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고을 영월을 다녀오다 (수지지원 개원 10주년 기념 야외수련회를 마치고)
박용목/ 경기대 명예교수
<흐르는곡은 두견새 우는 청령포>
註: 溪岩 박용목교수가 2010년 5월 3일《국선도(國仙道) 수지지원 개원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국선도 원로 단원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정서, 한과 눈물이 서린 영월에서 개최한 "1박2일의 야외수련회"에 참가한 기행문이 國仙道정기간행물 제 34호(2010년)에 게재된 것을 최근에야 접하고 39카페에 올립니다. 박교수는 청아하고 유려하며 격조높은 문체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켜 읽는이를 감동하게 합니다. 이곳에 올리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박교수를 억지로 설득하여 올립니다. <2010.8.12 동산>
국선도 수지지원의 개원 10주년을 기념해서 명승지와 박물관이 많기로 소문난 영월에서 5월 3일부터 1박2일 수련회를 갖기로 의논이 정해졌는데, 영월하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단종의 비극적 생애요, 이왕이면 내친 김에 어린 단종을 품에 안고 고명대신들이게 앞날을 걱정하던 그분의 조부이신 세종대왕의 능이 있는 여주도 함께 다녀오는 것이 한 세트로 격에 어울린다는 협의에 따라 여주를 거쳐 가기로 작정하였다.
고속도로 주변의 산천초목은 연두색 신록으로 착색되어 우리의 시각을 부드럽게 해주었고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여주 천송리 봉미산 아래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에 도착했다.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절은 한때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지나가는 봄볕에 쇠잔한 기색이 완연해 단지 조사당, 다층석탑 등 7점의 보물로 지정된 중요 문화재만이 한때의 화려한 과거를 말해주는 듯 하다.
신륵사란 이름은 고려 고종때 건너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날뛰는데 아무도 붙잡을 수 없어 전전긍긍하던 중에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유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세심정(洗心亭)이란 현판이 붙은 곳은 정자가 아니고 청량음료수가 솟아나는 우물이어서 모두들 한잔씩 들이켰는데 목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것이 현판을 洗心井이라고 했더라면 더욱 제 격에 맞는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남한강을 굽어보는 전망 좋은 곳에 다층전탑이 우뚝 서 있고 그 아래 진짜 멋진 정자가 있어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절로 시흥을 자아내게 했지만 일행은 그 좋은 풍광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어 여주군 감천면 이호리에 위치한 전통 목공예 및 불교 박물관인 목아(木芽)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1989년 세워졌고 1992년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전문사립 박물관으로서 설립자인 중요 무형문화재 박찬수 관장이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모작을 위시하여 40여 년간 조각한 150여점의 대표작품을 전시하여 목조각 예술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잔디가 보기 좋게 깔린 널찍한 정원 입구에 있는 거대한 첨성대 모형안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이 있는 것부터가 동서양의 통합정신을 엿보게 했는데,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3,782평의 웅장한 3층 벽돌건물이면서도 맞배지붕 위에 살아있는 나뭇가지가 기와 사이로 군데군데 솟아나 있어 무척 어려운 건축공법을 짐작케 하면서 감탄을 자아내었다는 점이다. 건축 당시 인부들의 불평이 대단했다고 안내자는 설명을 덧붙였다.
각종 불교유물과 정교한 조각 작품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심취해 있던 일행은 시장기에 떠밀려 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걸구쟁이네」식당으로 들어갔다. 걸구란 구걸을 거꾸로 한 동의어이니까 걸구쟁이는 결국 구걸쟁이가 되므로 빌어먹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먹을 정도로 무척이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당이란 뜻이니 얼마나 재미있는 이름인가. 우리도 향긋한 산채나물로 맛있는 점심을 정신없이 먹었으니 모두 걸구쟁이들이 된 셈이다.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을 배경으로..../앞줄 우측 첫 번째 앉아 있는 박교수 國仙道정기간행물 제 34호(2010년)에 게재된 사진을 스캔 했더니 영~희미하군...
