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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Scene 18. The Chaos /혼돈/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렌은 벌써 일어나 앉아있었
다. 여전히 침대 위이고 상체만 일으켜 기댄 것뿐이었지만 열린 창문
으로 들어온 바람에 검고 긴 머리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그녀에게선
환자라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가며 지호를 향했다.
"아."
그제서야 지호는 자신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는 조금 당황했다.
"저, 상태가 어떤지 보려고 왔는데……"
렌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
의 그런 행동이 '실례니까 나가달라'는 뜻인지, 아니면 '상관없다
'는 뜻인지 지호는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내친 걸음이니 그냥 들어
가기로 결정하고 문을 닫았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의 마음이 이럴까? 지호는 엉거주춤 의자를 가져
다가 그녀의 침대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렌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
보고 있었다. 뭔가 그녀의 시선을 끌만한게 있나 싶어 지호도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대단한건 없었다. 그저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나뭇잎
과 그 사이로 떨어지는 오후의 햇살, 그리고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여
러가지 잡다한 소리들뿐.
"저, 몸은 좀……"
어렵사리 시작한 말이었지만 지호는 채 끝내지도 못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렌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지호는 그만 말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심연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저를 치료하신 그 여사제 분이…… 성녀님이신가요?"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랬군요."
렌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초록색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푸른 햇살
이 반짝거리며 흔들렸다.
"누구나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나에게만은 예외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부터 난 신의 도움을 바라는 걸 그만뒀죠. 내가 가장 신을
필요로 할 때에도……"
렌은 허무하게 미소지었다.
"신의 도움이란 것은 나에게만 항상 예외인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이제…… 모든것을 다 잃고난 후에야, 이제야 그 신의 도움으로 목숨
을 이어가다니 정말……"
렌의 검은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이런 삼류 희극도 없을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호의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그녀의 검
은 눈동자에서는 더이상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인형의 눈처
럼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스스로 살 의지가 없다고 말하던 여사제의
말이 지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신의 은총은, 좀더 가치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일텐데. 살아갈
가치도 없는 나같은 마녀에게 보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격정적이지도, 울먹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치 혼잣
말하듯 울려나오는 그녀의 담담한 그 목소리가 지호는 더 가슴 아팠
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지호는 한마디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렌은 바로 지호의 눈 앞에 있었지만 그녀와 자신의 사이에 너무나 커
다란 벽이 느껴졌다. 그러나 침묵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침묵하는 것
은 지호로서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그녀의 말을 긍정하는 것이나 마
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요."
긴장한 지호의 목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긴장으로 조금 어색했다. 자
신이 듣기에도 간신히 짜내는 듯한 듣기싫은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지
호는 멈추지 않았다.
"살아갈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따위, 세상엔 아무것도 없어요.
생명의 가치라뇨, 누가 그 가치를 정하는 거죠? 하늘과 대지의 도움없
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이 대체 무엇으로 다른 생명의 가
치를 저울질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그러니까……"
렌은 고개를 돌려 지호를 쳐다보았다. 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
꺽 삼켰다. 그의 얼굴은 흥분때문인지 조금 상기되어있었다.
"당신은 살아도 괜찮아요. 아니, 살아야 해요. 절대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렌의 자그마한 웃음 소리가 뒤를 이었다.
"훗."
금방 지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렌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
녀는 지금 분명히 웃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미소에 그렇지 않
아도 상기되어있던 지호의 얼굴이 빨갛게 되어버렸다.
"당신은 정말로 진부한 얘기를 너무나 진지하게도 얘기하는 군요. 당
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렌은 미소지었다.
"정말 그런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쓸쓸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스
쳐간 그 어두운 그늘 때문에, 지호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
다. 그녀가 그렇지 않다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차라리 나으련만.
그래도 지호는 그녀가 웃은 것 만으로도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숨막힐듯한 그 벽이 이제는 조금 얇
아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다시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지호가 뭔가
말을 꺼내보려고 하는데, 렌이 먼저 불쑥 말을 꺼냈다.
"아까, 여사제님과 함께 리니아라는 분이 왔었어요."
지호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여사제 에반제린이야 치
유를 위해 왔다고 해도 리니아가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그분이, 바로 티에라였더군요. 가문의 비전을 회복하지도 못한 채
그저 쫓기고 있을 뿐인 티에라. 내 손을 붙잡고는 한동안 많이 울었어
요. 하긴 그랬겠죠. 저도 카르나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랬으니까. 언
제까지고 울기만 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의 시선은 눈 앞의 광경을 너머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다시금 서리는 쓸쓸한 미소와 그녀의 입
에서 언급된 카르나스라는 이름 때문에, 지호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
다.
"지호님."
"그, 그냥 지호라고……"
그녀가 자신에게 붙이는 존칭이 왠지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것 같이
느껴진 지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하려던 말은 뒤이은 그녀의 목소
리에 끝을 맺지 못했다.
"본가의 추적이 더 이상 없을거라는 말은 정말인가요?"
