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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연구
80년대 여성언술의 특성
비판의 풍자성2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여성적 글쓰기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수필에서 ‘발언’은 여성들에게는 보통 친숙하지 않은 글쓰기 양식이다.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자 저항과 폭로로 전복적 언술을 구사하는 일련의 수필 작품이 과거에 비해 80년대에 유독 많이 보인다. 이들의 언어는 가부장적 권위에 의탁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을 경험하지 못한 채, 늘 가부장적 질서의 주변을 겉돈다. 주변을 맴돌던 여성 언어는 아이러니칼한 풍자적 진술과 쉽게 공모하여 주변화된 여성의 소외를 고발하고 중심을 공격한다. 이 같은 전복성은 하나의 규범, 진리, 이성만을 강조하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남성논리에 대한 저항의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가부장적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에 위치해 있는 여성들의 반격으로 읽힐 수 있다.
(1)하늘에는 별도 많다 휘황찬란 별잔치/ 땅에는 인물 많다 잘난분네 말잔치/ (2)세상사 용광로라 기기묘묘 형형색색/ 인간의 몸 소주우라 골골육육 절절묘묘 요지경이 따로없다 이 몸이 요물단지/ 누우면 세 평 차지 일어서면 탐욕일색/ 고상한 분네들은 만물의 영장 섬겨대고/ 마이크로 코스모스 잘났다고 흠모하고/ 유명타는 조각가 로댕과 미켈란젤로/ 해부학 기하학에 미학철학 곁들여서/ 인속 간의 인간입네 모양내서 빚어놓고/ 고타마 싯달타는 룸비니에 우뚝서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장엄하게 외쳤어도. (굵게 강조 : 인용자)
- 이옥자, 「인간계곡」 중에서 -
여성 수필에 나타나는 말장난이나 유머, 재담, 비속어 등은 흔히 남성 질서가 강조하는 단일한 의미나 동일성의 논리를 교란하면서 그것들이 가진 허위의식과 폭력성을 웃음으로 폭로하는 기능을 담당할 때가 많다. (1)의 ‘하늘의 별’ ‘땅에는 인물’ ‘잘난분네 말잔치’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남성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이며, (2)의 ‘세상사 용광로라’ ‘요지경이 따로없다’의 언술은 남성중심주의 우리 사회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풍자적으로 폭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 작품은 우선 문학의 형식면에서, 기존 수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3.4.4.4조의 내재율을 선택하고 있어 모든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사회 현실 속에서 타락의 가능성이 높은 인간의 속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글에는 우두머리가 되려는 인간과 눈치를 살피느라 자기 모습을 잃고 있는 기회주의자, 당리당략에 매여 허수아비가 된 군상과 한탕주의에 목을 매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할 수밖에 없고, 그 소중한 가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지켜나갈 때 가능하다. 사람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불행한 일이나 우리 모두에게 가능할 수도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기에 이 작품을 통하여 스스로에게까지 경고장을 보내고 있다.