걸구쟁이네」식당을 나선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영월로 향했다, 오늘이 마침 월요일이라 세종대왕이 계신 영릉은 개방되지 않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영월군 한반도면 온정리 강변에 있는 선암마을로 갔다. 서강의 샛강인 평창강 끝머리에 있는 이 마을 앞에는 신기하게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를 꼭 닮은 지형이 있어 워낙 널리 이름을 세상에 떨치게 된지라 행정명칭까지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필자도 사진과 영상으로는 여러 번 보았으나 실제로 와서 직접 보니까 자연의 오묘한 조화치고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놀라운 데다가 한반도를 둘러싼 강물이 호수처럼 잔잔한 가운데 지난번 천안함 사건이 났던 서해 백령도 부근만 유독 물살이 빨라 주름이 심하게 잡힌 것까지 그대로 빼닮아 있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을 연발하였다. 절벽 위에서 그 신기한 자연의 요술같은 현상이 만들어내는 절경에 취해있던 일행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청령포(淸泠浦)에 당도했다.
아! 청령포. 조선 제6대왕 단종이 17세의 어린 나이로 사약을 받아 죽기 직전까지 (비록 사약을 마시고 숨진 곳은 강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광풍헌이긴 하나) 넉달 동안 갇혀 있었던 육지속의 작은 섬.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 제 50호로 지정받았으며 동, 남, 북 3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만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외부로 통할수 없는 절해고도같은 지점으로서 550여년 전에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조선 팔도를 뒤져서 당시로선 가장 완벽한 유배지로 선정했던 곳이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한때 여기에 살았음을 알려주는 단묘유배지와 단종어소,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단종이 두 갈래로 갈라진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觀) 들었다(音)고 전해지는 천연기념물 349호인 관음송(觀音松), 한양에 두고 온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진 막돌을 주어 쌓아올려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 된 망향탑, 훗날 영조때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세웠다는 금표비 등이 있어 찾는 이들을 숙연케 한다. 우리는 슬픈 역사가 서려있는 유서깊은 유적지가 휘감아 돌아가는 서강의 정취와 어우러져 석양노을을 배경으로 조성된 뛰어난 자연경관을 둘러보느라 넋을 잃고 있다가 불현듯 지원장의 지시에 따라 오공법과 단전호흡을 하면서 명상에 잠겼고 이어 쌍장 지르기를 30회나 하였다.
둘레가 5m이고 높이가 30m이며 수령이 600년으로 추산되는 관음송을 위시하여 수십년에서 수백년생의 거송들이 하나같이 모두 한양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울창한 수림지 한쪽 가에서 대오를 짓고 그 거대한 수목들이 쩡쩡 울리도록 기합소리를 힘차게 내질렀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나니 야릇하게 구슬픈 감상에 젖었던 마음과 나른하던 몸이 한결 가쁜해지는 기분이었다. 봄햇살에 나른하게 가라앉아 피로에 겨워하던 사지가 어느새 날아갈 듯 가쁜하게 생기에 넘쳤다.
돌아나오는 나룻배를 타고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니 다시 애련한 감상에 젖어 초등학교때 암송하던 왕방연의 시조가 연상되어 나도 모르게 읊게 되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세조의 명으로 단종께 사약을 바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 강물을 보며 비통한 심정을 읊었다고 하는데 누구나 그 통절한 비감에 깊이 빨려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과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이윽고 고대하던 만찬 시간이 되자 청령포 바로 근처에 오늘부터 정확하게 1년 전인 2009년 5월 2일 문을 연 영월 동강한우타운에 들렀다. 이곳은 청정지역에서 사육한 한우만을 도축하여 엄격한 심사를 거쳐 품질과 등급이 우수하다고 평가된 한우판매 인증점이 된 곳이었다. 필자는 한 친구로부터 “누군가 소고기를 사준다고 하면 사양하고, 돼지고기를 사준다면 마지못해 따라가되, 닭고기는 내 돈 주고라도 사먹고, 오리고기라면 훔쳐서라도 기필코 먹어라”란 농담 반 진담 반의 고기철학의 섭생법에 영향을 받은 터라 소고기를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이곳 동강한우타운에서는 그따위 나발철학은 집어치고 맛만 좋게 실로 달게 먹었다. 마침 그 자리에 구철서 회장님의 고교동창이며 다음날 우리가 방문하게 될 아프리카 미술박물관의 관장이신 조명행 전 나이지리아 주재 대사님이 합석하여 즐거운 담화를 나누면서 고기맛을 한층 돋구었다.
