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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 춘계 2차공세('51.5.16~ )
1. 피아의 상황
가. 아군 상황
1951년 4~5월에 접어들어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을 때에 후방에서는 앞서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거과 거청사건의 조사, 처리문제로 정국이 갈등을 빚던 중에 5월 7일 싱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이기붕이 장관에 임명되어 군 기강확립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전선에서는 중공군으 대규모 공습이 있을 거라는 여러 징후가 포착되며서 , 이미 4월공세에서 경험한 바 있는 아군은 전초진지, 주진지, 저지진지 등 방어진지 보강에 주력하면서., 원거리 정찰대를 파견하여 정찰활동을 강화 하였다.
특히 미 제9군단은 적 병력이 북한강 서쪽에 집결 중이라는 정보에 따라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 위해 적 예상집결지에 7일동안 평소보다 5배 이상의 교란사격을 실시하였다.
수도권을 방어 중인 미 제1군단은 문산 축선에 국군 제1사단, 의정부 축선에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을 배치하고 영 제29여단은 예비로 하였다.
북한강 계곡 통로를 방어 중인 미 제9군단은 덕소-예봉산-용문산-금학산을 연하는 선에 좌로부터 영 제28여단, 미 제24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6사단, 그리고 미 제7사단을 배치하고 제187공정단은 예비로 남한강변 옥천에 집결하였다.
미 제10군단은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2사단으로 춘천-홍천 축선을 방어하도록 하고, 국군 제5사단, 국군 제7사단은 소양강 남쪽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제9사단과 제3사단으로 인제 남쪽의 한석산-가리봉을 연하는 산악 능선을 주저항선으로 확보하고, 국군 제1군단도 수도사단과 제11사단으로 설악산-대포리를 연하는 노네임선을 점령하여 진지보강에 주력하였다.
미 제8군사령부는 적의 배치현황으로 보아 4월 공세처럼 서부 또는 중부전선의 의정부-서울, 북한강 통로, 그리고 춘천-홍천 축선이 중요 공격 축선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8군사령관은 홍천 동쪽의 배칟된 북한군의 전력이 미약하고 태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면 주저항선 진지를 고수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13일, 정보원, 피난민, 포로의 진술이 대규모 중공군ㅇ이 동부지역으로 집중하고 잇닥고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4일과 15일에 이틀 동안 게속된 비와 안개로 항공관측이 불가능하여 적의 이동상황을 확인하지 못했다.
나. 적 상황
반면 중공군은 4월 공세의 패배를 만회 하기 위해서 5월 공세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들 5월 공세 게획은 현리를 중심으로 배치된 국군 4개사단(제3.5.7.9사단)을 양익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기본 방침에 따라 ㅈ제9병단이 주공으로 좌익(양구-인제)에서 상남ㄹ리-속사리, 한계리=풍암리로 우회하고, 북한군 제2,5군단이 우익(인제-한계령)으로 현리 동쪽과 속사리 방향으로 기동하여 다중 양익 포위망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서부전선에 배치된 중공군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은 자신들이 주공인 양으로 위장하고 기만작전을 펼치며, 북한군 예비인 제3군단은 제2군단을 후속하여 동해안에 배치된 국군 제1군단이 현리지역으로 증원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또 춘천 동쪽의 중공 제3병단은 주공의 일부로서 미 제10군단을 고착견제하여 현리 지역으로 증원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공산군은 5월 초에 그들 양용전술인 양익 포위 작전에 중점을 두고 북한군 제1군단을 서울 서쪽에서, 중공군 제19병단을 서울 동쪽에서 위장 도하작전을 , 그리고 예비인 중공 제39군을 춘천-홍천 축선으로 공격을 하는 것처럼 준비하도록 하여 공격 방향을 기만하였다.
그리고 주공으로 투입될 중공 제3, 제9병단은 10일간의 부대정비를 끝내고 5월 9일부터 동쪽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15일 은밀히 춘천에서 남전리에 이르는 북한강, 소양강 지구에 진입하였다.
2. 현리지역의 돌파
가. 어론리 전투
어론리 전투('51.5.16~19)
인제
간무봉 남전리
구만리
국7연
662 상수내리 음양리 국5연
국5=국7
샘촌
옥산동 소치리 정자리
매봉 국35연 어론리 노 네 임 선
미2=국5 1076 우각산
714 장남리 국36(-) 국5=국7 가마봉
933
가리산 자은리 833 국36연 광암리
미23연=국36연 가죽리 574 876 1099
국27연
도관리 외야리
한계 내촌강
643 미23연 27연=36연
683 국36연
533 472 장평리 559
외삼포리 국27연 국36연 379
군업리 587
어론리
미9연 796
국군제5사단은 5월 7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미조리선을 공격하여 홍천-인제 간의 도로를 확보하고 어론리 북쪽의 고지군으로 진출한 후 방어로 전환하였다. 이때 제35연대와 제27연대를 매봉(800)-상수내리를 연하는 주저항선에 배치하였으며, 예비인 제36연대(제3대대는 좌인접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배속)는 노네임선의 1076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때 사단의 좌인접에는 미 제2사단 제브라 특수임무부대가, 우인접에는 국군 제7사단 제8연대가병행하여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51. 5월 16일, 중공군이 소양강 북쪽의 662고지를 공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20:00시경 우인접 국군 제7사단 전투지경선 부근에서 1개 사단규모가 소양강을 도하, 우인접 제8연대 정면을 돌파한 후 1개 연대규모가 우전방 제27연대의 우측방을 공격하였다. 전방 연대들은 전방과 좌우측방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를 개시하여 괘석리로, 광암리로 철수하였다.
