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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Scene 18. The Chaos /혼돈/
얼마전까지 황궁에서 가장 한산했던 곳을 들라면 반드시 꼽혔던 곳이
재상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 한산하다는 재상의 집무
실은 요 며칠사이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로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활기를 띄고 있었다. 그리고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초로의
흰 머리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정하고 정확하게 걸음을 내딛고 있
는 애쉴리의 모습이야말로 눈에 띄는 것이었다.
언제나 단정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는 그도 요 며칠동안은
가끔씩 상기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재상의 집무실이
다시 활기를 찾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상의 집무실이 한산하게
되었을 때도 그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으니 드나드는 사람이 다시
많아졌다는 정도로 그의 표정이 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똑똑.
"애쉴리입니다."
"들어오게"
"실례하겠습니다."
오늘도 여느때와 같은 단정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애쉴리는 재
상 집무실을 노크하고 응답을 기다린후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섰다. 애쉴리 정도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냥 들어설 수도 있으
련만 그는 옆에서 보기에도 유별나다 할 정도로 제국 재상 로드릭 폰
케네스 후작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 애썼다.
"좋은 소식인 모양이군."
막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애쉴리를 보며 재국 제상 로드릭 폰 케네
스 후작은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재국 제상은 책상앞에 앉아 있었
지만 무언가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약간 옆으로 비틀어 앉아 다
리를 꼬고 있었다. 재상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애쉴리의 시야에 들어
왔지만 애쉴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애쉴리는 들고온 서류들을 책상 앞에 내려놓았다. 다리를 살짝 꼬고
앉아있던 제국 재상은 그가 내려놓은 서류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음. 황제가 판단력을 상실한 것이 아무래도 사실인가 보군."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현재로선 황제의 통치권을 행사할 의지가
없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애쉴리는 서류를 내려놓은 뒤 조금 뒤로 물러서서 단정히 선 자세로
재상의 말에 대답했다. 그들은 아무도 제국 지고(至高)의 존재를 나타
내는 '황제’란 명칭 뒤에 폐하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고 있었다. 분
명한 불경(不敬)이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해 이의(異意)
나 조심스러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현재 황제의 상태는 어떤가?"
"지난 몇주간의 자세한 행동에 관한 보고는 서류에 기록된 바와 같습
니다. 다만 그 이전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
애쉴리의 말을 들으며 서류를 살펴보던 재상의 눈이 살짝 찌푸러졌다.
"이건 좀 심하군."
"지난 몇주간 황제는 별궁에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식사도 몇 번
간신히 손을 대었을 뿐이고 황제가 내린 명령은 새로운 여자와 환각작
용을 일으키는 약품을 더 가져오라는 것들 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것 말일세."
제국 재상은 서류 한 곳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애쉴리는 재상이 지적
한 곳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황제의 별궁에서 일어난 행방불명 사건에 대한 비공식적인 보고입니
다."
"행방불명? 전라(全裸)의 여인이 난자(亂刺)당한 것이 행방불명 사건
이라……"
재상은 서류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애쉴리의 표정은 변
함이 없었다.
"희생자는 태후의 예전 모습을 닮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닮은 사람을 또 들여보냈단 말인가?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사람이 또 있지않나."
제국 재상의 물음에 애쉴리는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황후를 닮았었답니다."
"카르나스 놈. 처음부터 황제를 완전히 배제(排除)할 작정이었나 보
군. 이런 미친짓을 부추기다니……"
재상의 찌푸러진 얼굴이 펴질줄을 몰랐다. 재상은 '쯧’하고 혀를 차
더니 서류를 넘겼다.
"어쨌든 황제의 참여없이 70인회를 여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는 건가?
"
"그렇습니다. 제국 총 기사단장의 전시 지휘권은 명령권자인 카르나
스 제국 총 기사단장의 행방불명에 따라 자연히 상급 명령권자인 황제
에게로 귀속되었습니다. 황제는 전통을 따라 황제 자문회의인 70인회
의 소집을 명령하였고 모든 사안에 대해 70인회의 권고를 따를 것을
특별히 천명하였습니다. 지금 보시는 그것이……"
애쉴리는 살짝 시선을 내려 제국 재상이 막 펼쳐보려고 하던 서류를
바라보았다.
