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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감사(빌 4:4-7)
베스트셀러 작가 도쓰카 다카마사기가 쓴 『세계 최고의 인재들은 왜 기본에 집중할까』에서 그는 평생 성장을 멈추지 않은 사람들의 48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성공하는 사람들은 ‘감사합니다’를 자주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학생들은 10명중 9명은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다닌다고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항상 공평하게 대하고, 남의 호의를 격의없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문인지 감사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자신감이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도 다 하나님이 세우신 절기입니다. 유월절, 맥추절,초막절인데 한결같이 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지말고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기념일입니다.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맥추절은 밀, 보리를 거두어들인 후에 지키는 추수감사절기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출애굽한 이후 광야생활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말고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우리가 잘 아는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뿐 만 아닙니다. 오늘의 내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리고 많은 분들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11월은 전도와 감사의 달입니다. 우리가 한해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앞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바로 전도와 감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이기도 하고 총동원전도주일이기도 합니다. 우선 우리 성도들끼리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하며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로서는 우선 성도 여러분들께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교회를 섬기며 지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과 가정 위에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조금 어려움이 있고 힘든 일이 앞에 다가왔어도 위를 바라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죄악이기도 합니다. 감사를 회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2천년전 로마의 습기찬 감옥에서 사형수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도대체 바울은 그 차디찬 감옥에서 무슨 감사가 그렇게 많아 기뻐하며 살았을까요? 자신만 기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기쁘게 살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바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야 할 세 가지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이 풍성한 결실의 계절인 가을에 우리의 감사가 회복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때문에 고통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먼저 바울은 감사의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4절을 다시 보실까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은 기뻐하라고 하면서 먼저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감옥에 있는 그가 기뻐할 수 있다면 황제의 사면령을 받았거나 아니면 보석허가를 받을 때일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기쁘겠습니까?
감옥문을 열고 나오는 것 외에 무엇이 더 기쁘겠습니까? 혹시 그 정도는 아니지만 누가 면회를 와서 돈을 많이 넣어주었다든지 맛있는 음식을 넣어주었다든지 하면 조금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 기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다른 이유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이유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기뻐하라“입니다. 이 말을 “감사”로 대입해도 답은 같습니다.
우리 한번 물어봅시다. “여러분, 감사합니까?” “예”. “무엇 때문에 감사합니까?” “예, 이번에 아들이 취직시험에 합격했거든요”. “예, 이번에 우리 남편이 대박을 만나 매출이 10배로 뛰었거든요”. 이것이 우리 감사의 현실이고 수준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지만 감사의 본질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때문에 감사합니까? 어떤 이유로 감사해도 결국 하나님 때문에 감사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은 또 하나님 때문에 감사를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감사의 대상이면서도 우리의 불평의 대상입니다. “왜 감사하지 못해요?” 하고 물으면 대개 “하나님이 기도응답 안하잖아요”. “이번에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잖아요. 왜 하나님이 우리 어머니를 데려가셨죠?”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태원 참사사건이 일어났죠? 왜 하나님은 젊은 청년들 156명을 죽이셨죠?”하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세상에 그렇게 많은 고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나요?” 이런 질문은 사실 무신론자들이 좋아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고 사랑이시라면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악과 고통이 있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없거나 무기력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생각은 무신론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내 기도를 안 들어줄까? 왜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일마다 안되게 하실까? 하나님은 왜 나만 미워하시지? 왜 하나님은 나에게 고통을 주시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 생각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축복입니다.
그래야 감사합니까? 구약에 우리가 잘 아는 내용중에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남유다왕국이 곧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남유다왕국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박국선지자 역시 그런 예언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찬양을 드립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무엇 때문에 즐거워하고 무엇때문에 기뻐합니까?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다 해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다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기도가 응답되어야 하고 내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져야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적 관계에 있습니까? 돈내고 소원빌면 끝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은 주지 않고 좋은 것만 주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하나님이겠습니까? 전능하신 분이 인간에 대한 생사화복의 모든 권한을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 주시는 분이 전능자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분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재량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재량권을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부릅니다. 주권과 재량권이 없는 데 어떻게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설령 하나님이 어떤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합시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누가 판단합니까?
