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30.
01;30
지금 시간이 몇 시지?
CT 조영제 부작용으로 눈꺼풀이 열리지 않아 손가락을 써 강제로
눈(眼)을 벌린다.
아직도 얼굴이 퉁퉁 부었고, 무기력증(無氣力症)까지 왔는지 한참
힘을 쓰지 못한다.
전날 맞은 알레르기 완화제인 항히스타민제 혈관 주사와 함께 먹은
약에 취해 저녁 6시부터 잠이 들었으니 꼬박 7시간 이상 잠을 잔
모양이다.
지금 이 시각 바깥 풍경은 어떨까,
뜻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풍속이 거의 제로라 눈은 바람에 휘날리지 않고 곧장 땅으로
떨어진다.
한설(寒雪)에 바람이 불지 않아 문풍지 떨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밤,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는데 남이 보면 청승맞다고
하겠다.
05;00
눈이 수북하게 쌓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을 밟으며 산길로 향한다.
가던 길 뒤돌아보니 내 발자국 두 개가 소실점(消失點)을 향해
가지런히 이어져 간다.
새하얀 눈을 밟으며 눈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내가 무협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답설무흔(踏雪無痕)의 무공(武功)으로
눈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텐데,
문득 와룡생, 김용 같은 무협소설의 대가가 아직 살아있다면 부탁을
해보고 싶다.
눈 위에 작은 새의 발자국이 생겼다.
기러기는 북쪽으로 다 날아갔으니 설니홍조(雪泥鴻爪)는 아니다.
숲에서 잠을 자던 참새나 아주 작은 콩새의 발자국이겠지.
침잠(沈潛)의 세계로 빠져들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바둑을 복기하듯 최근 3개월간 나에게 발생하였던 일에 대하여
거꾸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열흘 전인 12월 20일 주치의 입에서 조직검사 결과에 대하여
무슨 말이 나올지 가슴이 두근거렸지.
그동안 단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으니 나한테 기적과 같은
두 번째 행운이 왔을까,
진단결과를 통보할까, 아님 선고(宣告)를 내릴까.
양성(良性)일까, 악성(惡性)일까,
코로나 감염으로 그동안 유지돼 오던 나의 면역력이 무너진
모양이다.
위에서 '악성 신생물'이 조기 발견 되어 위를 절제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상당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주치의는 말한다.
하지만 이 시간부터 산정특례자로 분류가 되며, 이른 시일 내에
복부 CT촬영을 하여 폐, 간 등 다른 장기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여야 하고,
5년간 주치의 당신이 특별관리를 한다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한다.
아!
이제부터 나도 암(癌) 환자인가.
23년간 서울대병원, 순천향병원, 아산병원, 한양대병원,
경희대병원 등 메이저급 병원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뇌종양과
척수공동증을 발견하여 수술까지 성공한 병원이라 신뢰감이
가지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23년 1월 9일 최종결과가 나온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미리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아직은 소망편향(所望偏向) 속에 살고 싶은 거다.
현실은 냉담한 논픽션(nonfiction)의 세계로 팩트(fact)만
존재하지만 가끔은 픽션 (fiction)의 세계로 들어가 꿈을 꾸고 싶다.
뇌종양을 극복한 기적 같은 1차 행운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두 번째
행운이 올 것이며 2023년은 올해보다 더 나아지겠지.
06;30
3개월간의 금주령(禁酒令)과 등산 금지령(禁止令)이 내렸으니
세상 사는 재미가 없어졌다.
내일이 지나면 해가 바뀌는데 별 느낌도 오지 않고 연말 기분이
나지 않는다.
무감각해진 마음 뒤쪽에 무기력감마저 존재하는 모양이다.
느림은 기다림이다.
그렇다고 넋 놓고 멍 때리는 게 아니다.
비록 지금은 몸과 마음이 바짝 움츠러든 번아웃(burnout) 상태지만
치열하게 체력을 비축하며 기적과 같은 제2의 행운을 만들고자
앞산을 세번이나 오르내렸고, 내일도 모레도 꾸준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아프지 않고 높은 산에도 오르고, 친구들이랑
오손도손 막걸리를 마시며 정담(情談)을 나누는 꿈도 이루어지리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를 나는 느림으로 기다릴 것이다.
2022. 12. 30.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