도 규범화되지 못한 한국식 영어까지 가세한 한국어가 밀려들어 중국 조선어 방송언어의 규범에 많은 애로를 조성하였으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리춘남, 2000 : 84)
흑룡강 신문사 사장 홍만호는 학술발표회에서 조선족 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홍만호, 2000 : 9)
시장경제 시대에서 신문은 일종 특수한 상품으로 시장에 진입하기 마련이며 시장에서의 그의 가치와 수입의 다소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런데 소수민족신문인 조선족 신문들은 소수민족신문이란 이 선천적인 국한성으로 하여 시장행위로써는 그 생존과 발전이 어려운 사정이다. 다시 말하면 신문의 판매시장이 좁아 발행량이 제한되어 있고 광고수입도 적기 때문에 신문판매와 광고수입에 의한 운영이 어렵다는 것이다.
운영난을 해결하고자 조선족은 여러 가지 방도를 탐구해 봤었다. 그중 힘을 제일 많이 들인 것이 기업경영이었다. 그러나 인재, 자금 등에 아무런 우세도 없는 형편에서 기업경영으로 신문사를 뒷받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천은 알려 주었다. 다음으로 한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방도도 꾸준히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세상에 공것이 없다고 외부에서의 일방적인 지원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역시 실천이 알려주었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조선족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하나는 당의 민족정책에 힘입어 당과 정부의 지원을 적극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문사 운영경비를 확보하는 기본적인 방도이다. 이것은 구걸이 아니다. 이것은 당의 민족정책의 구현으로서 정정당당한 것이다. 당과 정부의 지원을 쟁취하려면 무엇보다 신문을 잘 꾸려 진정 당, 정부, 인민의 빛이 되도록 하여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야 한다. 특히 민족 독자들 속에 깊이 뿌리 박고 깊은 신임을 받아 운명을 같이 하는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당과 정부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요, 발언권이다.
하나는 자생의 길을 부단히 모색하는 것이다. 무한정 정부의 지원에만 매달릴 수 없으며 결국은 자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자생의 길을 부단히 모색하지 않으면 생존마저 위협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경험에 의하면 신문의 발행, 광고, 인쇄업을 잘 틀어쥐는 것이 주요한 방도이다. 발행량은 신문의 생명이다. 일정한 발행량이 확보되어야 신문은 생존가치를 가지게 되며 발행량이 많아야 광고수입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편 광고업을 기둥산업의 위치에 올려 놓고 상응한 인력, 물력을 투입하여 성가를 올리도록 짜고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인쇄업, 정보업 등 신문과 관련된 사업을 역시 기둥산업으로 개발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밖에 신문사 주위에 후원기업군을 형성하는 것도 탐구해 볼만한 방도이다. 민족기업, 한국기업과 상부상조, 공존공영의 원칙에서 한덩어리가 되어 그들의 후원으로 신문사를 함께 운영하는 것이다. 지금은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지만 장차 그것이 현실로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현지 언론인들의 발표와 주장을 보면 그들이 조선족의 언어와 언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족 언론의 환경은 결코 밝지가 않다. 국영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되면서 정부에만 의존할 수 없는 재정적인 어려움, 날로 농촌과 자치주를 떠나는 조선족 인구, 조선족 학교의 감소, 조선어를 배우는 사람의 감소 등이 심각하게 어려운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 언론인들이 높은 사명감과 책임의식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으로 신문방송을 제작하고 있고 조선족들이 한어보다는 신문방송 공히 조선어 언론을 선호하고 있어 이러한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하고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조선족 언론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역사가 깊고 200만 조선족을 하나로 묶는 끈이 되고 있으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 보존하고 발전시키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족 언론은 초기에 모택동식 공산주의 언론이념을 좇아 당과 공산주의 선동 선전에 힘썼으나 중국정부가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민주국가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며 한국과의 국교 수립으로 한국과의 내왕이 잦아졌다. 이에 따라 뉴스와 정보를 다변화하고 문학, 예술, 사진 등 내용을 다양화했으며 광고도 많이 취급하는 등 지면의 활성화를 실현했다. 한어만을 방송하던 방송은 초기에 부분적으로만 조선어를 방송하다가 현재는 조선어 라디오와 조선어 텔레비전이 동북 3성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수교 후에는 한국방송이 잘 들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신문방송관계자와 학계 관계자들이 앞으로의 조선족 언론 발전을 위해 자주 학술회의를 열고 한국과의 교류도 확대하는 등 자구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지만 조선족 언론인들이나 독자, 시청자들이 확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분위기는 조선족 언론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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