만찬 후에는 조대사님의 소개로 거짓말 조금 보태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설좋고 나지막한 무대까지 갖춘 노래방을 소개받았는데 20여명이 마음껏 뛰놀아도 남아돌만큼 널찍한 곳이어서 모두들 타고난 노래솜씨를 유감없이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회사의 긴급회의 때문에 늦게서야 「걸구쟁이네」식당에서 합류한 이행기 회장께서 맥주, 소주를 비롯해서 각종 음료수와 안주 일체를 포함한 노래방 비용 전부를 부담해 주셔서 모두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혹 늦게사 동행하게 되어 미안해서 그랬다느니 혹은 원래부터 호쾌한 헌헌장부의 의기 때문이라느니 하면서 호사가들이 한동안 즐거운 입방아를 찧느라 부산하였다.
다음날 아침 7시, 김삿갓면 진별리에 있는 숙소 「온 모텔」에서 모두 도복을 갈아입고 2분 거리에 있는 아프리카 미술박물관으로 갔다. 영월은 한때 탄광촌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지금은 문을 연 박물관만 29개소에다가 앞으로 6개소가 더 들어설 예정이라고 하니 검은석탄물이 흐르던 강물에 1급수에서 자라는 물고기가 돌아오고 첨단기술을 동원하여 역사, 자연, 과학, 예술, 민속 등등을 주제로 한 박물관 천국을 이루게 되었으니 상전벽해도 이쯤되면 가히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우리가 찾은 아프리카 미술박물관은 아프리카 토인들이 사는 토속적인 움막의 지붕을 흉내낸 뾰족지붕과 그곳의 명물인 얼룩말 모양으로 흰줄과 검은줄이 길게 휘어진 거대한 외벽이 특이하여 우선 눈길을 끌었다. 작년 5월 개관하였으니 이제 겨우 첫돌을 맞이한 셈이라 넓은 정원에는 아직은 흙과 모래가 심은지 얼마되지 않아 듬성듬성 보이는 잔디보다 많았으나 관장님의 호의로 박물관 소장의 거대한 비닐시트에다가 가져간 수지지원 소유의 비닐시트를 겹쳐서 깔고 그 위에 또 회원들이 개인적으로 휴대한 간이매트를 깔고 수련을 시작하였다.
▼뒷줄 좌측 청색 도복을 입은이가 박교수
태극기가 없어 국기에 대한 경례만 빼고 수련장에서 매일 하는 격식대로 훈제창, 전조신법, 단전호흡행공, 후조신법에다 오공법, 쌍장지르기 20회까지 마쳤는데, 그날은 또 사범들의 특별 시범이 있었는데 이정열 사범과 김정희 사범 두분이 남녀 대표로 앞으로 나와 연공법 시범을 보여 주었고, 이어 우리 수지지원의 부지원장이신 김정희 사범 혼자서 펼치는 강공법 시범이 있었다. 특히 김 사범님은 수지지원만이 아니라 중앙본원에서도 손꼽히는 시범조의 중심인물로 유명짜한데, 이분의 시범공연은 실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황홀한 카타르시스의 경지로 인도하는 예술작품과 같아서 그 감동이 전율할 정도임은 이미 익히 사방에 널리 알려진 바이다.
▼앞줄 좌측 네 번째가 박교수.
