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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참되고도 바른 신앙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경외한다는 것은 공경한다, 또는 삼간다는 의미의 ‘경(敬)’ 자와 두려워한다는 뜻의 ‘외(畏)’ 자가 합쳐진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삼갈 것을 스스로 삼가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경외한다’는 이 말은 성경의 용어를 우리말로 정확하게 풀이한 말이 됩니다.
경외한다는 의미의 원어가 구약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로는 ‘이레’,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는 ‘포보스’(혹은 포베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두 단어 모두 두려워한다, 무서워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을 지니지 않고서는 참되고 바르고 건강한 신앙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스데반의 설교는 본문 30절에 이르러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Мо세의 제2의 인생, 즉 40년에 걸친 미디안 광야에서의 양치기 생활 끝에 나이 80이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유명한 역사적인 장면입니다. 출애굽기 3장 1절에서 2절은 이 역사적인 장면을 더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소의 이름을 사도행전은 ‘시내산’, 그리고 출애굽기는 ‘호렙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각각 다른 이 두 명칭은 다른 두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호렙과 시내는 산맥과 산봉우리의 관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를테면 ‘호렙 산맥의 시내산’ 이런 식입니다. 따라서 달라 보이는 그 두 명칭은 동일한 한 지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80세가 된 모세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벌써 40년째 양떼를 치고 있지만 오늘의 본문은 그 모든 양떼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소유임을 굳이 밝히고 있습니다. 40년이나 양떼를 쳤는데 모세 소유의 양은 단 한 마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피신한 이래 40년째 장인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던 모세는 양떼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지닌 것 가운데 장인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80세가 되기까지 자신의 것이라고는 전무한 모세야말로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게르솜(나그네)임을 매일매일 통감하며 살았습니다.
양떼를 치던 모세는 그날따라 양떼를 서쪽으로 인도해 가서 시내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시내산에서 불이 붙은 가시나무 떨기를 목격하게 됩니다. 희한한 것은 가시나무 떨기에 분명히 불이 붙었는데 나무 가지가 전혀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로 그 불꽃 가운데에서 천사가,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나 천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모두 동일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줄인 말이 ‘천사’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천사라고 하면 하얀 옷을 입고 등에 두 날개가 붙어 있는 그림이나 상상 속의 천사를 연상합니다. 하지만 본문 31절은 30절이 언급한 천사가 그런 천사가 아님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사도행전은 그때 그 불꽃 가운데에 임재한 분이 ‘주’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헬라어 ‘퀴리오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그런가 하면 출애굽기 3장 3절 이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출애굽기는 그때 불꽃 가운데 임하신 분을 아예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행전과 출애굽기가 그분을 가리켜 천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분이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자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2,000년 전 육신을 입고 오신 이후에야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그릇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 필요할 때마다 구원 사역을 행하고 계셨음을 오늘 본문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 32절을 유의해 보시겠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모세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분명히 불꽃을 자세히 보기 위해 불꽃 앞으로 다가갔지만 더 이상 불꽃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 6절은 이때 모세가 얼마나 두려워했든지 스스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고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때 처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태어난 이후에 최소한 3년, 경우에 따라서는 5년 이상 생모의 젖을 빨며 생모의 품속에서 양육되었던 모세는 생모로부터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에 대하여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노예를 학대하는 이집트 사람을 원수로 여겨 쳐죽이는가 하면, 자신의 그와 같은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한 이후에는 오직 엘리에셀의 하나님, 하나님만 자신을 도우실 수 있으심을 믿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불꽃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 자체는 전혀 놀랄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만약 불꽃 속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평소에 모세가 알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셨다면 모세가 놀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꽃 속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은 모세가 평소부터 알고 있던 조상의 하나님,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평소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나 80세가 되어서야 특별히 자신을 찾아와 주셨다면 쌍수를 들어 그 하나님을 환영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그 반대였습니다. 지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알던 하나님을 하나님의 전 존재이신 말씀을 통해 그분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 모세가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혔던지 그는 하나님을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서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두려움에 벌벌 떠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시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얼굴과 옷이 해처럼 빛나고 하얘지신 예수님께서 하늘 위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황홀했던지 베드로는 그 즉석에서 예수님에게 그곳에 초막 셋을 짓자고 했습니다.