'51.5.17, 사단은 돌파구 확대 저지와 미 제2사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노네임선 후방 장남리, 광암리, 외야리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기가 저하된 상태에서 중공군에 저항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장병들은 고립된 상황에서도 고군분투하였으나 내촌강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미 제8군은 18일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이 철수를 계속하자, 새로운 방어선인 7889-한계-장평리-1009고지를 연하는 와코선을 점령하고, 적의 진출을 진출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이에 미 제10군단의미 제2사단의 제23연대가 국군 제27연대 전방에, 미 제9연대가 국군 제5사단 주력부대의 후방에 배치되었다. 이 무렵 중공군은 사단을 완전히 섬멸하려 18일 밤부터 익일 새벽까지 파상공격을 실시하였으나 국군 제5사단은 배수의 진을 치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여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사단은 작전지역을 미 제9연대에 인계하고 하안홍리로 철수하여 차기작전에 대비하여 부대정비에 주력하게 된다.ㅣ
나. 음양리 전투
※중공군이 공백지대 침투하여 연대를 포위하였고, 특히 이들 중 1개 중대가 오마치를 점령하여 도로장애물을 설치하여 현리-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제3군단의 퇴로가 차단되었다.
음양리 전투('51.5.16~18)
양구 인제 인제
소양강
관대리 770 국28연
구만리 국7=국9 내린천 검우석
682 국8연
음양리 인구리
상수내리 국27연=국8연
국27연 신풍리 소치리 정자리 미10군=국3군 노네임선 현리
갑둔리 용포
어론리 888 김부리 대암산
노네임선 비득재
노네임선 1076 우각산
국36연(-) 국5사=국7사 가마봉 오마치
자은리 873 상남리
675
광암리 침교 국3연
도관리 외야리 고사리재 국3연
내촌강 방내리 국5연
율전리
매봉산 가마소 가진포 국3연
국군 제7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우전방 사단으로 제8연대와 제5연대를 전방, 제3연대를 예비로 미조리선을 공격하여, 5월 11일소양강 남쪽의 상수내리-구만리-남전리 선으로 진출하였다. 사단도 13일부터 방어로 전환하여 소양강변의 전초선ㅇ에철조망과 지뢰를 매설하는 등 진지보강에 주력하였다.
16일 낮, 사단정면에서는 진눈개비와 가랑비가 내리고 소양강 일대에 안개가 짙게 기어 극도로 시야가 제한되었다. 16:00시경부터 강력한 적의 공격준비 사격이 시작되어, 좌.우인접부대간의 유선시설이 파괴됭어 일시에 지휘체게가 마비되었으며 화력지원도 불가하였다.
중공군이 19:30분 경 소양강변의 각종 장애믈을 포격으로 제압한 후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강폭이 100~200m, 수심이 평균 1m내외로 갈수기 영향을 받아 대부분 지역이 도섭이 가능하였다. 소양강은 피빛으로 물들고 기마대를 앞세운 적의 제2파 공격이 이어지며 주저항선이 돌파되었다.
적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우전방 제5연대는 연대지휘소가 기습을받고 퇴로가 차단되어 적중에 고립되었다. 이런 와중에 제1, 제3대대는 우인접 제9사단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좌전방 제8연대는 우인접 부대가 돌파된 상황에서 주저항선을 고수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백병전을 치르며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 신풍리로 철수하여 저지선을 구축하려했으나 이미 좌.우인접으로 돌파한 중공군이 먼저 진출하여 저지진지 점령에 실패하여 갑둔리일대에서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이에 인접 제5사단 제36연대 지역으로 철수하면서 오인사격으로 다수의 피해를 입으면서 철수를 완료하였다. 제7사단은 하루가 지나서야 제8연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오마치 고개를 차단, 국군 제3군단의 퇴로가 차단당함]
제7사단장 김형일 준장은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정자리에 집결 중인 예비인 제3연대를 노네임선의 가마봉-대암산에 배치하여 전방연대를 엄호하려 했으나 야음으로 10km의방어정면 중 감제고지인 930고지와 1030고지에 방어거점을 구축하여 상당한 공백지대가 발생하였다.
중공군이 이 공백지대 침투하여 연대를 포위하였고, 특히 이들 중 1개 중대가 오마치를 점령하여 도로장애물을 설치하여 현리-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제3군단의 퇴로가 차단되었다.
18일, 포위된 제3연대는 숨바꼭질하듯 일부 병력만이 포위망을 돌파하여 상남리로 철수하여 오마치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사단은 방내리와 율전리로 저지진지를 편성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려했으나 여의치 않아 18일 풍암리로 이동하였다.
다. 한석산 전투
※ 국군 제9사단은 소양강남쪽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엿으나, 중공군으이 양익포위전술에 말려, 좌인접 국군 제7사단이 돌파되고난 후에야 철수병력이 사단지역으로 몰려들어서야 아게 되고, 급기야 부사단장 이용문 대령에게 차량제대를 인솔하여 철수를 개시하였으나 오마치에서 막혀 되돌아 오게 되고 사단 주력도 용포까지 진출햇다가 다시 현리로 되돌아가게 되면서 중공군에게 완전 포위됨
한석산-가리봉 전투('51.5.16~17)
서화리 간성
북12사/북6사
와촌 안산
소양강
원통
소양강 국3사=국수도사
국18연 국22연 가리산 국1연 한계령
소양강 1226
인제 958 23연 회전동
국30연
국29-2대 한석산 국9사=국3사
내린천
매봉 점봉산
596 국28연 검우석
현리 국3사/국9사
국7사=국9사 도채동
중20사 매봉산 용포
신남 대암산
검전리
오마치 방대산
'51.5월 10일, 매봉-한석산 전투에서북한군을 격퇴하여 사기가 고조된 국군 제9사단은 제3군단의 좌전방으로 인제 남쪽의 소양강으로 진출한후 제28연대를 인제 부근의 소양강 만곡부에, 제30연대를 한석산 일대에 배치한다. 그리고 제29연대는 예비로 군단에서 사단으로 복귀하였으나, 군단통제하에 제2대대는 제30연대에 배속되어 인제 동쪽 소양강과 내린천의 합류점 부근에 배치되었다.
