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한 전쟁터에도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 그것도 형제와 같은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면. 실제로 예의를 지켰더니 영웅이 됐다. 지난해 가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의 한 마을에서 수색 정찰에 나선 우크라이나군 병사와 생사를 가르는 백병전(총 칼 등을 이용해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 싸우는 전투)을 벌였으나, 막상 상대의 죽음 앞에서 예의를 지킨 러시아 제39 기계화소총여단 소속 안드레이 그리고리예프 상병의 이야기다.
사건이 벌어진 지 몇 개월이 지난 이달 초 '보디 캠'(몸에 차는 카메라) 영상이 인터넷에 공유되면서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된 그리고리예프 상병(콜 사인·ID 투타, 이하 투타)은 시베리아 사하(야쿠티야)공화국 출신이다.
러시아 텔레그램 계정에 올라온 백병전 삽화/캡처
한순간에 영웅으로 등장해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안드레이 그리고리예프 상병/캡처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투타 상병에게 '러시아 영웅' 칭호를 부여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고 크렘린이 11일 밝혔다. '러시아 영웅' 지정이 이렇게 신속하게 이뤄진 것은 이례적이라고 한다. 그의 전투 영상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상은 폐허가 되다시피한 한 마을의 수색에 나선 우크라이나군 병사의 총구로 시작된다. 혈투 끝에 사망한 이 병사는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 출신 드미트리 마슬로프스키로 알려졌다. 영상은 마슬로프스키의 헬멧에 부착된 카메라에서 나온 것이다.
혈투는 지난해 가을, 우크라이나군이 도네츠크주 트루도보예 마을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을 방어하다 이 마을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투타 상병은 정찰및 수색에 나선 우크라이나군 병사에게 발견됐다. '보디 캠'을 부착한 우크라이나군 병사는 조심스럽게 마을을 수색하다가 투타 상병을 발견하고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투타 상병도 응사(應射)했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서로 눈앞에 있는 상대방을 항해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이어진 몸싸움, 아니 백병전. 영상 중간 중간에 단검이 허공을 가르고 피가 튄다. 단검의 칼날을 움켜쥔 손도 보인다. 기합인지, 신음인지 단발마와 같은 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잔혹한 칼싸움이 벌어진 상황으로 추정된다. 투타 상병은 나중에 러시아 매체와의 언론 인터뷰에서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손목을 물어뜯으며 상대를 밀어냈다"고 회상했다.
영상에서 확인되는 치열한 백병전. 단검이 허공을 수없이 가른다/영상 캡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잠깐만, 잠깐만, 편안하게 죽게 해달라. 숨을 조금 쉬게 해다오, 많이 아파. 놓아줘"라는 소리가 들린다. 우크라이나군 병사의 호소였다. 투타 상병이 끓었던 무릎을 펴며 물러서는 모습이 보이고, “다 끝났어, 엄마. 프로싸이(прощай, 안녕)”라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수류탄)을 터지는 듯한 영상이 이어진다.
투타 상병은 “그가 수류탄을 터트려 자살을 시도했지만, 목숨은 붙어 있었다”며 "나에게 고통을 끝내달라고 했고, 나는 그를 총으로 쏴 고통에서 벗어나게 도왔다”고 털어놓았다. "고맙다. 넌 세계 최고의 전사야"라는 목소리와 "형제여, 잘 가라"(Прощай, брат)라는 또다른 목소리가 들리는데, 그걸로 상황은 끝난다.
이 영상은 몇 가지 관점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우선 현대전에서 보기 드문 생생한 백병전 영상이었다는 것. 또 "고통스럽다. 편안하게 죽게해 달라"는 상대의 호소를 받아들인 인간미다.투타 상병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다워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몸싸움을 벌일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그도 알았던 것 같다"며 “내가 그의 마지막 순간을 알고 놓아줬을 때, 그는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조용히 가게 해달라는 호소에 물러서는 투타 상병/영상 캡처
투타 상병은 영상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데 대해 “칼에 베이고 상처를 입었지만, 소리를 내면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이 몰려올까 두려웠다"면서 "우리 동료들은 5~6㎞ 떨어져 있어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답했다.
이 영상을 공개한 한 군사 블로거는 "그들의 마지막 대화에는 피에 굶주린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아니라, 비록 적이지만 상대에 대한 존경과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풀이했다.
관심을 끄는 또다른 관점은 우크라이나 측의 반응이다. 알렉세이 아레스토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은 이 영상을 “이번 전쟁을 상징하는 것 같다”며 "우리(우크라이나군) 병사는 영웅 심리에 취해 혼자 행동하고, 몸싸움 중에 비명을 질러 스스로 힘을 빼는 등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몸싸움의 결과가 우크라이나군의 패배로 끝났고, 치열한 싸움 뒤에 서로를 "최고의 전사", "형제여"라고 부르는 대화가 우크라이나군의 전투 수직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 영상을 찾아봤다.
고향의 수장(사하 자치공)으로부터 치하를 받은 투타 상병/텔레그램 캡처
이 영상으로 러시아에서 유명 인사가 된 투타 상병은 사하 자치공화국에서 운전사·정비공으로 일하다가 지난해 4월 군에 자원입대했다. 아이센 니콜라예프 사하 자치공화국 수장(대통령)은 투타 상병을 만나 그의 용기를 치하하고 이 지역 원주민인 야쿠트족의 전통 칼을 선물했다. 그리고 러시아 영웅 칭호가 수여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새해들어 억세게 운이 좋은 안드레이 그리고리예프 상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