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님 전에 제글을 보고싶다고 하셨죠?
전에 올린것이 지워젔네요
이제는 지나간 추억일뿐....다른사람들의 글을 유도하기위해 올렸든글이었는데..
올리는사람이 없어 좀 쑥스러웠었는데 ...보세요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
그래! 잊을 수밖에...만나서 뭘 어쩌겠어. 어쩌면 잘된일인지도 몰라!
그렇지만 혹시....
그래도 미련이 남아있어 열차밖을 바라보며 혹시나 하고 ...........
금방 "잠간만요?" 하고 나타날것같은 ....멀어지는 부산을
안타까운 마음 뒤로한채 안보일때 까지 바라보았다.
작년 11월 어느날,
부산 아시아드경기장에서 2002 아.태장애인경기대회 개막식을 참관하고
해운대로 가서 자고 시내구경하다가
오후에 부산역을 출발한 열차가 선선한 늦가을 날씨에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바라보며
스쳐 자나가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착잡한 마음을 가눌수없었다
참! 부산도 많이 변했구나!
"언제 또 올수 있을까?"
이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지천명의 나이인데
온통 가슴이 애들 마냥 휘둘린다.
꼭 한번은 보고싶었는데, 한번은 보아야 했는데
인연이 아닌게야!
애써 자위해보지만 아!
이쓰라린 가슴이여!
30년도 훨씬넘던시절 그날도 이 열차를 타고
이렇게 착잡한 마음으로 부산을 떠났었지.
지금과 똑 같은 12열차를 타고서........
0 0
"기다릴겝니더! 꼭 오이소.
3년동안 몸조심하이소 오빠 자주 편지하이소"
해맑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잡은 손을 놓지 못한다.
"그래! 3년동안 나를 기다릴수있겠니?
"오빠가 돌아온다면 10년은 못기다릴까?"
"그래 돌아와야겠지? 기다려 준다면"
잡은 손을 꼭 쥐고 그렇게 나는 약속했다.
열차에 올라 내려갈줄 모르는 그녀를 재촉하여
내려가게 하고
당시에 부산진역에서 12엹차가 서서히 떠나고 나는 홈으로나와서서 바라보았다
애써 눈물 훔치며 가물가물 손흔드는 그 청순한 그녀가 안보일때까지
그도 손을 흔들고 나도 흔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가슴에 묻고 입영길에 올랐다
아! 그것이 34년전 이었던가?
- 계 속 -
"동생 잠간 나올래 ? 여기 00제과점이야!"
68년도 겨울이던가? 징글벨소리가 아직 남아있던 년말같았다.
총각시절 서울 무슨 미싱회사에 사원으로 근무할 때
부산에서 자취하며 2년간 현지 주재한적이 있었는데
어느날 이웃집 나를 예쁘게 보아주고 친근하게 대해주던
소위 당시에 X누나라는 사람이 안집 전화를 통하여 나를 부른다.
"그래 금방 나갈게"
멀지않은 제과점 한켠에 앉았던 그 누나는 나를 반기고
그옆에는 다소곳이 고개숙인 어여쁜 아가씨가 일어나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아!아! 정녕 꽃이야! 그래 꽃이구말고
나는 첫눈에 그 다소곳이 서있는 그아가씨를 본순간 꽃으로 보았다.
해맑은 얼굴에 곱사라한 눈, 조금은 가냘픈 몸매에 어깨를 덥던 긴머리,
"동생 쓸쓸한게 안돼서 내가 예쁜 아가씨 소개하니까
둘이 잘 사귀어 봐?"
몇마디 소개말을 하더니 누나는 나가고 둘이 남았다
19살 곱디고운 그아가씨나 나나
무슨 말을 해야할지.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우리 밖으로 나가죠" 겨우 이말밖에 못했다.
입대소집영장을 받아놓고 마음이 울적하여 말이없는 내가
안되었든지 누나는 이런 아가씨를 내게 소개해주고
마음을 다스리라고 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거제도 명사가 고향인 그는 부산 이모집에 거주하며
어느 양장점에 근무한다는데,
쑥스러워 별말을 못하고
여하튼 좋은 말만 골라 몇마디 했던것 같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채 그날은헤어졌다,
전화도 많지 않고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
서로가 연락이라도 할려면 유일한 편지가 통신역할이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며칠후, 그가 근무한다는 곳에 겨우 찾어갔다.