미국의 어느 시골집에 몸이 매우 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하루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집 앞에 있는 바위를 옮겨라“.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왜 그 무거운 바위를 옮기라고 할까? 하나님이 내 몸 안 좋은 것을 모르시나?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순종했습니다. 한달동안 낑낑거리고 마쳤는데 저녁에 하나님이 또 말씀합니다. “이제 그돌을 원래 위치로 갔다 놓아라”. 황당했습니다.
한달동안 몸도 약한 사람이 힘들게 돌을 옮겼는데 다시 원위치하라니. 화가 났지만 또 낑낑거리고 옮겼습니다. 일을 모두 마치고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하란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겠습니다. 왜 몸도 약한 저에게 그 일을 두 번씩이나 시킵니까?”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그렇게 아프던 네가 지난 두달동안 밤마다 기침 한번 없었지? 아침에 일어날 때는 상쾌하고 저녁에는 피곤해서 잘 잤지? 거울앞으로 가보겠니?”
이 사람이 거울앞으로 갔는데 와, 이게 누구입니까? 거울앞에 선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두 달동안 힘든 일이 그를 건강하게 한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나쁜 일입니까? 우리가 가끔 힘든 일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힘든 일이 나쁜 일입니까?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 두 달이 지난 다음에 봐야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이것처럼 힘든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고 그 일이 나쁜 일입니까? 그가 거기서 순교함으로 기독교가 로마에 뿌리내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세계로 뻗어가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힘든 일은 많습니다. 가끔 하나님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달만 기다려 보시겠습니까? 그 힘든 일이 좋은 일이 될지 어떻게 압니까? 그래서 바울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래서 “주안에서 기뻐하라”. 하나님 때문에 감사합시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합시다. 아멘.
2. 이웃때문에 상처를 넘어서 감사합니다.
바울이 감사를 말하면서 두 번째 한 말씀이 5절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왜 바울은 기쁨을 말하다가 갑자기 관용을 말하는 것입니까? 관용이란 관대하다는 뜻입니다. 국어사전에는 관용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웃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 상대할 사람이 없는 데 혼자 용서합니까?
누군가에게 넓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바울은 그 감사를 이웃과의 관계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떠오르는 것이 대개 사람입니다. 시집간 딸이 감사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감사해요. 결혼하고 자식낳아보니 조금 어머니, 아버지 마음을 알 것 같아요. 감사해요. 건강하세요”.
학교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가르쳐두시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휼륭하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인간관계는 우리가 감사하는 두 번째 요소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가 항상 감사의 이유는 아닙니다. 사실 가장 가깝고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실망을 받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가장 많은 아픔과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 받는 것도 인간관계입니다. 성경에 “실족”이란 말이 나옵니다.
눅17:1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여기 나오는 “실족”을 헬라어로 “스칸달론”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스캔들”이 나왔습니다. 이 말의 뜻은 누군가가 다니는 길에 덫을 놓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원수가 사용하는 올무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올무”는 비단 동물을 잡는 도구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덫을 놓아 그로 실족케 하는 것이 올무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는 실족이 스캔들입니다. 실족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흔히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혼자 살지 않은 한 남의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판과 권면은 다릅니다. 비판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참된 것, 곧 진리를 말하라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좋은 비판입니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악의적이거나 파괴적인 비난입니다.
이런 것은 무시해야 합니다. 비판을 할 때 상대와 대화가 되지 않은 일방적인 비판은 대꾸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 7:1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에서 “비판”은 재판장이 재판정에서 내리는 선고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성경은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최후선고는 오직 하나님만 내립니다. 우리가 홀로 판사석에 앉아 남을 판단할 때 우리는 머지않아 피고인석에 앉게 될 것입니다.
