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새벽녘에 잠 설쳐 깨어보니
‘단’숨에 그 님 생각 내 마음 감당 못해
‘강’한 맘 움켜주고서 달려가네 님께로.
-〈‘비단강’을 첫 글자 운으로(시조시)〉, 김성예, 2012.3.25.
나는 두 번에 걸쳐 아내와 함께 미국 엘에이 지역 문인들의 초청을 받아 문학 강연을 하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번번이 15일씩, 여유 있는 일정이었습니다. 재미교포가 운영하는 호텔에서 지내면서 현지여행사를 통해 여행도 다니고, 여러 문학단체에 불려다니며 강연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그랬지요.
그런 가운데 한번은 얼에이 근교 오렌지카운티에 본부를 둔 글마루문학동인회의 초청으로 갔던 빅베어산장의 문학캠프였습니다. 김동찬 시인과 정해정 작가가 주축인 문학모임인데, 회원도 많았고, 회원들의 우의도 좋았습니다.
우리가 찾아간 산장은 매우 아담하고 분위기 넘치는 산장이었는데, 계절이 3월인데도 눈이 아직 남아 있었고, 눈 속에 샛노란 수선화가 피어 있는 게 신기로웠습니다. 산장 이름이 ‘위스퍼링 파인스 캐빈(Whispering Pines Cabin)’, 아마도 우리말로는 ‘솔바람소리 오두막’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곳의 저녁 시간, 나의 문학 강연이 있었고, 그 다음엔 시조 쓰기 백일장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잘 하지 않는 시조 쓰기를 이국에 사는 교포문인들이 한다는 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시조의 3장, 장마다 첫 글자로 쓸 운을 나더러 내라 그래서 나는 내 작품 제목 가운데 ‘비단강’이 생각나 그것으로 했습니다.
심사위원은 김호길 시인, 그는 또 70년대에 등단한 시조시인으로 대한항공 비행사로 근무하다가 아예 미국으로 이민 간 교포문인입니다. 나와는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참가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시조시 형식과 운자에 맞추어 시조를 짓기만 하면 되는 그런 백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한번 써보고 싶다지 뭡니까? 나더러 도와달랬지만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우리한테 배정된 방갈로 침대 위에 올라가 엎드려 글을 썼습니다. 궁둥이를 천정으로 바짝 치켜올리고 다람쥐 자세로 글을 쓰는 모습이 매우 우스꽝스러웠지만, 나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 작품을 모은 뒤, 김호길 시인이 꼼꼼이 읽고 심사 발표를 했는데, 글쎄 김성예의 글이 차상, 2등상을 받았지 뭡니까. 절대로 내가 거들어준 일이 아닙니다. 아내가 외우는 몇 개 안 되는 글 가운데 홍랑이란 조선시대 기생의 시조 한 편이 있습니다.
산버들 가려 꺾어 보냅니다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오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그런 애절한 사랑과 이별의 시입니다. 이 시를 외워두었다가 살짝 비틀어 패러디한 글이 바로 아내의 글입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외우는 일은 글쓰기에 아주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죽기 전에 詩 한 편 쓰고 싶다(나태주, 리오북스, 2016)'에서 옮겨 적음. (2019.04.20. 화룡이) >
첫댓글 좋은 글을 외우는 일은 글쓰기에 아주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새롭게 받아 들입니다.
왜냐면 제가 걱정하고 있었던 부분은
외웠던 글들이 제 가슴 속에 기억 되어 있다가 비슷하게 아니면 똑같이 튀어나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읽기는 하지만 요즘은 외우려고는 하지 않았었거든요.
감사합니다.
힘써 외운 시는 '의식' 속에 저장이 되고,
어렴풋이 이해하고 넘어간 시는 '잠재의식' 속에 저장이 된다고 봅니다.
'의식' 속에 저장이 된 시는 시의 제목만 들으면 그 내용 상기는 물론 암송도 가능할 터이나,
어렴풋이, 대충 이해만 하고 넘어간 시는 비슷한 시적 공간을 만나도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느낌 그 이상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힘써 외운 시들은 작품 제작의 방향키가 되어 표절과 같은 행위를 오히려 막아주지 않겠는지요?
저는 시인에게 암송시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유리한 조건이고, 자랑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시를 외우는 일과 쓰는 일은 별개입니다. 외운 시가 내 작품으로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망고씨, 걱정마시고 많이 외우십시오. 많이 외울 수록 내 시력은 더 든든해 지니까요.
도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시 외워서 두 분 선생님께도
들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