그러나 들어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서 아무리 나올때를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주인이 문을 닫을때까지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후일에 물어보니 그날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며칠후 서울 본사에 다녀왔더니 같이 근무하든 사람이
그 아가씨가 우리 숙소를 찾아왔다가 갔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편지를 썼다. 그것도 그 이모집으로 못쓰고 그가 아르켜준 동생에게로..........
겨우 날짜를 잡아 두 번째 만났다. 이제 제법 말도 잘한다.
무어든지 예쁘게만 보인다, 먹는거 말하는거, 손이라도
꼭 잡고싶은데 쑥스러워서...
그때는 그랬다.
손이라도 잡으면 이제 평생을 약속하는 사이다
범일동 동양극장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틈에 서로가 떨어지지않을려고 겨우 잡은손!
그렇게 나는 그녀의 예쁜손을 처음 잡았다.
22살 한창 설레이던 그시절에.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
-계 속-
사각! 사각!
모래톱을 밟는 소리가 부드럽게 들린다.
밤바다 파도소리와 함께 3월의 밤공기는 양볼을 차겁게
어르만지지만 차거운줄도 모른다.
그냥 걷는 것이 좋았다
.
멀리 영도의 밤풍경이 가물가물 바라보이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모래밭.
우리는 무작정 걸었다. 그 긴모래밭을 .....
이야기도 하며 모래도 끼언져 보고 둘이 손잡고 뛰어도 보고
멀리 부산앞바다의 떠있는 배가 몇척인지 불빛도 세어보고
밤하늘에 별도 세어보았다.
아! 아! 내평생 그런 낭만적인 데이트는 처음이다 .
하염없이 걸으며 놓을줄 모르는 손엔 땀이 고인다.
"서울에는 언제 갑니까 예?"
" 응? 그건 왜?"
" 이러다가 서울에 오라면 가야 되는것 아닌가요?"
갑작이 불쑥 서울로 올라갈것 같아 불안한 모양이다.
웬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 아참! 이 아가씨가 내가 입대영장 받아논 사실을 모르고있지!"
나는 갑작이 대답을 안한채 뛰었다.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터질것 같은 가슴.
그녀는 장난하는줄 알고 얼레벌떡 뛰어오며
"아이고 그만 뛰그라? 숨차 죽겠니더"
나보다 세살이나 아래인 그는 꼭꼭 존대말이다
한달후. 꼭 한달후면 나는 입대하여야 하는데,
이 천사같은 아가씨에게 어떻게 이야기 하여야 하나?
" 숙이가 붙잡으면 안가지 뭐?"
그 긴 해운대 모래밭을 지나 동백섬을 올라 돌아갈때까지
우린 밤이 깊어지는줄도 몰랐다.
"그만 안가면 이모한테 혼납니더"
헤어지기 싫어 무언가 정을 표시하기는 해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않는다.
컴컴한 나뭇밑도 있었고 아무도 없는 호젓한 어두운 해변도 있었건만
무얼 어떻게 할줄몰라
" 응? 그래? 그럼 들어가!"
그녀는 머뭇 머뭇하다가 먼저 앞서서 간다.
무언가 아쉬운듯 돌아가는 버스에 그녀를 태우고 나는
내 어리석은 숙맥을 스스로 탓해보았다.
" 그냥 확 끌어 안으면 될걸, 에 이 참 "
- 계 속 -
"내 뭐랐는교? 이렇게 간다고 안합디까?
한참을 엎드려 울던 그녀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을생각도 안하고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며 말한다.
마산이다 포항이다 계속되는 출장을 다니다가 10일만에 만났다.
"나 내일 서울올라가. 이번가면 못내려 올거야!"
갑작이 서울에서 호남지방 출장지시가 떨어져 이참에 아주 올라가 출장마치고
시골집에 몇일좀 있다가 입대할 요량으로 무작정 그녀의 집을 찾았다.
우리 만난지 기껏 3개월, 그것도 그동안 서로 엇갈리는 인연으로 만나본게
겨우 이제 4번째.
처음 만나 인사정도 하고 두 번쩨 극장구경가고
3번째 해운대 데이트, 그리고 이렇게 떠나야하는 통고의 만남.
비록 편지는 몇번 주고 받았지만 너무 짧은 만남.
그래도 우리는 오랫동안 사귄 듯 만나지 못하는
애절한 안타까움만 나누다가 이제 정좀 들려니 이별이다.
" 그리고 나 영장 받았어. 보름후엔 군대간다구"
계속되는 나의 말에 그녀는 어이가 없어 바라보다가 없드려 울기만 한다.
여자가 할말이 없으니 울기만 하는걸가?