'51.5.16일, 저녁 무렵 좌인접 국군 제7사단지역에서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될때 사단 정면은 의외로 경미하였다. 그러나 22:00시경 좌인접 제5연대가 통신두절로 사단에 상황보고를 할 수 없다며 제28연대에 중계를 요청하고, 또 일부 제7사단 병력이 당 사단지역으로 철수해 옴에 따라 사단은 비로소 적이 제7사단 주저항선을 돌파하여 후방으로 진출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17일, 02:00시경부터 중공군의 포격이 개시되어 전방연대들은 596고지와 958고지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 주저항선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사단장 최석 준장은 중공군의 침투로 포위를 고려하여 04:00에 철수를 명령하였다.
한편 사단장은 상황이 심상치않음을 고려하여 부사단장 이용문 대령에게 전 차량제대를 상남리로 철수하도록 하여, 부단장이 통제하는 차량제대가 오마치에 접근하다 정상을 선점한 적이 장애물을 설치하고 집중사격으로 돌파하지 못하고 되돌아 오게 된다.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이 양익포위를 형성하기 위해 초기에 정면에 압박을 가하지 않음에 따라 주저항선에서 피해는 경미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는 과정에 일부 대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분산되고, 주력은 전투력을 유지한 채 현리 남쪽 용포부근에 집결하였다.
17일 오전에 사단 주력이 용포 일대에 집결할 무렵 국군 제7사단 병력 일부도 섞여 매우 혼잡하였다. 이런 상황에 용포 서쪽으로 진출한 중공군이 요란사격을 실시하여 집결된 병력이 동요하기 시작한다.사단장은 즉시 제29연대 1개 대대로 이 적을 공격하고 잔여 병력은 다시 현리로 이동하도록 하여 1시간 가량 행군하여 현리에 도착한다.
라. 가리봉 전투
※국군 제3사단은 우인접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 제1연대가 가리산-한계령 선에서 돌파되고, 좌인접 제9사단이 철수하면서 포위당하는 것을 골려 현리로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 국군 제3군단의 제9사와 제3사단, 그리고 미 제10군 에하 국군 제7사단의 일부 병력이 군다느이 주보급로에 몰려들어 오마치 돌파를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포위되어버린다.
가리봉 전투('51.5.15~17)
서화리 간성
북12사/북6사
와촌 안산
소양강
원통
소양강 국3사=국수도사
국18연 국22연 가리산 국1연 한계령
소양강 1226
인제 958 23연 회전동
국30연
국29-2대 한석산 국9사=국3사
내린천
매봉 점봉산
596 국28연 검우석
현리 국3사/국9사
국7사=국9사 도채동
중20사 매봉산 용포
신남 대암산
검전리
오마치 방대산
제3사단은 제3군단의 우전방 사단으로 덕적리-가리봉 선에 주저항선을 편성하고, 제18연대를 1226고지에, 제22연대를 우정방 가리봉 서쪽 능선에, 제23연대를 예비로 전방 연대의 후바에 대대별로 방어거점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사단의 동쪽 가리봉 능선에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 제1연대가 배치되었다.
소양강 남쪽의 국군 제5, 제7, 제9사단은 5월 16일 저역부터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인제 동쪽의 제3사단은 하루 먼저 5월 15일부터 가리봉에서 북한군 제5군단(제
6.12.32사단)과 대결하게 되었다.
이 지역 전투는 적의 5월 공세가 개시되기 하루 전인 5월 15일 자정이 지나면서 1개 대대규모가 수도사사단제1연대를 공격하면서사단정면으로 확대되었다. 사단은 16일 낮 동안은 수차례 적의 공격을 격퇴하는듯 했으나 오후에 주저항선이 돌파된다.
한편 좌측의 제3사단은 좌전방 제18연대는 적의 공격이 경미하여 주저항선을 유지했으나 우전방 제22연대는 적의 강력한 공격으로 16일 오후부터 공방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우측의 수도사단 제1연대가 돌파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이때 일부적이 회전동이 연대지휘소를 침투해, 에비인 제23연대 적 2개 중대를 격퇴하였다.
이에 제3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주저항선을 유지할 것으로 최초 판단했으나, 좌인접 제7, 제9사단의 철수와 오마치가 차단되었음을 통보받게 되자, 철수를 결심하고 현리로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국군 제3군단은 군단 주보급로상에 위치한 오마치가 차단되면서 제9사단과 제3사단이 현리로 철수하여 남전리-한석산-가리봉을 연하는 주저항선이 맥없이 무너지고, 좌측방에서는 중공군에, 우측방에서는 북한군에 포위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마. 오마치 돌파 실패('51.5.17~18)
※ 오마치 돌파를 위해 협의를 한 양 사단은 제9사단 제30연대가 주력으로 돌파공격을 담당하고, 제3사단 제18연대 후속하는 것으로 돌파작전을 수립하였으나, 공격개시전에 중공군이 먼저 엄호부대를 공격하여 용포-현리간 도로변에 작렬하는 박격포탄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선봉에 있던 제30연대는 돌파공격은 커녕 좌측 방대산으로 건재가 무너진 상태로 분산되어 철수하게 되고, 이를 후속하던 제18연대가 사단에 보고하면서 제3사단도 뒤이어 방대산으로 분산철수를 하여 창촌을 거쳐 속사리-하진부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된다;.
