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자유북한방송 게시글 전문-
조명애, 그녀가 한국에 있었다면...
올해 “하나원”을 졸업한 탈북자다.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北무용수 조명애, 애니콜 광고모델”, “남북 합작 ‘사육신’ 촬영”... ...
올해 26살인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그가 몸담고 있던 “평양 민족예술단”의 무용 훈련장에서였다. 친구였던 예술단 무용지도원을 찾아 갔을 때 처음 알게 된 그녀는 이후에도 같은 장소에서 종종 만날 수 있었고, 여타의 행사장에서도 어깨를 스칠 때가 있었다.
2005년 그녀가 남한의 유명 여배우와 광고촬영을 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변사람들에게 넌지시 물었던 말이 있다. 외국에서 광고한편 찍으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된다는데...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누군가가 무슨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는 가고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머쓱해 있는 나에게 다가와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꼭대기 놈들이나 좋아할 일이지” 본인은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광고촬영 후 국가로부터 그녀가 받은 혜택은 가정용 전화기가 전부였다. 180달러라는 설치비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가정용 전화기라지만 당시에도 국가가 너무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2008년 6월,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병약하고 시름겨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디 아파?”...
그녀를 대신해서, 위장병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고 친구가 말해 주었다. 남조선과 합작 드라마 찍을 때 생긴 위병이 나날이 더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 곳곳에 완연한 병색이 돌고 있었다.
그럼 약이라도 좀 사 먹어야지? 그리고는 또다시 공연한 소리를 했다싶어 혀를 깨물었다. 약 사먹을 돈이 있으면 왜 저러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북 합작 드라마를 찍고서도 명애가 받은 돈은 일 푼도 없고 그가 소속된 예술단에 일제 중고 뻐스 한 대가 “수고한 대가”로 공급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금도 앓고 있을 명애가 이곳 남조선에서 “청순, 행복, 발랄”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왔고, 그러면 그럴수록 개인의 가치와 노력을 존중하지 않는 북한 당국의 행태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무겁게 다가온다.
이평평 (2009년 3월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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