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hur de Coimbra Zico
선수경력
플라멩고(73~83년.브라질) 우디세네(84년~86년.이탈리아) 플라멩고(86~90년) 가시마 앤틀러스 (91년~94년)
주요성적
브라질 리그우승 4회, 리베르타도레스컵 우승 1회, 도요타컵 우승1회, 78.82.86월드컵출전 (14경기 5골)
주요수상
남미 올해의선수 3회수상 ( 77.81.82년 ) A매치 :89경기 66골
판타지스타 지코
지코는 플레이메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겸했던 선수였다.
지코는 공격 지향적인 미드필더였는데 체력과 기동력이 탁월했고 활동 범위가 넓어 쉐도우 스트라이커 위치에서도 골을 많이 터뜨리기도 하였다.
또한 지코는 과거의 브라질 흑인 스타들(펠레, 가린샤, 쟈일징요 등)못지 않은 개인기와 유연성 그리고 창조성까지 겸비한 선수여서 게임 때 관중들을 매혹시키는 화려한 플레이를 많이 보여주었다.
월드컵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펠레로부터 카나리아 군단의 10번을 이어받은 지코는 ‘공에 레이더를 달았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자연스러운패스와 예술적인 프리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현역시절
"패널티킥 보다 오히려 프리킥이 더 쉽다"고 할 정도였다.
선수시절 지코
지코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시작으로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이어 1986년 멕시코 월드컵까지 3차례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거둔 3위의 성적이 지코가 기록한 월드컵 무대 최고의 순위. 그러나 지코는 소속 클럽 플라멩고에서 매우 성공적인 선수 시절을 보냈다.
1972년 플라멩고 RJ에 입단한 지코는 이듬해 리그 데뷔전을 갖게 된다. 그로부터 3년 뒤에는 국가 대표 선수로서 데뷔전을 치르게 되는데 첫 경기에서부터 지코는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팀내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비록 월드컵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88번의 A매치를 통해 66골을 성공시키는 놀라운 득점력을 선보이며 성공적인 대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지코는 플라멩고 소속으로 1972년부터 1983년까지 3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1981년에는 남미의 챔피언스리그로 불리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남미 클럽 챔피언과 유럽 클럽 챔피언간 대결인 인터컨티넨탈컵(도요타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당시 인터컨티넨탈컵 결승전에서 지코는 리버풀을 상대로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치며 맹위를 떨쳤다
.
플라멩고 시절 3번이나 남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다. 물론 2차례 브라질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던 지코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1983-84시즌 이탈리아의 우디네세로 전격 이적한다. 우디네세에서 3시즌간 활약한 뒤 지코는 다시 친정팀인 플라멩고로 복귀하게 되는데, 1990년까지 플라멩고에서 3시즌 반을 활약한 그는 플라멩고와 함께 각각 1차례의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또 이끌어냈다.
90년을 끝으로 플라멩고에서 선수 생활을 접은 지코는 37세에 이르러 2번째 해외 진출을 단행한다. 축구 선수로서는 거의 환갑이나 다름없는 37세의 나이로 지코가 찾은 해외 무대는 태동기를 맞고 있는 일본의 J리그였다. 지코는 41살이 되던 1994년까지 가시마 앤틀러스에서 뛰었고, 1993년 리그 우승을 일궈내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94년을 끝으로 가시마와 작별하며 완전히 현역 생활에서 물러난 지코는 이후 브라질로 귀향해 브라질 체육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행정가로 탈바꿈했다
-차범근과의 인연
지코가 플라멩고를 이끌고 일본 기린컵 축구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서독의 레버쿠젠도 이 대회에 참가를 했었다. 차범근도 출전 하였으며 이 대회에서 플라멩고VS바이엘 레버쿠젠전이 실현.. 그 때 차범근이 레버쿠젠 주전 스트라이커로 뛰었는데 결과는 플라멩
고가 1대0으로 레버쿠젠을 이겼다
불운한 월드컵과의 인연
지코는 1976년에 브라질 대표로 선발 되었다.. 월드컵에는 78, 82, 86년 대회에 연속 출전을 했지만 월드컵과의 인연은 불운 하였다. 지코는 78년 아르헨 월드컵에 첫 출전하면서 세계 축구계에 신고!
