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왕조에서 사용하던 화려하고 관념적인 한어를 사용하지 않은 동이족에게 남아있던 옛한어 구성법으로 작성되었다고 한다.(김덕중 선생 견해)
其詞曰昔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貢整旅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上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穹平道 東來力城北豊王獲旗.遊觀土境 困훼而還.
사관의 말씀에 고인께서는 영락5년 을미년 비려가 조공을 하지않자 잘훈련된 군사를 이끌고 토벌을떠났다. 부산을 넘고 부산의 여수상류에 이르러 그 왕과 부락 6~7백을 처부셨으며 노획한 소와 말 양들은 셀 수 없었다.여기에서 어가를 돌려 옛터전이던 궁평을 둘러보고 동쪽으로 자력성 북풍에 와서 왕은 기를 거두고 숨어사는 유랑민을 살피고 돌아왔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安羅新羅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같은곳에 살던 (고조선의) 권속으로 예로부터 조공을 했는데 왜는 신묘년 부터 비로소 매년 바다를 건너와 조공을 하였다. 안라(아라가야)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는 백제를 쳐부셨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以到首攻取百八城,臼模盧城,若模盧城,餘韓弓利城,利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古舍蔦城,阿旦城,古利城,困草城,雜彌城,奧利城,勾牟城,古須龍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 敵不服氣 敢出交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利迫城 橫攻敵退 急圍其城. 百殘主困逼 遣使獻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 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영락 6년(396) 병신년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셨다. 백제에 도착하자 선두에서 공격하여 취한 108성은 ~이다......(성이름 생략).....백제가 굴복할 기세없이 감히 나와 싸움에 맞섰다. 왕이 대단히 노해서 아리수를 건너게 하여 군사로 압박하고 급히 성을 포위하니 백제왕이 곤궁에 처해 사신을 보내면서 남녀노비 천명과 모시천필을 바치면서 말하길 "이로부터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고 하니 태왕이 은혜로서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하고 이후 화합하는 성의를 도모하기 위해 58성과 7백촌을 빼앗는다 하였고 장수와 백제왕의 아우 및 대신10인을 데리고 군사를 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 莫□羅城,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영락8년(398)무술년에 교시하고 군사를 보내 숨어사는 (조선민)토박이들의 형편을 살피게하고 도둑질이나 빼앗아 살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서 신라성,가태라곡 남녀3백인이 스스로 찾아와 나랏일을 논하게 되었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歸王請命,遣新羅使還國.
영락9년(399)을해년에 백제왕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자 왕께서 평양 남쪽을 순행하는데 신라사신이 와서 고하길, 왜인이 신라국경에 가득하여 노객(백제)이 성과 저수지를 파괴하고 있으므로 다시 구할것을 명령하시도록 청하니 신라사신에게 군사를 군사를 보내겠다하고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昔新羅安錦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영락10년(400)경자년에 이르시길 보기병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라 하였다.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병이 가득한데 그가운데로 관군이 다다르니왜적들이 달아나는데 그 뒤를 따라가 쳤다.임나에서 가라까지 그 성들을 빼앗고, 성을 즉시 안라인과 수비병에게 돌려주었다....생략.... 안라인과 술병은 옛 신라였는데, 편해지니 나랏일을 상의하러 몸소왕을 찾아뵙지 않았으나 태왕께서 신라를 구하자 이에 감복하여 조공하였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連船□□□.
영락14년(404)갑진년에 왜가 법을 어기고 대방의 경계를 침입하였다.왕이 명하여 석성도에서 함선을 몰고 대방에 다다르게하고(추정)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
영락17년(407)정미년 교시하길 보기병 5만을 보내 왜구를 깨끗이 없애라 하였다. 싸움을 하여 참살하고 밀쳐내니 노획한 개갑이 만여개 였고 군사무기는 셀 수 없었다.돌아오면서 사구성과 루성...성등을 쳐부셨다.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舉國,駭□□□□□□□□□. 王恩昔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영락20년(410)경술년,동부여는 본래 추모왕의 권속(동족)인데 중도에 배반하고 조공을 하지않자 왕께서 몸소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군사가 부여성에 도달하자 백성들이나와 항복하므로 왕이 옛날을 생각해서 빼앗은 성을 돌려주고 돌아왔다. 왕에게 감복하여 관병을 따라온 미구루압로,비사마압로,단사루압로..등이었다.
첫댓글 새로운 해석. 공감이 가네요.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