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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열왕 21,1ㄴ-16
복 음 : 마태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리석은 자와 논쟁하면 더 어리석어 보입니다.
꼬마 아이와 큰 소리를 지르며 다투는 어른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이가 예의 없이 행동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서 많은 이가 어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것입니다.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나요?”
스승이 말했습니다.
“바보들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남자가 정색하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말에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스승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렇다. 네 말도 맞다.”
어쩌면 자기를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기분이 안 좋아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진리를 향하는 방법인 바보들과 다투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자기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주장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설득해 봐야 무의미한 논쟁이고 이를 얼른 끝내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생명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
동의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과 논쟁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보들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당시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것이 가장 공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과 똑같은 방법으로 맞서게 될 때,
그 안에서 더 큰 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아니 그보다 큰 사랑으로 다가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넓은 마음으로 적대적인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난과 죽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그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하다 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 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 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대는’(마태 5,39) 일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40-42)
<오늘의 말·샘 기도>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뺌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음악 프로그램 중에 ‘가요 톱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에 순위를 정하는 겁니다.
경쟁이 치열하면 매주 순위가 바뀌곤 합니다.
5주 연속 1등 하면 자연스럽게 다음 순위로 1등이 정해집니다.
20위 권 밖에 있지만 사람들이 점차 좋아할 만한 노래도 정해서 들려줍니다.
순위는 시청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노래도 흐름이 있는지 어떤 때는 서정적이고 조용한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강력한 리듬과 춤이 어우러진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K Pop이 사랑받으면서 솔로 가수가 아닌, 그룹이 순위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전설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 HOT, 동방신기 그리고 방탄 소년단이 있습니다.
걸 그룹에는 SES, 핑클, 소녀시대 그리고 뉴진스가 있습니다.
한국의 음악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았던 1991년 가요 톱텐 1위 곡은 이렇습니다.
‘태진아의 거울도 안 보는 여자, 김지애의 몰래 한 사랑,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이선희의 추억을 책장을 넘기면,
노사연의 만남, 김완선의 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신승훈의 날 울리지 마,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있습니다.
33년 전의 노래인데 지금도 멜로디와 가사가 생각납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가슴 벅찬 이야기와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 중에 ‘노아의 방주’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합니다.
홍수가 지난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벌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탈출기’가 있습니다. 앞에는 깊은 바다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홍해가 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린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나아갑니다.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하혈이 멈출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정말 기적처럼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죽었던 나자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자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죽었던 나자로가 살아나왔습니다.
‘5병 2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담의 원죄’ 이야기입니다.
아담은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아담의 원죄는 죽음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복된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카인의 죄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 첫 번째 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으로 잡혀갔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참하게 죽였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독서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아합왕은 이미 많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욕심 때문에 나봇의 하나밖에 없는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나봇을 억울하게 누명 씌어서 죽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억울한 죽음이 많았습니다.
이런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런 억울한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는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보여줍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언제나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사악한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그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여인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 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 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악함에 있어서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 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 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 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 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9~42)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 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가능합니다.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윤리를 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구약성경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행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본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오늘 주님의 말씀들은 문제적인 말씀들입니다.
악인과 맞서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악인과 맞서지 말고 그에게 복종하라는 뜻이거나
복종까지는 아니고 타협하라는 뜻이라면 아무리 주님의 말씀일지라도
옳은 말씀이라고 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가 따를 수 없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복종이나 타협의 뜻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말씀들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악인이란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죄인이나
사회정의를 거스르고 사회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내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 주님은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뜻은 맞대응하거나 말려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가 연예인들이 악플로 인해 불행해지거나 자살까지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왜 그들의 악플을 보느냐,
보더라도 대응치 않으면 되는데 왜 대응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악플을 볼 때부터 이미 그 악인들의 악에 말려드는 것이고,
한번 대응하기 시작하면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얽히게 되지요.
이는 마치 쓰레기 더미나 똥 더미에 발을 디디는 것과 같은 것이고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쓰레기 더미나 똥 더미에 발을 디딜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도 악플에 말려드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원해서겠습니까?
원치 않는데도 말려드는 거지요.
남이 상처를 줘서 상처받았다고 하는 사람에게 제가 하는 말이
‘준다고 다 받느냐? 좋으면 받고 싫으면 받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인데
그런데도 받는 것은, 받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 없이 받는 것이지요.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싶지만, 몸이 약하고 면역력이 약해 받듯이
상처나 모욕 같은 것들도 받고 싶지 않지만 약하기 때문에 받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약하다면 무엇이 약한 것일까요?
심리적, 정신적, 영적으로 약한 것이며
그래서 심리적으로 약하면 우울증에,
정신적으로 약하면 정신병에,
영적으로 약하면 마귀 병이 드는 것이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사랑이 강하지 못하거나 불완전하여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 고통에 약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랑은 또 왜 불완전하고 약합니까?
그것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랑하려고 하지 않고,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좋은 것만 좋아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자란 사람은 웬만한 악플에 까딱없습니다.