비판은 필요하나 오직 사랑으로 권면할 뿐입니다. 우리 자신을 못 고치는 데 누구보고 고치라고 합니까?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는 한 갈등하지 않을 수도 없고 상처받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가끔 나만 상처받는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상처는 누구도 상처준다고 생각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상처는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았다는 느낌”입니다.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느낌”이 문제입니다. 그 느낌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할 것은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받은 것은 우리가 감정이 약하고 자존감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문제는 상처주는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는 나에게 있기때문에 내가 강해지면 됩니다. 내가 강해지는 것이 “관용”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그러워야 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당당하지 못하니까 남이 뭐라고 말하면 금방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때에 하나님앞에 저자신을 돌아봅니다.
십자가의 도를 생각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내안에 예수님이 사십니다. 예수님은 강하십니다. 그 어떤 시험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 내게 짐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주님앞에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때 주시는 은혜가 평강입니다. 혹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주님의 마음으로 그것을 내가 지는 것입니다.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 짐을 질 때 그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빈 곳이 보일 때 내가 그 빈곳을 채우라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짐지기를 싫어하면 편하게 믿을 수는 있지만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너희 사랑, 너희 온유한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이유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고 준비한다면 주님의 심정으로 이웃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서로 갈등할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부부도 갈등이 있는데 교회안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섬기는데 문제가 없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이것이 새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날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그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미워하고 대적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때문에 더 기도하고 그 사람 때문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로서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자기 십자가를 다시 붙잡고 등에 짊어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 사람때문에 상처를 넘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신앙에 이를 수 있어야 정금같은 믿음으로 성숙되는 것입니다.
3. 염려때문에 기도로 바꿔서 감사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감사해야 할 세 번째 상황을 말합니다. 그것은 염려입니다. 6절입니다.“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왜 바울은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그리고 염려로 왔습니까? 우리의 감사를 빼앗는 요소로 염려는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라는 말은 “마음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내 신앙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안에서 보면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염려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면 미국의 어느 대학의 심리학팀이 연구를 했습니다. 조사결과를 인간의 염려 중 40%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30%는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10%는 병에 관한 걱정인데 실제는 걸리지 않았습니다. 진짜 걱정할만한 것은 8% 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실제로 요즘 병원에서 전혀 아프지 않은 데 스스로를 환자라고 단정하고, 병원을 전전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답니다. 이런 환자를 “건강염려증환자”라고 부른답니다. 서울에 있는 순천향병원의 통계는 내원 환자의 20% 정도가 건강염려증 환자랍니다. 문제는 몸은 안 아픈데 아프다고 염려하다 그만 병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염려가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제2차대전때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30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남편이나 아들 기다리며 염려하다가 죽은 사람은 백만명이라고 합니다. 염려는 비생산적이고 불신앙적일 뿐 아니라 파괴적입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가 말했습니다.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요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
오늘 바울이 말합니다. 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바울은 다만 염려만 하지 않으면 감사가 저절로 생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염려와 감사 사이에 기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라고 했으니 기도하지 않아야 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은 강조사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는 기도의 두 종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앞에 나온 기도는 일반적인 대화를 말하고 뒤에 나오는 간구는 목적이 있는 기도를 말합니다. 통성기도, 묵상기도, 새벽기도, 철야기도, 다 좋은 데 그 핵심은 간구라는 것입니다. 염려거리가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면 감사거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염려가 있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염려는 기도의 출발입니다. 감사는 기도의 종착입니다. 기도하면 염려는 감사로 바뀝니다. 염려가 없는 사람은 사실 기도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염려가 많은 사람은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의 재료를 많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려가 그냥 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베틀에 넣고 짜야 합니다. 그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가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한 해를 돌아보고 먼저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십시다. 여러분,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의 구원자되심으로 인하여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가정의 식구들, 또 교회 모든 성도들로 인하여, 나와 함께 일하는 직장, 사업장의 모든 사람들 때문에 감사합시다. 문제가 없어서 감사가 아니라 문제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까? 우리안에 하나님 주신 관용때문에 감사합니까?
염려가 있어서 기도하고 염려 때문에 감사합니다. 그 염려가 기도의 재료가 되어 감사의 제사로 드릴 수 있음을 믿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헤아리면서 하나님앞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