수련을 마친 뒤 코앞에 있는 「산장식당」에서 인심 후한 아줌마가 푸짐하게 가득 담아 내온 올갱이 해장국을 배불리 먹은 후 다시 아프리카 미술박물관에 가서 전시된 소장품을 감상하게 되었다. 이곳은 반평생이 넘도록 남미와 아프리카 여러나라의 대사를 역임했던 조 관장이 주재국들에서 수집한 전통 부족사회의 조각과 현대적 작품들을 전시한 곳으로 식전 내내 2시간 가까이 이용한 사용료 및 입장료 일체는 구 회장님 빽으로 무료혜택을 받았다. 이곳 지방대학의 겸임교수로 계시는 관장님은 마침 화요일이 강의가 있는 날이라 대사 부인이신 김읍자 부관장님의 유창하고 해박한 해설을 듣게 되었음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이 박물관은 고미술과 연관될 수 있는 소수의 근현대작품을 비교·전시함으로써 아프리카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주로 나무, 청동, 토기, 상아로 만든 작품이 전시되어 아프리카 토착문화와 전통예술 및 변화하는 아프리카 현재의 모습을 조망하면서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는 바, 아프리카 미술의 특징은 후에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등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탈춤공연에서 볼 수 있는 각종 탈과 비슷하면서도 어쩌면 더 웅장하고 정교한 수많은 탈들이 전시되어 친근감을 느낄수도 있었는데, 특히 마지막에 아프리카 미술의 영감을 받은 입체주의 운동의 대가 피카소가 1937년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스페인의 한 도시를 묘사한 거대한 벽화「게르니카」의 축소판 사진에 대한 김 부관장의 해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필자가 학위논문의 주제로 삼았던 테네시 윌리암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유리동물원』에도 주인공의 개막사에서 언급되는 동명의 도시 이름「게르니카」를 학부시간에 여러 차례 강의하면서도 정작 그 벽화의 추상적 미학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는데, 김 부관장은 풍부한 예술적 지식과 감수성 넘치는 유려한 화술로 그 입체파의 세부적인 내용을 명쾌하게 분석하여 대단히 가치있고 귀중한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남은 일정의 시간이 촉박하여 그분의 차분한 해설을 더 듣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못내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아프리카 미술박물관에서 다리 하나 건너편에 있는 천연기념물 219호인 고씨굴은 시간관계상 생략하고, 그 대신 동굴생태박물관에 들어가 약 4억년 전에 형성된 고씨동굴의 미개봉 지역까지 영상으로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동굴 속에 사는 황금박쥐를 비롯하여 수많은 동물들과 기이한 곤충들을 총천연색 동영상으로 상세하게 살펴본후
이 지방의 명물 칡칼국수로 점심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 김삿갓 문학관으로 버스를 몰았다. 같은 김삿갓면이지만 진별리에서 와석리까지 약 30리길은 꼬불꼬불 곡예를 하여 그야말로 악명높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을 실감케 하였는데, 김삿갓 계곡으로 들어가 김삿갓 유적지와 생가를 지나서 문학관에 도착하니 무엇보다도 우선 삿갓모양의 커다란 지붕이 우리 모두의 흥을 돋구어 주었다.
그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호는 난고(蘭皐)인데, 5세때 홍경래의 난으로 삼족이 멸할 위기에 놓인 것을 김성수란 종이 구사일생으로 그를 구출하여 황해도 곡산에서 키우다가 몰래 영월로 와서 숨어살게 되었는데 2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백일장에서 장원이 되었으나, 홍경래 반란군에 항복한 조부를 욕한 내용의 시를 쓴 죄책감 때문에 평생 밝은 하늘을 볼 수 없다는 판결을 스스로 내리고 22세부터 40여년간 삿갓을 쓰고 걸식을 하며 방랑생활을 했기 때문에 별명이 이름과 아호보다 유명해진 김삿갓이 되었고, 그로 인해 살던 곳의 행정명칭도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우리는 1층의 영상실에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를 일별하고 명국환 선생의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로 시작되는 가요를 합석한 다른 관광객들과 합께 따라 부른 후, 김삿갓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영국 선생의 업적과 연구자료 및 유물을 모아둔 기획전시실을 돌아보고 2층 난고문학실로 올라가니 구한말에서 현재까지 김삿갓에 대한 각종 서적, 간행물, 논문, 잡지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허름한 삿갓을 쓰고 조선 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양반귀족들의 부패상과 타락상, 비인도성을 통쾌하게 폭로 · 풍자한 그의 대표작들이 복도에 전시되어 있어 그의 놀라운 재주에 모두 감탄을 연발하였는바, 그중 비교적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한편만 소개한다.
어느 시골 서당에 들렀더니 생도들의 버릇이 형편없을 뿐 아니라 선생도 나와보지 않는 지라 이 시를 지어 놓았으니, 한자의 뜻은 별 것 없으나 각 행의 마지막 석자를 우리말로 읽으면 고약한 욕설이 된다. 김삿갓은 이런 류의 시를 이 “辱說某書堂” 말고도 “祝文詩”, “辱孔氏家”, “辱尹家村”, “元生員” 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미운 사람 욕을 실컷 하면서도 기이한 뜻을 지니게 하는 기가 막히는 재주를 멋지게 발휘하였으니 가히 동서고금에 뛰어난 천재라 아니 할 수 없다. 문학관 건물 앞에 기념품과 관련책자를 파는 곳이 있어 들렀더니 문이 잠겨있고 “근처 식당에서 김삿갓 시집을 구입할 수 있음” 이란 쪽지가 붙어있어 100여 미터 떨어진 식당을 찾아가 『김삿갓 시 모음집』한 권을 샀더니 거기에 필자가 알고 있던 시 한편의 해설에 수긍이 가지 않는 구절이 있었다.