렌은 지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호는 왜 그녀가 자신을 이렇
게 쳐다보는지 금방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말을 전한 것은 아마도 여
사제, 혹은 자신이 말을 전해 준 리니아 일 것이다. 그런데 왜 다시금
확인하는 것일까? 그들의 말이 못미더웠던 것일까?
의혹속에서도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여전히 지호를 향한 시선
을 거두지 않은채 말을 계속했다.
"나도 그렇게 전해 들었을 뿐이예요. 그런데 왜……"
지호를 향한 그녀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지호의 얼굴이 살짝 굳
었다.
"지호님. 우리가 직접 만나본 대로 본가의 가주는 개인적인 호의로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그는 실제로 자신의 일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죠. 마치 카르나스처럼……"
"당신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요?"
갑작스러운 지호의 질문에 렌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가 금방 얼
굴이 어두워졌다.
"내게 그런 확신이 있었다면 카르나스가 날 버리는 일도 없었겠죠."
그리고 나와 당신이 만날 이유도 없었을 거예요.
차마 못한 지호의 말은 속으로 삼켰다. 렌이 그런 확신이 없어서 다행
이라고, 지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 본가에 있어서 우리들 세 가문의 후계에 대한 추적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우리들 가문의 후계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명령이 바로 그들 본가에 대한 복수죠. 이건 단
지 개인의 원한 같은게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권위, 즉 가문의 선조
들로부터 내려온 명령이기 때문이예요.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 보건대, 본가의 추적이란 것이 그와 비슷한
의미를 그들에게도 지녔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어요. 비록 본가
가 현실적인 이득을 좇는 쪽으로 변화되었다고 가정해본다 해도 선조
로부터 내려온 명령을 가주 개인의 판단으로, 설령 아무리 그 사람이
가주라고 해도 그렇게 간단히 중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죠."
갑작스럽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렌의 목소리는 꽤 불안했
다. 그러나 렌의 눈동자는 계속 지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씩 떨리는 눈동자로.
"가주는 그보다 더 높은 권위로부터 명령을 받은 거예요. 오직 그것
만 합당한 해답이죠. 분명히 가주는 당신이 그 한사람의 가문의 후계
라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의 뜻을 따른거예요. 기억
나나요? 당신이 가주에게 했던 말을……"
유적 속에서 가주에게 했던 말, 그리고 제국 재상이 자신에게 전해 주
었다던 가주의 말이 지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제국 재상은 분명
히 그렇게 말했었다. 과거의 이름 때문에 더 이상 누군가의 삶이 파괴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 말은 지호가 유적 속에서 가주에게
했던 말 그대로였다.
"당신은 정말 그 한사람의 가문이라는 곳의 후계가 아닌가요?"
"왜…… 그게 당신에게 그토록 중요한 거죠?"
담담한 지호의 반문에 오히려 물음을 던졌던 렌의 안색이 살짝 놀라움
으로 물들었다. 렌에 반문하는 지호의 목소리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침착했다. 예전같으면 그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겠지만, 지금
지호에게는 그녀의 질문 자체 보다는 그녀의 의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
이 분명하게 다가왔다.
"진실을 말해줘요."
렌의 눈동자에 다시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어요.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지, 누가 거
짓을 말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정
말 가주의 말대로 그런거라면…… 나는, 그리고 내가 해 온 일들은…
… 대체 어떻게 되는거죠?"
그녀의 뺨으로 한줄기 눈물이 또르르 굴러내렸다.
"그러니까…… 말해줘요. 당신이 가주가 말하던 그 사람이라면, 제발
내게 진실을 말해주세요."
렌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
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침묵을 지키던 지호는 조용히, 그리고 천
천히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의 가문…… 그런건, 전부 허위의식일 뿐이예요."
문득, 그녀의 젖은 눈동자가 지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현재의 누군가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의 누군가와 어
떤 식으로든 연관을 짓기를 원하죠. 현재의 불확실한 결정에 내맡기기
에는 미래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닥쳐올지도 모를 결과가 너무 두
렵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것이든 기대고 싶어하는 거예요.
핏줄이 이어져 있다고 해도 그건 옛사람의 과거일뿐, 현재 눈 앞에 있
는 그사람의 과거가 아닌데도, 그런데도 기대고 싶어하는 거죠. 이사
람은 과거에 그런 일들을 해냈던 영웅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
가 바라는 일들을 해 줄 것이다. 그렇게 말이예요."
순간 지호는 렌의 눈동자에 스치는 어떤 실망의 빛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왜 실망하는 걸까? 그녀는 무얼 기대했
던 것이까? 그러나 지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나라를 세운 영웅왕도, 나라를 망치는 바보 같은 왕도 같은
성(姓)을 가지죠. 선인에게서 선인이 태어나기도 하지만, 선인을 부모
로 둔 악인도 많아요. 악인에게서 악인이 태어나기도 하지만, 악인을
부모로 둔 선인도 많죠. 그렇다면 대체 물려받은 이름이란게, 가문이
란게 뭘 증명한다는 거죠?"
