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진정한 위로자일까? ♥
생명의 삶 QT 2021. 11. 1
욥기 16:1~17
저는 은퇴를 3년여 남겨 놓고 매일 아침 QT를 하면서 저의 목회를 말씀에 비추어 반추(反芻)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결단을 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한 분은 40대에 남편이 바람을 피워 이혼하고 두 딸과 함께 지내는 분이 계셨습니다. 둘째 딸은 남편이 외도하는 중에 임신하게 되어 심한 약시(弱視)로 태어나 청년이 되었지만 두꺼운 안경을 쓰고도 책을 코앞에 두고 겨우 읽을 정도였습니다. 그분에게 특이한 버릇이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창밖에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비련’이라는 조용필의 노래를 들으면서 한없이 운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정에는 먹장구름이 드리운 듯 슬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둘째 딸에게 “아버지는 뭐하시던 분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청년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당황하면서 순간 괴로운 표정으로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습니다. 그녀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고통을 안겨주는 아킬레스건(calcaneal tendon)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칫 무심코 내뱉는 말들이 상대방에게 아픔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욥의 세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욥의 고난에 대하여 해결책을 제시하고 속히 거기서 벗어나길 원하여 자신의 인생 경험과 지혜를 동원하여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친구들의 권면에 대하여 욥은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라고 대답합니다. 고난 겪는 욥에게 저들의 권면은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목회자는 교인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고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때로는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을 드러내기까지 잠잠히 기다리며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진정한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는 인내의 시간의 필요하다는 것을 또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