二十樹下 三十客 四十家中 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김삿갓이 어느 집에 가서 밥을 달라고 사정하니 쉰 밥을 주는지라 아무말 않고 한 두술 뜨는 척하고 붓을 꺼내 시를 써놓고 휑하고 가버리니 주인이 아무리 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동네 글방을 돌아다니며 한시를 볼 줄 아는 여럿에게 보여 그 뜻을 새겨보니
스무나무 아래서 서러운 나그네가 망할 놈의 집에서 쉰 밥을 얻어먹다니
인간이 어찌 이런일이 있는고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밥을 먹는것만 못하구나
라는 뜻이 되었다고 필자가 중 1년때 생물 선생님한테서 배웠는데, 위에서 말한 책 28쪽에는 첫 구절 해석이 “스무나믄 살 아래인 서러운 나그네가”로 되어 있었다. “나무 수(樹)”자가 “나이 수”로 둔갑을 할 수 있는지 한자실력이 변변찮은 필자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식물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그 집 앞에 일명 시무나무라고도 불리는 느릅나뭇과의 낙엽 교목으로 높이가 20m 정도 자라는 큰 나무가 있어 김삿갓이 그렇게 읊었다고 했는데, 그는 ”스물“ ”서른“ ” 마흔“ ”쉰“ 이란 숫자를 재치있게 나열해서 그의 특기인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명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 문학관에서 다시 왔던 버스길을 거슬러 5분 가량 달려서 조선민화 박물관에 들렀다. 이곳은 국내 최초 민화 전문 박물관으로서 “어해도” “호렵도” “까치와 호랑이” “어변성룡도” 등 소박한 서민적 정서가 담긴 대표적인 조선시대 민화 180여점과 현대민화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각 그림에 담긴 뜻을 여자해설가의 입담좋은 설명으로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남자해설가가 그림 해설은 대충 하고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안쪽 편을 가리키고 있어 들어갔더니 조선, 중국, 일본, 삼국의 춘화방이 있었다. 답사 팀이 이구동성으로 침이 마르게 자랑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곳에서 선조들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성생활을 그림으로 대담하게 재현시켜 놓은 민화를 보면서 혹자는 여기도 아프리카 미술박물관의 입체파 조각처럼 부분적으로 확대하고 강조한 점이 유사하다고 논평을 하였다. 아프리카 미술박물관의 조각품은 여성의 가슴을 기형적으로 크게 만들어놓았고 이곳 춘화방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선조들의 남성도 거석(巨石)처럼 강조하여 입체파식 묘사를 해놓았다는 감상을 늘어놓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빙긋이 웃은 양반은 그분만이 아니고 여성 회원들까지 21명 모두가 무엇이 좋은지 어떤 점이 재미있는지 어쨌든 모두들 괴상한 탄성을 지르면서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우리 일행 중에는 미혼자가 없었다는 게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한 순간이나마 온갖 시름에서 벗어나 이렇게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는 게 진정 소중한 것임엔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경주 박물관에서 토우들을 보면서 느낀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신라시대나 조선시대나 신비스런 성을 현대인들보다 더욱 솔직하고 자랑스레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후손들인 우리가 어쩌면 부끄러워하면서도 빙그레 웃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모양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모두들 상기된 얼굴로 그곳을 나와 마지막 행선지로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단종의 묘인 장릉(莊陵)으로 향했다. 출생 후 사흘만에 어머니 현덕왕후를 여의고 12세에 아버지 문종마저 여읜 후 왕이 되었다가, 3년후 15세에 작은 아버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7세에 유배되었다가 넉 달만에 죽임을 당하고 시신이 동강에 버려진 단종은 운명적으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영월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남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했던 것을 60여년 후 중종때 어렵사리 암장지를 찾아 봉분을 갖추었고, 다시 80여 년 후인 숙종때 비로소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으니 죽어서도 우여곡절을 많이도 겪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중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장릉에는 언덕 아래에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홍도의 정려비, 암장묘를 간신히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기타 정자 등 다른 왕릉에는 없는 시설물들이 있어 특이한 능이며, 능에서 일자로 길게 뻗친 언덕능선에는 청령포에서처럼 수령 몇백년이 되는 아름드리 소나무 수십 그루가 모두 한양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어 우리의 마음을 한층 애잔하게 한다.