"나가자"
가끔 음료수와 과일등을 내오며 힐끔힐끔 보는 그집 이모댁 식구들 보기도 민망하고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수없어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 그 안에 한번 못내려 오능교?"
체념한 듯 기대어 걸으면서 묻는다"
" 아마 전라도 다녀오면 못올거야 집에도 몇일 있어야지.어머님이 서운해 하실거야"
우린 말없이 하염없이 걸었다.
그가 살고있는 감천동에서 내가 살고있던 범일동까지 우린 걸었다.
"기대릴겝니더" 꼭 오세요"
얼른 대답을 못하겠다. 19살 그녀의 입에서 기다린다는 소리에
너무나 나에겐 부담스런 말이기에......
"그만 들어가"
그러고 보니 또 어두운 감천동길을 그냥 보낼수없어 다시 뒤돌아 걸었다.
다시 감천동으로 .......
"어서 들어가"
"조금만 바래다 줄게요"
그렇게 걸은 것이 다시 범일동으로.......
그렇게 감천동으로 다시 범일동으로
우린 그 먼길을 3번을 왔다갔다하다가
범일동인지 그 어디 높은곳 자성대라든가?
여하튼 좀 높은 곳에 올라가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군대가면 다른여자 사귀다는데?"
멀리 밤바다 불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녀를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리고
팔딱이는 가숨의 요동을 느끼며 만나서 처음 어설프게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에 포개는......나.
"아! 이 느낌이었구나!"
그도 떨고 나도 떨고 있었다.
고개숙여 눈마주치지 못하는 이 청순한 여인이여!
이것이 시작이려니 했다. 이제 그는 나의 것이려니.......
"이제 그만 가세요"
부끄러움에 고개들지 못하던 그녀가 가만히 밀치며 빠저 나간다.
그리고 저만치 걸어가며 손을 흔든다.
저만치 걷다가 뒤돌아보니
처연하게 서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손짓으로 들어가라고 하고서.다시는 안돌아 보았다.
돌아보면 나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 계 속 -
4월에 들판은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만물이 생기가 돋는듯 하건만
마음은 납덩이 처럼 무겁고 무엇에 맞은듯 머리가 띵하다.
조금전 황량한 부산진역에 애처로히 서서 손흔드는 그녀를 남겨두고
상경하는 열차 차창에 비치는 들판과 산천을 바라보는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엉키는듯 하다.
"이모한테 억수로 혼났어예!"
어제밤 늦게 들어가서 잠을 못잔듯 부숙한 얼굴로 역에 나온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이모가 그사람하고 결혼할거냐고 묻데예"
결혼? 몇년후?
아니야? 정녕 이것은 아니야!
아! 내가 벌써 여자에게 억매이다니....
그렇게 청운의 꿈을 안고 무작정 가출 상경하여
서울역에서 구두통 들고 서성이다가 다른 구두딱이들에게 끌려가
염춘교다리밑에서 얼마나 맞았으며
짜장면 집에서 짜장면 그릇으로 머리통 얻어터져 가며
천추의 한이되는
배움을 갖겠다고 나선놈이
22살 어린놈이
어쩌다가 벌써 여자를 책임질려고?
안돼! 안돼!
부산진역 풀랫폼까지 들어와 배웅하던
그 청순한 그녀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가 하면
염춘교 다리밑이 겹쳐
온통 머리가 빠개지는것 같았다.
꼭 꿈을 꾼것일까?
차라리 약속이나 하지 말것을.....
안돼 나는 공부를 해야 돼!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는 나는 아직 안돼!
군대 3년 그리고 공부,
언제 그녀를 책임질것인가? 자신이 없다.
그때는 20살전후 벌써 결혼을 하던 시기인데.
책임지질 못할 약속을 어떻게 하고 왔나?
후회가 앞서는가 하면 금방 그녀가 떠오르고.
서울에 왔다가 곧바로 전라도로 내려가서 고산을 거쳐 목포로...
멀리 섬지방 비금도까지
그 비금도에서 풍랑이 심해 오도가도 못하고 10일을 지냈다.
당시에 열악한 연락선이 작은 파도에도 쉽게 배가 못뜬다
내편지를 기다릴 그녀
어떻게 정을 이어갈지 갈피를 못잡는 어리석음으로 며칠을 보내다가
"나 군대간다" 달랑 한장의 편지 보내놓고
그렇게 나는 군대에 갔다.
어찌해야할지 마음을 다잡지 못한채.......