오마치 돌파 상황('51.5.17)
629 558 현리 521
509 국29-3대대 국3군단
804
631 국29-1대대
국18연 694 국29-2대대 839
용포교
사평동 매화동
887 736 국30-3대대 776
562 국30연-9중
1016 1162
810
766
오마치
국군 제3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좌인접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7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으나, 17일 아침까지는 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당일 04:00시에 오마치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고도 국군 제7사단을 돌파한 적이 오마치를 점령하기란 산악지형상 어렵다고 오판하게 된다.
그러나 오마치 피탈이 사실로 확인되자 17일 14:00시에 현리를 방문하여 제3사단장의 상황보고를 받고, 군단장은 2개 사단과 2개 포병대대의 화력이면 오마치를 돌파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제3사단장의 책임하에 오마치를 탈환한후 도로를 따라 창촌으로 철수를 명령한 후 군단사령부로 복귀하였다. 당시 오마치를 점령한 적의 규모는 항미원조사에 의하면 1개 대대(중공군 제20군 예하 제178연대 제2대대)규모였다.
국군 제3사단장과 제9사단장의 협조하에, 제9사단 제30연대가 오마치를 공격 돌파하고, 제3사단 제18연대가 제30연대의 측방을 엄호하며 오마치가 돌파되면 철수계획에 따라 철수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30연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중공군 제20군 제60사단이 먼저 제29연대가 점령한 엄호진지로 선제공격을 개시함과 동시에 용포-현리간 도로변으로 박격포사격을 집중하여 혼란이 야기되고, 공격의 선봉인 제30연대 주력이 공격을 포기하고 방대산쪽으로 철수를 시작하에 된다.
'51.5.18일, 이에 뒤따르던 제3사단 제18연대가 이상황을 사단장에게 보고하게 되자, 제3사단자은 이런 상황에서돌파란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18일 03:00시에 전부대를 방대산을 경유하여 창촌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적이 북.서.남에서 현리 일대의 포위망을 압축하게 되고, 일부 부대는 방대산으로 아군을 추격하게 되었다. 방대산으로 탈출을 기도하는 아군은 서로 혼잡되어 소속을 파악하기 곤란하고, 통제하는 지휘관도 없는 상황에서 적의 추격이 계속되자 대부분 소대단위로 분산하여 주억봉(1443)-구룡덕봉(1338)을 넘어 광원리로 철수하였다. 이 와중에도 제9사단을 지원한 제30포병대대와 제3사단을 지원한 제11포병대대는 중공군이 위치한 방향으로 요란사격을 실시하여 포탄을 소모하고 공이와 방향포경을 회수하고 포구를 폭파한후 방대산으로 철수하였다.
이와같이 소양강 남쪽의 매봉-구만리-한석산-가리봉을 연하는 약 40km,의 정면을 담당한 국군 제3, 제5, 제7, 제9사단은 초전에 통신망이 적의 포격으로 두절되고 지휘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어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주저항선을 돌파당했다. 여기에 중공군의 상투적인 성동격서와 제파식 파상공격, 그리고 부대간 전투지경선을 이용한 침투부대의 우회 포위기동에 휘말려 매번 반복되는 상황을 자초하게 되면서 군지도력과 전투지휘상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 대돌파구가 형성되었고, 이 돌파구 화대를 저지하느냐가 급선무로 대두되었다.
3. 홍천 북방의 공방전
홍천 북방 전투('51.5.16~18)
소양강 삼가리 매봉 양구 인제
23=35 어론리
714 국36-3대 미2=국5
춘천 미9(-)연
755 가리산 자은리 833 국5-36연
미2=국5
네덜대대 888프대대 566 미23연(-)
대룡산 800 신평
미38-3대 도관리
미1해병=미2사 736 9연=38연 719 미38-1대
금광 한계 내촌강
네덜대대
643 미23연 683 국36연
미9군단=미10군단 구성포리 장평리
미23연=국36연
홍천강 군업리 미2사=국5사 어론리
홍천
국군이 인제-현리 지구에서 격전을 치를 때 좌인접 미 제10군단의 미 제2사단도 홍천 북방에서 중공군과 격돌한다. 사단은 대룡산(899)-가리산(1051)-매봉(800)을 연하는 전선의 좌전방에 제9연대, 중앙에 제38연대(배속:한국 유격중대, 네덜란드/프랑스 대대)를 배치하였다. 우전방에는 기동이 용이한 자은리-양구 도로가 잇어 미 제72전차대대 1개 중대, 미 제23연대 제2대대, 미 제1유격중대로 편성된 "제브라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주저항선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배속된 아이반호 부대와 국군 제5-36연대 제3대대는 미조리선의 전초진지에 배치러고 도로와 계곡일대는 지뢰를 매설하여 진지를 보강하였다.
'51.5.16일, 저녁 무렵 중공군은 소양강 남쪽 국군 4개 사단지역의 공격과 병행하녀 중궁군 제15군 예하 제45사단은 제38연대 좌전방으로, 중공 제35사단은 제38연대와 제브라 특수임무부대의 전투지경선으로,중공 제31사단은 양구-자은리 도로를 따라공격을 개싷였다.
가. 벙커고지 전투('51.5.16~18)
※ 홍천 구성포리에서 춘천에 이르는 도로 우측방에 위치한 800고지로서, '51.5.16~18일까지 미 제2-38-3대대 ,K중대가 사낭으로 반 유개화 진지를 구축하여 연대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백병전과, 참호 속으로 드러아가 출입구를 사낭으로 막고 진내사격을 요청하여 포병의 "벤플리트 사격(1일 가용량의 5배 사격)"과 시한신관으로 맹폭하여 무려 1000여 명의중공군을 살상시킨 전투로서 고지가 20M내려 앉아 지금은 780고지 정도라 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중공군 5웕 공세시 서쪽으로 돌파구 확대가 저지되어 차후 반격작전(현리 돌파구 차단(속사리운두령)의 발판이 되었다.
