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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5-24
내 가족을 살리소서.
어느 도시에 한 가정이 있었는 데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족들이 서로 마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가족들이 모두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데 바쁘게 가다가 그만 신호를 위반했습니다. 경찰관이 차를 세우고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신호위반하셨습니다. 면허증 좀 보여주십시오”. 그러자 운전자가 말합니다. “거 한번 봐 주쇼. 아침에 어쩔 수 없이 술을 한잔 했잖소?” 경찰이 놀라며 말합니다. “아니, 아침부터 음주운전을?” 이때 운전석 옆 자리에 앉았던 부인이 말합니다. “아저씨, 한 번만 봐 주세요. 이 이가 아직 운전면허가 없어서요.” 그랬더니 경찰이 눈을 크게 뜨고 말합니다. “아니, 무면허까지?” 그러자 뒤에 있던 어머니가 말합니다. “거봐라. 내가 훔친 차는 오래 못간다고 말했지?” 마지막으로 아들이 한마디 거듭니다. “아빠, 거봐요. 내가 은행 털 때 알아보았잖아요”. 이 사람은 신호위반에, 음주운전, 무면허에, 은행털이 절도범으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입니까? 실수가 많고 단점이 많지만 서로 덮어주고 사랑합니까? 험한 세상에 가장 소중한 것이 가정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가정만 든든하면 능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이요 은혜입니다.
지난 주 말씀대로 기생 라합은 가나안인이요 여자요 창기였습니다. 어느 면에서 보나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는 죽어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면 그는 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용까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의 영광스러운 관문이 되고 여리고 정복의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전혀 자격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직 믿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그 믿음이 그를 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망합니다. 죄가 많기 때문에 심판받지 않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절하기 스스로 심판받는 것입니다. 믿음, 오직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믿음말고 또 있을까요?
한 주간 동안 저는 이 말씀을 계속 묵상했습니다.
“하나님, 라합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조용히 응답하셨습니다. “없다. 오직 믿음뿐이다”.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알았습니다. 하나님, 그러면 다른 더 깨달을 것은 없습니까?“ 그리고 성경을 읽는 데 단어 몇 개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2장 12절, “내 아버지”, 그리고 13절, “내 부모, 형제”.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 준 후에 대신 자기 아버지 집의 모든 식구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한 내용입니다.
수2: 12-13,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아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징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극한적 상황에서 가족을 생각한 라합, 그 장면을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라합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가 그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편을 들면 여리고왕에게 죽고 여리고편을 들면 이스라엘에게 죽습니다. 그때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았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라합 한 사람만 살아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와중에 자기 가족 이야기를 합니다.
“이왕 나를 살려줄 바에는 내 가족도 살려 주세요. 내 아버지, 어머니, 내 형제와 자매를 두고 나만 혼자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고 나만 혼자 살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같이 살려 주세요”.
그리고 맹세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해주면 당신들을 숨겨 주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차라리 내 가족과 함께 죽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극한적인 상황에서 가족을 생각하겠습니까?
나 혼자 겨우 살까 말까 하는 데 “나는 가족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가족도 살려주세요. 아니 차라리 나는 죽어도 좋으니 내 가족을 살려주세요“. 라고 말하겠습니까?
라합의 이 비장한 가족 사랑을 보십시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족중에서 라합은 가장 천덕구러기 인생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천한 직업을 택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을 수도 있습니다. 가족은 그에게 무거운 생계의 짐이었습니다. 그런 가족들로부터 라합은 많은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그것 때문에 가족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밉거나 좋거나간에 가족은 그에게 운명공동체였습니다. 가족이 죽으면 내가 죽고 가족이 살면 내가 살고, 그는 가족과 함께 죽고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족을 사랑하던 라합에게 놀라운 성경의 비밀이 소개됩니다.
마1:5절입니다. 거기에 라합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태어나는 이스라엘 족보의 중심에 나타납니다.
마1장 5절입니다. 마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절, 마1:6, “이새는 다윗왕을 나으니라”. 놀랍게도 라합은 아브라함, 다윗, 예수님으로 이어진 구속사의 한 중심에 우뚝 서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인류역사의 한 중심에 서 있을까? 변해도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신분이 달라지고 운명이 달라져도 그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하나님 믿으면 다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 은혜를 받으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믿으면 존재가 달라지고 위치가 달라지고 격이 달라지고 운명이 달라 집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의 이름은 살몬입니다.
살몬은 누구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이스라엘백성입니다.