울진 삼척지구 북한무장공비침투사건,해군56함 피격 침몰사건,
미첩보함 푸에블로함납북사건,미정찰기 U2기 격추사건,
박대통령 3선개헌등으로 국내는 어수선하고 급기야는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하는 누란의 위기의 살벌한 그당시 정세속에
그리고 지독한 훈련, 또 훈련, 특공대 5분대기조 .
도대체 자유시간이 허락치 않는 인간개조.
연약했던 심성에 독기만 품어갔고 여기서 낙오하면 인생의 낙오였기에
악착같이 참고 참으며 자랑스런 이나라 군인이길 원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잊어본적은 없다.
다만 무책임한 망서림의 세월만 흘러갔다.
훈련이 힘들때면 문득 그녀가 떠올라 마음을 무겁게 하고
한번 편지를 했던것 같다. 잘있다고.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그리고 입대한지 7개월만에 그당시 한창 치열하던
월남전 파견특명이 났다.
한달간의 실전훈련을 마치고 남행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1500명 장병과 환송나온 부산시민과 예쁜 세라복이 어울리는
부산 데레사 였는지 어느여고 학생들이 흔들어 대는 태극기의 물결로
부산 3부두는 감격의물결,
우렁찬 "백마가" 함성으로 뒤덮힌 그많은 사람들틈에 있어야할
그녀는
없다.
그녀와 함께 했던 8개월전 짧은 시간들이 명멸하는가운데
그 낫익은 부산에서 그녀를 지척에 두고 떠나야 하는...
이제 떠나면 살아돌아올지 못돌아올지 알수없는 전쟁터에 가는길인데.......
얼마나 나를 원망하고 나를 찾았을까?
더욱이 눈물도 많은 그녀가.......
저 수많은 인파속에 갑작이 오빠! 하고 뛰어나올것 같은 환상에
마음은 미칠것 같았다.
붕!..무거운 뱃고동소리를 들으며 한없이 그가 살고있는 건너편 감천동을
바라보며 안보일때까지 그녀의 행복만 빌었다.
그래 인연이 이것뿐인걸. 연분이 닫으면 또 만나리라
전쟁터가는데 오히려 홀가분한지도 몰라!
그렇게 나는 한여자를 가숨에 묻고
그험한 정글의 나라로 떠났다.
- 계 속 -
월남으로 가는 군함은 남태평양을 지나 남지나해로
5박6일간에 험난한 뱃길.
창자를 쥐어짜는듯한 엄청난 배멀미에 월남에 도착했을때는
거의 초죽음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이역전선. 나는 백마도깨비부대로 투이호아지역
험준한 산악 지대 사방이 적진에 둘러쌓인
정글 깊숙한 최일선 전술기지에 배치받았다.
"살아서 돌아가기는 글렀는가보다"
어쩐지 예감이 불길하다.
계속되는 작전과 매복. 정찰등 야전생활이 길어질수록
주변에서 자꾸 다치거나 죽어 나간다 전우들이..............
검푸른 험악한 정글, 상상을 초월하는 글자그대로 악전고투.
아! 이것이 전쟁이구나, 이 참혹한 현실이 실감나지않는다.
사람이 그립고 정이 그리운 전선 이역만리 타국에 외로운 병사로
그래도 또하나의 여인 나의 국민학교동창 친구.....정이
이웃동네 사는 그녀에게 터놓고 못할말이 없던 우리사이.
양가어른까지 친숙하여 친인척같았던 우리 사이는
코흘리게 어린애부터 어였한 숙녀가 될때까지
수없이 오가는 친구의 우정은 어느 연인 이상으로 깊었다.
그러나 처음 월남에 도착했을 때 월남에 왔다고 편지하니까
"어쩌면 그먼곳까지 가야만 하나요. 부디 꼭 살아서 돌아오세요"
그럴때 그도 어쩔수없는 여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짜피 내가 돌아가기전 어느 사람의 여인으로 가야될 사람
그래서 부담없이 더 흉금을 터놓고 허물없이 지냈는지도 모른다.
맛선보았다며 시집갈 준비한다는 그녀에게
바가지 긁는 연습 나에게 하고 가라고 너스레 떨며 놀리기도 했는데
월남간지 3개월쯤 되었을까?
나는 그동안 그에게 부산 숙이의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의 우정어린 질책과 권유를 받아 부산으로 편지를 썼다.
"그렇게 남자가 우유부단해서는 안됩니다.