"70인회의 소집과 그에 관련된 모든 사안에 대한 권한을 위임하는 황
제의 서류입니다."
"흐음……"
서류를 살펴보던 재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제국에서 70인회가 열
리는 것이 오랜만이기는 했지만 처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
상의 미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그가 들고 있는 서류에 따르면 황제는 모든 사안에 대해 70인회
의 권고를 따를 것이라고 되어있지만 실상 황제의 모든 권력이 70인
회, 다시 말하면 제국 재상 로드릭 폰 케네스에게 돌아오는 것이나 다
름없었다.
물론 황제가 스스로 이런 명령을 내렸을 리는 없다. 그러나 황제가 별
궁에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전혀 나오질 않고 있는데 누가 그것을
확인하려 들 것인가?
"70인회 위원 귀족들은 현재 모두 수도에 거주하고 있어 긴급하게 회
의를 열더라도 모두 참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영지를 몰수당한 일부
귀족들과 영지분쟁으로 인해 몰락한 몇몇 귀족들은 제외될 것 같습니
다."
"흠. 이것도 카르나스가 연일 황궁 무도회를 열어 댄 덕분인가?"
제국 재상의 말 뒤에 애쉴리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황궁 재정은 현재 말이 아닙니다."
"그렇겠지. 귀족들로부터 긁어댄 돈은 전부 카르나스 그놈에게로 들
어가 버렸으니까. 그 엄청난 돈을 퍼부은 기사단은 현재 컨웨이 강물
속에 차례차례 잠겨가고 있고 말이야."
제국 재상은 말을 하면서 감정이 격앙되는 듯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런 미친 짓거리도 이젠 끝이야. 그녀석이 돌아올 때 쯤이
면 이미 모든건 바뀌어 있을 테니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제국 재상이 쥐고있던 서류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런 제국 재상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애쉴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겠습니까?"
"응? 뭐가 말인가?"
애쉴리의 얼굴이 처음으로 살짝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주저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잘 풀려가는 것 같습니다."
제국 재상은 들고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애쉴리를 향해 아예 몸을 돌렸
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게 애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의 상황만큼 후작님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 최적인 상황
은 없습니다."
"내 계획이 아니야. '우리'의 계획이지."
제국 재상의 지적에 애쉴리는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올렸다. 그의 얼
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왠지 카르나스가 만들어 놓은 무대 같다는 느
낌이 강하게 듭니다."
"흐음."
재상은 한손으로 턱을 살짝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애쉴리의
말은 계속되었다.
"일단 이런 기회 자체가 그의 실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게다가
황제에 관해 그가 취해온 태도라든가 70인회 위원 귀족중 영향력을 발
휘할 만한 유력 가문을 먼저 정리했다는 점, 그리고 황궁 무도회로 귀
족들을 대부분 수도에 모아놓았다는 것까지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
재상은 의외로 순순히 애쉴리의 말을 긍정했다.
"하지만 카르나스가 결국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
다고 한다면 황제에 대해 그의 취한 태도라든가 일부 유력 귀족의 몰
락을 유도한 것들은 당연히 해야할 수순(手順)이야. 그가 특별히 지금
의 상황을 기대하고 의도적으로 연출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무엇보다
도 본가에서 당분간 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개입을 않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카르나스가 지금 황궁에 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대단히 좁네. 그렇지 않나?"
"하지만 만일 카르나스의 본래 계획대로 그곳에서 장로단이 몰살 당
했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애쉴리의 지적에 제국 재상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애쉴리의 말은 분
명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세 가문에 대한 추적을 아예 포기한 것
은 예외라고 쳐도, 사실상 장로단이 괴멸당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 제
국 정치상황에의 개입은 예전만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자
명한 사실이었다.
사실 본가에서 그런 선언을 하지 않았다고 할 지라도 제국 재상은 본
가의 새로운 장로단이 선출되는 과정을 틈타 지금과 같은 일을 시도했
을 것이다. 기존의 장로단이 괴멸된 상태에선 새로운 장로의 선출에는
불가불 가주의 영향력이 가장 커지게 마련이고 그 결과 새로이 선출된
장로단은 본가 사상 최고의 친 가주 성향을 가진 장로단이 될 것이 명
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카르나스로서도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가 설령
이 무대를 꾸몄다고 해도 그것이 카르나스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
까? 재상은 단호한 어조로 애쉴리에게 답했다.