'51년 5월 16~17일, 중공 제45사단 예하부대들이 좌전방 미 제2-38연대의 전초진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총공세로 17일 02:00시에 우전방으로 공격하여 주저항선이 돌파된다. 지역내 감제고지인 가리산(1051)를 점령하게 되자, 미 제2사단장 루프너 소자은 네덜란드 대대와 프랑스 대대를 투입하여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포병부대들은 탄약이 부족할 정도로 전방으로 증원되는 적의 집결지와 접근로 드에 집중적인 포격을 실시하여 전방 연대들을 지원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은 집중공격을 받는 중앙지역과 우전방의 적의 공격에 대비, 미 제8군에 1개 연대 전투단의 지원을 요청하고 , 사단 및 군단 포벼에 대해 탄약 가용량의 5배로 집중사격(벤풀리트 탄약)을 가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공군으이 인해전술을 제압할 수 있었으나 심각한 탄약보급난에 직면하게 된다.
17일, 한편 상황을 분석한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2사단을 보강하기 위해 접적이 경미한 미 제9군단의 우측 전투지경선을 동쪽으로 4마일 이동시켜 미 제10군다의 책임지역을 축소 조정함과 아울러 현리 전투에 실패한 국군 제3군단과 접적이 경미한 국군 제1군단을 노네임선 남쪽 1009고지-창촌-오대산-남애리를 연하는 와코서능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전.광주.진주 일대에서 공비토벌 중인 구구 ㄴ제8사단과 군 에비인 미 제3사단 제15연대를 중동부 전선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하였다.
17일 21:30분에 제38연대 제3대대 k중대가 방어 중인 벙커(800)로 중공군이 접근한다. 이고지는 지난 2주간 2만 개의 사낭으로 진지를 구축하여 야포의 직격탄에도 견딜 수 있는 방어지역으로 각종 장애물이 설치되엇다.
중공군 제45사단 제133연대가 파상적인 공격을 물리친 중대는 중공군을 진내로 유인하여 진내사격을 요청하여 시한폭탄을 투하하여 살상작전을 수행햇지만 적은 파도처럼 밀려와 결국 고지를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중대는 예비소대로 지체없이 역슴을 가해 백병전으로 고지를 탈환하게 된다. 진지내와 주변엔 중공군의 시체가 100여 구 널려있었다.
18~19일, 18일자정에 중공군이 다시 공격을 감행해와 중대는 참호속으로 들어가 준비된 사낭으로 입구를 막고 진내사격을 요청하여 침투한 적을 무력화시킨다. 19일 새벽에 중공군은 무려 800여 구의 시체를 유기하고 철수하였다. 이때 이고지 동쪽에서 현리까지 대돌파구가 형성되는데 k중대의 분전으로 서측은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여 전선이 붕괴되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막는다.
나. 자은리 전투
※ '51.5.17저녁 무렵 좌인접 제38연대의 주저항선이 돌파하고, 가리산으로 진출한 적의 일부가 연대의 측후방을 방어 중인 프랑스 대대를 공격하였고, 또 다른 적은 인제-홍천 도로를 따라 자은리로 진출하여 연대주력의 후바을 차단하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대대가 돌파되어 철수로가 중공군 제181사단에 의해 차단됨으로서 제23연대는 18일 새벽 적중에 고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철수로상에 중공군이 도로 장애물과 대전차 지뢰를 매설하고, 주요 애로지역을 선점하였다. 선두에서 진출하는 전차가 지뢰에 폭파된며서 차량제대가 멈추면서 적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운전병들이 일시에 피신하게 되면서 인제-홍천도로상에 아수라장이 되어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이에 미 제2사단은 엄청난 항공과 포병 화력으로 중공군에게 막대한 인명피해를 주면서 철수하여 수정된 노네임선상의 683고지로 철수한다.
중공 제45사단이 좌전방 미 제2-38연대 지역을 공격하고 있을 무렵, 중공 제31사단과 제35사단은 우전방 "제브라 특수임무부대"를 공격한다. 작전 초기에는 장애물 지대 통과와 전차포 및 포병화력에 상당수 피해를 입고 철수한다. 그러나 다시 증원부대인 제31사단 제92연대를 투입, 양구-홍천 도로변에 배치된 전차부대의 돌파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막강한 전차포와 포병화력에 450여 구의시체를 남기고 철수한다.
5.17~18일, 낮동안 좌안접 미 제38연대지역은 치열한 접전이 있었으나 우전방은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사단장은 17일 오후 역습과 우인접의 국군 제5사단의 철수로 우측방이 노출되어 사단의 예비인 제23연대를 투입하여 우전방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저녁 무렵 좌인접 제38연대의 주저항선이 돌파하고, 가리산으로 진출한 적의 일부가 연대의 측후방을 방어 중인 프랑스 대대를 공격하였고, 또 다른 적은 인제-홍천 도로를 따라 자은리로 진출하여 연대주력의 후바을 차단하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대대가 돌파되어 철수로가 중공군 제181사단에 의해 차단됨으로서 제23연대는 18일 새벽 적중에 고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무렵 연대는 제38연대가 고수한 벙커고지를 기점으로 남동쪽으로 뻗어 내려 인제-홍천 도로의 동쪽 683고지로 이어지는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명령을 받았다. 연대는 추격하는 적과의 단절을 위해 전차.포병.항공화력을 집중하였으나 철수로에 중공군이 장애물을 설치하고 주요 애로지역을 점령하고 있어 철수가 어려웠다. 여기에 선두의 전차가 지뢰에 폭파되면서 후속하던 차량제대가 정지되고 주변 고지에 산재한 중공군의 집중 사격이 이어져 운전병들이 차를 버리고 피신함으로서 순식간에 이동대열이 흩어지고 차량에 탑재된 탄약이 폭발되었다. 여기에 저녁 무렵에는 폭우가 쏟아져 도로가 진흙탕으로 변하면서 철수가 어렵게 되어 자졍경에에야 683고지 부근의 신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5월 19일, 미 제2사단은 인적자원을 앞세운 중공군의파상공격을 받아 주저항선의 일부가 돌파되고, 일부 부대는 적의 포위망을 탈출해야만 했다. 그러나 항공과 포병의 엄청난 화력으로 적에게 막대한 인명피해를 주면서 19일 벙커고지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수정된 노네임선으로 철수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4. 돌파구 차단 작전
가. 국군 제3군단의 철수작전
철 수 로
양양
현리 진동리 조침령
내린천
용포교 방동리 갈전곡봉 갈천리
방대산 주억봉 구룡덕봉 가칠봉 구룡령 약수산
1435 1449 1388 1283 1306
오마치 내린천
수리봉
내린천 광원리 을수재
내린천
방내리 오대산
창촌리
계방산
율전리 운두령
국군 제3군단 장병들은 5월 17일 야간에 현리ㅐ에서 중공군의 추격을 받으며 험준한 방대산(1436)으로 철수하는 동안 일부 병력의 낙오는 물론 다수의 공용화기와 무전기를 버리고 고지 정상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 철수작전은 수리봉에서, 용포-현리 일대로부터 철수하는 병력을 엄호한 제3-18연대가 마지막으로 방대산으로 철수한 18일 아침 무렵 일단락되었다.