여자의 눈에 눈물을 보이게 해선 안돼죠. 매듭을 지었으면 매듭을 풀어야 그도 어떤 결정을 하고 눈물을 거두고 마음을 다스릴것 아녜요?
가급적이면 그를 기다리라고 하면 안될까요?
친구에게 어울릴것 같은 아가씨로 보이는데. "
어른스런 그의 충고를 받아드려 펜을 들었다.
"숙아!나는 여기까지 왔다 .너에게 불행을 줄것같아 지금까지 너를 잊으려고 했었다.
용서를 빈다. 나를 아직도 찾고있는건 아닌지?
나는 못 돌아갈지도 모르는 몸.
지금도 정말 너를 사랑하지만 나보다 더 낳은 너의 행복을 빌고싶다"
오지않는 편지 기다림을 잊은지 오래, 계속되는 작전에
점차 늘어가는 전우들의 희생은 눈엔 핏발만 섰고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이국전선
오직 살아가야한다는 일념일까?
점차 망각의 늪으로 아스라이 먼 옛날 이야기인양
잊어갈즈음, 참전한지도 11개월째
이제 한달만 잘견디면된다
마지막 작전나가며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던 어느날
어느 악명높은 작전지역 어느 고지점령 명령을 따라 진입하다가
적의 로켙트포 공격세례를 받았다.
다른 전우 3명을 잃고 6명이 부상하는 큰 손실을보고
나는 전신에 파편을 맞고 한눈을 잃은채
쓰러졌다.
순간에 파노라마 같이 명멸하는 빠른 많은 사람들속에
그녀도 스쳐 지나갔다.
나트랑 102후송병원으로 후송되어 20여일 입원하여 수술받고
그렇게 부상당한 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하는 비행기 창에 보이는 검푸른 험악한 저 정글속에
또 얼마나 많은 전우들의 피와 땀을 흘릴런지.....
크고 작은 10여번의 작전과 50여회의 매복.10여회의 전투정찰등
이한몸 혼신을 다해 일생의 가장 힘겨웠던 또한 가장 자랑스러웠던
그 영광의 세월에 그 땅을 떠나며 만감이 교차하였다
고국으로 가저가는건 한눈을 잃은 상처와
몇달전 독수리70-1호작전에서의 수훈으로 받은 화랑무공훈장 한개 달랑....
나는 필리핀 미공군병원을 거쳐
대구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하여 두달가량
치료받다가
부산 해운대 근처 수영이라는곳에 있던
부산 국군통합병원으로 전원되었다
아! 오지 말아야할 부산을 다시오고보니
어뗜 운명같기도 하였다.
이제 그녀가 있는 감천동은 지척인데
아스라이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
지금 무얼하고있을까?
병원생활이 길어지고 전선에서 일그러진 마음도
다잡아 가면서 점차 그녀의 존재가 자꾸 떠오른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그녀
너무나 궁금하고 보고싶고 미안한 마음 사과도 하고싶고
그렇게 생각하니 미칠 듯 한번은 그녀를 꼭 보고싶었다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외출하는 사람에게 간단히 편지써서
그녀의 이모집을 가르쳐 주고 찾아 전해달라고 부탁해보았다.
우리 헤이진지 거의 2년.
이제 그도 눈물을 흘렸다면 어느정도 말랐을거고
그래 우리 이제 이렇게된 내몸으로 너를 찾는건 나쁘지만
부산을 떠나기전 너를 꼭보고 용서를 빌고 떠나고 싶다
그러나 뜻밖에 돌아온 전우의 전갈은
그녀가 지난봄에 영도 어느사람에게 시집을 갔으니
찾지 말라는 그녀의 이모님 말씀만 전해듣고
편지만 맡기고 돌아왔단다.
나는 마치 무슨 망치에 얻어맞은 듯 했다.
아! 그렇게 벌써 갔구나.
얼마나 나를 찾고 원망하고 저주하며 갔을까?
한시도 부산에 있고싶지 않아 전역신청을 하여
몇 달 더 있으라는 병원 권고를 뿌리치고
부상의 의한 명예전역을 하여 부산을 떠났다.
병원생활 약 5개월, 입대한지 23개월만에
정말 짧고 굵게 보낸 군복무의 의무를 그렇게 마쳤다.
전신에 파편상은 다 치료가 되었지만
한눈은 영원히 회복시키지 못하고......
다시한번 또 쓸쓸히 부산진역에서 공교롭게
또 12열차를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어느곳에 살든 행복하기만 하여라!
진정마음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면서..............
언젠가 너에게 속죄할 날이 있으리라
다짐하면서 부산을 떠났다.
