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아일랜드 기행 36 / 벨파스트 시청사에서
벨파스트 시청사 여왕은 벨파스트 시가지를 굽어보신다 궂은 날씨를 걱정하고 조선업의 쇠퇴를 염려하고 지금은 돌아간 영광을 그리워하며 제왕이 홀로 비에 젖는다 왕관도 젖을 수 있다 지존至尊도 맨손일 때가 있다 양 떼가 뒹구는 초원으로 돌아가서 포도주 잔에 바람을 섞어 홀로 앉아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승전의 시간들을 죄다 물리치고 풀잎처럼 바람처럼 한없이 낮은 몸으로 텅 빈 채 앉아서 흩어지는 꽃잎 옆에 저무는 하늘 아래 홀로 오래 머물고 싶을 때가 있다 |
36. 벨파스트 시청사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왕관을 쓰고
조용히 왕홀王笏을 손에 잡은 채로
옷자락에 뒤덮인 근엄한 얼굴을 들어올려
대영제국의 아침을 불러들이는 곳
여왕은 늘 패배를 잊었기에
남쪽으로 얼굴을 들면
모든 족속들이 달려와 순종을 바쳤었다
벨파스트 시가지 중심부
도네갈 광장에 위치한
포틀랜드 산의 거대한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건축물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여왕이
벨파스트를 도시로 승격시킨 것을 기념하여 지은 건물
1898년에 착공하여
1906년에 완공시킨
고전 르네상스 양식의 최고 건축물
아일랜드 산업혁명의 본거지 역할을 했으되
지금은 대영제국의 주정부 청사 겸
벨파스트 시청사로 쓰이고 있다
위용은 여왕을 닮았을까
건물의 네 귀퉁이는 푸른색의 탑들
중앙부는 높이 53미터의 초록색 돔
내부의 화려한 장식들과 바닥의 타일들은
외관의 위엄만큼이나 장중하고 기품 있는 모습
우기의 여정이여
장엄이 비에 젖는다
여왕의 존엄이 오늘은 비에 젖는다
우산을 가누기 힘들 만큼의 사나운 바람
나는 고개 들어 살피고
구부려 들여다보고
종종걸음으로 이리저리 걸음을 옮겨 살핀다
거대한 돌이 위용을 부르는가
제왕의 권위가 값비싼 돌을 찾는가
이를 본뜬 건축물들이
세상의 이곳저곳에 들어서게 했다니
권력의 힘은 언제나
왕홀의 사방을 돌로 둘러쳐야 하는가
나는 제왕의 날을 더듬어보기보다는
돌의 아름다움에 더 마음이 이끌린다
인간의 손끝을 거쳐 나오면
무심한 돌도 조용히 돌아앉아서
부처님의 이마처럼 고요해지는가
그리스도의 눈빛처럼 맑아지는가
그러나 내 마음은
여왕의 위업보다는
비운의 역사에 마음이 더 기운다
비운의 선박 타이타닉호의 기념비는
시청사의 동쪽에 있다
가라앉을 수 없는 배가
가라앉은 비운
배가 침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침몰한 것일까
‘할랜드 앤 울프Harland and Wolff’ 조선소가 건조한
거대한 제국의 자존심은
무심히 떠도는 빙산의 희생물이 되었다
1911년에 제작된 호화여객선
지상에서 가장 큰 배
높이 30미터
길이 260미터
무게 4만 6천 톤
일천 개의 방으로 꾸며진
떠도는 수상도시
1912년 사우스햄턴 항을 출발하여
뉴욕으로 가는 처녀항해
떠다니는 궁전은
자연의 일격으로 두 동강이 났었다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해역에서의 조난은
인간의 꿈을 수장시켰다
비운의 재난영화 ‘타이타닉’
혹자는 승선한 두 연인의 사랑을 애석해 하고
혹자는 인간의 자만과 교만을 꾸짖으나
나는 인간의 재난에 아랑곳하지 않는
자연의 무심을 더 두려워한다
있고 없음이 인간의 희로喜怒요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림길이 인간의 운명이나
재앙도 참사도 알지 못하는 대자연의 운행
희로애락도
인간의 눈물도
낙원도 모르는
자연의 저 거대한 침묵을 나는 두려워한다
여왕의 옷자락이 방금도 비에 젖는다
인간의 눈물과 고통이 비에 젖는다
내가 힘겹게 받쳐 든 우산은 바람에 뒤집어지고
나의 옷자락은 젖었으나
내일을 알 수 없는 길 위의 나그네는
즐거워야 할 날이 외롭기만 하다
누가 인간의 이마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가
운명은 어디서 와서
인간의 두 어깨를 마음대로 누르는가
나는 문득 떠올린다
와야 할 것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오고
오지 말아야 할 것들은
원한다 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내 몸이 비에 젖는다
그렇다
원하지 않아도 젖어야 할 때가 있고
원해도 젖을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비에 젖은 내 몸이 안다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