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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맥 주요 코너 읽기
[시산맥 가을호 여행 에세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엔 언제나 당신이 있다/ 박수현
에세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엔 언제나 당신이 있다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를 중심으로
박수현
슈바비슈활에서 만난 건장한 남성미가 넘치는 오각형 목골구조 전통 건축물
여행은 다분히 개인적이며 개성적인 체험이다. 일상의 시계를 끄고 그곳 사람들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과 낯선 풍경, 켜켜이 쌓인 시간의 유적에 자신을 오롯이 내맡기는 순간들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지금 세계는 covid-19라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침공에 캄캄하고 답답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일상은 통제받고 자유롭게 오가던 여행길은 닫혔다. 그래서 지난 여행길이 소중하게 뒤돌아봐지는 때이다. 재작년 독일의 서남부 슈투트가르트 펠바하(Fellbach)에서 40여 일간 머물면서 그때 보고 느낀 그들의 생활상이나 교육에 대해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근처의 몇 도시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와이너리와 오페라의 고장,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눈을 감으면 자주 거닐었던 마을 묘지와 포도원이 펼쳐진 구릉들, 우반(U-Bahn) 전철을 타기 위해 들리던 루터키르헤(Lutherkirche)역 인근 골목길들. 오각형 목골구조와 창문 장식이 독특한 독일 전통 건물들, 시간마다 교회에서 울려오던 종소리, 밤이 되면 노란 붓꽃 같은 별들이 또렷이 피어나던 침실의 지붕창이 떠오른다.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Land Baden-Württemberg) 주의 4개 행정구 중 가장 큰 도시이다.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인 슈바벤·프랑켄 지역 왕실의 수도인지라 고대부터 여러 시대에 걸친 유물과 유적이 풍성하고 ‘오페라의 도시’라는 명성답게 오페라 하우스는 물론 음악대학과 발레단도 유서 깊다. 파이프 오르간, 교회음악과 발레를 전공하는 한국의 유학생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공업도 발달해 명차,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Benz)와 포르쉐(Porsche)의 본사와 6만 명 수용이 가능한 메르세데스 벤츠 아레나(Arena) 구장과 자동차 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또 맥주와 포도주로 유명한 도시라 뮌헨 ‘옥토버 페스티벌’에 비견되는 맥주 축제가 9월 말에, 또 가을이면 다양한 와인(wein) 축제가 열린다.
궁전 역사박물관과 주립 미술관
중앙역에서 쾨니히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널찍한 궁전 광장이 펼쳐진다. 18세기 말에 세워진 신 궁전은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된 아름다운 건축물로서, 주 정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앞에 말을 탄 빌헬름 1세의 기념탑이 있다.
구 궁전은 주립 역사박물관(Landes history museum Württemberg)으로 석기시대부터 켈트족, 로마인 등을 거쳐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주의 역사가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신 궁전 뒤편이 주립 회화관(Staatsgalerie)인데 입구에는 특이한 3명의 남자상이 관객들을 맞는다. 1843년에 개관한 이곳은 고전적 모더니즘과 독일 르네상스 시대, 13c~18c의 이탈리아 회화작품 등을 소장하고 있다. 야수파, 입체파를 비롯해 오스카 슐레머와 독일 표현파인 킬히너, 딕스, 프란츠 마르크 등과 몬드리안, 달리나 뭉크 그리고 ‘바이올린’ 등 우리에게 친숙한 피카소(Pablo Picaso)의 다수 작품을 볼 수 있다.
근처 슈티프츠(Stiftskirche)교회 앞, 시인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von Schiller) 동상 앞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꽃 시장이 열리고 겨울이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크리스마스 시장이 선단다.
중심가 슈트라세 거리 중앙에는 1㎞ 이상 가로수들이, 양옆으로 옛 건축 양식과 현대식 건물에는 백화점 등 다양한 가게와 노천 식탁을 내놓아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다. 그 앞 거리 예술가들의 여러 공연이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삶과 죽음의 두 세계를 잇는 플랫폼, 마을 묘지
마을 묘지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자작나무가 둘러싼 초록 철제문을 들어서면 종루가 있는 작은 교회와 천사상이 받치고 있는 분수와 ‘묘비 예술’이라 불릴 만큼 섬세한 기교와 개성적인 조형미를 갖춘 묘비들이 줄을 맞춰 서 있다. 생전의 사랑과 슬픔, 생의 비의(秘儀)들은 각각 달랐겠지만 이제 직사각형으로 요약되어 쉼을 얻은 망자(亡者)들! 서양인들은 묘지를 ‘삶’과 ‘죽음’의 세계를 잇는 플랫폼 같은 곳이라 여겨 중요한 결정을 하거나 영감을 얻고 싶을 때 가족의 묘지를 찾는다고 한다.