종교심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기에, 바로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요 종교는 종교심의 객체로 상대적인 가치밖에 지니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출발점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믿음의 주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믿어 주시고 인간을 선택하고 불러 주시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5장 16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결코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비록 죽을 수밖에 없는 미천한 죄인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믿어 주시는 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을 믿으신 하나님의 믿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은 인간을 선택하시고 불러 주시는 것만으로 그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것만으로 그쳤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뒤에도 마치 고아처럼 내팽개쳐져서 진리의 삶을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52장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우리를 먼저 선택하시고 불러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앞에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동시에 우리 뒤에서 우리를 호위하심으로 우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증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곁길로 갈 때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두드려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이처럼 믿음에 관한 믿음의 출발점도 하나님이시요, 과정도 하나님이시요, 믿음의 종착점도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그분만 믿음의 주체시요, 우리는 믿음의 객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대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아니, 믿음의 대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객체에 지나지 않는 인간에게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상대적인 존재가 아니시라 절대 순종해야 할 절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이상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의 종교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발점 되시는 믿음으로 출발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른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발상의 대전환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 자신이 믿음의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의 출발점이 되신다는 이 발상의 대전환이 결여될 때,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인간의 종교심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종교심 그 자체가 인간의 의요 자랑거리가 됩니다. 종교심의 주체가 인간 자신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음의 출발점으로 삼는 자는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깊어질수록 자랑할 것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불러 주시고 자신을 먼저 찾아와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 경험하고 더 체험할수록 그는 더더욱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에도 여전히 허물투성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은총을 날마다 내려 주심으로 우리가 오늘 이런 모습으로 남아 그리스도인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은혜를 절감한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나의 것 중에 무엇인들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14절이 전해주고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참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가문, 학력, 경력 그 모든 것이 세상을 향한 자랑거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에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믿어 주시고 불러 주시고 동행해 주시지 않았던들, 자신의 학력이나 가문이나 경력만으로는 참생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일평생을 무의미하게 탕진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닫는다면 사도 바울의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라고는 오직 내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나를 위해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불러 주셨을 뿐만 아니라 먼저 나를 찾아와서 나와 함께해 주고 계심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종교심으로는 인간은 자신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아 나섭니다. 자신이 필요 없을 때에는 아예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심으로는 하나님과 제한된 관계를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연합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찾아오시어 자신과 함께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찾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를 찾아와 계십니다. 내 앞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내 뒤에서 나를 호위하시고, 내 속에서 나와 더불어 계십니다.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상관없이 그분은 언제나 나와 함께하십니다. 때로 내가 그분을 망각하고 그분을 외면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나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시편 121편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내가 깊이 잠들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내 곁에 계십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어찌 그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시편 139편 1절에서 4절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고백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님,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께서는 내가 그 혀로 무슨 말을 할지를 미리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행실을 다 감찰하고 계십니다. 아직 내 입 밖으로 발설하지 아니한 내 마음속에 묻어둔 말들까지도 그분은 다 듣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발상의 대전환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출발점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발상의 대전환 속에서만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고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발상의 대전환이 수반되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종교심일 수밖에 없게 되고, 종교심은 깊어지면 깊어지는 만큼 그 당사자는 실은 하나님과는 더 무관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1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사피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우리는 이미 초대교회 교인들의 물질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전 재산을 처분하여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물질을 머리 위에 주인으로 모시고 비인격적인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탈피해서, 물질 위에 물질의 주인으로 서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물질을 도구로 쓰겠다는 결단과 고백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에게 머리 위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분은 그들에게 믿음의 은총을 먼저 내려 주신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초대 교인들 가운데에 아나니아와 사피라라는 이름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전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교인들과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른 교인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본문 2절의 증언입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다 처분한 뒤에 막상 자신들의 수중에 돈이 들어오자 그만 마음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들 부부는 재물 가운데 일부를 아무도 모르게 감춘 뒤에 나머지만을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거짓 행위를 행하고서도 하나님도 사람도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 행위는 즉각 들통이 났고, 그로 인해 그들 부부는 생명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따라서 자칫 본문의 의미를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마치 아나니아와 사피라 부부가 생명을 잃은 것이 그들의 재산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전 재산이나 탐하시는 분처럼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참된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의 잘못을 꾸짖은 내용이 3절과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 부부가 잘못한 것은 그들이 모든 재산을 다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전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둔 것은 누구의 강요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발적인 행위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도 