"그가 설령 지금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연출했다고 해서, 그것이 꼭
그의 함정이라고만 볼 수는 없네. 어쩌면 카르나스 본인이 이런 상황
을 틈타 합법적으로 제국의 권력을 승계하려고 했었을 지도 모르지.
어쨌든 우리로선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네. 카르나스가
무엇을 들고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이상 지금으로선 한시라도 빨리 계
획을 진행시켜야만 해. 70인회의 소집 정도는 첫걸음에 불과하니까."
애쉴리는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걱정은 어쩌면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숙원의 성취를 눈앞에 두고 지나치게 예민
해진 결과일 수도 있다. 게다가 재상의 말대로 지금 취할 수 있는 다
른 행동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등뒤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 꺼림칙함은 대체 무엇
이란 말인가? 불길한 예감을 떨어버리기라도 하듯 애쉴리는 살짝 고개
를 저었다.
"만셀가의 지호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나?"
갑작스런 재상의 질문에도 애쉴리는 잠시의 주저도 없이 곧 대답했다.
"전혀 진전이 없습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들 외에는 다른 특이한
사항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비밀이 있다면 제국에서 자
취를 감추었던 지난 3년간의 행적에 있다고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가? 흐음……"
재상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애쉴리도 알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신경쓰이는 존재입니까? 설령 그에대한 가주의 호감이
각별하다고 해도……"
"호감정도가 아닐세. 자네는 듣지 못했지만 가주가 내린 명령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어."
애쉴리의 얼굴에 놀란빛이 스쳐 지나갔다.
"명령입니까?"
재상은 애쉴리의 반문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애쉴리의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 가주의 명령은 무엇이든 본가 전체의
의지이며 뜻이다. 그런데 가주가 직접 그에 관해 명령을 내릴 정도로
지호라는 사람이 특별한 존재였던가?
"놀랄 것 없네. 명령의 내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앞으로 그
에 대한 사항은 전부 본가의 가주와 장로단에서 전적으로 직접 관리한
다는 것일세."
애쉴리의 눈이 크게 떠지며 눈동자 가득 경악이 번져갔다. 평소에 표
정변화가 거의 없는 애쉴리에게 이정도로 놀란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
이었다. 그러나 방금 그가 들은 내용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장로단에서 전적으로 직접관리란 말입니까? 황제에 관한 것조차도 그
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애쉴리의 음성은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제국 재상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쨌든 그에게 직접 손을 쓸 수는 없어. 당분간은 감시도 철수시키고
대신 만셀가의 일레인에게 각별히 신경쓰도록 전해주게. 그는 지금 없
어서는 안되는 인물중의 하나야. 대체 왜 그런지 그 이유는 전혀 알
수 없으면서도 말이지."
애쉴리는 허리를 굽혀 재상에게 예를 표함으로써 그의 뜻을 받들었다.
재상은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애쉴리는 몇걸음 뒤로 물러선
다음 재상 집무실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
이 들었는지 애쉴리가 몸을 돌려 재상을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책상위의 서류에 다시 눈길을 주고있던 제국 재상은 고개를 들어 의아
한 눈빛으로 애쉴리를 바라보았다.
"아까 제가 들어왔을 때 좋은 소식을 갖고 왔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
까?"
"아아, 그거……"
제국 재상 로드릭 폰 케네스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 얼굴에 그렇게 써 있더군. 자넨 마음속이 전부 눈으로 나타난다
니까."
애쉴리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재상의 말은 액면 그대로의 사
실이 아닐 것이다. 성인이 된 이후엔 애쉴리 자신의 부모조차도 그의
표정에서 그의 속내를 분간하지 못했다. 그러나 애쉴리는 지금 자신을
쳐다보는 제국 재상의 눈길에서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제국 재상의 눈동자가 아니라 그의 마음
이었다.
"그건 후작님도 마찬가지시군요."
"그런가? 하하하."
환하게 웃는 재상을 보며 애쉴리는 다시한번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집무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얼마전까지 등뒤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막연한 불안의 그림자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애쉴리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복도를 걷는 애쉴리의 발걸음은 그 어느때보다 가벼웠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