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버스기사입니다"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이라는 도시에서 23번 버스를 운행하며 틈틈이 시를 쓰는 기사에게 어떤 승객이 시인이냐고 묻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묵묵하고 먹먹한 우리 삶의 노선도
허혁. 영화속 남자주인공일 것만 같은 비범한 이름을 지닌 지은이는 20여년 가구점을 운영하다 그만두고 귀농하고파 했으나 전주한옥마을 문화해설사인 부인이 반대하자 가출했다. 방황하고 있는데 부인이 애타게 찾고 있다는 소식과 장애를 가진 딸아이가 눈에 밟혀 일단 귀가. 그렇게 돌아다니고 싶으면 버스기사가 되어 돌아다니라는 부인의 제안에 48세에 버스기사가 되었다. 머리맡에 늘 책을 두고 지낸다는 이름도 멋진 혁오빠-잘생기면 무조건 오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유명한 대사. 책을 가까이 하니 분명 잘생겼을 것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견해-는 그렇게 나고 자란 도시 전주에서 시내버스 기사가 되었다.
'패터슨'이라는 독립영화의 주인공 대사 "그냥 버스기사입니다"에 환한 웃음이 났다던 허혁씨도 시내버스 기사이면서 시를 쓰고 글을 쓴다. 그 글들과 시를 엮어, 좁게는 대한민국의 기사님들에게 넓게는 전국민에게 책으로 선물했다, 기사님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알아달라는 애교를 섞어.
이 책의 추천사를 써 준 홍세화씨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나 김민섭씨의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그리고 몇해전 읽었던 '전업주부입니다만'이라는 강한 어조의 제목과 달리 "그냥" 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겸양함과 애잔함이 느껴지는 이 책을 꼭 읽고 싶어서 주로 반납일이 다가와 부랴부랴 읽었던 책들과는 달리 받자마자 읽고 빠른 반납을 한 개인적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고매한 인격은 고독한 수행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서 얻어진다"는 믿음을 근거로 "삶의 목적이 인격 성숙이라면 전주시내버스만한 대학도 드물 것"이라며 늦깍이 대학생마냥 이젠 글쓰는 재미에 버스기사라는 직업을 대통령하고도 안 바꾸고 싶다고.
"가요, 잉!" 70세 이하에게 주는 시그널.
"얼레, 버스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이힐 아가씨가 자리잡을 시간때우기 민망함에 하는 말 등 "암시롱토않당께요!" "거시기 가요?" "예, 거시기 가요!" 사투리 대잔치가 펼쳐지는 유쾌한 버스기사이지만 그도 오전에는 선진국 버스기사였다가 오후엔 개발도상국, 저녁엔 후진국 기사가 된단다. "친절은 마인드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이기 때문. 하루 18시간을 운행하는 기사님들은 친절은 고사하고 까칠하기 그지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란다. 나만해도 운전을 하면 몸이 몹시 피곤해지고 신경은 예민해지는 지라 충분히 이해된다. 거기에다 일명 진.상. 승객이라도 마주하게 되면..그래서 기사님들은 선글라스(표정관리용)에 마스크(험한말입모양감추기용)까지 착용하시는거라고 친절히 일러준다.
하루 18시간 운행이라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시는 기사님들의 생활 생리리듬을 낱낱이 알려주며 "우주가 시간과 공간으로 직조된 끝없는 보자기라면 도시는 조각난 꿈들을 이어붙인 밥상보, 시내버스가 박음질한" 이런 멋진 시도 선보인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전주에서는 시내버스 승객은 대개가 교통약자이면서 동시에 경제적 약자다. 그 흔한 시내버스조차 맘편히 못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며 "의식주와 맞먹는 이동권을 교통약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고루 누릴 수 있어야 하는 마지막 교통수단이 버스일 것"이라며 그들의 발이 되어주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동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어?! 허기사님도?! 여기 데카르트 팬 한명 추가요!
"시내버스 최고의 덕목은 닥치고 빨리 달리는 것이고 승객을 위한 세상의 서비스는 친절한 언행이 아니라 과감한 신호위반"이라고 기사생활 이년여만에 터득한 대목에서 생각나는 이가 있었다. 미국인영어강사였던 그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부모님이 휴전중인 분단국가라 매우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한국을 와보니 정작 그 강사가 무서웠던건 무법 운전을 하는 시내버스기사였단다. 그치만 그것도 잠시, 새벽에 국내대기업체에 버스로 출강가는데 지각하기 일보 직전인 경우엔 신호를 무시하는 그 무법 버스기사가 그렇게나 좋아 "기사님, 나이스!"를 외쳤다고.