브라질은 아르헨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하였고
지코의 월드컵 최고 성적이다.
지코는 82년 스페인 월드컵 때 가장 멋지고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10번 지코가 이끄는 브라질 미드필더진은 당시 세계 최강이자 최고로 인정 받았다. 지코, 소크라테스, 팔카오, 세레죠 이 4인방을 당시 세계 축구계에서
‘황금의 Quartet(황금의 사중창)’라고 칭했는데 지금도 전설로 불리우고 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지코를 축으로 모든 플레이가 펼쳐진다.
브라질은 예선에서 소련, 스코틀랜드, 뉴질랜드를 연파했고, 16강전에서는 마리오 캠페스와 마라도나가 버틴 아르헨티나 마져 3대1로 누르며 막강 전력을 과시했으나 브라질은 8강전에서 그만 이태리에게 3대2로 무너지고 말았다.
스페인 대회 때 브라질과 이태리의 경기는 명승부중 하나였다.
전반전 파울로 로시에게 선제골을 빼앗긴 브라질은 소크라테스가 바로 동점골을 터뜨렸고 브라질은 후반전에 로시에게 두 번째 골을 허용했으나 이 후 팔카오가 왼 발 슛을 성공시키며 전세계 축구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그러나 브라질은 막판에 또다시 파울로 로시에게 세 번 째 골을 허용하며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또한번 지코는
월드컵 무대에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지코가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월드컵이다.
게다가 지코는 8강전인 대 프랑스전에서 페널티킥 실축까지 하고 말았다. 당시 1대1 상황에서 지코가 교체 투입이 됐는데 투입된 지 몇 분 안되서 브라질이 페널티킥을 얻었지만 프랑스 골키퍼인 바츠가 막아내고 말았다.
결국 양팀은 승부차기까지 갔는데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에게 결국 4대3으로 져서
지코의 월드컵과의 인연은 끝나고 만다.
브라질은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특급 스트라이커인 카레카가 5골을 터뜨리며 고군분투했으나 4년 전 대회와 비교해 미드필더진의 조직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일단 지코가 부상이었고, 소크라테스와 세레죠는 이미 대표팀에서 은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의 사중창.??
얼굴 전체가 수염으로 가득한 8번 주장 소크라테스는 190cm의 장신 미드필더이면서 쉐도우 스트라이커를 겸했던 선수였는데 리드미컬한 드리블에 대단히 냉정한 플레이를 했던 선수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의학박사(정형외과)축구 선수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막내 동생인 라이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로 활약하며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등 본인이 이루지 못한 월드컵 우승의 한을 대신하기도 했다.
깡마른 체격의 15번 팔카오는 빠르고 개인기가 뛰어난 미드필더였다. 명석한 두뇌 플레이어였으며. 팔카오는 이태리 AS로마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해 당시 AS로마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저기 15번이 팔카오 입니다
뒷모습이라도
세레조 선수
황금의 4중창中 세레조 선수는 없네요.
지코의 월드컵 득점.
78년 대회: 1득점(대 페루전 PK 득점)
82년 대회: 4득점(대 스코틀랜드전. 대 뉴질랜드전 2득점, 대 아르헨전)
86년 대회: 무득점.
-출처-
네이버기사
게티이미지
다음
보지도 못한 축구선수들을 알아가는건
정말 재밌어요.
직접 플레이를 눈으로 볼순 없지만.
이런글들과 사진만 봐도.
흥분되고 멋져요~
첫댓글 은퇴는 일본에서..ㅋ
소크라테스 정형외과.....ㄷㄷㄷㄷ
와 에이매치 기록 장난아니다...
예전부터 지코 선수를 알고있었지만... 역시 잘했네요.
지코-_- 미치겟다
소크라테스는 선수 당시 의학관련 학위는 없었고, 86년 월드컵에서 은퇴하지 않고 주전 미드필더였습니다. 지코는 교체요원이었구요. 수정 바랍니다.