연예인 같이 인기를 끌고 좋은 얘기만 듣던 사람이
계속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하기에 악플을 보게 되는 것이며
악플에 말려들고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니 한 뺨 맞고 다른 뺨까지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오 리뿐 아니라 십 리까지 가 줄 사랑이 있는 사람은
악인이 하는 짓에 말려들지도, 대응하지도, 까딱하지도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경지에 도달하면 맞설 악인조차 없게 되겠지요?
내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될 텐데
원수까지 사랑하면 내게는 악인이 아예 없게 되는 거지요.
바라고 요구하는 딱 그만큼이 아니라
바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려는 우리가 되라시는 오늘 주님이십니다.
오늘과 중요한 강론을 다른 데서 하게 되어 있고,
모레는 갑작스럽게 강의를 하게 되어 그 준비로
오늘 강론을 전의 것으로 올렸고
어쩌면 모레도 그렇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씨앗이 되어야 함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 대당명제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출애 21,23-25;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는 명제를 폐기하시고,
“앙갚음하지 말라.”는 반명제를 제시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는 앙갚음은 피해자가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해를
가해자에게 주거나 같은 종류의 방법으로 가해자를 해치는 소위 同害刑法, 또는 同態復讐法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 법칙이 앙갚음이나 보복을 정당화하고 복수를 부추기는 법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모든 종류의 형법은 사전에 범법행위를 방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은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어떤 조치가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일을 관장하는 기관이나 공동체에 속한 일임을 밝히려는 것이다.(민수 35,24)
나아가 구약의 율법은 가해자에 대한 일련의 조치가
하느님의 전적인 통치권에 속함을 강조하고 있다.
(신명 32,39-43; 집회 28,1; 이사35,4; 예레 46,10; 에제 25,17)
이러한 동해형의 가해 형법이 원시사회나 고대 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용된 규정일지 모르나
법이 발달한 오늘날 사회에서는 국가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복수와 보복의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동해형법, 또는 동태복수법이라는 용어보다
“탈리오법(lex talion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탈리오talio)”sms “이러한, 동등한, 동일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형용사 “탈리스(tali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그 원초적인 유형은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대왕인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1750) 법전에서 발견된다.
탈리오 유형의 형법은 고대 앗시리아 그리스 문화권에서도 발견되며,
고대 로마 문화권에서는 十二銅版法이라고 불리는 법전의 한 조항으로 성문화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사지를 분리시키고,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탈리오 해야 한다.”(제8표 2)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의 뜻은 어떤 사람이 남의 손이나 발을 부러뜨렸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금전적 배상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탈리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가해자도 동일한 해를 입도록 조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탈리오는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소멸되고,
국가에서 정하는 특정한 형법이나 재산에 의한 손해배상으로 변화하였는데,
그 근본적 사고방식은 應報이며, 이러한 견해는 형벌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탈리오법은 언뜻 보기에 적용이 쉽고, 상당히 이성적이며, 정의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앙갚음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요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께서는 앙갚음하지 않는 것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惡을 善으로 되갚으라고 하신다.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재판 거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와 십 리를 같이 가 주라는 것이다.
또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惡을 관용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대사제 안나스가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묻자 예수께서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경비병이 예수의 뺨을 때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빰을 돌려대지 않으시고
“내가 한 말이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 18,20-23 참조)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라.
악은 분명히 악이다.
예수께서 악을 선으로 되갚으라고 하시고, 요구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베풀라고 해서
옳고 그름의 척도가 파기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악의 도전을 받았을 때나 어떤 요구를 받았을 때, 이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구는 분명 실천하기 어려운 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보다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강함보다는 약함을 더 선호하시는 것이다.
이 선호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유에 뿌리박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테라 수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학교폭력으로 눈뜰 힘조차 없는 피해자 학생에게
'이번에는 오른쪽을 내밀 차례야.'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없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 말씀은 뒤에
'너가 그럴 힘이 있으면'이 생략된 것 같다.
무시당하고 짓밟혔을 때 같은 화로 갚지 않고
한 템포 늦출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다시 그를 바라보라는 말씀.
퉁명스럽게 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속옷을 내달라는 말에 발끈하지 않고
추워서 새파래진 입술과 잘게 떨리는
그의 온몸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고운 말은 못하더라도
말없이 속옷과 함께 겉옷을 내어주는 선택을 해보라는 말씀.
그러기 싫어서 극단적인 상상 속을 헤매고
말마디에만 머무는 어거지를 부린 것 같다.
내가 죽을 힘이 있는데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싹을 틔우지 않겠다는 밀알이구나..
바깥 어둠 속에 던져져 이를 갈며 울기 전에!
왼쪽 뺨을 대주고
겉옷까지 벗어 줬을 때
죽을 것 같은 나는 사실 죽어야 하는 나다.
무엇이 거짓 나를 죽지 못하게 막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소서. 아멘.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