탓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 부부의 재산 처분권은 그들 자신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던 것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기로 결단했더라도, 만약 상황이 바뀌어서 다른 용도로 써야 할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께 그 사실을 아뢰고 물질 위에 주인으로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물질을 사용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 주머니 속의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행하게 아나니아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를 숨긴 뒤에 나머지를 전부인 양 바치면서 그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완벽하게 속였다고 착각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감추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인간이 자신의 거짓 행위로 하나님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다면, 그런 하나님이 과연 전능한 하나님이요 무소부재한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어야 될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나니아 부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행하는 거짓 행위를 그 하나님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 부부는 생명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믿는 생명은 이 땅에 생명으로서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생명은 참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허상으로, 거짓 생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아나니아와 사피라 부부에 대해서 우리 좀 더 깊이 생각을 해봅시다. 그 부부는 교회의 영원한 원형인 초대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던들 절대로 초대교회 교인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다른 교인들처럼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의 전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고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 가운데 일부를 감추었을망정 나머지는 분명히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이 역시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던들 아예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분명히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속일 수 있고 자신들의 거짓 행위를 하나님은 알지 못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사피라 부부가 지니고 있던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종교심의 주체는 인간 자신입니다. 아나니아와 사피라가 종교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에는 자신의 전 재산을 서슴없이 처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을 때, 자신들의 속에 있는 생각이 더 크다고 여겨졌을 때 그들은 서슴없이 거짓 행위를 하고 하나님께서 절대로 물으시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종교심의 주체가 된 그들에게 하나님은 절대자가 아니라 상대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나니아와 사피라 부부가 믿음의 출발점이 자기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발상의 대전환 속에 있었던들 결코 범하지 않았을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이 생명을 잃게 되었다는 것은, 종교심으로는 자기 생명을 스스로 갉아먹을 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생명을 결코 누릴 수 없다는 귀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어리석은 아나니아 부부가 실은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인 것은 아닙습니까?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들의 믿음을 절대시하고 과시하느라, 막상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상대적인 존재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습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것이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내가 필요로 할 때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다니지만 필요로 하지 않을 때는 아예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습니까? 그래서 삶 속에서 온갖 거짓과 불의를 다 행하면서도 하나님은 그 사실을 모르리라 믿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닌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아니라 저급한 인간의 종교심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본문 속의 이 한심한 아나니아 부부와 우리 사이에 무슨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종교심으로야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다한다 할지라도 아나니아 부부처럼 우리 자신들의 생명을 허망하게 스스로 갉아먹는 자해 행위 이외에 무엇을 달리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발상의 대전환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언제나 믿음의 출발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믿어 주시고, 우리를 먼저 불러 주시고,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 믿음의 출발점이요 과정인 동시에 종착점이 되십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에만 우리는 언제나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미구에 한 한 줄기 흙으로 화해 버릴 유한한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고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찾아와 주신 하나님의 귀하신 뜻과 계획이 우리의 삶 속에 멋지게 펼쳐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많은 것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진실을 감추고 우리의 양심과 허물을 감추면서 사람을 속입니다. 위정자가 국민을 속이고, 상인이 고객을 속이고, 선생이 학생을 속입니다. 때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속이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속이며, 형제와 형제가 서로 속이고, 이웃과 이웃이 서로 속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거짓 행위에 사람들이 깜쪽같이 속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무엇이든 감출 수 있고 하나님마저도 속일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어리석음이 우리의 그릇된 종교심에서 기인합니다.
그런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깊은데, 그분들이 모여서 이룬 교회가 세상의 신뢰를 받고 있지 못하다면 이 표지판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지금 ‘예배’라는 표지판을 따라왔는데, ‘기도’라는 표지판을 통해서 길을 걸어왔는데, ‘말씀’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지금 따라왔는데 그 표지판이 잘못 설정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열심과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가 보니까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될 곳이 아닌 것이죠. 세상으로부터 신뢰받는 곳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무엇인가, 기도가 무엇인가, 우리가 말씀을 좇는다고 할 때 어떻게 쫓아야 하는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재정립을 함께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배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께 먼저 세 가지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여러분들은 주일마다 왜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까? 목사님에게 눈도장 찍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예배 안 드리면 뭔가 찝찝해서 일종의 면죄부를 받기 위함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예배당에 가서 앉아서 한 시간 내내 졸더라도, 주일날 한 시간은 예배당에 갔다 와야 복을 받는다는 생각 때문입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예배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함께 찬양 부르고 목사님 설교 듣고 헌금하는 그 종교 행위 그것 자체가 예배입니까? 만약에 그 행위 자체가 예배라면 여러분들 주일날 예배당에 나올 필요가 무엇 있습니까? 집에 편안하게 앉아서 유튜브로 예배드리면 되지요. 미국의 그런 TV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집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교인들이에요. 그리고 온라인으로 헌금 보내요. 이제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분명히 그런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겁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주일 드리는 예배, 주일 예배만 드린다고 해도 1년에 쉬운한 번 이상 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평생도록 드린 예배 수를, 내가 40년 믿었다 하면 40년 곱하기 50을 한 번 해 보세요. 얼마나 예배를 많이 드렸는지. 그 예배가 여러분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예배를 통해서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응답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임한다면, 주일 예배를 드릴 때에 그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인해서 내 삶 가운데에 잘못된 부분이 하나만 교정된다고 해도 1년이면 여러분의 삶에서 쉬운 하나의 잘못이 교정됩니다. 1년만 내가 예배를 드려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예배를 통해 소통하고 교통하는 가운데 그분이 내 삶을 터치하셔서, 1년에 내 삶 가운데 50여 개의 잘못된 부분이 바르게 교정된다면 1년만 예배드려도 우리 성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예배가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평생 드린 예배가 여러분들에게 무슨 영향을 그동안 주어 왔습니까?
