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절규
이 뒤주에는 씨앗을 넣지 마소서
백성을 먹일 낟곡도 넣지 마소서
독기 품은 씨앗은 올바로 썩지 못하나이다
하지만 독은 독으로 치료하는 법
오염되고 병든 씨앗만 넣어두소서
여드레 날 죽은 씨앗이 아닌 부활하는
제대로 썩은 씨앗은 이미 산*이로 자랐나이다
세손이 거둬들일 조선이라는 열매가
얼마나 튼실하고 풍성한지 아바마마
기대하소서 고대하소서
저에게 종묘사직의 씨앗이라 하시었나요 허나 당신은 진정한 농사꾼은 되지 못하였나이다 채종**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지 여린 싹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나이다 바심***에 맘이 급해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걸 잊은 채근에 튼실치 못한 싹은 두려움에 병들어갔나이다 햇볕과 물을 제대로 먹고 자라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나 아들 농사는 폐농이 되었지만 손자 농사는 풍년이 들 것이옵니다 부디 산이에게 힘을 실어주소서 그리하여 당쟁을 탕평시키는 농사를 지어 붕당과 짝패를 몰아내주소서
다시는 뒤주에 독 품은 씨앗을 넣지 마소서
피눈물 흘리지 않는 알곡만 넣어 밥상을 차리소서
그리하여
백성들이 입을 모아 풍요로운 시절을 노래하게 하소서
* 조선 22대 정조의 아호
** 좋은 씨앗을 골라서 받음
*** 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낟알을 거두는 일
책들의 감정
사십 년 전의 약속이 아직 감금되어 있네요
두께를 더한 먼지를 양탄자처럼 말면
놀랍게도 숨겨진 책들의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요
책장을 짠 목재는 나무 심는 남자가 심은 것이었을까요 대물림되던 약속을 믿었던 책들은 실망하여 아마 책도둑을 애타게 기다렸는지도 몰라요 잘못 꿰어진 첫 단추는 다시 꿰지 않는 한 어떤 주인을 만나던 자신의 신세가 모리츠와 같을 테니까요 원기왕성한 희랍인 조르바의 열정을 가졌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체게바라의 혁명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 아마 이곳이 아닐까요
구부러진 어머니의 무릎과 허리로 버틴 책장
만족을 외면하고 반항을 택한 아들에게
책들은 무수히 많은 위험신호를 보냈지만
유혹에 중독된 자식은 결국 살라미가 되어버렸죠
무슨 일일까요
감금이 풀린 책상 위에
시각 청각 후각이 책 대신 자리를 잡고 있네요
체온과 교환되는 책들의 감정
사전답사를 마친 계산이
퀴퀴한 남새가 얼룩말을 키우던 책장을 발굴하고 있어요
각자의 이름 앞에 중고中古라는 이름이 추가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