독일인들의 가드닝(garderning)에 대한 사랑은 이곳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다양한 재질과 모양의 묘비들은 정성껏 가꾸어진 관목이나 베고니아, 제라늄, 장미꽃과 고인을 기념하기 위한 리스, 오르골, 크고 작은 램프 등이 함께 장식되어 마치 작은 조각 공원에 온 느낌이 든다. 고즈넉함 어딘가 슬픔을 머금은 이곳이 좋아 내가 자주 찾던 곳이다.
어느 오후에 공원묘지를 거닙니다 직사각형으로 요약된 삶들이 소풍객들 마냥 햇볕을 쬐고 있습니다
죽음들이 무성해서 묘비 앞 베고나아와 제라늄은 명랑하게 웃습니다 덩굴장미가 오르는 검은 대리석 묘
비는 다정도 무정도 아닌 표정을 짓습니다 산딸나무 환한 그늘 아래로 풀뱀 한 마리가 스칩니다 나무는
아직 고요에 다다르지 못해 뱀의 흘림체에 발끝을 오무립니다 저쪽 묘비 위로 검은머리오목눈이가 잠깐
앉았다 날아갑니다 슬픔들도 깃털처럼 공중에서 바래는군요 붉은 묘비 앞, 길고양이 한 마리가 망가진 오
르골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어떤 묘비들엔 먹구름과 비가 더 필요한 문장들이 아직 붐비고 있습니다 누가
돌아온 것일까요 종루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봅니다 눈가에
금계국 같은 노을이 몰려드는 저물녘, 몇 번이나 고쳐 읽었던 당신의 문장들은 가만가만 묘비 속으로 스
며들고 있군요 다만 당신의 짜욱한 고백은 미처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전문
카타리나 왕비가 잠든 언덕과 천사의 포도주, 파르테앙주
이곳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러시아 태생, 카타리나 왕비의 무덤 예배당(Grabkapelle)은 포도원(vineyard)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작지만 기품 있는 이곳은 슬픈 얘기를 간직하고 있는데 왕비는 빌헬름 왕이 선정을 베풀도록 내조했지만 이태리 출신 궁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왕의 변심으로 쓸쓸히 병으로 죽었다 한다. 나중에야 왕비의 진가를 안 왕이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예배당이다.
트레킹 가는 길에 농부들이 처음 보는 기계로 경사도 높은 고랑 사이 전지를 하거나 줄을 매주는 작업을 하는 것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 장미 덩굴로 뒤덮인 농기구 창고도 이방인에겐 운치 있고 지지대가 휘도록 달린 송이를 매단 포도나무들이 늘어선 풍경도 자못 목가적이다. 언덕에 올라서면 초록 수목과 어우러진 붉은 지붕 사이 멀리 벤츠 아레나(Mercedes-Benz Arena) 구장과 자동차 박물관, 분지인 시가지 전체 모습이 동그랗게 한눈에 들어온다. 유월의 햇살과 구름의 붓질에 따라 표정이 빠르게 변하는 풍경들은 그 옛날의 슬픔에는 무심한 듯 더없이 한가롭다.
근처 체리 나무에서 체리 몇 개를 따 맛보며 언덕길을 내려오면 15C~18C부터 있던 양조장 마을에 다다른다.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포도 넝쿨 사이로 보이는 설립연도와 앞마당에 놓인 옛 포도주 틀은 어느새 몇 세기 전으로 내 손을 잡아끈다. 홍보용 포도주와 각 양조장의 특별한 장식품이 전시된 쇼윈도를 둘러보는 것도, 시음장에 들러 알맞은 치즈와 함께 와인을 추천받는 일도 소소한 재미였다.
포도알이 숙성되어 유리잔에 맑게 찰랑이기도 전/ 붉은 향이 청어 가시처럼 코끝을 찌르기도 전/ 참
을성 없는 천사들은 날개를 접고/ 남몰래 성의(聖衣)에 떨어진 얼룩을 닦으며/ 밤마다 술통 마개를 열어
성찬식에 올릴 포도주를 탐했다
-「포도원」 부분
밤새 천사들이 술 익는 향기에 매혹되어 마신 양만큼 그다음 날 오크통에 포도주를 보충했다는데 이를 ‘천사의 포도주’ 즉 ‘파르테앙주’ 라 한단다. 천사들의 본분도 흔들릴 만큼 이곳 포도주의 향과 맛이 뛰어나다는 것이리라.