이때 현리-용포 도로상에는 미 전폭기들이 군단이 유기한 차량과 포차들을 끌고 북상하는 적 종대를 포착하여 소이탄과 기총소사로 파괴 또는 소각하였다.
방대산으로 집결된 병력은 1009고지-창촌리-오대산을 연하는 와코선을 점령하기 위해 일부는 산악통로인 방대산-구룡덕봉-광원리-창춘으로, 주력은 기동이 용이한 내린천을 따라 방대산-남전동-광원리-창촌을 목표로 철수한다. 이때 산악통로를 따라 철수한 제대는 중공군의 추격을 받지않고 중간집결지인 광원리로 철수할 수 있었으나, 내린천을 따라 철수하는 주력은 계속하여 추격하는 적의 공격에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한발 앞서 일부 부대가 창촌으로 진출하여 광원리-창촌도로를 차단하였다. 그러나 군단은 철수하는데 급급하여 중공군의 감제하에 포위망 속으로 집결 중인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중공군이 차단하기 전에 창촌리로 철수한 일부 병력을 제외하고는 다시 포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수에 성공한 일부병력으로 재편성을 시도했으나 장병들이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재편성이 불가능하였다.
'51.5.19일, 새벽에 제18연대와 낙오병들이 창촌 삼거리에 도착하여 계방천을 도하하려는 순간 중공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어, 2,000여 명의 병력이 일시에 분산되면서 군단은 비로소 포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군단은 광원리-창촌 도로를 통한 철수를 포기하고 일부 부대의 엄호하에 야음을 이용하여 계방산(1577)과 오대산(1563) 사이에 있는 을수재를 넘어 하진부리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을수재까지는 무사히 도착하엿으나 이틀간 계속된 철수작전으로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일부 병사는 촐수를 포기하고 포로가 되었다. 군단은 4일 동안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65km,를 철수하여 19일 15:00시에 중공군의 추격을 벗어나 속사리-하진부리에 도착하였다.
20일 16:00시까지 이곳에서 수습된 병력은 제3사단이 3,621명(34%), 제9사단이 4,582명(40%)이었으며 , 후에 일부 낙오벼이 도착하여 병력은 다소 증가되었다. 군단이 재편성을 시도하고 있을 때인 21일 북한군과 중공군의로 혼성편성된 4개 연대규모의 적이 군단의 저지선을 돌파하여 하진부리-강릉 도로를 차단하려는듯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 당시에 국군 제3사단은 유천리 북쪽에서, 제9사단은 속사리 부근에서 적을 저지할려했으나 여의치 않아 제3사단은 정선으로, 제9사단은 대화 쪽으로 철수하여 군단의 저지선인 속사리-하진부리 선이 붕괴되었다.
나. 미 제3사단의 돌파구 차단 작전
※운두령 탈환은 속사리 북쪽 10km에 위치한 고개로서, 인제-현리-속사리 축선에 형성된 돌파구 첨단의 차단을 의미함과 동시에 강릉을 공격하기 위해 이 고재 남쪽 경강국도로 진출한 적의 철수로가 봉쇄 되었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국군 제3군단의 철수작전으로 중동부전선은 벙커고지-풍암리-속사리-철갑령을 연하는 선에 대돌파구가 형성되었다. 미 제8군사령관은 돌파구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예비로 서울에 대기 중인 미 제3사단 제7연대와 경안리에 집결 중인 제65연대를 긴급히 미 제10군단 우전방으로 이동시켜 사단주력과 합류하도록 한다.
'51.5.19일, 아침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미 제3사단응ㄴ 정찰대가 속사리, 하진부리 일대를 정찰하였으나 접적이 경미하자 제15연대를 풍암리 북쪽 납언리로 추진하여 하배재부근의 국군 제7사단과 협조, 횡성-풍암리 축선에서 적을 저지하였다. 이날 미 제2사단 제23연대도 한계리에서 중공군 제181사단의 공격을 , 프랑스 대대는 중공 제31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그런데 5월 공세를 개시한 이후 매일 밤마다 그들의 상용전술인 야간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주간공격이 부진한 이날 밤은 예상외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후일 판명된 것은 유엔군으 강력한 항공 및 포병화력에 큰피해를 입어 증원ㅂ대의 투입을 위해 대기한 것이었다.