성경학자들은 그를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추측합니다. 마1장의 족보는 이스라엘의 정통을 이어가는 사람들만 나옵니다. 따라서 살몬은 이스라엘의 장손이었거나 유력한 자였을 것입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방인과 결혼했습니까? 유대인은 신분과 혈통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그들이 과거에 외었던 기도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이방인으로, 여자로, 사마리아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지금도 유대인 남자가 외국여자와 결혼하면 그 자녀는 법적으로 유대인이 아닙니다. 라합과 살몬사이에는 엄청난 신분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백번을 양보해서 살몬이 인종과 종교를 뛰어넘었다 합시다.
마지막까지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 라합의 과거입니다. 평생 거룩을 위해 사는 민족입니다. 성경 읽다가도 하나님이라는 말만 나와도 목욕하는 민족입니다. 수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입니다. 그나마 살몬은 이스라엘의 장자입니다. 장자로서 다른 백성의 귀감이 되어야 하고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앞서야 합니다. 만일 요즘 누가 장관으로 나왔는 데 인사청문회때 그 아내가 과거에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다면 청문회에서 통과되겠습니까? 어렵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민족을 위해서나 자손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보아스가 나오고 그가 룻과 결혼하여 다윗왕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예수님이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가정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결혼해야 하며 어떻게 결혼해야 합니까?
성경에 단 한 구절밖에 나오지 않은 라합과 살몬 부부 이야기, 저는 두 사람을 우리의 가정 현실에 놓고 많이 상상하고 묵상했습니다.
왜 살몬은 라합과 결혼했으며 그들은 어떤 가정을 이루었을까?
그들이 결혼과 가정이 우리 가정에 준 교훈은 무엇일까?
라합과 살몬의 결혼에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강제로 결혼했을 가능성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여리고 정복후에 라합을 살려주기로 약속했고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라합과 결혼해야 합니다. 라합 입장에서는 여리고를 정복한 이스라엘사람과 결혼해야 생활도 안정되고 가족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이 없지만 결혼했을지 모릅니다. 매우 낮은 가능성이고 불행한 가능성이지만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두 사람 사이에 자유로운 동의가 없었다면 좋은 결혼이 아닙니다.
야곱과 레아의 결혼이 그러했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7년을 일을 한 야곱은 라헬을 준다는 말을 듣고 신혼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그가 만난 것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원치 않는 레아와의 결혼으로 그 후에 아이는 많이 생겼지만 아이가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동의없이 이루어진 결혼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둘이 목숨걸고 살아도 될까 말까 한데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고 전제한 결혼이 오래 가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가정의 위기는 부부가 언제나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안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은 과거보다 화려해졌는 데 결혼의 안정성은 과거보다 훨씬 낮아졌습니다. 나름대로 만났으니까 최선을 다해 보지만 그래도 안되면 언제든지 그만둘 각오를 하고 삽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면 사랑없이 결혼한 것입니다. 둘 사이에 인격적인 동의없이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고 여러분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인격적이고 책임적인 동의없이 결혼하면 언제나 이렇게 됩니다. 사랑없는 결혼은 항상 불행을 낳습니다.
▶라합과 살몬이 결혼한 두 번째 가능성은 서로 사랑에 빠져서 그랬을 수 있습니다.
살몬이 정탐꾼중의 하나였다면 그 가능성은 더 높습니다. 정탐꾼중의 하나로 파송된 라합이 여리고 라합의 집에 들어 갔을 때 라합의 천절과 아름다움에 홀딱 반했을 것입니다. 라합입장에서는 사선을 뚫고 들어온 살몬이 그렇게 믿음직하고 용감하게 보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순간적으로 사랑을 느꼈고 떠날 때 사랑을 약속하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답기는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순간적이며 감정적인 측면입니다. 그것이 가끔 사랑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감정이 사라지면 식고 맙니다.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 있으나 사랑에 빠졌다고 결혼해서는 안됩니다.
옛날 한 공주가 왕궁에 있는 노예와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공주는 그 노예없이는 못산다고 하면서 왕에게 결혼하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왕은 괴로웠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공주가 노예와 사랑에 빠지다니. 고민하고 있는 데 지혜로운 신하가 왔습니다. “왕이여, 공주의 결혼을 결코 반대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공주는 실망할 것이고 노예를 더 사모할 것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십시오”. 신하의 말을 들은 왕은 공주를 불렀습니다. “공주야, 내가 네 결혼을 허락하겠다. 다만 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노예와 조그만 방에 30일간 갇혀 같이 지내거라. 그 뒤에도 좋다면 결혼하게 하마”. 공주는 뛸듯이 기뻤습니다. 둘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 꿀같은 사랑에 빠졌으나 곧 싫증이 났습니다. 보기에는 그럴싸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너무 마음에 안드는 것이 많습니다. 30일이 지나자 공주는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이 남자와 결혼못하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노예와 사랑에 빠졌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에 안드는 것도 보고 나와 다른 것도 이해하는 것인데 공주에게는 그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랑이란 사랑의 감정이 꺼진 다음에 남은 무엇이다”. 사랑의 감정이 꺼진 다음에도 남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입니다. 감정으로 끝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랑의 대표자가 다윗의 아들 암논입니다.