고풍스런 공원들과 교회들
캘리스버그 공원을 찾았다. 공원의 일부는 대낮에도 컴컴할 정도로 숲이 깊었고 그 안에 수영장과 축구장, 연못과 산책길, 놀이 시설들이 있었다. 빙글빙글 돌며 전망대 꼭대기에 올라간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꽃들이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정원과 그 안을 달리는 꼬마기차, 멀리 방사 동물원이나 식물원 등 탁 트인 공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순간 현기증이 났지만 몸도 마음도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주일이면 참석하던 한인교회 근처의 궁전 정원(Schlossgarten)에는 오래된 고딕 양식의 건물과 연못가 수십 그루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볼거리였다. 그 그늘이 주는 시원함이라니! 사람이 직접 말로 뛰는 큰 체스판 게임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갑자기 신나는 전자 기타 음이 들렸다. 주말 오후마다 열린다는 공원 안 비어 가든에서 나는 소리였다. 편안한 복장도 있었지만 한껏 멋을 낸 노인들이 쌍쌍이 로큰롤, 디스코 등 밴드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곡이 끝나자 잠시 자리에 돌아와 맥주를 한 모금을 들이키고 다시 리듬에 빠져드는 열정적인 모습들! 나이를 잊은 저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튼실한 사회보장제도의 뒷받침 때문인지 독일 어디서나 건강한 분은 물론 돌보미를 대동하고 휠체어를 탄 노인들이 여행을 즐기는 것을 만날 수 있어 과연 노인 천국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발레나 오페라 공연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대신 관람하게 된 교회 합동 음악회는 모처럼 은은한 클래식에 빠져든 시간이 되었다. 파이프 오르간 이중주와 모양이 큰 실로폰 비슷한 ‘내림 마’라는 생소한 악기의 연주회였다. 파이프 오르간 이중주도 처음 들어 좋았지만 타악기와 건반악기의 중간쯤이랄까 ‘내림 마’ 악기의 넓은 음폭과 떨림이 많은 잔영은 오래 내 귓전을 맴돌았다.
교회의 한 가정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 그 부부는 뜰에 유실수와 한국 시골을 연상케 하는 텃밭을 가꾸고 계셨다. 독일로 이민온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정서적으론 여전히 한국인인 그들! 함께 자리한 여러분들도 광부나 간호사로, 유학이나 주재원으로 왔다가 근로 조건과 자녀들의 교육 환경에 매료되어 이곳에 남은 분들이었다. 그러나 낯선 이국에서의 애환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도 엿볼 수 있어 마음 한쪽이 아릿해져 왔다.
아날로그적 소박함과 창의적인 교육 활동
독일은 시간마다 교회 종소리가 울리는 등 생활 곳곳에 아날로그적 요소가 상당히 남아 있었다. 자동차 강국인데도 웬만한 거리는 걷거나 보드 혹은 자전거를 주로 이용한다. 그래서 큰길로 나갈 수 있는 ‘자전거 자격시험’을 초등 4학년 때 경찰관의 입회하에 치른다. 중학생이 되면 좀 더 먼 거리의 등하교 시 보드나 자전거를 타기 때문이란다.
주요 교통수단은 기차와 전차이다. 독일 반(Deutch Bahn)은 행선지 티켓과 좌석권을 별도로 구입해야 하며 성인과 동반하는 아동들은 몇 명이라도 무료인 점도 특이했다. 기차나 전철에서는 여자들이 뜨개질이나 자수를 놓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독일인들은 정원 가꾸기 뿐 아니라 건강한 먹거리를 위한 텃밭 가꾸기에도 열심이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당일의 채소를 파는 농산품 자동판매기나 농원 앞 작은 박스에 체리나 사과, 당근 등을 담아 자물쇠가 달린 돈 통과 함께 놓은 ‘무인 식료품 판매대’도 흔히 볼 수 있다. 식료품을 자주 구매해서 냉장고도 대형을 선호하지 않고 인스턴트 음식 대신 가정식 요리를 즐겨 쿠키나 케이크 등도 직접 굽는 주부들이 많단다.