돌파구 차단 작전('51.5.20~5.22)
계방산 1577
운두령
흥정산 1277 1325 회령봉 1324 보래령 1381 1272 1185
1226 1104
1056 953
수색3중 645 924 미7연 속사리
창동리 미65연 1003
817 1141
893 장평삼거리 1085 백적산
미65연 미7연
속사천
금당산1173 미7연
19일을 전후하여 중공군의 공격기세가 현저히 둔화되었으며 미 제3사단은 제65연대가 장평리에, 제7연대가 백적산으로 진출하면서 적 주력이 운두령 일대에 집중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21~22일, 사단은 운두령을 목표로 장평-백적산에서 2개 연대 병진공격을 하였다. 순조롭게 진출하던 와중에 우인접에서 엄호하던 국군 제3군단이 속사리-하진부리에서 적의 기습으로 돌파되어 철수해버렸다. 이에 사단은 연대를 재배치하여 제65연대를 속사리에 배치하여 측바응ㄹ 강화한 후 22일 공격을 재개하였다. 제7연대가 운두령에 접근할수록 적의 저항이 완강하여 공격이 돈좌 되기도 했으나 강력한 포병화력으로 18:00시경 마침내 운두령을 탈환하였다.
운두령은 속사리 북쪽 10km에 위치한 고개로서, 인제-현리-속사리 축선에 형성된 돌파구 첨단의 차단을 의미함과 동시에 강릉을 공격하기 위해 이 고재 남쪽 경강국도로 진출한 적의 철수로가 봉쇄 되었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공세초기 제3군단이 후방의 오마치가 피탈되면서 무기력하게 철수하였듯이 이번에는 적이 그 전철을 밟게 되었다. 미제3사단의 운두령 전투는 적의 5월 공세 저지는 물론 아군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 대관령 방어 전투
※이 전투로 주도권을 장악한 사단은 적이 전상자 속출과 식량 및 탄약의 부족으로 전투력이 약화되었음을 간파하고, 23일 10:00시 동해에 대기 중인 미 제7함대의 함포 지원하에 기습공격으로, 횡계리-노동-차항리에서 역습을 준비 중이던 적 1개 연대 규모를 공격하여 분산시켰다. 이로써 운두령을 탈환하여 적의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공세이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대관령 방어전투('51.5.20)
오대산 1563
1560 등대산 1434 노인봉 1338 국26연
진고개 매봉 1173
황병산 1407
국20-1대
월정사
을수재 중공? 1150
1359
1167 건봉 1157
중공군? 국3사 967 장군암 1140 국20-2대
싸리재 대관령
국1-3대
투구봉 909 칼산 941 횡계리 능경봉
유천리 국1-1대
국9사 988 국20-1대
하진부리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 5월 공세를 맞아 설악산-속초 선에서 분전하였으나, 19일 육본 명에 의거 제3군단과 전선 조정을 위해 오대산-두노봉-남애리를 연하는 와코 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21일, 이때 군단은 제1, 제3군다의 전투지영선을 따라 진출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동해안 지역의 국군 제11사단 예하 제20연대를 군단 좌측 후방의 유천리-횡계리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21일 국군 제3군단의 속사리-하진부리 방어선을 돌파한 중공군의 일부가 대관령과 강릉을 목표로 경강국도를 따라 진출하여 제20연대와 격돌하게 되었다.
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중공군의 목표가 비행장이 있고 국군 군수품이 지벅되어 있는 강릉일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강릉 관문인 대관령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수도사단은 대관령을 확보하고 제11사단은 정면의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강릉에서 부대 정비 중이던 수도사단 제1연대는 갑작스런 명령에 적정도 모르고 구두명령으로 대관령으로 이동하였다.
22일, 새벽에 제11사단 제20연대가 백일평-대기리 선에서 적과 대결하였으나, 적이 방어선을 돌파하여 대관령으로 진출하였다. 적정을 탐지한 제1연대 수색대의 보고로 모든 화력을 3시간 동안 집중하고 근접전투로 적을 격퇴하였다. 적이 다시 2개 대대를 증원하여 능항봉으로 우회공격을 기도하였으나 다시 격퇴되었다. 적은 다시 대관령 탈취를 위해 증원부대를 투이하여 횡계치의 제3대대를 포위공격하였으나 국 제1연대 1대대와 협동작전으로 적을 격퇴하였다.
23일, 이 전투로 주도권을 장악한 사단은 적이 전상자 속출과 식량 및 탄약의 부족으로 전투력이 약화되었음을 간파하고, 23일 10:00시 동해에 대기 중인 미 제7함대의 함포 지원하에 기습공격으로, 횡계리-노동-차항리에서 역습을 준비 중이던 적 1개 연대 규모를 공격하여 분산시켰다. 이로써 운두령을 탈환하여 적의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공세이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5. 용문산 승전보
용문산 승전보('51.5.18~5.20)
중188사 중189사 북한강 중187사
청평댐 홍천강
청평호 미사리 559
마곡리
울업산 381
장락산맥
송산리
신천리
창촌 장락산
353
마치고개 국2연=미17연
31연=2연 벽암산
가일리 설곡리
'51.5.17일, 중공군은 5월 16일 공세를 개시한 주공부대들이 중동부전선의 주저항선을 돌파하자, 중서부 지역의 유엔군이 중동부 전선으로 증원을 차단하고 그들의 주공부대들의 진출을 지원할 목적으로 17일 조공부대인 제19병단 예하 제63군의 3개 사단(제187, 188, 189사단)을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점 부근을 방어 중인 미 제9군단의 중앙사단인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해 옴으로서 중서부지역에서도 격전이 벌어진다.
