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 아멘, 알렐루야”가 그리스도교적 만트라로 기도에 사용되길 제안합니다.
아빠는 히브리어로서 우리말의 아빠입니다. 예수님도 사용하셨으며 우리도 사용하도록 일러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1요한 3,1)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빠라 부르게 하셨습니다.”라고 말 할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 담대함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기도의 뿌리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기만 해도 기도의 신비는 시작됩니다. “‘하늘에’라는 표현은 거리감이 아니라, 사랑의 근본적인 다양함, 사랑의 또 다른 차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표현은 친밀함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중략-
아멘 이는 “사실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비춰보면 “그대로 이루어 주소서”란 말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예수를 “아멘”(묵시 3,14)이라고 불려집니다. 그분은 믿음이 두텁고 진실하십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의식의 중심이시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하셨기 때문에 예수는 아버지의 아멘 이십니다.-중략- 알렐루야는 히브리어로 “야훼를 찬양하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쁨에 넘치게 찬양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알렐루야는 교회 전례를 통하여, 특히 부활과 성령강림 대축일에 울려 퍼집니다. 이는 성령에 가장 합당한 말입니다. 성령의 잔치는 알렐루야로 울려 퍼집니다. 성령이야 말로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사랑이며 황홀이고 기쁨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사랑과 기쁨 그리고 위로입니다. 알렐루야가 우리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것은 성령의 힘을 통해서이며 성령 자체가 우리의 알렐루야 이십니다.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알렐루야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불리며 “오시오”라고 말하는 분은 성령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의 위대한 알렐루야 합창단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알렐루야는 가장 심오한 수준에서 성령 잔치의 기쁨의 표현이며 실존적 흠숭의 가장 풍요로운 형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빠, 아멘, 알렐루야! 이 세마디로 표현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 레지오마리애 [202303]알아볼까요?
생태위기와 가톨릭교회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 작은형제회
가톨릭교회는 수천 년 전부터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세상 창조 이야기를 인류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알아볼 주제는 “생태위기와 가톨릭교회”입니다. 생태위기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 속에서 가톨릭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가톨릭교회는 그동안 사회문제에 관하여 항상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즉각적인 대답을 회피하곤 했습니다. 현재 우리 인류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생태위기에 대하여 가톨릭교회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나요? 미국의 해양 생물학자인 레이첼 카슨(1907~1964)은 1962년 DDT 등의 살충제로 인한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김은령 옮김, 에코 리브르, 2011.에서 경고했습니다. 생태계 파괴에 대한 그녀의 경고는 미국 환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생태운동과 가톨릭교회까지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몇몇 과학자들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생태위기에 대하여 분석하면서 생태위기의 근본원인이 가톨릭교회의 ‘인간중심주의’와 ‘이원론적 시각’에 있음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은 그동안 구원신앙에만 중심을 두었던 가톨릭교회가 창조신앙을 되찾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특히 현대 교종들은 생태위기와 관련한 다양한 사회회칙을 발표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생태영성을 연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생태위기 극복을 위해서 ‘통합생태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합생태론’은 어떠한 의미이며 언제부터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나요?
가톨릭교회의 사회 회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는데 바로, 연속성과 발전성입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단절되고 파편화된 내용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갑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기념비적이라 평가받고 있는 이유는 역대 교종들의 회칙을 연속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통합생태론’이라는 내용입니다. 1971년 바오로 6세 교종은 회칙 ‘팔십주년’을 통해 처음으로 환경 문제를 언급했으며, 1991년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회칙 ‘백주년’을 반포하며 자연 환경과 인간 환경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한 ‘인간 생태론’을 발전시켰습니다. 2009년 베네딕도 16세 교종은 회칙 ‘진리 안의 사랑’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바라보는 ‘자연생태’와 ‘인간생태’ 그리고 ‘사회생태’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종은 ‘찬미받으소서’ 회칙에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137항)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 교종들이 강조한 ‘자연생태’, ‘인간생태’, ‘사회생태’의 개념뿐만 아니라, ‘경제 생태학’, ‘문화 생태학’, ‘일상의 생태학’의 개념을 추가하여 ‘통합생태론’으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제4장). 생태위기 시대에 가톨릭교회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교회의 현대 교종들은 사회적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현대 교종들은 사회적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관리자 모델’로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대리인의 역할로 생태적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에 견주어 인간이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사상은 우리가 모든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을 존중하게 합니다”(‘찬미받으소서’ 119항).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종은 ‘찬미받으소서’ 회칙에서 이러한 관리자 모델에서 조금 더 나아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강조한 ‘가족모델(혈족모델)’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모든 피조물은 사랑의 유대로 자신과 하나 되는 누이였습니다. 그는 만물의 공통 원천에 관한 성찰로 더 큰 경외심에 가득 차 아무리 작은 피조물이라도 ‘형제’나 ‘누이’로 부르고는 하였습니다”(‘찬미받으소서’ 11항).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 형제의 노래는 ‘창조 공동체(Kinship)’ 모델을 시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프란치스코 전집’ Fonti Francescane, 263) “저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특히 형제인 태양으로 찬미 받으소서. 태양은 낮이 되고 주님께서는 태양을 통하여 우리에게 빛을 주시나이다.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내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누이인 달과 별들로 찬미 받으소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달과 별들을 맑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지으셨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형제인 바람과 공기로, 흐리거나 맑은 온갖 날씨로 찬미 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피조물들을 길러 주시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누이인 물로 찬미 받으소서. 물은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고 순결하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형제인 불로 찬미 받으소서. 주님께서는 불로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불은 아름답고 쾌활하며 활발하고 강하나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 형제의 노래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이 각각의 독특함 안에서 복사되거나 반복될 수 없는 자기만의 독특함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자고 모두를 초대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또한 태양 형제의 노래를 인용하면서 피조물 모두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이며, 가족적인 조화 안에서 각각의 독특함을 표현한다고 언급합니다(참조 ‘찬미받으소서’, 84-88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