이미 렌의 시선은 지호를 보고있지 않았다. 그녀의 슬픈듯한 시선은
지호를 빗겨나 있었다. 정적이 가라앉은 방 안에 지호의 목소리만 허
공을 울리고 있었다.
"게다가 핏줄로 이어지는 것도 아닌 한 사람의 가문이라니, 그런 작
위적인……"
"당신은, 몰라요."
렌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지호의 말을 끊기에 충분했다.
"사제들은 피로 이어지지 않았어도 세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신의 뜻
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죠. 그들이 서로 하나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으로 증명되는지 알아요? 그건 그들이 가지고 온 신의 뜻의
동일성이예요.
가문이 무엇을 증명하냐구요? 한 사람의 가문이란 것이 작위적이라구
요? 그렇지 않아요. 가문은 그가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를 증명해요. 가
문의 유산이라는 것이 그저 고리타분한 노인들의 선입견들로 가득한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추구했는
지 당신이 아나요?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당신이 아냐구요.
당신이 아카데미아에서 배웠다는 것들 만이 전부는 아니예요. 아니,
당신은 사실상 당신이 무엇을 배웠는지 조차도 모르는 거예요. 방금
말한 것이 당신 생각의 전부라면 말이예요."
렌은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메마른 목소리에도 불구하
고 그녀의 눈은 여전히 슬펐다.
"당신은, 가주가 말하던 그 사람은 분명 아니군요."
렌은 고개를 돌렸다. 마치 더 이상 지호와는 할 얘기가 없다고 말하는
듯 했다.
"그래요."
귀를 기울여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지호에
게서 흘러나왔다.
"나는 그 한사람의 가문이라는 곳의 후계는 아니예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내가 그 사람이었으면 해요."
렌은 여전히 지호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호의 목
소리를 분명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호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모두를 용서해 줄 수 있을텐데. 누가 잘못했건, 어느것이 진
실이건 서로를 용서하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그들이 당한 고통과 괴로
움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줄 수 있을텐데……"
"어떻게……"
렌의 떨리는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흐느
끼듯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어떻게 헛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어떻게......"
"내가……"
대답하는 지호의 목소리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의 두 눈 가득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내가 가슴에 담아둘 테니까,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할 테니까. 당신이
당해야 했던 고통과, 당신이 흘린 그 눈물을.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
고 해도 나만은……"
지호를 쳐다보는 렌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렌은 갑자기 고개
를 홱 돌렸다.
"흑, 흑흑……"
숨죽인 흐느낌이 흘러나오며 고개돌린 렌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거렸
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너무나 애처로와보여서, 지호는 그녀를 감
싸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그녀만이 아는, 지호로서는
알 수 없는 기억과 감정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 지호는 천천
히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탁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지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후회가 되었다.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슬픈 얘기들 말고
좀 더……
자신이 그녀를 슬프게 했다는 생각이 지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지호의 귀에 난데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흐느낄때는 말이지, 조장."
지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복도 한켠에 휘슬이 기대 서 있었
다.
"아, 의도적으로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소. 하여간 여자가 흐느낄 때
는 말이오, 조장. 신사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한가지뿐이라고."
휘슬은 지호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가만히 다가가 어깨를 끌어 안아 주는 거요. 사랑하는 사람의 품 속
에서 흘리는 눈물만큼 여인의 마음을 치료해 주는 묘약은 세상에 없는
법이니까."
"나, 나는 그런……"
"쯧쯧. 이래서야 원……"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한마디에 벌써 얼굴이 붉어지는 지호를 보며 휘
슬이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수습도 못하는 주제에 왠 여자들은 이리저리 건드리고 다니
는지 모르겠군. 게다가 하나같이 다 괜찮아 보이는 여자들이라니……
조장 당신, 그러다 미움받을 거요. 신은 여자를 울리는 남자를 용서하
지 않으시거든."
"휘, 휘슬……"
지호는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휘슬은 그런 지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자신에게는 언제나 무언가 있는 척하며 무게
잡는 사람으로만 보였던 지호의 이런 모습은 그에게 흥밋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잘 해보시오. 나야 조장 편이니까. 아참, 힘에 벅차면 한명
정도는 넘겨줘도 되는데 말야."
"휘슬!"
얼굴이 달아오른 지호가 정색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얼굴이 휘슬이
보고 싶어하던 지호의 얼굴이었다. 휘슬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냉큼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지호의 당황한 시선이 뒤따랐다. 어느새 복
도 저쪽으로 멀어져 가던 휘슬은 뒤돌아 보지도 않은 채 한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이런……"
지호는 휘슬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단단히 오해를
산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어차피 휘
슬은 장난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지호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렌의 방 문을 바라보았다.
렌……
저 문 안에서 홀로 울고있을 렌을 생각하니 지호의 가슴 한켠이 다시
아려왔다. 휘슬의 말대로 같이 있어주는 것이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지호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려 렌의 방에
서 천천히 멀어져 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