또 원자력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전기세와 물세가 무척 비싸다. 딸네가 입주한 타운 하우스는 지붕에는 태양광 전열판을, 외창에는 보온이 뛰어난 알루미늄 셔터를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건축비 절감을 위해 개별 세탁시설 대신 지하 공동 세탁실(여덟 가구의 세탁기가 놓여 있음)을 사용하고 밤에 이용하는 절약세탁코스로 요금을 아낀다니 그들의 검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곳은 놀이터였다. 무지개색 채색 대신 나무나 철제를 자연 그대로 사용하고 또 체력 단련과 모험심을 위해 다소 과격해 보이는 로프를 활용한 놀이 구조물이 많았다. 동네 놀이터 여러 곳이 우주선, 움직이는 의자, 물 펌프와 댐 등이 특색 있게 구비되어 있다.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일깨우거나 학교에서 과학적 원리를 배울 때 자연스레 연결 지을 수 있도록 고안된 것들인데 어른인 내게도 신기하고 흥미로운 것이 많았다.
나는 둘째 손녀(초교 2학년)가 학교에서 일박하는 캠핑 행사에 참여했다.(집을 비우게 된 딸을 대신) 반별로 이루어진 이 활동은 조별로 연극이나 보컬 등을 계획, 실행하며 교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지난밤의 활동 동영상을 보며 웃고 즐기는 가족 중심의 행사이다. 조금 불편하나 일회용 용기를 줄이기 위해 아침 식사 시간에 가정에서 쓰던 접시나 포크를 가져와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어 환경에 대한 높은 관심도를 알 수 있었다. 또 자신이 뛴 거리만큼 사회단체에 기부할 수 있는 ‘학교 달리기 대회’가 동네 축구장(Max-Graser Stadion)에서 열렸는데 어릴 때부터 기부 문화를 몸에 익히기 위한 것이란다.
큰 손녀의 ‘방과 후 승마 수업’도 참관했다. 집 근처 한 목장의 승마장에서 수업을 받는데 1회당 레슨비는 2유로(3,500원 정도)에 불과했다. 수업은 먼저 말과의 교감시간을, 그다음 실제 말타기로 진행되었다. 서로 친구의 말고삐를 잡아 주고 말이 똥을 싸자 아이들이 군말 없이 삽을 들고 협동하며 치우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교육 전반에 걸쳐 아동 중심의 세심한 배려를 실감할 수 있었고 독일이 산업 전반에 왜 강자인가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말이 떠오르며 우리의 교육 현실과 비교되었다.
한갓진 정취의 슈바비슈 할(Schwabisch Hall)
지붕이 있는 나무다리를 건넜지요 천장에 거미줄이 자욱한 다리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거렸어요
다리 밑 강물은 한 무리 시간을 몰아 저물고 흰 새들이 자맥질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새들의 울금빛 노
래를 모아 윗옷 주머니에 넣은 채 높다란 성채로 걸어 들어갔어요 성안엔 푸른 눈의 아이들이 까르르 까
르르 목마를 타며 놉니다
=「자장가」 부분
인구 3만의 이 작은 도시는 코허(Kocher) 강 골짜기에 형성된 독일인들만 안다는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다. 구 시가지로 가려면 양쪽에 즈루파 탑이 있는 지붕 덮인 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푸른 이끼가 자욱한 나무다리를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시간 여행을 통과하여 중세로 건너가는 듯 조금씩 심장이 떨려왔다. 옛 집터를 지나자 건장한 남성미를 풍기는 오각형 목골구조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삼각형 맞배지붕과 그 밑의 빨간 창틀들도 은근히 매력적이다. 전형적인 중세풍 시청사에 들어서자 천장의 기도하는 천사상과 고딕식 장중한 문의 장식의 우아함이 돋보였다. 광장 위 교회는 내가 본 교회 중 가장 컸으며 장중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들과 천장까지 닿아있는 파이프 오르간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저절로 발뒤꿈치가 들려졌다. 많은 성화와 조각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꽤 많은 인골을 모아둔 유리관이 특이했다. 삼십 년 전쟁 중 사망한 병사들인 듯했다. 고대 선사시대 유적부터 중세의 가구, 가발과 의복, 유명 가문의 휘장과 문장, 회화와 조각품들이 전시된 역사박물관의 규모는 상당했다. 다른 곳과 달리 중세 시대의 장난감과 인형 전시관이 있었다. 금발의 예쁜 인형들과 크고 작은 목마, 소꿉놀이 세트, 우스꽝스러운 광대 인형, 특징을 잘 잡아낸 귀여운 동물 인형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어디선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사뭇 인상 깊었던 곳이었다.