풍자는 악의 교정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까발림’이고, 적나라한 공개다. 위정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 점이며, 이것을 인위적으로 막기 위해 정치는 암흑의 베일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비극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대중들의 공감이다. 개인적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를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를 입증할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그 모순을 비판해야 한다. 풍자의 주요 대상이 정치적 행태와 사회현상으로 집중되는 이유는 민심의 뿌리를 근원으로 하여 형성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어지러운 정황 속에서는, 이것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요지경 속 열두 마당」 중 ‘물림굿’에서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옥자의 「물림굿」은 우리 정치 풍토를 경멸에 찬 어조로 야유하는 작품이다. 세태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오늘의 실상이 얼마나 암울하고, 비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가를 쉽게 감지케 한다. 굵게 인용된 부문을 직설법으로 풀어보면, 부정한 자와 잡귀가 등식으로 성립되며, 곧 잡귀들은 퇴치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풍모가 출현하여 희망이 솟구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흐르지 않고 멈춰져 있는 물은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 썩은 물이 어떤 계기에 새로운 가치를 발현할 수 있는 것은 기대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우리 정치 수준은 상식 이하에 머물러 있다. 일체의 기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삭막한 상황이다. 이 사실을 ‘20세기 막차타고 잡귀들아 물러가라/ 부정탄자 물러가고 새바람아 불어대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흔히 남성들은 자신이 무엇이든지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여성들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남성들은 자만심이 강한 허위자이고, 여성들은 자기 경시의 허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결국 기만적인 용어가 되어 칭찬으로 비난하거나 비난으로 칭찬하는 ‘비틈’의 언어가 된다. 때문에 아이러니적인 ‘비틈’의 언어에는 비웃음․조소․우롱․희롱․조롱․경멸․모멸․야유․놀림 등의 언어가 포함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에게 이런 ‘비틈’의 풍자나 아이러니의 언어가 소용되는 것은 그러한 언어가 균형 잡힌 넓은 시야를 성취하는 것, 인생의 복잡성과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것, 직설법으로서 가능한 것보다도 더욱 광범위하면서도 풍부한 의미를 표현하는 것,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독단적이 되기를 피하는 것 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여성들에게 있어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는 인생의 복잡성과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양가적이고 동적인 세계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비틈’의 언어는 모든 진리를 부분적으로만 인정하고 불변성과 안정성을 불신하는 개방적이고 비결정적인 여성의 언어를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사내 자식이 부엌에 들어가면 무엇이 떨어지고 기집애가 싸돌아 다니면 집안이 망한다고 누누이 귀에 익게 들었다. 집안이 망했는데 못 다닐 곳은 어디며 맞벌어 먹는 판에 부엌에 들어가면 어떠랴. 기집애는 돌아다니지만 사내 자식은 안방에 앉아 한나절 잔소리가 쏟아진다. 물떠와라, 밥차려라, 양말 빨아라, 속옷 찾아놔라, 청소 깨끗이 해라, 애 달래라, 반찬 신경 써라. (굵게 강조 : 인용자)
- 최명자, 「주제 파악」중에서 -
아내를 부려먹을 권리로서의 가부장적 기득권은 달콤한 껍질에 싸인 독약과도 같은 것이다. 최명자의 위 글에서는 아내의 사회적 노동은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지만, 자신의 가부장적 권리를 포기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란 것을 풍자하고 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떨어지는 것이 있다. 그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가부장제적 기득권이다. 이것을 버리게 하기까지의 과정은 멀고 험한 것이다. 눈앞의 가부장적 이득에 연연해하는 남자만이 부엌에 들어가길 꺼릴 것이다. 위 글은 이런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을 자조 섞인 말투로 조소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남편에 대한 재교육과 훈련은 많은 ‘투쟁’으로 화한다. 그리하여 ‘가사전쟁’이 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힘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들의 투쟁에 의해 남편들은 단단한 가부장제의 알에서 깨어나야 함을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는 여성들에게 보호색의 언어가 된다. 남성들의 언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여성들은 자신의 언어를 숨겨야 하고, 그렇게 숨긴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야 한다. 보임/숨김, 공격/순응, 앎/모름 등을 동시에 나타내는 이런 이중적 언어가 바로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인 것이다. 이처럼 보호 기능과 해방 기능을 동시에 획득하려는 것이 곧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이기에 여성들은 이러한 언어를 빌어와 이 세상이 이성을 중심으로 한 남성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때문에 아이러니적인 ‘비틈’의 언어는 우월함의 기호가 아닌 투쟁의 형식으로 자리매김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자 저항과 폭로의 전복적 언술을 구사하는 일련의 여성 수필가들은 이들의 언어가 가부장제적 권위에 의탁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을 경험하지 못하자, 늘 가부장적 질서의 주변을 겉돈다. 주변을 맴돌던 여성 언어는 아이러니컬한 풍자적 진술과 쉽게 공모하여 주변화된 여성의 소외를 고발하고 중심을 공격한다. 흔히 화산처럼 폭발적인 것으로 비유되는 이 같은 전복성은 하나의 진리, 규범, 이성만을 강조하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남성 논리에 대한 저항의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부장제적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주변에 위치해 있는 여성들의 반격으로 읽힌다.
