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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레이(John Gray)의 베스트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있습니다.
금성에서 온 여자가 화성에서 온 남자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금성 방식입니다. 그러니 화성에서 온 남자는 짜증이 납니다. 금성 여자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리지 않고 자기 식대로 행함이 문제입니다. 자기식의 사랑이요 표현입니다. 그러니 금성과 화성의 거리 만큼이나 서로 사랑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나는 ‘금성의 여자이고, 저 사람은 화성의 남자다’를 인식하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사랑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이 큰 은혜,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교회의 사람들을 두고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흔히 “그리스도인들” 또는 “크리스천들”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에 못 박으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는 말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 6:6,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과거형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의 ‘십자가에 못 박힘’은 현재완료형으로 ‘have crucified’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는데, 이제 우리를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말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니라”(막 11:25)
의지를 가지고 지금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까? 바로 우리의 육체입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
바울은 앞서 16절에 말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우리가 육체 소욕에 사로 잡히면 성령을 좇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에 충실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는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죽일 때 ) 성령으로 사는 삶,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가능케 함을 말씀합니다.
육체와 함께 못 박아야 할 “정과 욕심”이 무엇일까요?
정(情, passions)은 헬라어로는 파세이마(πάθημα)로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 속에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죄심(罪心)입니다. 번쩍 번쩍 머리 속에 들어오는 죄입니다.
욕심(慾心, desires)은 헬라어로는 에피수미아(ἐπιθυμία)로서 의식적으로 갖게 되는 죄성(罪性)입니다. 내가 어떤 영향을 받아서 그냥 안주해 버리거나 고집스럽게 가지는 죄성입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머리 위로 새가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다”
새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합니까? 머리 위에 지나가는 새를 잡아다가 자기머리 위에 둥지를 짓고 살아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육체의 소욕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알 수 없는 거부감, 비토를 가집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우월감과 투쟁심을 미화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도취에 빠져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거기에 중독됩니다. 그래서 헤어나지 못하고 망가집니다.
보십시오, 우리 마음 속에 슬그머니 자리 잡은 미움과 분노가 그렇습니다. 그대로 버려두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육체의 정과 욕심은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긴 지 우리는 잘 압니다.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마치 연기가 스며 들듯이 우리 영혼의 시야를 뿌옇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냥 방치하면 어두움의 세력은 내 영혼은 숨을 쉴 수 없게 하며 영적 죽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기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라.” 고 합니다.
십자가 형은 로마제국 시대에 가장 극악하고 야만적인 흉악범에게 부여된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가장 무서운 형벌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육체의 정과 욕심을 이처럼 심각하게, 흉악범으로 취급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9-21절에서 나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0)
육체의 소욕은 우리에게 치명적이고 잔인하게 내 영혼을 파괴자, 멸망으로 인도하는 재앙적인 존재임을 인식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라는 것입니다.
김춘근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미국 USC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는 가운데 37세에 간경화로 죽음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은혜를 받아 JAMA 선교회를 만들어 미국과 세계의 선교를 위해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 선고를 받았을 때에 ‘WHY ME?’ ‘왜 나냐?’며 원망하고 불평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고 난 후에 “WHY ME?”라고 여전히 외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왜 자녀로 삼아 주셨는지, 너무나 감사해서 그렇게 간증하며 다닙니다.
그는 콧수염을 기릅니다. 왜 그렇게 기를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멋지고 싶어서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됨을 기른 콧수염을 보면서 확인한다고 합니다.
매일 매일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고 수염을 보면서 ‘그래 나는 예수님의 사람이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야지 다짐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육체의 정과 소욕에 따라 사는 자가 아닙니다. 육체의 소욕의 심각성을 알고 단호하게, 가차없이 육체의 소욕을 멀리하고 극복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25절의한글개역성경에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εἰ ζώμεν πνεύματι, πνεύματι καὶ στοιχώμεν)
한글 공동번역 성경에는 더욱 분명하게 번역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으로 산다”고 라는 말은 “생활한다”는 의미보다는 ‘성령이 없는 자의 생명이 없는 삶’과 대비시키는 문장입니다. 즉 ‘성령으로 산다’는 말은 “생명이 있는 자의 삶을 살고 있다” 는 뜻입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가득 널려 있는 골짜기로 인도하십니다. 이 마른 뼈들은 심령이 죽은 자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보이기는 살아있는 자 같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대언하게 하시고, 에스겔이 대언할 때 마른 뼈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여 제대로 된 사람의 모양을 갖추었지만 그들은 아직 산 자들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들에게 아직 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겔 37:8).
하나님의 명을 따라 에스겔이 생기를 향하여 대언할 때 바람과도 같은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10)고 했습니다.
이 생기(루아흐)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기운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첫 번째 사람 아담에게 들어가매 그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령(a living being or soul)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하여서 생명의 기운이 그들에게서 떠나고 육체의 소욕에 따라 죄를 짓고 마시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멸망 받을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육체의 소욕에 따라 죽음으로 가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혀 죽게 하시므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영을 받은 사람이요, 그 영을 받으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기에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으니, 성령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
“성령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행함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확인하십시다.
16절에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갈 5:16-17). 반면에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라고 했습니다(갈 5:16-17). 성령의 열매 맺는 삶입니다(갈 5:22-23).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결단입니다(갈 5:24).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의 선물이요 수동적인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이제는 능동적으로 ‘성령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에 노출된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하고 적극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이 간구해야 합니다. 능동적으로 성령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의 결단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므로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되십시오.
(2)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의 자리에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내 육신의 소욕에 따라 산 것을 회개하십시오. 하늘의 기쁨과 생명으로 채워지게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십시오. 그때에는 나의 완악함, 이기심, 교만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집니다.
(3)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게 말씀하게 하십시오. 나를 세워 보십시오. 그 말씀에 간절해지면 나의 이기심과 감정은 수그러지고 나의 허물과 죄악을 깨닫아 겸손한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영의 이끌림을 받게 되고 성령으로 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완전히 의롭게 되었다는 말이기 보다는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을 닮아가는 과정(성화의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이 과정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온전한 사람은 없고,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으로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이끌림을 받도록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기도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하십시오. 말씀으로 무장하여 승리의 삶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 458, 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