동심을 부르는 로텐부르크(Rothenburg)
타우어 강변 돌 성곽으로 감싸인 마을 전체가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독일에서도 몇 안 남은 중요한 유적지란다. 원형 보루 문을 통과하면 마치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 시계탑과 아기자기한 마을이 펼쳐지고 어느새 마르크트 광장과 시청사가 나온다. 60m의 시청사 탑 위에서는 전체 전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이곳에는 매시 정각마다 점령군 장군과 포도주 마시기 내기를 하는 시장 인형(이 내기로 도시를 지켜냄)의 퍼포먼스가 시계 양옆 건물의 창문을 통해 진행된다. 상점마다 개성 있는 문장(門帳)과 꽃으로 장식된 플뢴라인의 많은 길과 문 중, 이곳은 포토존으로 가장 인기가 있단다. 광장을 중심으로 멀리 두 문이 보이며 또 문을 향한 갈림길이 나뉘어 다양하게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길을 따라 전통 과자 ‘슈니발렌(망치로 깨 먹는 빵), 손 자수 수예품, 사시사철 크리스마스용품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쇼윈도에 전시된 장식품을 구경하노라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간다. 크리스마스가 멀었지만 귀엽고 예쁜 장식품에 마음을 빼앗겨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곳은 마치 중세 병사가 된 듯 성곽 위를 잠시 걸어보며 달콤한 슈니발렌을 먹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든다. 저녁 무렵, 근처의 뉘른베르크(Nürnberg)를 들렀다. 동으로 만든 맥주 저장고로 이름난 전통양조장에서 독일식 양배추김치 샤워 크라우트, 돼지고기 요리인 슈바인스학세(schweinshaxe)와 슈니첼(schnizel), 그리고 여러 종류의 소시지 등 정통 독일식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레스토랑 테이블 천정에 매어둔 휘장들은 동호회들이 자주 회합하는 고정 테이블이라는 표시란다. 어깨 너머 그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웃음이 금방 들려온다.
리모델링의 아이콘, 에슈링겐(Esslingen)
에슈링겐은 슈투트가르트 남쪽, S-Bahn을 타면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소규모 배후 공업도시였다. 그러나 Das DICK이란 폐 철물공장을 복합 문화레저시설로 리모델링해서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곳이다. 현재 세계 각국의 식당과 주점, 디스코텍 그리고 최고급 극장 등 다양한 업소가 입주해 있어 주말이면 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다. 이 놀라운 변신을 시찰한 오세훈 시장은 돌아와 문래동 등 예술거리를 기획했다 한다.
Das DICK을 뒤로하고 전통 깊다는 루터파의 개신교회를 둘러보았다. 사방 벽을 가득 채운 고풍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십자고상의 가시관이 강조가 되어 있어 아무래도 두 손을 모으고 나의 죄를 모두 고백해야 할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교회 뒤쪽 역사가 깊다는 언덕의 포도원(vineyard) 길을 가보기로 했다. 무릎뼈 같은 바닥 돌도 닳아버린 좁장한 길을 그 옛날 일꾼들을 따라 밟는다. 포도를 나르며 등짐을 맨 채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돌 벤치와 가파른 돌계단 그리고 그 옆엔 옛날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있다. 잠시 나도 등의 백 팩을 돌 벤치에 걸쳐놓은 채 지친 발걸음을 쉬어본다. 그들의 고달픈 일상이 눈앞에서 서성거리는 듯했지만 길가에는 산딸기가 익어가고 청량한 바람에 보랏빛 들꽃들은 마냥 하늘거렸다.
프롤로그
독일에서의 40일간은 모서리가 닳아버린 내 오감(五感)을 일깨우던 아름다운 풍경과 시간의 유적들은 “민소매 티와 짧은 스커트를 입은 초저녁별들”에 “색인을 붙이”듯 날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 시간이었다. 목 넘김이 좋던 독일 맥주와 포도주며 고소한 명이나물과 치즈, 깨물면 단물이 입가에 흐르던 사과들이 딱딱해진 내 사고의 프레임을 부드럽게 때론 강하게 흔들어 주었다. 무뚝뚝하지만 음악과 축구를 사랑하는 독일인들과 그들의 진중하고도 검박한 생활양식이 내가 몸담은 자연과 환경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하였다.
여행의 날들은 언제나 짧고 아쉽다. 그러나 나그네의 시선이 얼추 지워진 뒤 여행은 다시 내게 속 깊은 말을 걸어온다. 그때야 비로소 풍경은 원근(遠近)과 명암(明暗)을 회복하며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 시선과 시간을 돌려받아 시를 얻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여행이 주는 최상의 선물이 아닐까? “뜰에는 사과나무가 푸르”던 에레나 할머니를 지나 붉은 지붕들을 휘돌아온 바람이 더 붉게 불어오는 쪽엔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박수현 2003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운문호 붕어찜』,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 페인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