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임진년 8월 (15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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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 (신해) 맑다. [양력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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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은 객사 동헌에서 정 영감(충청수사 정걸)과 같이 먹고 곧 침벽정으로 옮겼다. 우수사와 점심을 같이 먹었는 데 정 조방장 도 함께 먹었다. 오후 네 시쯤에 배를 출항하여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정박하다. 한밤 열두 시에 달빛을 타고 배를 몰아, 사천땅 모자랑포에 이르니 벌써 날이 새었다. 새벽 안개가 사방에 끼 어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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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임자) 맑다. [양력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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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여덟 시쯤에 안개가 걷혔다. 삼천포 앞바다에 이르니 평 산포만호가 공장(수령이나 찰방이 감사․병마사․수사등에게 공 식으로 만날 때에 내는 관직명을 적은 편지)을 바쳤다. 당포 가 까이에 이르러 경상우수사(원균)와 만나 배를 매 놓고 이야기했다. 오후 네 시쯤에 당포에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 자정에 잠깐 비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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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계축) 맑다. [양력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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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량에 이르러 배를 멈추고서 우수사와 더불어 이야기했다. 순천부사 권준(權俊)도 왔다. 저녁에 배를 옮겨 각호사(角乎寺:거제 시 사등면) 앞바다에서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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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갑인) 맑다. [양력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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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수사(원균)과 같이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漆乃 島)에 이르렀다.웅천현감 이종인(李宗仁)이 와서 말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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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의 머리 서른다섯 개를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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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 어두울 무렵에 제 포(濟浦)․서원포(西院浦)를 건너니, 밤이 벌써 열 시쯤이 되어 자려는데, 하늬바람이 차겁게 부니, 나그네의 회포가 어지럽 다. 이 날 밤 꿈자리도 많이 많이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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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을묘) 맑다. [양력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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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앉아 꿈을 생각해보니, 처음에는 나쁜 것 같았으나 도리어 좋은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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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는 알수 없으나, 8월 28일 이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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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요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전일 승평에서 받들었던 것은 매우 기쁘고 다행한 것이었습니다. 줄이고. 일본은 바다 가운데 있으며, 비록 추운 겨울이 되어도 날씨 는 늘 따뜻한데, 지금까지 흉한 적들이 오랫동안 남의 땅에 머물 러 있어도 풍속에 익숙되지는 않습니다. 