수입의 두께는 숫자로 측정되나, 부부애와 가족의 결속은 측량이 어렵다. 결혼 생활의 불만족도는 절반씩이었다. 불만과 다툼의 원인은 역시 ‘가난’이었다. 쪼들림과 남편 때문에 늘 슬프고 막막하다는 것이다. 아내의 구타율이 의외로 높다. ‘살림을 박살내고’, ‘온몸을 멍들게 구타하고’, ‘머리카락을 쌍동 자르고’, ‘옷을 벗겨 때리고’, ‘뼈가 부러지고, 윗니가 다 날아갔다’고 호소해온다. 부인들에게 여자란 ‘고생바가지’, ‘억울한 것’, ‘한’을 의미한다고.
어느 부인의 다섯 가지 소원을 들어보자. 첫째 소원, 정기적으로 월급봉투 가져오는 공무원의 부인이 되어봤으면. 둘째 소원, 공무원 부인이 못 되더라도 남편이 술이나 안 마셨으면. 셋째 소원, 술은 마셔도 좋으니 제발 바람이나 안 피웠으면. 넷째 소원, 이제 바람을 피건 말건, 술 먹고 나만이라도 패지나 말았으면. 다섯 째 소원, 아예 집 보는 개나 되었더라면, 살림과 나를 망치지나 않았을 것을. (굵게 강조 : 인용자)
- 손덕수, 「한국의 가난한 여성의 삶과 한」 중에서 -
이 작품에서 서술자는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여성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 공무원 부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것도 안 되면 남편이 술이나 안 마셨으면 하고 한 발 물러난다. 서술자는 한 부인의 다섯 번째 소원, ‘아예 집 보는 개나 되었더라면’하는 풍자적인 진술을 통해 당대 남성들의 횡포에 정조준하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작가는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빌리지 않고서도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법으로 현실에 끼어들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남성중심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여성 수필가들의 텍스트에 빈번히 나타나는 말장난이나 유머, 재담, 비속어 등은 흔히 남성 질서가 강조하는 단일한 의미나 동일성의 논리를 교란하면서 그것들이 가진 허위의식과 폭력성을 웃음으로 폭로하는 기능을 담당할 때가 많다. 분노와 눈물을 대신하는 웃음은 억압 주체의 권위를 파괴하고 전복시킨다. 웃음을 통한 이와 같은 의미의 해체는 여성 주체의 해방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 굵게 강조된 인용 예문을 통해서 여성의 비참한 현실이 하향하는 소원으로 표출되고 있다. 우리 한국적 여인의 굴욕적인 삶을 적나라하게 풍자하는 수법이다.
80년대 여성 수필가들이 보여준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담한 노출과 능동적인 인식은 풍자적 목소리를 높이는 데 한 몫을 했다. 암묵적으로 여성수필에 금기시되었던 섹스에 얽힌 단어들은 선정적이었고, 또 그만큼 통쾌한 것이기도 했다. 현실적 불평등 앞에 무기력하기 만한 여성 자아의 공격적인 자기 폭로는 웃음의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은 자신의 육체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성을 수치스런 것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손덕수의 여성문제 산문집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빈틈없는 검열 하에 있는 여성의 당위적인 성역할에 저항한다. 그 역으로 여성의 성을 고무하고 과장한다. ‘위악적인’ 어조와 포즈로, 여성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으로 터부시되었던 금지된 욕망을 향해 맹렬히 달려간다. 손덕수는 여성의 성이나 생리적 현상은 물론이고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욕설이나 은어, 비어, 속어를 거침없이 구사한다. 남성들이 사용하는 언어 형식들을 패러디하고 흉내내며 풍자한다. 남성적 언어의 탈을 빌려 남성 중심의 메커니즘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한 전략은 여성들의 성욕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을 은연중에 겨냥하면서 남성들에 의해 미화된 기존의 ‘여성적인 글’에 맹렬하게 저항한다. 통렬한, 신랄한, 코믹한 비판을 특성으로 하는 아이러니칼한 풍자의 언술전략은 근본적으로 여성 정체성을 이 사회 속에서 모색하고 찾으려한다는 점에서 외부 지향의 통합 언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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