사마리아 땅 수가성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결혼을 다섯 번 했는데 다섯 번 다 실패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남자에게 얹혀사는데, 공개적으로 내가 어떤 남자에게 얹혀산다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2,000년 전 그 율법주의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 사마리아 사람들, 그들의 도덕관념과 윤리관념으로 따지자면 이 여자는 인간 이하의 존재입니다. 결혼 다섯 번 실패하고 지금도 어떤 남자에게 얹혀살며, 더 나아가 떳떳하게 내 삶을 공개하지 못한다니 기가 막힌 사람이죠.
그런데 이 여인은 기가 막힌 웅덩이에 빠진 것과 같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예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 진짜 예배를 드리고 싶은 거예요.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진짜 받아 주시면 좋겠는 거예요. 여러분 가운데 혹시 지금 기가 막힌 웅덩이에 빠져 계신 분이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회복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예배가 소생되게끔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은혜를 베푸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이 기가 막힌 인생 웅덩이에 빠진 여인이 어느 날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메시아를 만난 거죠. 그 여인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중에야 그분이 메시아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 대화 초기에는 단지 보는 순간 유대인이라는 것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솔로몬이 죽고 난 다음에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 시대에 하나의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이 분열되지 않습니까?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이 이 왕국을 찢어서 북왕국을 만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남왕국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힘으로 열 지파를 찢어서 북쪽에 북한국을 만들고 통치를 하는데, 안식일만 되면 자기 왕국에 있는 사람들이 성전을 찾아 남왕국 예루살렘으로 갔다 온단 말이에요. 불안하거든요. 저 사람들 자꾸 예루살렘으로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남왕국에 주저앉을 것 같단 말이죠.
그래서 여로보암이 남왕국과 북왕국의 경계 지방인 벧엘과, 북왕국의 제일 북쪽 경계인 단 두 곳에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많이 보던 장면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뒤에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으니까, 아론이 그 민중이 요구하는 대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분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엘로힘이다. 내일 이분을 위해서 우리 여호와의 절일을 공포하자” 했던 것, 여로보암이 그것을 흉내 낸 것입니다.
항상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황금을 얻는다고 하면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 황금 송아지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믿으면 너희 집이 다 이렇게 황금으로 도배될 것이다”라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국 사람들은 그 황금을 하나님이라고 섬겼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북한국 사람들은 사마리아 수도에 있는 그리심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진짜라고 주장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거 저건 짝퉁이야” 하며 백성들을 묶어 두는 겁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북한국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며 남왕국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를 가짜라고 했고, 남왕국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솔로몬이 지었는데 여기서 예배드려야 진짜지, 그리심산에서 드리는 건 다 가짜야” 하며 서로 자기네 예배가 진짜라고 우겼습니다.
그 수확의 여인도 늘 예배를 드리면서 그것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게 진짜인가, 가짜인가? 예루살렘에 가야 되는가?”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서 물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21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 지금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진짜냐,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진짜냐 따지며 예배 장소를 우상시하는 바람에 정작 하나님 아버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외에 예배에서 절대시하는 것, 그게 무엇이든 그건 아버지한테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심산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든, 예루살렘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든 아무리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어도 그건 아버지한테 드린 게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예배를 ‘아버지께 드리느냐 아니냐’입니다.