"친구는 원래 이런사람 아니었잖아?"
몸도 마음도 지쳐 고향에 돌아와서도 하는일 없이 책도 못보겠고
공부도 안되고 취직도 안되고 집에 있기도 뭐하여
매일 장바닥에서 어정거리며 못먹는 술
억지로 먹는체 하며 대낯부터 얼굴 벌겋게 하고
공연히 남들과 투적거리며
노닥거리는 내가 안쓰러운지
여자친구 정이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한다.
눈에 장애가 있으니 공부도 할수없고 무엇하나 내맘대로 안되는....
웬지 마음이 허전하면 점차 그녀에게 가는날이 많아지고
다행이 과년한 시골처녀에게 자주가도 받아주는 그집 부모님배려로
찾아가 선본얘기 지난간 얘기등으로 마음을 추수리고 올때가 많다.
"그 신념에 찬 친구의 옛모습을 보여 줘야지 이러면 어떻해?"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에 자리한 속내를
털지 못하고 공연한 잡담만 나누면서 무언가 속시원히 말못하는 서로를
안타까웁게 바라보다가 헤어지곤 하면서
선한눈매의 훤칠했던 그녀가 친구가 아니라 여자로
어느새 그에 가슴에 내가 있고 나의 가슴에 그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정이야! 우리 둘이 평생 한이불 덥고 자자!".
막상 선을 보면 공연히 내가 떠오르곤 했다는 그녀.
눈똥그렇게 뜨고 바라보는 그녀에게 미쳐 생각할 여유도 주지않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맺지못하면 평생후회할까봐
친구에서 부부로 맺어졌다.
여자 나이 때문에 서둘러 결혼부터 서두른 우리는 좀 힘겹게 살았지만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생활을 하면서
"우리 한이불덥길 잘했다"
그래서 2남1녀의 자녀와 함께 ........
마음을 다잡고 짓물르는 눈에 안약을 넣어가며
힘겹게 보잘것없는 공부나마 해왔고
아스라이 먼 엤날은 있은지 오래.
고단한 삶의 세월이 가르치는 연륜의 상징으로
우긋했던 머리숫은 자꾸 빠지고
불혹의 고단함을 넘어 지천명으로 들어선 어느때인가?
티브이에서 "TV는 사랑을 실고" 라는 프로를 볼적마다
문뜩문뜩 떠오르는 그녀.
어느날 이제 나이도 많이 먹었고 30여년이 흘러갔는데
서로가 감정이 있어봤자 무얼 어떻겠나?
하면서 무슨 수배자 찾듯 기억을 더둠어
부산 에 거주하는 같은 이름중에
어느 짚이는 사람을 찍어 동사무실 직원 도움을 받아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고신교?" 낭랑한 여자 목소리
"저? 혹시 거기 이상열이라는 사람 있습니까? "
엉뚱한사람을 물어보며 말을 걸었다.
"없는데요"
"여기 000인데요. 그사람이 기소중지자인데 주소가 거기로 되어
있어서 전화 했는데 그럼 혹시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거들랑
제게 전화좀 주세요"
전화번호는 지역번호123에456국 7890입니다.
제이름은 "맹선달"이고요
"네? 누구라고요?"
얼떨떨해하는 그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몇시간이 지나갔는가?
"옆에 여직원이 전화를 바꿔준다
"아까 전화하신 부산인데예...........저 혹시 맹선달님
옛날 서울 무슨 미싱회사 다니지않았는교?"
첫댓글 친구님 ~~ 대단합니다 ... 평소에 글 잘쓰시는줄 잘알지만 이렇게 멋지게 감동적으로 잘쓰실줄은 ...소설을 출판하시면 베스트셀러감 입니다 ㅎㅎㅎ
영화 한편 보느라고 시간 많이 걸렸어요. 아름다운 사랑에 내가슴이 와 이리 두근거리노. 혼자만 꺼네보소. 마눌님이 알면 마음 아프요. 추억이니까
얏빠리 스고이 스고이데스요.. 역시 대단해요.. 앞에 친구들 감탄사 들었지요 친구? 계속 올려 주길 바래요..
뭔소리여? 앗싸야로라는 말인감? 거참 알수없는 말이네 ㅎㅎㅎ
얏빠리 = 역시 스고이 = 대단해 스고이데스요 = 대단합니다. 라는 뜻 ㅎㅎㅎ
베리~~~굿
사랑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마음이 저려 오는지....글솜씨에 감탄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