당시 국군 제6사단은 사창리에서 중공군 4월 공세시 무력화 ㄷ되어 전선 조정에 따라 노네임선의 용문산(1157) 일대를 점령하고, 사창리 전투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 훈련과 정신적인 재무장에 전념하며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임박한 징후가 포착되자 제6사단은 주저항선이 북한강과 12~17km 떨어져 있어 적이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면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제2연대를 홍천강 남쪽에 추진배치하고, 주저항선인 용문산 서쪽에 제19연대, 동쪽에 제7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사단 수색대를 홍천강 북쪽에 일반 전초로 파견하였다.
이때 제2연대는 사창리 전투의 책임을 물어 연대장과일부 참모들이 해임되고 송대후 중령이 신임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비장한 각오로 방어준비를 하였다.
제2연대는 제2대대를 좌전방 북한강 일대를 감제할 수있는 울업산(381)에, 우전방 제1대대를 미사리 부근의 559고지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예비인 제3대대를 울업산 후방의 353고지에 배치하여 방어준비를 한다.
17일, 제2연대 정찰대가 서천리와 강촌리 일대에서 이미 도강하여 방하리 계곡에 집결 중인 주대규모의 적을 발견하여 격퇴하였으며 적이 북한강 여러곳에서 도하를 기도하고 있엇다.
이 무렵 중공군의 남하로 북한강 리대에 전은이 감돌자 좌인접 국군 제2사단의 제31연대가 화야산에, 우인접 미 제7사단의 제17연대가 두능선에서 주저항선으로 철수하여 제2연대만 청평호 남쪽의 요지를 방어하게 ㄷ되었다.
18일, 낮동안 중공군은 중대규모로 고성리, 기정리, 상박암리에서 도하공격을 기도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어둠이 내리자 중공군은 좌전방 울업산 지역에 대대규모로, 우전방 장락산맥에 연대규모 이상을 투입하여 도하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제2연대는 사단 및 군단에서 지원된 5개 포병대대의 화력과 조명지원을 받아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일부가 탄막지대를 돌파하여 진지에 도달하여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격퇴하였다.
[강력한 화력과 불굴의 정신으로 저항하자, 중공군은 제2연대 지역이 주저항선으로 오판하여 19일 새벽부터 2개 사단이 공격]
19일, 적은 2개 사단을 투입하여 돌파를 기도하였다. 홀천강변 감제고지인 559고지의 제1대대를 연대규모로 포위공격하였으나, 항공지원으로 격퇴된다. 그러나 항공지원이 종료되자 장락산맥 계곡으로 침투하여 제1대대의퇴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대대는 포위망을 탈출항여 연대지휘소가 있는 나산으로 철수하였다.
중공군은 이번에는 증원부대를 투입하여 좌전방 제2대대의 울업산을 공격하여 결국 수적인 열세로 결국 철수하게 된다. 이에 적은 야간에 총공세로 밀어붙지기 시작하여 제2대대는 철수한 427고지에서, 제1대대늕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 일대에서 백병전으로 맞서 결국 진지를 사수하였다.
한편 사단이 적중에 고립된 제2연대를 증원하기 위해 절취부심하고 있을 무렵인 19일 밤에 미 제8군사령관은 중동부전선에서 적의 공세가 현저하게 둔화되자, 중서부전선의 미 제1, 제9군단에게 문산-포천-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으로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공격명령을 받은 국군 제6사단장은 주저항선을 방어 중인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되자 북한강 남안으로 진출하여 제2연대를 포위하고 있던 중공군이 예상치 못한 사단의 기습공격에 오히려 본인들이 포위될까 우려하여 강 북쪽으로 철수를 개시하게 되어, 공격 제대들은 제2연대와 연결 후 중공군을 추격하게 된다.
결국 중부전선의 요충지인 용문산 일대를 탈취하기 위해 중공군 제63군이 5일도안 공세를 펼쳤으나, 제6사단 제2연대의 분전과 항공 및 포병화력 앞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21일 새벽 철수를 개시한다. 이로써 국군 제6사단은 지난 4월 공세시 사창리에서 당한 치욕을 싯고 용문산 전투의 대승이라는 기록을 세워 국군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용문산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전술적 승리보다도 , 전략적으로 중부전서네 형성될 적의 돌파를 저지함으로서 전선의 절단을 막아, 수도권에 미칠 위협을 제거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중공군의 춘계 1,2차 공세 총평]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춘계 1, 2차 공세는, 예상되는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목적으로 한국전에 참여한 이후 최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4월 공세시에는 중서부전선에서 임진강변의 국군 제1사단과 영국 제28여단을 돌파하고, 중부전선에서 국군 제6사단을 무력화시키고 서울 외곽까지 진출하고, 5월 공세시는 중동부전선의 소양강변에서 국군 제5.7사단의 무력화와, 현리지역에서 국군 제3군단(제3. 9사단)을 무력화 시키고, 속사리-하진부 선까지 돌파구를 확장하였으나 반면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로 그 댓가를 치렀다.
반면 유엔군은 전선의 일부가 30~60,km까지 돌파되기도 했지만 우세한 기동력과 화력으로 첨단을 차단하고, 조직적인 ㅈ연전으로 전투력의 큰 손실을 최소화 하면서 결정적으로 홍천 서북방 벙커고지에서의 미 제2사단의 승리와, 중동부 전선의 운두령에서 미 제3사단의 퇴로 차단, 국군 수도사단의 대관령지구 사수미츠 측방 보호, 그리고 중동부의 용문산 전방에서 결정적인 중공군 제63군을 무력화하여 5월 22일부터 토페카선(38선과 비슷)으로 진출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미 제8군사령부는, 국군의 지휘통제의 나약함과 결정적으로 국군 제3군단의 무능함에 제3군단을 해체(5월 26일)하고 제9사단을 미 제10군단에, 제3사단을 국군 제1군단에 배속조치하여 모든 지휘관들로 하여금 전장에서 승패와 지휘관의 지도력 및 책임에 관한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