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강가에서/靑石 전성훈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 사람의 몸과 마음도 변하기 마련이다. 다가오는 자연의 흐름을 온몸으로 거부하지 않고 말없이 그냥 받아들이며 숨 쉬고 내뱉는 게 자연스럽다. 세월을 낚는지, 해 질 무렵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저물어가는 노을을 쳐다보는 늙은이의 등허리를 본 적이 있는지요. 혹여 없다면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속으로 그 모습을 그려보면 어떨까? 고달픈 세상살이의 고뇌와 번민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하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하지 않고 넋을 놓은 채 슬프도록 황홀한 모습으로 아스라이 저물어가는 저녁 해를 작은 가슴에 품으려는지도 모르겠다.
또 한 해가 진다. 이렇다 하고 번듯하게 내어놓을 게 없어 빈손으로 세월만 보내고 몸과 마음은 야속하게도 하루하루 쇠약해진다. 홀연히 눈에 살짝 비치는 눈물이 오늘따라 왠지 고맙고 슬프다. 차가운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걸어온 올해의 발자국을 되돌아본다.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처럼 몸과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 시기를 보냈지만, 그런 와중에도 가족과 친구들과 한바탕 축제처럼 즐겁게 지낸 잊을 수 없는 추억도 있다.
작년 11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찾아와 몇 개월 동안 힘들었던 어지럼증으로 병원에서 평형기능 검사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다. 뚜렷하게 몸에 이상 없다는 의사의 말에도, 속절없이 시도 때도 없이 윙윙거리는 이명(耳鳴)과 함께 닥치는 어지럼증에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 어지럼증 탓인지 2월 어느 날, 늘 다니던 초안산 철봉대에서 떨어져서 왼쪽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철봉을 붙잡고 땅에서 발을 뗀 순간에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나도 모르게 그대로 땅으로 고꾸라져서 넘어졌다. 다리에 생긴 상처는 무슨 불멸의 훈장처럼 없어지지 않고 볼품없는 왼쪽 종아리에 그대로 흉터로 남았다. 오뉴월에는 강아지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봄이 지나고 여름에 들어서자 몸살감기를 심하게 겪었다. 동네 의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고 며칠 동안 끙끙거리며 보냈다. 다행히 기운을 회복하여 무덥고 뜨거웠던 여름을 그런대로 무사히 견디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때에 겪었던 길고 긴 하루의 사건, 휴대폰에 온 문자를 무심코 눌러서 일어났던 끔찍했던 일, 갈수록 진화하는 보이스피싱의 놀잇감이 되고 먹잇감이 될뻔한 사건으로 마음고생이 심하였다.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후유증으로 한동안 입맛도 잃고, 금융기관과 관공서 그리고 가까운 분들에게 연락하고 사후처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들고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다고 힘들고 괴로운 일만 있던 한 해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부터 꼭 가고 싶어 하던 백령도에 봄꽃이 만발한 4월 어느 날 친구와 둘이서 찾아갔던 멋진 추억, 부부 동반으로 고등학교 동창들과 봄가을에 함께 떠났던 수다와 맛집 여행, 성당 동갑내기들과 봄날에 찾은 남녘 여행과 늦가을에 꿩샤브샤브를 맛보려고 떠난 충청도 여행, 코로나 탓에 4년간 해외여행을 하지 못하다가 사랑하는 손녀를 데리고 떠났던 일본 홋카이도 여행 등,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은 마음속 사진첩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서산에 해가 지면 칠흑 같은 어두움이 찾아온다. 다시는 밝은 낮을 볼 수 없을 것 같지만, 밤을 지새우고 나면 내일의 태양은 동녘의 하늘에서 솟아오른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며 하루를 무사하게 보낼 수 있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내일도 건강한 모습으로 아침 해를 맞이할 수 있는 은총을 간절한 마음으로 빈다. 기나긴 겨울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하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아듣는 나이가 되니, 정말로 ‘밤새 안녕’이다. 한 해를 보내고 다시 한 해를 맞이하며 작은 소망을 해본다. 몸이 무너져 이런저런 약을 한 움큼 먹지만 새해에도 걸을 수 있을 만큼의 건강을 주시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술 한잔이라도 나누고, 누군가에게 조그마한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몸과 마음을 주시기를 하느님께 간구한다. (202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