그가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사모하여 그를 겁탈한 후 그를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친 오빠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으니 잘못된 불꽃 사랑이 온 나라를 망친 것입니다. 사랑이 빠지는 사랑은 감정만 있고 의지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감정적입니까? 영적입니까? 감정의 불이 꺼진 다음에도 남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감정보다 큽니다. 고전13:7절 말씀대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사랑이 아니듯이 애정과 애착도 다릅니다. 애정은 상대방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요 애착을 나를 위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령 어머니가 아들을 학교에 보낼 때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기 차로 운전해서 학교를 데리고 갑니다. 지극한 모성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사랑입니다. 아들을 한 인격으로 인정하거나 아들의 성장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애정이 아니라 애착입니다. 어머니가 이미 비만한 아이에게 음식을 자꾸 먹게 한다. 아버지가 딸에게 옷장 가득히 장남감을 넣어준다. 애정같지만 애착입니다. 애착은 병든 자기 사랑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중심에 내가 있으면 애정이 아니라 애착입니다.
▶살몬이 라합과 결혼한 또 하나의 가능성이 동정입니다.
살몬 입장에서 라합을 보았을 때 여러 가지로 맞지 않습니다. 가문도 맞지 않습니다. 신앙도 맞지 않습니다. 다만 불쌍합니다. 오죽하면 창기로 일했겠나 동정이 갑니다. 그 많은 가족들은 누가 먹이고 책임지나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없지만 결혼했습니다. 이것으로 동정으로 인한 결혼입니다. 그러나 동정은 사랑이 아닙니다. 동정은 상대방을 한 인격으로 대한 태도가 아니라 그를 자기 정신적 노예로 두는 태도입니다. 결혼은 오직 강하고 독립된 두 사람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정으로 출발한 사랑은 무례히 행할 수 있고 동정이 사라지면 쉽게 미움이 됩니다. 그가 나를 배신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살몬과 라합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강제적 사랑도 아니고 어느날 사랑에 빠진 사랑의 불꽃도 아니고 그를 내 수하에 둔 동정도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보아스같은 훌륭한 아들을 낳고 좋은 믿음의 가문을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살몬과 라합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유지될 수도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강제적 사랑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입니다. 빠지는 사랑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사랑입니다. 동정하고 노예로 삼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노예가 되고 그를 받드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랑이 감정화되어 있습니다. 감정대로 툭하면 그만 두자고 소리칩니다. 감정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라합은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하면서 창에 붉은 줄을 맨 것을 기억하십시오.
라합에게는 두 개의 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정탐꾼을 성벽밑으로 내려보낸 15절의 줄이고
또 하나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매단 18절의 붉은 줄입니다.
이 붉은 줄에는 가족을 살리려는 라합의 절실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줄이 히브리어로 “티크바”입니다. 이 말이 “희망, 소망”이란 뜻입니다. 라합이 가졌던 유일한 희망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외에 가족을 살릴 다른 희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아께 희망을 둔 사람은 복됩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둔 라합 가정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방인이며 창기였던 라합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자기 민족을 정복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없이는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살몬과 라합의 가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정이 순탄하기만 했겠습니까?
어쩌다 한번씩 과거가 생각나면 거센 풍랑이 일지 않았겠습니까?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 라합과 살몬의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료받고 새로워져야 했습니다.
먼저 라합이 자기 상처를 치유했어야 합니다. 라합에게는 어떤 상처가 있을까요? 과거의 상처가 있습니다. 창기로서 일해야만 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그것을 치유하기 전에 라합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를 보는 방식으로 남을 봅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태도로 남을 대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없고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남도 존중할 수 없습니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남을 칭찬할 수 없고 수치감속에 사는 사람은 남을 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라합은 먼저 자기 자신을 치료해야만 했습니다. 그 치료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잊어 버리는 사랑, 도말하는 사랑, 우리의 실수를 폐기처분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갑니다. 덮어주는 데서 도말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덮어주는 사랑은 문제를 그대로 두고 없는 것처럼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도말하는 사랑은 문제를 뿌리채 뽑아주는 사랑입니다.
사44:22입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어떤 성경학자가 “도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고 “낚시금지”라고 써붙이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한번 용서하면 다시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선포했습니다.