그러나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년왕에 대해 서글픈 감상에 젖어 있을 수 만은 없는 우리 일행은 이제 나약한 기분따위는 훌훌 털고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생활인의 자세와 본분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돌아오는 귀향버스 안에서는 갈때처럼 더러는 잠을 청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소주와 맥주 파티를 벌이는가 하면 노래방 시설까지 동원하여 어젯밤 못다 부른 노래를 부르고 때로 짓궂은 농담에 박장대소를 하며 우쭐대는 사이에 버스는 벌써 박달재휴게소를 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여자회원이 “울고넘는 박달재”를 구성지게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 밑천이 짧은 필자가 잔뜩 꼬누고 있었던 곡인데 그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아 하는 수 없이 해방직후에 나왔을 법한 아주 케케묵은 “낙화유수”를 부르고 말았는데, 짧은 곡인줄 짐작하고 신청하였더니 웬걸 3절까지 나오는 바람에 가뜩이나 못부르는 실력에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모두들 이번 야외 수련회는 박물관 고을에서 풍성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또한 빼어난 명승지 관광을 통해 그에 못지않은 풍요로운 정서의 무게와 부피를 채울 수 있는 유익한 “1박 2일”이 되었다고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끝으로 이번 행사에 수고하신 많은 분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우리 모임을 원활하게 움직이게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달으면서 이분들의 숨은 노고에 고개숙여 경의를 표하면서 모두들 한단계 상승되고 고양된 국선도의 경지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박수를 치는 가운데, 버스는 어느덧 어둠이 짙어가는 동수원 IC에 접어들었고 우리 모두 더욱 알차고 즐거운 다음 수련회를 기약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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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박용목 교수의 영월 여행기를 잘 읽었읍니다. 같이 매월 등산 하면서 서로 체력을 다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렇게 여행기를 소상이 표현 할 줄이야! 감탄 했읍니다.그리고 이 많은 분량의 글을 노래와 함께 홈페이지에 올린 동산형도 대단 합니다. 두분 모두 건강 하시고 행복하게 지내 십시요.
박교수는 좋은 글 솜씨를 우리카페에 직접 할애 해줄 마음은 없는지, 명장은 꼭 솜씨를 함부로 자랑하지 않는건지? 카페 활용으로 새로운 친교와 온고지신의 하모니를 해 봄도 나쁠 것이 없을 텐데...., 많은 명 문필의 동문들이 함께하지 못함을 아쉬워 합니다.
전적 동감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실은 위의 글도 년전에 홈피에 올리겠다고 간청했으나 극구 거절한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박교수의 이밖에 글을 보고 싶네요
무더위에 溪岩형, 東山형 수고하셨습니다. 파주쪽에는 호우피해도 막심하다든데 동산형 내외분 무고 하신지요. 일차 문안전화도 않고서 죄송합니다. 부산 바닷가는 폭염주의 이라 소금장사 마음입니다. 건강하십시요.
박교수의 필력은 학창시절부터 잘 알려진것이지요. 경북대학교 물리대 재학시 경북대학보에 시와 평론을 왕성하게 발표했으며 경기대 재직시에도 일간지에 칼럼등을 기고했으며 윤식동문이 39산악회장 때는 총무를 맡아 매월 산악회 산행 안내문을 작성하였었는데 그 내용이 안내문 수준이 아니라 모두가 작품수준이 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호우피해 걱정까지 해 주시는데 일산에는 피해가 전혀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관심 가져 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좋은 글을 주인공이 직접 올렸더리면 금상첨화가 됐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장본인은 이렇게 여러 동문들의 열성을 알고나 있는지 궁급하네요. 본문중 김삿갓 시에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까지도 들어갔더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을 읽느라 고생하신 동문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소생의 되도못한 글을 읽을만한 축에 든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형편없는 악필이라 다른 사람의 교정을 받아야 한다고 두드러기가 생기는 분들도 있는 것이 사살이지요
월주,동강,학헌형들의 충고는 고마우나 앞으로도 제가 39카페에 올리는 일은 없을 것이오니 양해를 바랍니다. 동강형의 작년일은 미안하게 되었는데 금년에는 연배가 월등하게 높으신 동산형이 몇차례 말씀하시니 더이상 거절할 마땅한 이유가 없더군요. 동강형에게 거듭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