"내리고 싶은 자 편히 내려주고 타고 싶은 자 얼른 태워주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운전에만 집중할 것" 이런 모토가 절로 생겨나는 건 아닐거다.
연애시절 버스 막차를 타면 인파를 뚫고 몸을 던져 맨뒷자리 좌석 2개를 걸터앉아 자리를 확보하고 "오빠, 여기!" 외치는 여자친구를 보고 나를 먹여 살릴 수도 있겠구나 싶어 결혼했는데 결혼 후 그런 상공주가 없다고. 그래도 그런 귀여운 여자랑 결혼해서 딸하나 아들하나를 뒀으니 후회말고 성공했다고 자부해도 될 듯. 최저임금가족이라 칭하는 그의 가족은 그래도 딸과 유머를 즐길 줄 알고 새벽 운행을 마치고 들어온 남편의 이야기보따리를 들어주는 부인과 대학은 가고 싶지 않고 자기 힘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아들이 있기에 행복할 것이다. 경찰이었던 아버지에게 매타작을 당해 유린된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허혁기사님이 아들에게 그 폭력대물림을 하지 않고 친구같은 아빠가 된 건 참으로 다행. 그래서 부인에게서 "이 세상에 당신처럼 변덕이 죽끓는 사람도 없을"거란 말을 들어도 카를 융의 "결코 인정하기 싫은 나의 본 모습이 나를 참된 자기에게로 이끄는 안내자"라는 지침에 따라 "상처깊은 어린 나를 잘 보살피고 잘 키워내야만 가슴까지 아름다운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다"며 무의식에 상처받은 자신과 진정으로 화해하려 한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나는 스스로가 무척 경우 있고 예의바르다고 자부하며 산다. 걸핏하면 경우없는 꼴은 절대 못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의식은 달라보인다. 버스운행할 때 승객의 사소한 실수나 경우 없음에도 자주 속앓이를 하는 걸 보면 스스로에 대한 많은 의문이 든다"고 읊조린다. 승객여러분! 우리 이제 버스탈 때 경우없는 짓 하지 맙시다. 기사님들 속병생기지 않게요.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려 애쓰며 안전운행하시는 분들이잖아요. 노곤한 일상의 이동을 책임져 주는 분들이잖아요. 이렇게 부탁하는 것처럼.
이민초기시절 길눈이 밝다는 이유로 버스기사가 되어보라는 남편의 권유가 있었다. 저런 말을 부인에게 하는 남편의 심리는 대체 뭘까? 하다가도 의미부여를 하지 말자 도를 닦은 적이 있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 두 분이 버스기사가 되셨다. 나는 버스기사가 되지 않아 속앓이를 면했지만 그 분들을 비롯 오클랜드 버스기사분들이 속앓이 하지 않도록 오클랜더들이 선진국다운 승객의 위엄을 갖췄으면 좋겠다. 오늘도 안전운행 화이팅이요!
♡ 늘 도서관 관계자분들과 한글도서목록을 수고로이 올려주시는 평상님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
1년에 52권 열세번째 읽은 책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2021년 4월 16일 쇠요일에
첫댓글 남편이 부인에게 버스 기사 해보라..오클랜드에서 택시와 버스기사 하는 교민이 250명 쯤 될까요.
한국과 비교하면 스트레스가 적을 것이다라고 생각됨.
기사 시인 수필가도 몇명 있겠지만 , 굴쎄요 글소재인 경험치가 한정되니까 좀 신변잡기에 흐를 수도 있겠죠.
홍세화씨 책도 보았는데 s대 출신 빼면 알맹이가 허전했죠.
250여명. 정말 많은 분들이 하시네요! 제가 아는 분들은 울트라 긍정주의자분들이라 조금 덜 스트레스 받으시지만 건너 건너 아는 분들 이야길 들어보면 스트레스가 이곳도 심하다 하시더군요. 이 책에 의하면 한국도 현재는 많이 개선된 상황이라고 하던데 여기도 계속 더 나아지리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