대개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나로부터 생겨나는 일입니다. 내 속에 해결되지 못한 자기 상처, 자기 한, 자기 감정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언젠가 아내와 자녀에게 화를 냈습니다. 돌아서서 생각하니 내 속에 있는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이혼하고 재혼한 커플의 60-65%가 다시 이혼합니다. 상대는 바꿨지만 자기는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먼저 치료하는 사랑입니다. 나를 먼저 살려야 가족이 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대가를 지불하고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살몬이 라합과 결혼했을 때 지불해야 할 대가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마음의 부담도 있고 주변의 나쁜 평판도 있었을 것입니다. 라합의 많은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도 짊어졌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면서 창기인 라합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 가정은 쉽게 무너졌을 것입니다.
지금도 제게 생생한 감동을 준 집사님 부부가 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얼굴이 붓고 좋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간경화입니다. 가진 방법으로 치료하려고 했으나 치료가 되지 않고 몸은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남편이 감당하기가 만만치 찮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남편이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아내를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 간호에 매달렸습니다. 퇴직금으로 받은 1억을 고스란히 아내 치료비로 썻습니다. 그래도 안되니까 마지막에 자기 간을 아내에게 이식했습니다. 둘이 병원 수술대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 제가 갔습니다. 아내가 울면서 말합니다. “목사님, 윤정 아빠에게 너무 미안해요.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남편도 눈시울이 붉어져서 말했습니다. “뭘, 사는 것이 문제지. 살면 다 해결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손을 잡고 우는 것을 보고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이 서로 살리는 가족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책임적 사랑,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가족은 그 사랑으로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살리는 가족, 그 아름다운 살몬과 라합의 이야기가 그 아들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을 아십니까?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는 아들 보아스가 그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이야기임을 아십니까?
살몬과 라합이 한 대로 보아스와 룻이 한 것입니다.
부부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살리니까 자식들이 그것을 보고 배워서 아름다운 룻기가 탄생한 것을 아십니까?
그 아름다운 사랑의 뿌리에서 다윗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온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도 서로 살리는 가족이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가족을 살려 주옵소서.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내 가족은 살려 주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남편을 사랑하고 내 아내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나 혼자 가지 않고 내 가족과 함께 가게 하옵소서.
주여, 내 가족을 살리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거룩한 소망의 줄을 내려 그를 붙잡게 하옵소서.
우리 가족이 하나님 믿는 신앙으로 나와 함께 가나안으로 향하게 하소서.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가족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챤양, 기도)
사랑이 자기 중심으로 가면 가족 간의 사랑도 애정도 깨집니다. 가정안에서 우리가 살필 것은 나는 나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는가 가족을 위해 가족을 사랑하는가 묻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제가 공부하다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한국어로 해도 힘드는 데 영어, 히브리어로 하는 공부가 얼마나 힘듭니까? 더구나 저는 나이가 들어 갔지 않습니까? 공부를 따라 가려면 다른 사람보다 두 배 세배는 해야 합니다. 하도 힘들어 하루는 결단했습니다. 아예 침랑을 가지고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하다가 시간되면 침랑에 누어 잡니다. 그렇게 가정을 떠나 몇 주 보냈더니 공부할 시간은 늘었는 데 마음이 조금 삭막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브라는 미국 학생이 저에게 왔습니다. 스트브는 평소에 저와 친하게 지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 목사님, 한국 목사님들은 목회도 그렇게 합니까? 가정을 떠나 교회에서 잡니까?” “아니요” 그랬더니 “저도 목사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늘 저희와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청소년기를 아무런 문제없이 넘겼습니다. 지금 목사님에게는 두 어린 자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낯선 나라에서 누구와 함께 놉니까? 목사님이 함께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너무 놀랐습니다. 그 말이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옳습니다. 그때 제가 회개하고 침랑을 쌌습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가정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집에 갔더니 아이들이 쓰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아빠없이 외롭게 지내다가 쓰러져 잔 것입니다. 제가 그들 머리에 손대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아이들이 필요할 때 아내가 필요할 때 거기 있게 하옵소서”. 가족을 나의 성공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내가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사랑받아야 하고 나는 사랑을 위해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된 것입니다. 부모도 내가 출세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 보아스가 이방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사랑한 것은 누구에게 배운 것입니까?
아버지에게 배운 것입니다.
보아스가 이방인 룻을 위하여 기업을 물어 그를 사주고 이스라엘 호족에 입적시킨 것은 누구에게 배운 것입니다.
아버지입니다.
룻이 자기 열등감을 극복하고 남편을 도와 아름다운 가문을 이룬 것은 누구에게 배운 것입니까?
라합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삶으로 가르쳐준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가 행복한 자녀를 만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