22절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여로보암이 왕국을 쪼개고 나서 처음에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하더니,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리심산에서만 예배드려야 진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구약 성경 가운데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다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선지서를 보면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잖아요. 그 성경을 그대로 두면 여로보암 자기네 계열이 짝퉁이라는 게 표가 나니까, 자신들의 정체성이 들통날까 봐 성경을 토막 내어 가나안 땅 요단강까지 갈 때까지의 다섯 권만 성경으로 남기고 잘라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뒤의 역사서나 선지서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도 모른 채 예배를 드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메시아는 유다 지파 다윗의 계보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당시 남북 사람들의 관심사는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진짜인가’였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프뉴마)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가 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영으로 임재해 계십니다. 우리 눈에 안 보입니다. 안 보이시는 그 영이신 아버지에게 우리의 온 영을 집중해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내 시선을 빼앗겨서는 영이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습니다. 어느 장소가 더 좋은가, 예배당 빌딩이 더 커야 하나, 좌석 수가 더 많아야 하나 따지면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 역시 영으로 예배드릴 뿐만 아니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진리가 헬라어로 ‘알레테이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진리(알레테이아)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은 말씀에 의한 예배, 말씀에 따른 예배, 말씀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알레테이아’라는 단어는 말씀이나 진리라는 뜻도 되지만 ‘참됨’, ‘진정성’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께 나의 온 영을 다해 영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그 예배가 나의 진정성을 수반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영으로 드려져야 하고, 우리의 참됨과 진정성을 다해서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는 이 말씀을 현대어로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배하는 자가 온 중심을 다해 예배드려야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온 중심을 다해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먼저 ‘예배’라는 용어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말로 예배를 한자로 쓰면 ‘예절 예(禮)’ 자에 ‘절할 배(拜)’ 자를 씁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예의를 다해서 절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자로 ‘배(拜)’ 자를 쓸 때는 그냥 목례를 갖추어 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완전히 땅에 구부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님을 찾아 자식들이 세배를 드릴 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완전히 엎드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불교의 ‘삼보일배’도 세 걸음 걷고 길바닥에 몸을 던져 절하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서로 죽이던 적장들이 협상을 위해 만날 때, 장군은 절대로 상대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머리를 숙이는 순간 상대가 내 목을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수의 예법도 오른손으로 칼을 뽑지 않겠다는 신뢰를 보여주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절을 다해 배(拜)한다’, 즉 내가 완전히 엎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예배를 드리는 상대가 나를 죽여도 좋다는 뜻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엎드려 있는 동안 그분이 내 목을 치든, 무슨 짓을 하든 나를 당신의 처분에 맡긴다는 것이 예배입니다.
히브리어로 예배를 가르치는 단어 중 첫 번째는 ‘아바드’라는 동사입니다. 번역하면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아바드’는 노예가 주인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섬김은 내 인격을 지키면서 하지만, 노예에게는 인격도, 재산도, 자기 뜻도, 결정권도 없습니다. 내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내 뜻, 내 결정권, 내 인격, 내 재산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분의 처분에 맡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 히브어 동사는 ‘샤하’입니다. 이 동사는 ‘부복한다’, 즉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두 동사의 모든 의미는 예배드리는 대상을 향해 자발적으로 나를 포기하고 그 손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헬라어로도 첫 번째는 ‘프로스큐네오’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경배’라고 번역되는데, 노예가 주인의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가르칩니다. 두 번째는 ‘라트류오’라는 동사로 ‘섬긴다’는 뜻인데, 이는 대상의 유일성을 나타냅니다. 돈이나 권력 등 다른 것을 함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길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내게 어떤 섬김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독일산 셰퍼드는 주인이 몇 번 바뀌어도 잘 따르지만, 진돗개는 한 번 주인은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군견으로 주인이 바뀌면 진돗개는 새 조교의 명령을 듣지 않고 예전 주인을 찾습니다. 오직 한 주인만 섬기는 그 모습이 바로 ‘라트류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상황에 따라 이 주인 저 주인 따르는 셰퍼드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유일한 주로 모시는 진돗개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핵심 요약 정리
하나님 경외의 참된 의미: 경외(敬畏)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삼가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성경 원어('이레', '포보스')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뜻하며, 이 거룩한 두려움이 건강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 모세에게 나타난 가시나무 떨기 불꽃 속 주님은 구약 시대부터 역사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관념이 아닌 인격과 말씀으로 만날 때 인간은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 믿음은 인간의 종교심이나 선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찾아오시며 호위해주시는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발상의 대전환 (종교심 vs 참된 믿음):
인간의 종교심: 내가 주체가 되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자신의 의와 자랑으로 삼으며,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착각(아나니아와 사피라의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참된 믿음: 하나님이 주체이심을 깨닫고 늘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 앞에 깨어 있게 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 예배(아바드, 샤하, 프로스큐네오, 라트류오)는 내 뜻과 주권을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하고 납작 엎드리는 행위입니다. 장소나 형식이 아닌, 영이신 하나님께 온 중심과 진정성을 다해 유일한 주님으로 섬기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