한 겨울이 되면, 추위로 지내기 괴로우며, 가난할 뿐 아니라, 군량은 이미 다 떨어지고, 용기와 힘도 다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 급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일어난 왕실이 바로 이 때인데 한해가 새해로 바뀌었어도 아직 적을 없앴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 다. 한 구석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 다행이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옮기는 것 모두 이 전라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해를 다 없애어 국권을 회복하 는 것도 이 도(전라도)의 계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라도 감사가 다시 임금에게 충성하러 부임했고, 절도사는 오 랫동안 남의 땅(경상도)에 머물면서 군사와 말을 정예하게 여거 하는데, 군기․군량은 이가운데서 다하여 돌아가고, 진과 보(鎭堡) 에 이르러 방어군사를 정하는 것 또한 각각 반으로 나누어 뽑아 거느렸습니다. 그런데 장수는 늙어 중도에서 굶주림과 추위가 아울러 들이닥쳐 반 이상은 달아나 흩어졌습니다. 비록 혹 흩어지지 않은 자가 있다손 해도, 굶주림과 추위가 이미 극에 달하여 죽음이 잇달았습니다. 큰 고을이면 300여 명, 힘차고 왕성한 사람을 조급히 가리어 채우기를 강요하며 독려하니, 한 도가 소동하였습 니다. 더구나 소모사(召募使)가 내려와서 남아있는 군사를 징발하니, 각 진포에 방군을 나누고, 여러 읍의 초병도 뽑아 그 수를 채우는 데, 한 도가 소동한 것은 알지 못하는 바, 이 도의 보전도 어려워 꼭 길에서 통곡하였습니다. 지난 9월에 유지에, 각 고을의 떠돌이 군사일지도 일족 가까이 있는 자에게는 일체의 세금을 면제하라고 하신 정녕한 서신이 있었거늘, 백성을 풀어 비상한 고난을 견줄데 없이 급하였던 것입니다. 큰 적(왜적)이 각 도에 가득차, 아무 죄없는 백성은 몇 십만 명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독한 해를 입었습니다. 종사(宗社)와 도성(都城)도 보전할 수 없었고, 말과 생 각이 이에 미치어 고통이란 불타서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달 10명의 군사가 방비하는 고을에 부임하니, 한번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다음 달 방비에 들어가는 사 람이 겨우 서너 명인데, 어제는 10 명의 유방군이 오늘은 너댓 명 미만이니, 몇 달 가지 않아서 바닷가의 진(鎭)은 하나같이 텅 비어 진(鎭)의 지휘관은 홀로 빈 성을 지키게 되니, 어떻게 알지 못하 겠습니다. 만약 옛 전례를 다른다면, 임금의 분부를 어기게 되고, 옛 명령을 따르면, 적을 방어하는데, 계책이 없으니, 이 두 가지 중 편리한대로 밤낮으로 생각하여 보고했더니, 관찰사의 공문에 일족 의 대충징발하는 폐단이 백성을 심하게 병들게 합니다. 정녕 명령을 내리신다면, 이른바 명령을 이행할 틈이 없거니와, 그 보고 내용 또한 일거리가 있으니, 백성을 어루만지고, 적을 방어하는데에 둘 다 그 편리한 일을 얻는 것이라 답하여 왔습니다. 각 고을에는 죽은 자가 자손이 모두 끊어지면, 도목장(都目狀)에서 빼버리라고 공문을 내 보냈습니다. 대개 본도(전라도)는 나누어 방비할 군사가 경상도의 예와는 같지 않으며, 좌․우 수영에는 320여 명이고, 각 진포에는 혹 200 혹 150여 명씩 나누어 방비하였거늘, 그중에서 멀리 도망갔거나 죽은자가 오래 되었다. 아직 본래대로 정하지 않은 자 는 10에 7~8이며, 현재 나타나 있는 사람을 거두어 주는 것도 모두 늙고 쇠잔하여 방비업무에 알맞지 않습니다. 힘이 부득이 하면 물론 일족에게 숫자만 채우려 입방할지라도 탈이 났다고 소송하는 자가 많고, 아직 방비에 도착하지 않은 자는 혹 이름을 대어 힘을 합하는 가운데 이것 저것 엇갈리게 한다면, 끝내 점고에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 사이의 질병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폐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큰 적이 앞에 있어 방비하는 일이 무척 급하고 예나 다름없이 병에 걸려 방어하는 것은 줄이기 때 문에, 전례를 따라 재촉하고 분발하면, 하나는 배의 사부를 채우게 되고, 하나는 성을 지키기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5번 출동에 적을 맞아 14번이나 싸워 이겼던 것은 이미 8달이나 되었습니다. 대개 국방이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은 중앙에까지 곧 미치게 됩니다. 이 것은 실로 이미 체험한 것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계책은 먼저 옛 전례를 따라 변방을 방어해야 하겠습니다. 차츰 차츰 조사하여 군사와 백성들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급한 일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호남에 달려 있는 것은, 마치 제(齊)나라의(山東省 地方의) 거현( 縣)이나 즉묵현(卽墨縣)과 같이 항복하지 않다가 공격해온 연(燕)나라를 파하고 국토를 회복하였던 것)처럼 (곧 전 쟁이 끝나지 않고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것은 몸을 온전히 하는 것과 같으니, 몹쓸 병있는 자가 겨우 한쪽 다리의 구 할 수 없는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허다하게 군사와 말을 지경밖으로 쓸어내 버렸습니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汝松)이 수십만 명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개성․서울 세 곳의 도적을 토멸했으며,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와 남김없이 소탕해 버리고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